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 백불고택 안채
1750년 7월 28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세상을 떠났다. 바흐Bach가 실개천을 뜻하는 어휘인 점이 베토벤은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베토벤은 “바흐는 Bach가 아니라 Meer로 불려야 마땅하다”라고 지적했다. Meer는 바다이다. 베토벤의 말은 ‘음악의 아버지’가 어찌 실개천이냐는 문학적 항의였던 셈이다.
바흐 사후 그의 음악은 작곡가나 악보 수집가, 출판업자 등 음악 종사자들을 제외하면 대중에게는 잊혀졌다. 바흐는 50여 년 지난 1802년 이후 들어서야 대중적 명성을 얻게 된다. 그렇게 된 데에는 독일 음악사학자 요한 포르켈의 공로가 결정적이었다. 요한 포르켈은 최초의 바흐 연구서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을 펴냈다. 이 책은 바흐 태풍이 유럽 전역을 휩쓰는 진원이 되었다.
요한 포르켈의 사례는 최흥원을 생각나게 한다. 1748년 당시 44세이던 대구 옻골마을 선비 최흥원이 유형원의 아들을 찾아간다. 1673년 세상을 뜬 유형원이 타계 3년 전인 1670년 ‘수록’ 집필을 마쳤는데, 70년이 지나도록 아직 출간되지 못한 그 원고가 너무나 뛰어나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원고를 빌려온 최흥원은 읽으면서 감동한 나머지 정성껏 전문을 필사했다. 소문은 흐르고 흘러 20년 후 영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영조가 어명으로 최흥원에게 책임을 맡겨 경상감영에서 책으로 간행하라고 지시했다. 대구 동구 옻골로 195-5 백불고택 보본당報本堂과 동화사에서 작업이 진행된 끝에 1770년 실학을 최초로 집대성한 《반계수록》이 빛을 보았다. 최흥원이 없었으면 우리나라 실학 발전이 얼마나 지체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나라에는 ‘예술창작에 현저한 공적이 있는 예술가를 우대·지원하고 예술창작활동 지원사업을 행함으로써 예술발전에 이바지하게 한다’를 목적으로 1950년에 설립된 대한민국예술원이 있다. 2021년 11월 21일 뉴스페이퍼 보도에 따르면
“지난 2020년 기준 예술원의 예산은 32억 6천500만 원이었으며 이 중 예술원 회원 100명을 대상으로 지급한 수당은 19억 3천650만 원에 달했다. 한 해 예술원 예산 집행액 대부분인 72.2%가 회원에게 수당으로만 직접 지급된다. 현재 예술원 회원은 100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회원의 자격은 ‘예술 경력이 30년 이상이며 예술 발전에 공적이 현저한 사람’으로 법에 규정되어 있다. 2020년 기준, 예술원 회원 중 67.4%가 대학교수 출신들로 이미 상당한 연금 혜택을 받고 있음에도 회원들에게 매달 국가가 정액 수당을 더 지급했다.” 회원끼리 모임 자리에서 시 한 편을 낭독했는데 수당 50만 원이 지급되었다는 내용도 있다.
“아침 바람 찬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라는 전래동요 노랫말이 있다. 마지막 구절 “구리구리 멍텅구리 가위 바위 보”가 너무나 의미심장하다. 대한민국예술원의 존재와 행태는 요한 포르켈과 최흥원을 울고 가게 만드는 일로 여겨지고, 이 땅의 예술가들을 멍텅구리로 전락시키는 기관인 듯 느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