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의 삶의 태도
누가복음 6장 20~38절
달라스 월라드그의 [잊혀진 제자도]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이 말씀을 소개하려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제사의 삶을 되찾자는 것이 이 책의 주제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과 영향력 그리고 기독교의 현실 인식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이 들려옵니다.
이 책은 그러한 상황이 벌어진 이유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중요한 가르침 중에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빠트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원제가 ‘The Great Omission'입니다.
이것을 직역하면 ‘아주 놀라운 누락’입니다.
제자도 라는 말을 쉽게 표현하면
이 땅에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정신과 성품을 갖고
그분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해가는 삶이 제자도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분이 가르치신 중요한 부분이
누락(Omission)되고 있는 시대에서 살고 있다는 있습니다.
그 누락이 무엇인가하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제자가 되지 않고서도
‘성도’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 = 자기 찢어짐과 비움, 돌이킴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그것 없이도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쓴 용어가 바로 ‘뱀파이어 크리스천’이라는 단어입니다.
뱀파이어 크리스천이란
구원을 위해 필요한 그리스도의 피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리스도인으로서 순종하며 제자가 되어 합당한 삶을 사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는 크리스천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즉, 우리는 은혜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받게 되지만,
구원받은 후 순종의 삶을 이루기 위해
날마다 새로워지려는 영적노력을 하지 않는 크리스천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이 누가복음 6장 20~26절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하면서
복 있는 사람은
한 마디로 뱀파이어 크리스천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강준민 목사가 쓴 『비전과 존재혁명』이라고 하는 책을 보면
역설적으로 변화를 원하면서도
변화를 싫어하는 것이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변화는 반드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동력이 필요합니다.
그때 떠나고 비우고, 도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비전’이라고 말을 합니다.
여기서 비전은 남이 볼수 없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내면을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전의 사람이 될 때 변화되고, 플랫폼이 바뀌고 전복됩니다.
KBS파노라마「플랫폼의 혁명」을 보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생태계가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이전과 다른 기업의 가치와 생각의 혁명이 없이는
더 이상 성장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과 기업이 가치의 혁명
삶의 혁명
생각의 혁명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은
현재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전복, 플랫폼을 바꾸고, 비전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라스 월라드그는 전복이라고 말을 합니다.
전복이란 뒤집혀 엎어짐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은 가치관이 전복된 사람입니다.
첫째,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성경적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치관은 세상을 보는 안경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돈 좀 있고, 배부르고, 즐겁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다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여겼습니다.
오늘날 그 어느 때 보다 풍족해졌지만 여전히 사는 것이 힘듭니다.
그래서 이렇게 좀 되었으면 좋고 행복하겠다. 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주님은 이러한 소박한 우리의 행복관을 전복시킵니다.
오늘 우리 주님은 복 있는 사람은
가난하고, 굶주리고, 애통하며, 핍박을 받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행복일 수 있는 이유는
어떻게 가난하고 굶주리고 애통하고 핍박을 당하는 것이 행복일 수 있습니까?
여기서 가난의 특징은 나의 부족함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C. S 루이스는 『모든 기도에 선행되는 기도』에서
말하는 이가 진정한 나 자신이게 하시고,
내가 말씀드리는 대상이 참 당신이게 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진심으로 도와 달라고 부르짖은 때가 언제이었습니까?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깨닫고 간절히 하나님을 찾을 때가 언제 이었습니까?
성경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복 있는 사람과 화 있는 사람의 구분 점이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깨닫고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할 때
어느새 하나님께서 나를 장악해 버리시는 것
이것이 복입니다.
반면에 화는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상식에 벗어난 말씀을 하십니다.
화는 재물도 많고, 먹을 것도 많아서 이제 가질 것 다 가졌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만족한 삶 즉, 더 귀한 것이 들어갈 틈이 없는 상태가 화입니다.
시편 51편 17절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여기서 복 있는 사람을 구분 짓는 것은
현재 처한 상황과 문제가 아닙니다.
복 있는 사람을 구분 짓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의 문제입니다.
가난하다고 화가 아니고 부족하다고 화가 아니고
부자라고 화가 아니고 풍족하다고 화가 아닙니다.
화는 현재의 우리의 상황과 전혀 무관하게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 로 결정이 됩니다.
본문 27~36절의 말씀을 보면
상처를 받은 상황 속에서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처는 어떤 일을 당하였느냐에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 당하였느냐에 따라서
그 크기가 결정이 됩니다.
최근 대학교수 = 제자 =폭행, 감금, 인분 먹임 = 사회적 충격
저는 뉴스를 보면서 = 폭행을 당한 청년 = 상황을 탓하고, 사람을 탓하며
인생을 망치지 않을까? 안타까웠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청년에게 화는
지금의 상황이 아니라
지금 그의 삶에 하나님이 없다면 그것이 더 큰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일을 겪지 않은 것이 복 있는 삶이 아닙니다.
이 거칠고 험악한 세상에서 얼마나 억울하고 힘든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상처는 = 사람과 환경을 탓한다고 = 회복되지 않습니다.
모세도, 요셉도, 다윗도 사람을 탓하거나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나의 부족함과 어리석음을 십자가를 통해서 바라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복 있는 사람은 현재 상황과 문제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함께 일하는 사람입니다.
화 있는 사람은 현재 상황이 풍요로워도 하나님이 일할 틈이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 = 민족으로 = 배신, 도망했음
요셉 = 형제들로 = 배신, 버림받음
= 주인으로 = 오해, 버림받음
다윗 = 장인으로 = 배신, 살해위협
= 아들에게 = 배신, 폐위위기
그런데 모세와 요셉과 다윗이 복 있는 사람인 것은
현재의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함께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의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일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현재의 모습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도와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들으시고 응답하시고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삶이 역전됩니다.
둘째, 복 있는 사람은 태도가 바뀌고 변화된 사람입니다.
얼마 전 캐나다에서 청년 때부터 함께 지내던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15년 정도 캐나다에서 사역을 하면서 오랜만에 만났는데
식사라도 대접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이 분들이 소 갈빗집만 찾는 것입니다.
한 시간이 넘게 돌아다니다가 파주 근처에 있는 소고기 집에 들어갔는데
그 가족만 5식구에 저를 포함해서 6명이 소갈비를 먹는데
족히 30만원은 나왔습니다.
도저히 제가 선뜻 밥값을 내겠다고 말하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돌아가는 길에 차비까지 주면서 보내시는데
얼마나 죄송하고 미안했는지 모릅니다.
가난하고, 배고프고, 외로울 때 우리가 보이는 태도는 어떻습니까?
속이 좁아지고, 자존심이 상하고,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복 있는 사람은 이러한 태도가 전복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해도 넉넉합니다.
배고파도 든든합니다.
울면서도 평안합니다.
핍박받으면서도 기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가난하고 배고프고 울며 핍박 받으면
변두리 인생 같지만
복 있는 사람은
당당함과 여유를 가지고 인생을 주도해 나가며 살아갑니다.
베드로와 제자 = 들판에서 먹을 것으로 인하여 걱정
베드로 = 성령을 받은 후 태도가 바뀌어 = 금과 은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
그에게 금과 은은 없지만 당당합니다.
요셉 = 애굽의 종있고 죄수였지만 바로 앞에서 당당했습니다.
다윗 = 어린 소년이었지만 골리앗 앞에서 당당했습니다.
모세 = 살인자였고, 도망자였지만 바로와 사람들 앞에서 당당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형편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그 어떤 형편에서도 당당한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복 있는 사람은 운명이 바뀌고 변화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는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날에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그날에」우리가 주목할 만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우리의 운명이 전복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 때에
부자는 그 인격과 삶의 태도와 상관없이 세상 사람의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난 후에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살 때에
그 집 문 앞에서 구걸하던 나사로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아니 손가락에 찍은 물 한 방울을 지금 구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살 때에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의 나의 태도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37~38절에서의 말씀처럼
그러므로 우리가 부족함을 모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고
함부로 비판하고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으로 인하여 비판을 받을뿐더러
용서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인정하며 겸손한 삶을 살 때
우리의 인생은 반드시 역전되고 바뀌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이 복 있는 사람의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정리
성도는 이 땅에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정신과 성품을 갖고
그분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해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분이 가르치신 중요한 부분이
누락(Omission)된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구원을 위해 필요한 그리스도의 피에는 관심이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순종하며 합당한 삶을 사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하면서
복 있는 사람은 이러한 잘못된 신앙의 플랫폼을
뒤집어엎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C. S 루이스는 『모든 기도에 선행되는 기도』에서
말하는 이가 진정한 나 자신이게 하시고,
내가 말씀드리는 대상이 참 당신이게 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진심으로 도와 달라고 부르짖은 때가 언제이었습니까?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깨닫고 간절히 하나님을 찾을 때가 언제 이었습니까?
성경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둘째, 복 있는 사람은 태도가 전복된 사람입니다.
형편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그 어떤 형편에서도 당당한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복 있는 사람은 운명이 전복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습니다.
그날에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그날에」우리가 주목할 만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우리의 운명이 전복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