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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라는 영양분을 얻기위해 밤의 정적을 틈타 영체가 육체를 이탈한다.
꿈은 잠자는 동안 우리들의 영체가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주에도 마음이 있고 우리의 마음은 그 분신일 뿐이다. 생명 정보가 세포 하나하나에 들어 있듯이 우주 정보가 사람마다 예외없이 들어 있다. 마음이 열려 우주와 하나가 되면 우주가 곧 나인 것이다. 우주즉아(宇宙卽我)이다.
사람은 죽어서 육체를 버리지만 죽은 후에도 이 세상에 살 때와 똑같은 습관적 의식으로 광자체(光子體)라는 육체로 바뀌는 것이 우리들의 저 세상이다.
전생이라는 말은 단순히 불교적 윤회의 개념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모든 에너지 운동에 순환의 법칙이 있듯이 전생은 분명히 존재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게 된 이유 중의 하나 역시 전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며 우리는 수 없는 전생의 윤회를 거듭한 끝에 지금의 현재의 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전생에 대한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삶 자체가 망각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의식의 일체가 잠재의식 속으로 가라앉아 버린다. 영혼의 학습과 단련을 위해서 영(零)에서 시작하도록 인생의 틀이 그렇게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생의 의식을 가진 채 이승에서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전생의 기억들을 모두 잊어야 한다.
동질의 에너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만나게 되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그와 똑같은 법칙에 의해 지상에 태어나기 전에 실제계에서 약속을 사전에 하게 되고 그 약속에 따라 각자 태어나 살고 있는 것이다.
부탁과 승낙의 약속 절차를 거쳐 이 세상에 태어났기에 우리의 운명은 예정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우리가 지금 여기 태어난 것 자체가 이미 예정된 운명이다. 출생 환경 또한 자신의 가르마를 수정하기에 가장 적합한 선택에 의한 것이다.
육체는 육체의 거울을 보고 단정하게 해야 하지만 마음은 마음의 거울을 보고 단정하게 고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마음의 거울은 무었인가. 그것은 상대방의 마음이다. 사람은 사람을 만남으로서 자신의 마음의 움직임을 볼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죽으면 끝이고, 만남은 우연이고, 인생은 만족을 추구하는 장소라고 여기는 것이 육체의 원리이고, 인간은 영원한 생명이고, 만남은 필연의 의미가 있고, 인생은 영혼의 수련장이라고 여기는 것이 영혼의 원리이다.
마음의 모양과 기능
마음은 도데체 어디 있단 말인가. 정답은 가슴 속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세포 수는 학설에 의하면 약 60조(兆)개라고 한다. 인간이 대우주의 축소인 소우주라고 하니 우주공간의 천체 수와 동일해야 한다. 아무튼 세포 하나하나에는 저마다 의식이 있다. 비슷한 의식들의 세포가 동아리 지어 기관이 되고 기관들이 모여 인체가 구성되는데, 이 많은 세포들을 중앙에서 통제, 관리하고 있는 것이 바로 마음이다. 우리가 활동중에 마음은 가슴 한가운데 위치한다. 두 젖꼭지를 잇는 수평선과 코와 배꼽을 잇는 수직선이 마주치는 곳을 침구학에서는 전중이라고 한다. 이 전중의 전자를 옥편에 찾아보면 뜻(意)전이라고 나온다. 그러니 전중은 의중(意中)과 같으며 의중은 의식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사실 우리가 감격해서 눈물을 흘릴 때, 먼저 가슴에서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것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을 육체에 전달하고 육체에서 수용한 감각을 마음에 전달하는 교환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뇌다.
둥근 고무 풍선 모습을 한 마음을 평면도로 설명하면 중심에 상념(想念)이 있고, 그 좌우에 본능(本能)과 감정(感情), 상하에 지성(知性)과 이성(理性)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 마음의 기능들은 의지(意志)적 작용에 의해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둥글게 서로 마주보며 자리를 잡고 있으며, 이것이 의지의 힘에 의해서 육체와 연결되어 상호 작용하고 있다.
이 마음의 기능과 육도 윤회하는 가르마의 관계를 아기의 성장과정에 따라 간략하게 살펴보면, 마음의 기능 가운데 가장 먼저 눈을 뜨는 것이 본능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인간의 본능에는 식본능, 성본능, 수면본능이 있다. 그 가운데 식본능이 가장 먼저 눈을 뜬다.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아기는 어머니의 젖꼭지를 빤다. 바로 그것이 먹는 본능이다. 본능은 탐(貪)이라는 독소이다.
본능 다음으로 눈 뜨는 의식이 감정이다. 배가 고프면 울고, 배가 부르면 웃는다. 좋은 것과 싫은 것, 기쁨과 고통, 만족과 불만, 희로애락의 감정이 표출한다. 감정은 진(瞋)의 독소이다.
아기는 자라서 교육을 받고 마음의 지성 영역이 발달하게 된다. 사람이 지식을 습득한 후에는 짐승과 다른 인간이 되었다하여 인간계라 한다. 하지만 배운 지식이 진리와는 멀고 본성과는 거리가 멀어질 뿐이다. 흑백 논리와 시비와 찬반이 인간 사회를 혼란으로 몰고 갈 뿐이다. 중도와는 거리가 멀다. 자기가 배워 아는 것이 옳다고 우기는 지식의 병, 치(痴)병이 우글거리는 세게가 인간계다.
사람의 마음의 기능 가운데 가장 늦게 발달하는 기능이 이성이다. 본능, 감성, 지성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유일한 기능이다. 다른 짐승들에게 찾아볼 수 없는 반성이라는 에너지를 발산하는 인간 특유의 의식 작용이다. 이 이성의 힘으로 인간은 만물의 영장다운 위치를 누릴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 이성이 표면의식으로 작용할 때 자칫 경험주의에 빠진다. 자기가 살아온 경험이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작용하여 독선과 완고와 배타에 빠진다.
"네, 그렇습니다"라고 말하는 유순한 마음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반성의 마음
"덕분입니다"라고 말하는 겸허한 마음
"제가 하겠습니다"하고 말하는 봉사의 마음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감사의 마음
그래서 인생은 무상하다고 하여 허무와 고독과 애수에 잠기는 사람도 우리 주위에는 많다. 하지만 이것은 큰 잘못이다. 무상인 것은 사실이나 인생은 결코 허무한 것도 비정한 것도 아니다. 무상을 무정으로 느끼는 것은 무상의 참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갇힌 마음 때문에 비롯된다. 무상에는 중대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다름 아닌 의식의 존재다. 제행(諸行)은 구름처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지만 제행 뒤에 숨은 생명 그 자체의 의식은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불생불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름의 형상은 새롭게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것 같지만, 구름 자체의 생명 에너지는 영원하다.
성냄과 꾸지람은 다르다. 성냄은 자신의 욕구를 강요하는 이기적인 파도지만 꾸지람은 상대방을 옳은 길로 가게 하려는 사랑의 파장이다. 꾸짖는 것은 상대를 아끼는 이타의 행위고 성내는 것은 내 뜻을 고집하는 이기심의 행위다. 꾸지람이 사랑의 행위이니 그 파장은 맑고 잔잔하여 결코 상대방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성냄은 이기의 감정이니 그 파장은 탁하고 조잡하여 상대를 어김없이 상하게 한다. 성냄은 자신의 마음에 독을 만드는 일이다. 이미 만들어버린 독은 반성을 통해서 씻어내야 한다.
인내와 인욕은 다 같이 참는 마음이기는 하나 인내는 일시적인 타협이고 인욕은 자비와 용서하는 조화의 기다림이다. 잘못을 용서하고 반성 개전하기를 기도하고 기다려주는 사랑의 참음이 인욕이다.
조화와 타협은 각각 저울대에 올려놓으면 조화는 쌍방의 비중이 같은 무게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데 비해서 타협은 그 어느 한쪽에 비중이 더 걸려 무게가 불균형을 이룬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조화는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는 마음으로 어울렸으므로 피차 마음 속에 저항이 없다. 설사 저항이 있다 하더라도 그 무게가 평균화되어 서로 공통의 입장에 서 있으므로 소화불량증엔 걸리지 않는다. 반면 타협은 어느 한쪽이 더 무거우며 그 무거운 무게만큼 언젠가는 상대방에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되는 불씨를 안고 맀다. 이처럼 타협은 적든 많든 어느 한쪽에 인내의 독을 먹이고 있다.
아픔은 생체의 이상이나 위험을 알려주는 경고 장치인 것이다. 그러니 아픔을 감사해야 한다. 아픔을 경건하게 수용해야 한다. 육체적인 아픔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아픔도 있다. 개인적인 아픔도 있고 가족단위의 아픔, 나라의 아픔, 인류 전체가 겪는 아픔도 있다. 인생을 포함한 삼라만상이 우연이 아니듯이 아픔 또한 자신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아픔을 피한다고 해서 모두 해결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원인을 규명해야 한다.
몸을 씻고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듯이 반성이라는 자비의 빛으로 영혼을 목욕하고 집착의 짐을 벗고 잠자리에 들면 순도 높은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다. 그런 아침은 상쾌하고 몸은 가벼우며 육체를 운전할 정신력은 충만하다.
환경이나 상황은 바꾸고 싶어도 간단하게 바꿀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것을 무리하게 바꾸고자 하면, 결국 도피로 치닫는 길 뿐이다. 가출, 자살, 자학, 도피, 대면기피 등은 그런 도피의 양상들이다. 현실을 무작정 도피하면 일시적인 편안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나 비슷한 상황이 또 닥칠 것이다.
도피는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자신의 미래를 망치는 일이다. 문제가 생기면 힘들더라도 그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계속 피하기만 하면 힘들어지고, 연약해지며 그 문제는 풀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문제가 풀리면 그와 같은 문제는 문제로 느껴지지 않는다. 결국 인내와 노력으로 자신을 바꿈으로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첫댓글 마음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정답은 가슴 속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세포 수는 약 60조(兆)개라고 하며, 인간이 대우주의 축소인 소우주이어서 저마다의 의식이 있는 것 처럼 세포 하나하나에는 저마다 의식이 있다. 비슷한 의식들의 세포가 동아리 지어 기관이 되고 기관들이 모여 인체가 구성되는데, 이 많은
세포들을 중앙에서 통제, 관리하고 있는 것이 바로 마음이다.
無相을 無情으로 느끼는 것은 무상의 참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갇힌 마음 때문에 비롯된다. 무상에는 중대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다름 아닌 의식의 존재다. 제행(諸行)은 구름처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지만 제행 뒤에 숨은 생명 그 자체의 의식은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불생불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도피는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자신의 미래를 망치는 일이다. 문제가 생기면 힘들더라도 그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계속 피하기만 하면 힘들어지고 연약해질 뿐이다. 그 문제가 풀리면 그와 같은 문제는 문제로 느껴지지 않는다. 결국 인내와 노력으로 자신을 바꿈으로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인내와 노력으로 자신을 바꿈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자는 복되도다! 진리가 가까이 있음이니.....
네. 가르침에 따르겠습니다. ()()()...
당장은 힘들어도 스스로 이겨내고 노력...또 다른내일이 맑게 개일데니까 지금이 행복이요 이곳이 천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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