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본관은 진주(晉州) 단본이다. 시조는 고려 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고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진 소계령(蘇繼 )이다.
소씨는 고려 때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평장사 경보(景輔), 문화시랑평장사 세린(世麟), 수문전태학사 이관(以寬), 추밀원사 ·상장군 경손(慶遜), 평장사 한공(漢公) 등이 있으며, 중간에서 실대(失代)하고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희철(希哲)이 중시조가 되어 2세 정(靖), 3세 약우(若雨), 4세 을경(乙卿), 5세 담(覃)과 천(遷)이 고려시대에 각각 현직을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천의 아들 희(禧)가 중군시정(中軍寺正)을 지냈고, 그의 손자 자파(自坡)가 구례현감(求禮縣監)을 지냈는데 자파의 일곱 아들이 모두 현달하였다.
특히 둘째 세량(世良)은 대사간(大司諫)에 있으면서 부모의 봉양을 위해 남원부사(南原府使)로 내려갔으며, 다섯째 세양(世讓)은 진주소씨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자이다.
또 이들 7형제의 후손에서 많은 문신과 학자가 나왔다.
선조 때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에 전심한 영복(永福), 효종 때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동도(東道), 직언 상소를 잘하여 이름난 두산(斗山), 28세에 요절했으나 총명하여 성리학에도 정통했다는 시만(始萬) 등이 있다.
그 밖에 임진왜란 때 많은 충신을 배출하여 진주(晉州)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제(濟), 성주(星州) 싸움에서 용전 끝에 전사한 상진(尙眞), 이화현(梨花峴) 싸움에서 전사한 행진(行震) 등이 있다.
소씨는 전북 익산시 ·남원시 ·고창군 등지에 집단부락을 이루고 있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2만 4288명으로 258성씨 중 68위를 차지하였고, 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9,356, 전국 가구구성비 0.09 %로 274성씨 중 69위를 차지하였다.
진주 소씨 (晋州 蘇氏)
시조 : 소경(蘇慶)
요임금의 후손인 기곤오가 소성의 하백에 봉해지고 기원전2266년 소성이 단군조선에 영속 되었으며 기씨를 소씨로 고쳐서 소씨가 생겼다고 한다. 소곤오(기곤오)의 후손이 신라 6부 촌장 중의 한사람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라고 한다.
소벌도리의 25세손인 소경(577년 출생)은 후손이 없었는데 꿈에 소벌도리가 나타나 진주 도사곡(저동)으로 이사를 하면 9저를 얻을 것이라고 하여 660년 3월 3일(신라 무열왕 7년)에 지금의 진주시 상대동(저동)으로 이사를 한후에 9대에걸쳐 9명의장군을 낳게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소벌도리를 원조으로 하고 진주를 본관으로 하였으며 소경을 중시조로 하였다. 소경은 관직이 각우에 이르렀고 나라에 공을 세워 656년(무열왕 3년)에 왕이 그의 조상인 소벌도리를 문열왕에 추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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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 희생 여중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