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 서거 사실 알았을 때 全장군은 집권 생각 못했지만, 許和平 실장은…” “
하나회 출신 가운데 尹必鏞 사건과 관련하여 軍에서 제대한 權翊鉉, 박정기, 신재기, 裵命國 등이 보안사에 거의 살다시피 했다. 그 사람들이 全장군 집권에 많은 조언을 했을 것. 그 무렵에는 李源祚, 金潤煥 등 경북 출신 인사들도 자주 보였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목사, 문인 등 여러 사람이 보안사령관실에 들락거렸다. 軍部 통치에 대한 국민 저항을 우려하여 합법을 가장했다”
韓鎔源 진술조서(제2회) 1995년 12월21일 서울지방검찰청
국회와 야당 정보 담당
-1979년 10월26일 당시 보안사에서 무슨 보직을 맡고 있었나요.
“10월26일 전에는 방산처 방산보안교육과장을 맡고 있다 10월26일 이후 방산처가 정보처로 확대 개편되면서 정보처 정보1과장을 맡았습니다. 1980년 10월23일 정보처장으로 승진해 그 자리에서 1년여 근무하다 511 보안부대장으로 나갔습니다”
-방산처를 정보처로 확대 개편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1978년 1월19일 정보처가 방산처로 바뀌었으나 10.26 사건으로 계엄령이 선포됨에 따라 민간에 대한 정보수집 기능이 필요하게 되자 다시 정보처로 확대 개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령 개정은 1979년 12월경이었으나 사실상 10.26 사건이 일어나자 바로 정보처로 복원된 것입니다”
-정보처의 임무가 무엇인가요.
“정치.학원.언론.在野.종교.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 정보를 수집, 분석해 대책을 수립하고, 군수업체와 국방부장관의 조정.감독을 받는 기관에 대한 인원.시설 및 문서 보안제도와 개선자료 제공, 군수업체 및 국방부장관의 조성.감독을 받는 기관의 파업.선동 또는 파괴행위 예방 및 분쇄 등을 담당했습니다. 4개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정보1과가 정치분야, 정보2과가 각 기관 및 언론분야, 정보3과가 경제분야, 정보4과가 종교.학원분야를 맡고 있었습니다”
-당시 과장을 맡고 있었던 사람의 이름을 기억나는 대로 진술하시오.
“1과장은 본인이었고, 2과장이 이용린 중령, 3과장이 김동조 중령, 4과장이 김효무 중령이었습니다”
-정보1과장의 임무는 무엇인가요.
“정치분야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구체적으로는 국회와 야당에 대한 정보를 수집, 처리했습니다”
-정보1과장이 직접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지시나 결재를 받는 일이 있는가요.
“全斗煥 사령관은 다른 사령관과 달리 과장들을 직접 상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10.26 사건으로 보안사 업무가 복잡하게 돌아가자 처장이 그 업무를 소화할 수 없어 과장들이 직접 사령관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12.12 이후에는 정보처의 경우 權正達 정보처장은 거의 대외적인 활동을 담당하고, 내부 일은 주로 본인이 담당했습니다”
-사령관이 처장을 통하지 않고 과장들에게 업무지시를 하는 경우가 많았는가요.
“처장을 통해 업무 지시를 하는 경우도 있고, 과장들에게 직접 지시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비율로 따지자면 처장을 통해 내려오는 지시가 3분의 2 정도, 과장에게 직접 내려오는 지시가 3분의 1 정도였습니다”
12.12 발표문 작성하다
-1979년 12월12일 저녁 진술인은 어디에 있었나요.
“제가 부산에서 보안사 정보과장으로 근무할 때 같이 근무하고 알고 지내던 吳一郞, 최경조 등이 그날 대령 진급을 하여 시내에서 진급 축하모임을 하다 호출을 받고 부대로 복귀했습니다”
-복귀해서 어떻게 했나요.
“權正達 정보처장에게 물어보니 鄭昇和 총장을 조사하기 위해 연행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許和平 비서실장이 저에게 사태가 급박하니 상황실을 맡아 상황파악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權正達이 ‘무슨 소리냐. 당장 내일 아침 발표할 발표문을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고 해서 저는 다음날 발표문을 만들어 주고, 평소 w가 해야 하는 일을 했습니다”
-발표문은 어떻게 만들었나요.
“제가 權正達에게 ‘무슨 내용으로 만드느냐’고 물었더니 ‘鄭昇和 총장이 金載圭 사건과 관련된 혐의가 있어 조사하기 위해 연행과정에서 총격사건이 발생했다는 내용으로 작성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權正達이 말한대로 간단하게 발표문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나중에 국방부 대변인이 발표한 내용이 바로 진술인이 작성해 權正達에게 준 발표문과 같은 내용이었나요.
“대충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權正達에게 발표문을 줄 때는 12월12일 24시가 되기 전에 주었기 때문에 아직 상황이 끝나기 전에 제가 아는 대로만 작성한 것입니다. 국방부 발표문에는 제가 작성한 내용에다 상황이 발생해 병력이 몇 명 죽고 다쳤다는 등의 피해상황과 국민 여러분을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하다는 내용이 추가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權正達 정보처장 진술에 의하면 정보처 산하에 정세분석반이 구성되어 있었다는데 진술인은 모르는 일인가요.
“당시 저는 정세분석반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權正達이 정세분석반이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제 생각에는 (1)당시 시국수습방안 등을 全斗煥을 비롯해 핵심참모들이 구상해 시행하고는 그것이 문제가 되자 정보처 소관업무라고 합리화하기 위해 거짓말하는 것 (2)실제 있었다면 당시 계엄령이 선포되자 학원을 담당하는 정보3과가 할 일이 없었는데, 3과에서 그런 일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술인은 김기철을 아는가요.
“李相宰 밑에서 일하던 문공부 파견직원입니다”
-윤두열이나 전재오를 알고 있나요.
“윤두열도 李相宰 밑에서 일하던 문관이고, 전재오도 李相宰가 대공처에서 정보처로 올 때 데려온 사람입니다”
시국수습방안 몰랐다
-權正達의 진술에 의하면 김기철, 윤두열 등이 정세분석반원으로 일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렇다면 정세분석반이란 것이 李相宰가 주관하던 팀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李相宰는 언론대책반을 주관하지 않았나요.
“언론대책반은 1980년 5월17일 이후에 불려진 명칭이고 李相宰는 제 기억으로는 1980년 3월경 이미 정보처로 옮겨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李相宰는 1980년 5.17 이전에는 무슨 일을 했나요.
“제가 알기로는 무슨 언론검열 업무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전에는 언론검열 업무를 하던 보안사 직원이 없었나요.
“계엄령 선포 후 즉시 언론담당인 정보2과장 이용린 중령의 지시를 받으며 2과 소속 손봉오 소령이 陸本 보도검열단에 나가서 일을 했습니다. 李相宰가 언론검열 업무를 맡는다는 이유로 대공처에서 정보처로 온 후에는 손봉오 소령은 계속 보도검열 업무를 했고, 李相宰는 따로 사무실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긴 했는데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습니다”
-李相宰가 대공처에서 정보처로 파견나온 경위를 알고 있나요.
“자세한 경위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당시 제가 각종 정보 수집 과정에서 姜전무라는 사람이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알아보니 姜전무가 바로 李相宰입니다. 그래서 제가 權正達에게 ‘언제부터 李相宰가 정보처 일을 하게 되었습니까’ 하고 물어보았더니 許三守가 파견해 왔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러면 직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정보처장 보좌관이라고 하여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그 때 權正達로부터 李相宰의 임무가 무엇인지는 듣지 못했나요.
“權正達의 보좌관으로 왔다는데 제가 자세한 임무를 물어볼 수 없었고, 權正達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權正達 정보처장은 정세분석반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문제가 입안.검토됐다는데 진술인도 알고 있나요.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정세분석반이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다만 1980년 5월 초경 許和平 비서실장이 저를 불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인가 무언가를 만들려고 하는데 趙淳하고 孫製錫에게 그 위원회에서 일할 생각이 있는지를 확인해 보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에게 확인한 결과 趙淳은 거절하고, 孫製錫은 승낙을 해 許和平에게 보고한 적이 있습니다. 그 무렵 權正達에게 許和平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했더니 그때 비로소 權正達이 소위 國保委를 설치하려고 한다고 하여 알게 됐습니다.
그때 權正達도 저를 불러 金鍾泌, 李厚洛, 朴鐘圭 등 15~16명의 명단을 주면서 그 사람들의 비위 사실, 재산상황 등에 대한 정보를 조직적으로 수집하라고 했습니다. 지시대로 각종 기관으로부터 입수한 자료와 저희들이 존안하고 있던 자료, 새로 수집한 정보 등으 정리하여 보고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것이 바로 권력형 부정축재자 처리로 이어졌습니다”
全斗煥이 역사의 방향을 예측
-진술인이 許和平 비서실장으로부터 지시받은 내용은 무엇인가요.
“國保委員 선정과 관련해 서울대학교 趙淳, 孫製錫 교수를 접촉해 보라. 陸本 교수요원 중에서 國保委 분과위원으로 임명할 만한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라는 지시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許和平, 權正達로부터 그런 지시를 받은 때가 정확히 언제인가요.
“5.17 직전이니까 아마 1980년 5월 초순경이 맞을 겁니다”
-당시 許和平으로부터 그런 지시를 받고 그들이 왜 그런 조치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나요.
“저는 자세한 내막을 모르기 때문에 저에게 알아보라고 한 趙淳, 孫製錫의 면면을 보고 그저 어려운 시기에 국난극복 차원에서 기구를 만드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비상계엄이 확대되고 광주사태 등을 거치면서 생각해보니 비상기구 설치도 순수한 차원의 기구는 아니었던 것으로 짐작했습니다”
-광주사태 이후 國保委가 정권장악을 염두에 두고 설치한 기구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國保委가 정권장악을 염두에 두고 설치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말인가요.
“1980년 5월 하순 國保委가 설치되어 저희 정보처에 내려오는 각종 지시를 보고 알기 시작했습니다. 즉 여러 가지 정책을 발굴하라면서 예를 들면 사회정화운동, 공직자 숙정, 정치활동 규제자 선별 등 지시를 보고 느꼈습니다”
-보안사 각 부처가 소관업무 정책을 결정, 추진할 때 업무 특성상 소관부처 장과 보안사령관 이외에 다른 처장들은 철저히 제외된다는데 사실인가요.
“본인도 처장을 지냈지만 정책결정이나 방향제시는 참모회의나 사령관과의 티 타임시간에 대부분 논의됩니다. 절대보안이라는 이름 아래 ‘차단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지만 당시는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으므로 그런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켜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참모회의는 어떤 경우에 열리고, 참석멤버는 누구인가요.
“거의 매일 열렸습니다. 하루에 여러 번 열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참석 멤버는 보안사령관, 참모장, 처장들입니다”
-1주일에 한 번 열렸고, 과장들까지 모두 참석했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마당인데 1주일에 한 번밖에 회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그리고 과장들이 참모회의에 참석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10.26 사건 후 1980년 9월1일 全斗煥 장군이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는데 全장군을 중심으로 한 新軍部가 집권한 것은 사전 준비된 이른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일을 추진한 결과 아닌가요.
“제가 보기에는 계획에 따라 진행된 것이 틀림없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우연인지 모르지만 상황도 계획에 맞게 터져준 것입니다. 결국은 全장군을 중심으로 한 軍部가 역사의 방향을 미리 예측하고, 그에 상응해 인위적인 노력을 많이 기울인 때문에 집권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許和平이 5.16 연구 지시
-관련자들의 진술과 전후사정, 예컨대 ‘K공작계획’이나 全장군의 中情부장 겸직, 보안사 주도의 계엄확대 및 國保委 설치.운영 등을 종합해 볼 때 적어도 1980년 1월경에는 軍部가 집권하는 방안에 대해 검토가 시작되었고, 1980년 3월경에는 全斗煥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新軍部가 정권을 장악하기로 결론이 나서 그에 필요한 집권계획을 기획.입안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실ㅈ로 軍部가 정권을 장악하기로 뜻을 모으고 그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한 때가 언제인가요.
“新軍部가 10.26 직후부터 집권의지를 가졌다고 확언하기는 곤란하지만 12.12 이후 일부 군인, 정치인, 종교계, 학계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全장군이 언제 결심했는지 모르지만 집권의지가 표면화된 것은 中情부장 겸직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술인은 全斗煥 사령관으로부터 집권에 관한 말을 들어본 일이 없는가요.
“1980년 초 全斗煥 사령관과 함께 尹普善 전 대통령 집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 때 全장군이 ‘尹普善씨가 대통령 시켜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대통령은 하늘의 뜻인데’라고 얼버무린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全사령관이 집권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10.26 사건이 생기자 許三守 인사처장이 진술인에게 5.16 혁명에 관한 연구를 지시했다는데 사실인가요.
“1979년 10월26일 21시경 全斗煥 보안사령관이 陸本에서 朴대통령 시해사실을 확인한 후 보안사에 잠깐 들렀다가 다시 陸本으로 가기 위해 나오던 중 보안사 뒤뜰에서 우연히 본인과 마주쳤습니다. 그는 ‘韓중령, 국가에 변란이 났으니 許和平 실장에게 가보라’고 말하고 훌쩍 떠났습니다. 본인이 許和平 실장 방으로 올라갔더니 許실장이 ‘5.16 이후에 어떻게 했는지 연구 좀 해봐라’고 지시했습니다. 본인은 국가변란에 따른 문제라면 계엄일 것으로 판단하고 보안사 도서관에 있는 ‘군사혁명사’라는 책을 가져와 포고령을 기안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陸本에서 모든 조치를 취해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許和平 비서실장이 진술인에게 5.16에 관한 연구를 지시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위기상황에 대한 대처방안을 연구하라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연구결과가 무엇이었나요.
“계엄선포에 따른 포고령을 기안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연구결과를 언제 누구에게 보고했는가요.
“이미 陸本에서 본인이 기안한 내용과 비슷한 내용으로 포고령을 발표했기 때문에 보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연구지시가 집권계획과는 무관한 것인가요.
“집권계획과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후 許和平 비서실장이 연구결과를 챙긴 일도 없습니다. 다만 許和平 비서실장은 陸士생도 시절 생도들이 5.16 혁명지지 시위를 적극적으로 주장한 일에서 보듯 정치군인으로서의 성향이 굉장히 강한 사람입니다. 朴대통령 서거 사실을 알았을 때 全斗煥 장군은 집권을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許실장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合法 가장하려고 애써
-5.16 당시 全斗煥이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민원비서관으로 일한 사실을 알고 있나요.
“예”
-全斗煥의 집권과정과 5.16 당시를 비교해 보면 거의 동일한 단계를 거쳐 집권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야말로 舊軍部가 新軍部를 낳았고 新軍部가 舊軍部를 모델로 집권한 것이 분명합니다. 다만 상황이 다르다보니까 朴正熙 대통령은 처음부터 혁명이라고 주장한 반면 全斗煥은 합법성을 가장하려고 갖은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합니다”
-보안사 팀이 집권계획을 기획, 입안함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하는데요. 이른바 집권 시나리오 내지 집권계획 입안에는 누가 주로 관여했다고 생각하나요.
“12.12만 해도 수도권 지휘관들이 30경비단에 모이고 張泰玩 수경사령관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고 하는 것을 보면 시나리오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5.17 역시 비상계엄 확대와 동시에 비상기구 설치, 국회등원 저지, 金大中 등 정치인 구속 또는 연금, 金鍾泌 등 소위 부정축재자 처리 등 일련의 과정을 보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시나리오가 없었으면 가능했겠습니까. 분명히 사전에 시나리오가 있었을 겁니다”
-5共 출범과정의 秘史를 다룬 각종 자료에 의하면 지략가형의 許和平 비서실장과 행동가형의 許三守 인사처장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구체적으로 그 사람들이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요.
“全장군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두 사람이 포진하고 있으면서 여러 가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틀림없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구체적인 역할이 무엇인지 아는 바가 없습니다. 許和平 실장으로부터 본인도 몇몇 사항에 대해 지시를 받았습니다만 집권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는 참석한 일이 없습니다”
-全장군의 집권과정에 보안사 소속이 아닌 사람들도 관여한 사람이 있는가요.
“특별히 기억되는 사람이 없습니다만 하나회 출신 가운데 尹必鏞 사건과 관련하여 軍에서 제대한 權翊鉉, 박정기, 신재기, 裵命國 등이 보안사에 거의 살다시피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많은 조언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 구체적인 역할은 보안사 참모들이 했을 것입니다. 그 무렵에는 李源祚, 金潤煥 등 경북 출신 인사들도 자주 보였고, 이름을 알 수 없습니다만 목사, 문인 등 여러 사람이 들락거렸습니다”
-당시 정보처장인 權正達은 어느 정도 역할을 했나요.
“權正達은 하나회 회원이 아니라 12.12 사태에 주도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12.12 이후 일련의 과정에서는 각종 시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회 회원이 아니면서도 權正達이 12.12 이후에 주도적으로 활동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거야 정보처장 하는 일이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일 겁니다”
李奎浩 전 문교장관이 집권 권유
-權正達이 정보처장이 된 경위를 알고 있나요.
“10.26 직후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기존의 방위산업보안처가 정보처로 변경됐습니다. 당시 방위산업보안처장인 오종현 대령이 정보처장으로 옮기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회의실에서인가 어디에서 許三守, 許和平과 제가 어떤 일을 하다가 두 許씨가 ‘오종현 대령에게 정보처장을 맡기기는 힘들지 않겠느냐’면서 ‘적당한 인물이 없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부산지역 보안부대장으로 나가 있는 權正達 대령이 머리도 좋고 하니 정보처장으로 적절하기 않겠습니까’ 하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보니 權正達이 정보처장으로 왔습니다”
-盧泰愚, 鄭鎬溶, 黃永時, 兪學聖, 車圭憲 장군 등은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나요.
“그들도 全장군에게 정권을 맡아야 한다고 많이 권유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구체적 역할은 알지 못합니다. 黃永時, 兪學聖, 車圭憲 장군 등은 全장군의 선배였지만 軍 내부에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장래를 위해 기회주의적인 처신을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全장군에게 집권을 부추긴 사람으로 생각되는 사람 가운데 특별히 기억나는 사람이 李奎浩 전 문교부 장관입니다”
-집권계획 전반을 문서화한 일은 없는가요.
“저는 알지 못합니다”
-집권계획과 관련해 당시 보안사에서 존안비치하고 있던 자료가 없었는가요.
“그런 자료를 본 일이 없습니다”
-許和平, 許三守, 權正達, 鄭棹永, 李鶴捧 등 보안사 5인방이 수시로 盧泰愚, 鄭鎬溶, 兪學聖, 車圭憲, 黃永時 등 12.12 주도세력과 모임을 가지면서 全斗煥 대통령 만들기 작업을 은밀히 진행하면서 일부에서는 혁명의 성격으로 추진하자고 주장하고, 또 일부에서는 법적 모양새를 갖추자고 주장하여 결국 후자로 결론이 났다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논의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軍部 통치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을 우려하여 合法을 가장한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5.17 계엄확대 조치 건의를 국가 안보를 우려한 軍部의 제도적 결의로 가장했고, 계엄업무 중 치안과 국방은 계엄사가 담당하고, 행정과 사법은 國保委가 분담하는 것으로 가장해 합리화시킨 것입니다”
정치군인들의 집권욕 때문에…
-軍部 집권의 종착점은 결국 崔圭夏 대통령이 자리를 물러나고 그 자리를 軍部가 추대하는 인물이 차지하는 것인데, 그에 대한 계획은 어떠했는가요.
“저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崔대통령이 과도정부 수반으로서 머지 않아 물러날 것이라는 점에 대해 누구나 공감하고 있었던 일이지요”
-全장군을 중심으로 한 軍部가 전면에 나서 집권을 해야 했던 당위성 내지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소수 정치군인들의 집권욕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쿠데타에는 민중들의 정치 활성화를 거부하기 위한 거부 쿠데타, 중산층의 이념을 반영하기 위한 돌파 쿠데타, 정권장악을 위한 통치 쿠데타 등 세 가지가 있는데 全장군의 정치개입은 민중들의 정치 활성화나 중산층의 이념과 무관했기 때문입니다”
-全장군의 집권과 관련해 보안사에서 언론분야에 대해 많은 신경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평소에는 보안사 어느 부서에서 언론분야를 담당하는가요.
“정보처 정보2과에 언론계가 있어 언론에 관한 정보수집 및 분석, 평가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10.26 사건으로 계엄이 선포되면서 계엄사 내에 보도처를 설치하고, 보도검열단이 구성되어 서울시청에서 신문, 방송, 잡지, 통신, 대학신문 등 모든 언론매체에 대해 보도검열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별도로 정보처 정보2과 소속이 아닌 공작의 일인자라는 李相宰 준위를 팀장으로 한 언론대책반을 따로 설치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 사람의 역할에 대해서는 당시 정보2과장을 맡고 있던 이용린 중령이 1988년 11월 국회 언론문제 진상규명에 관한 청문회에서 ‘1980년 3월 중순경 權正達 정보처장이 특수임무를 수행해야 하므로 언론분야를 정보2과 언론계에서 떼어 내 언론대책반에 넘겨주겠다고 하여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權처장이 여건상 불가피하다면서 명령을 내겠다고 하여 할 수 없이 응한 것’이라고 증언한 것이 참고가 될 것입니다”
-언론대책반 설치에 진술인은 어느 정도 관여했는가요.
“관여는커녕 설치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李相宰 팀이 언론대책반으로 알려진 것은 5.17 이후이고, 그 전에는 그런 명칭이 없었습니다”
-이용린 정보2과장이 말하는 특수임무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요.
“당시 저에게 들어오는 정보보고를 보면 李相宰가 언론인뿐 아니라 정치인 할 것 없이 각계 각층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으로 알려진 것으로 보아 단순한 언론검열 업무가 주업무가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았습니다”
-權正達 정보처장에게 언론대책반장으로 李相宰를 추천한 사람이 許三守 인사처장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추천과정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만 李相宰가 정보처 소속으로 되어 있어 權正達 정보처장에게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許三守 인사처장이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李相宰의 역할
-李相宰 준위는 공식적으로 계엄사 보도처에 파견된 보안사 요원은 아니지요.
“공식 파견된 거이 아니고 정보처장 보좌관이라는 이름으로 언론대책반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정상적인 절차에 의한 임무수행이라고 볼 수 없지요”
-정보처장 보좌관이 아니고 사령관 보좌관이 아니던가요.
“강기덕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는데 사령관 보좌관이 아니고 정보처장 보좌관이었습니다. 그래서 權正達 정보처장에게 확인한 것입니다”
-계엄사 보도검열단과 李相宰를 팀장으로 한 언론대책반은 도대체 어떤 관계에 있었나요.
“언론대책반은 명목상은 검열업무 조정기능을 위한 조직으로 출발했으나 사실상은 기자 해직, 언론사 통폐합 문제 등을 처리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李相宰는 누구로부터 업무지시를 받고, 누구에게 업무보고를 했는가요.
“당시 부정축재자 비위자료 수집 등 權正達 정보처장이 저에게 내리는 여러 가지 지시를 보면 權正達이 사령관 사전 지시없이 개인적으로 입안해 시행하는 차원의 지시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權正達도 全斗煥 사령관의 의도에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李相宰도 權正達의 지시를 받았다고 해야 할 것인데, 자세한 것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진술인이 정보처장으로 승진한 이후에도 李相宰 준위가 계속 언론대책반을 이끌고 있었는데, 李相宰 준위로부터 그 업무나 역할에 관해 보고를 받았는가요.
“1980년 10월23일 본인이 정보처장을 맡은 이후 李相宰로부터 일상적 업무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때 전임 정보처장인 權正達이 민정당을 창당하기 위해 전역하고 가면서 저에게 말하기를 ‘지금 李相宰가 언론사 통폐합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것에 관해 알 필요없다’고 하여 그 문제는 제가 관심을 가질 입장이 아니어서 물어보지도 않았고 李相宰도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언론관련 임무에 관한 공식 지휘계통은 李熺性 계엄사령관→박영록 보도처장→이병찬 보도검열단장이었는데, 보안사에서 ‘5.17 계엄지역 확대조치 및 포고령 제10호에 의한 보도통제 지침’이란 문건을 작성한 다음 보안사령관 결재를 받아 보도검열단에 지침으로 통보했습니다. 보안사령관이 보도통제 지침을 보도검열단에 통보한 법적 근거가 무엇인가요.
“원칙으로 하면 보안사령관 결재가 났다해도 이를 계엄사령관에게 보고하여 결재를 받은 후 보도처를 통해 내려와야 합니다. 그런데 李相宰가 全斗煥 장군의 힘을 믿고 보도처나 계엄사령관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그대로 시행한 것이지요. 본인도 全장군 결재문서가 보도처에 간 사실은 언론청문회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관의 권한을 침범한 월권행위가 아닌가요.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계엄사에 얼마든지 그런 협조를 구할 수 있는 것인데, 다만 절차가 잘못된 것이지요”
아이디어 맨 許文道
-李相宰 언론대책반장이 주축이 되어 작성한 이른바 K공작계획을 1980년 3월24일부터 시행했는데 그런 것을 계획, 집행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나요.
“그 당시에 저는 K공작계획을 들어보지도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런 계획을 李相宰가 수립해 시행한 것을 알았을 뿐입니다. 지난번 조사를 받으면서 그 문건을 처음 봤는데, 12.12 이후 軍의 최고 실력자로 부상한 全사령관의 집권을 염두에 두고 언론공작을 통해 이미지를 구축하고 세력을 결집해 집권기반을 형성하고자 했던 것임을 한눈에 알았습니다”
-K공작계획을 李相宰 단독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나요.
“李相宰는 민정당 사무차장을 하고, 1987년 대선 때는 선거본부 기획위원장을 지낸 것으로 보아 그 정도 계획을 수립하는 능력은 충분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許文道가 언론 등을 이용해 全斗煥을 차기 집권자로 홍보하는 노력을 상당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 許文道가 아이디어를 내고 李相宰가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지 않았나 짐작할 뿐입니다. 제가 그곳에서 근무한 경험에 비추어보면 그렇게 중요한 일은 李相宰나 許文道 등 개인 차원에서 시행한 것이라기보다 핵심 참모들의 협의를 거쳐 시행하기로 결정하고 李相宰가 수립했을 것입니다”
-許文道는 언제부터 全斗煥측과 합류했나요.
“1980년 4월14일 全斗煥이 中情부장 서리를 겸직할 때 비서실장으로 갔는데, 1980년 3월경부터 합류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許文道가 全斗煥측에 합류한 경위를 알고 있나요.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제가 듣기로는 許三守와 고교 동창이어서 許三守가 駐日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하던 許文道를 합류시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許文道가 주로 한 역할은 무엇인가요.
“글쎄요. 매일같이 보안사에 와서 어울리는 것을 보기는 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없지요. 다만 許文道가 각종 아이디어를 많이 내고, 언론인 출신이기 때문에 언론분야에 관해 어떤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할 뿐입니다”
-K공작계획은 언제 누가 어떤 경위로 입안, 추진했는지에 대하여는 모른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보안사라는 곳이 자기 전담업무가 아니면 철저하게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공작계획서를 보면 1단계 공작을 1980년 3월24일부터 한다고 되어 있는데, 그 무렵 李相宰가 저희 정보처로 왔으니까 李相宰는 그 K공작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하기 위해서 왔다고 해야겠지요”
-K공작계획의 실시방침으로 오도된 민주화 여론을 언론계를 통해 안정세로 전환하고, 보도검열단을 통한 봉사활동과 언론계 중진들과의 개별접촉 및 회유공작을 실시하는 것으로 정했는데 구체적으로 이를 어떻게 추진했는지 알고 있나요.
“權正達 정보처장이나 李相宰가 수시로 언론인을 만나고 다닌 것은 사실인데, 그것이 K공작계획에 근거한 것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新軍部 집권 위한 여론조작
-보도검열단으로 하여금 조속한 정치일정과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는 야당.재야.학생운동에 대한 보도를 삭제하고,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국가의 위기를 초래하는 혼란으로, 여야 정치인들의 대권을 향한 정치활동은 구태의연한 정치작태나 대통령병에 사로잡힌 추악한 파벌싸움으로 여론조작을 했다는데 사실인가요.
“본인이 볼 때 집권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여론조작을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만 저는 그런 것이 K공작계획의 일환이었는지는 몰랐습니다”
-회유공작반은 7대 중앙일간지와 5대 방송사, 2대 통신사의 사장, 주필, 논설위원, 편집.보도국장, 정치부장, 사회부장 등 94명을 차례차례 접촉해 시국관이 양호하거나 협조 가능한 사람과 야당 성향이 강한 사람을 분류한 후 협조자는 시국안정을 강조하는 사실을 계속 보도하게 하고, 비협조자들은 언론인 해직조치시 모두 언론계에서 내쫓았다는데 어떤가요.
“본인이 정치활동 규제자 선별작업을 하면서 많은 정치인을 접촉했습니다. 그 때 협조 거부자는 규제자로 묶었는데, 언론인 회유공작도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계획서 말미의 참고사항을 보면 ‘공작업무 수행과정에서 수정 및 보안을 요할 시에는 사전에 사령관 재가를 득한 후 실시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결국 全斗煥 사령관이 집권을 위한 여론조작의 계획부터 실행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말이 아닌가요.
“물론입니다. 예산까지 편성되어 있는 것을 보나 일의 성질상 일개인이 책상머리에서 구상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런 계획이 실제로 시행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K공작계획의 실시 시기나 구체적인 시행과정을 보면 K-공작계획은 全장군의 집권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되는데 어떤가요.
“당연히 그렇게 봐야 할 것입니다. 아니면 보안사령관 이미지를 좋게 홍보해 무엇하려고 했겠습니까. 그런 것을 보면 全斗煥이 中情부장 서리를 겸임하기 전부터 집권의도가 있었지 않나 생각됩니다”
-1980년 4월14일 全斗煥 보안사령관의 中情부장서리 겸직과 관련하여, 보안사에서 1980년 3월 초순경부터 이 문제를 추진했다는데 사실인가요.
“본인은 겸직 발표를 보고 처음 알았으므로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추진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全斗煥이 中情부장 서리로 취임하기 전인 1980년 4월초 저에게 全斗煥이 中情부장으로 취임한 뒤 기자회견에 대비해 예상 질의 답변사항을 정리해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당시 여론을 수렴해 예상 질의 답변 사항을 만들어 權正達 정보처장에게 보고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 그 전부터 추진한 것은 틀림없다고 봅니다”
-보안사 참모들이 全장군에게 中情부장 겸직을 건의했다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논의과정을 거쳐 건의했는가요.
“모르겠습니다. 추측컨대 하나회 출신의 許和平 비서실장, 許三守 인사처장, 李鶴捧 대공처장 등과 상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中情부장 기자회견문 작성
-全장군의 中情부장 겸직과 관련해 진술인이 맡은 역할은 아무것도 없는가요.
“全장군이 中情부장을 겸직하고 나서 가질 기자회견을 준비했습니다. 당시 분위기로는 정치 문제에 관한 질문이 다수를 차지할 것이 분명하므로 정치 담당인 본인이 예상질문.답변자료를 만들어 사령관에게 준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정축재자 처리와 관련해 中情이 보유하고 있던 존안 자료를 넘겨받은 일이 있습니다”
-당시 申鉉碻 국무총리는 3월 중순경 崔대통령에게 민간인 출신을 中情부장에게 임명해 정보계통을 양립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습니다. 그 후 全장군이 3월 말경 자신의 사무실로 찾아와 中情부장을 겸직하겠다고 해서 반대의견을 분명히 말했답니다. 李熺性 계엄사령관도 崔侊洙 대통령 비서실장으로부터 全장군이 中情부장을 겸직하고자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의견을 물어와 반대했습니다. 그런데도 全장군이 밀어붙여 中情부장 자리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全장군이 崔대통령으로부터 中情부장 임명을 관철해 낸 경위가 어떠했는가요.
“정보라는 것은 절대 한 사람에게 집중시켜서는 안되는 것이므로 申鉉碻 총리나 李熺性 계엄사령관이 반대한 사정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中情부장 임명을 관철해낸 경위는 모르겠습니다”
-崔대통령이 당시 全장군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무슨 사정이 있었거나, 아니면 국정 운영의 주도권이 新軍部로 넘어가 崔대통령은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기 때문이 아닌가요.
“崔대통령이 무슨 의도로 겸직을 승낙했는지 모르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부분입니다”
-국무총리나 계엄사령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또 겸직을 금하고 있는 법정신에 위배하면서까지 中情부장을 겸직한 실질적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한마디로 정치권을 장악하기 위한 것입니다. 모든 정보를 장악하고 정치공작을 추진해 집권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집권을 위한 상황조성에 필요한 국내외 정보를 장악하기 위한 것이지요. 中情부장이 되면 국무회의 등 회의도 참석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막대한 中情의 예산을 사용할 수 있는 이점도 있습니다”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제가 알기로는 대통령, 中情부장, 안보관계장관, 각군 총장만이 참석하는 주요회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참석자들은 이미 全斗煥측 사람들로 임명해 놓았겠지만, 그래도 본인이 직접 참석해 회의를 주도할 필요성을 느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10.26 이후 中情 감독관으로 파견되었던 崔禮燮 기획처장과 교체해 許三守 인사처장이 中情에 파견되었다는데 許三守 인사처장은 무슨 자격으로 파견되었고, 또 구체적인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許三守는 中情 직원들 인사를 단행하려고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崔禮燮 기획처장은 실력자가 아니니까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지요”
정권 장악의 교두보 확보
-許三守 인사처장은 全장군의 경호문제 때문에 파견나갔다고 주장하는데 어떤가요.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全장군이 中情부장 서리에 취임한 지 사흘만인 1980년 4월17일 中情 개혁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개혁방안은 누가 언제 만든 것인가요.
“許三守 인사처장이 주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보도검열 하에 있던 국내언론은 사실보도 밖에 하지 않았으나 일본 신문과 뉴욕타임스는 깊은 관심을 표시했습니다. 고소.고발인들도 全장군이 12.12 사건 성공 후 4개월 가량 무대등장에 따른 정지작업과 등장시기를 면밀히 검토하다 中情부장을 겸직함으로써 공개적으로 권력장악의 첫 몸짓을 드러내 보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이에 대해 진술인은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정치개입을 표면화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全장군이 中情부장을 겸직해 국가 정보기관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집권에 필요한 정보를 독점하여 정권 장악의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지요. 정보 장악이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집권에 장애가 되는 정보는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고, 집권에 도움이 되는 정보만 보고함으로써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中情부장을 겸직한 지 보름만에 가진 1980년 4월29일 기자회견에서, 全장군은 ‘본인이 양대 정보기구를 장악함으로써 정치발전에 차질을 초래할 것이라는 일부 억측은 지나친 기우에 불과하다. 오히려 난관을 극복하는데 긍정적인 기여를 함으로써 정치발전을 촉진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사실은 그때 이미 全斗煥 장군이 집권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 그 방향으로 일을 추진하고 있던 시기가 아닌가요.
“본인이 마련한 예상 질문에 양대 정보기구를 장악한데 따른 우려감이 들어있기는 했는데 답변은 어떻게 정리를 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다만 후에 이루어진 5.17 조치를 보면 기자회견 당시 어떤 구상이 서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全斗煥 장군이 중동순방 중 일정을 하루 앞당겨 귀국한 崔대통령에게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안을 보고한 사실을 알고 있지요.
“대통령 부재 중에 일어난 국내상황 전반에 관해 대통령에 대한 보고용으로 본인이 사령관에게 보고서를 만들어 준 일이 있습니다. 그 보고서에는 사북사태, 학원동향 등 상황만 기재했고, 세 가지 안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權正達 정보처장의 진술에 따르면 全장군이 보고한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문제 등은 정보처 산하 정세분석반이 계획, 입안해 참모들간에 협의를 거쳐 확정되었다고 하는데 정보처에서 위 세 가지 안을 최초로 검토한 때가 언제인가요.
“저는 그에 일체 관여한 일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본인은 정황으로 그런 안이 검토되어 있다는 것을 5월 초순경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許和平 비서실장을 통해 國保委 설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부정축재자 기초자료 수집도 본인이 權正達 처장의 지시를 받아 5월 초순경에 이미 마무리해 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회 싫어하는 姜昌成파로 분류돼
-1980년 5월17일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周永福 국방부장관 주재로 열린 全軍 주요지휘관회의는 全장군을 중심으로 한 新軍部 실세들의 요청에 따라 위 세 가지 안을 軍部의 결의로 확정하기 위한 것이었다는데 그것에 대해 알고 있나요.
“저희 정보파트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全軍 지휘관회의가 열릴 예정이라는 정도만 알았습니다”
-회의 의제는 알지 못했나요.
“당시 시위가 전국적으로 계속되는 등 시국이 혼란스럽던 상황이었는데, 全軍 지휘관회의가 열린다면 무언가 조치를 취하기 위하여 열리는 것 아닌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날 국방부에서 全軍 지휘관회의가 열리기 직전에 權正達 정보처장이 周永福 장관에게 비상계엄 확대, 비상기구 설치, 국회 해산 문제에 대해 논의해 달라고 회의 의제를 알려주었다는데 알고 있나요.
“청문회 때 비로소 알았습니다”
-계엄확대와 동시에 투입된 軍병력이 국회를 점거.봉쇄하여 국회의원의 등원을 저지하여 제104회 임시국회를 무산시키고, 3金씨 등을 이런 저런 이유로 제거한 것을 보면 1980년 5월17일 조치의 핵심은 결국 국회 해산 내지 정치활동 금지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요.
“당시는 몰랐습니다만 사후에 분석해 본 결과 3金씨 배제, 국회활동 중지, 國保委 설치를 위해 계엄을 확대한 것이었습니다”
-全軍 주요지휘관회의에서 논의 과정을 거쳐 軍部의 집약된 의견으로 추진하고자 했던 계엄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방안 등은 보안사 정보처에서 입안한 것이라는데 그 내용을 알고 있나요.
“저는 관여한 사실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방안을 보안사 정보처에서 한다면 당연히 정치분야를 취급하는 정보1과장인 진술인이 실무자여야 함에도 진술인을 배제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자세한 이유야 전들 알겠습니까마는, 우선 저는 하나회 회원이 아니고 당시 고려대에서 박사 과정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그런 저런 이유로 저를 믿지 못하고 중요한 임무를 맡기지 않은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1980년 5월17일이 지난 후 우연한 자리에서 全斗煥 사령관이 저에게 ‘崔枰旭이는 너를 좋게 이야기하는데 나는 너를 잘 몰라서…’라고 뒷말을 흐리는 것을 봤습니다. 그 말은 나를 믿지 못해 배제한 것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全斗煥은 陸士 출신 장교 중 누가 하나회 회원이고, 누가 하나회를 싫어하는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회를 싫어하는 사람으로 분류되어 있었을 겁니다.
또 한 가지는 당시 보안사에서 姜昌成파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저는 姜昌成 보안사령관 시절에 선발되어 보안사로 왔기 때문에 저를 姜昌成과로 알고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계엄확대와 동시에 발포된 포고령 10호에 의해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한 것이나 金鍾泌, 金大中, 金泳三 등 이른바 3金씨를 체포, 구속, 연금해 정치활동을 봉쇄하고, 국회를 계엄군으로 점령해 국회의원 등원을 저지해 임시국회를 열리지 못하게 막은 것도 위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인가요.
“정확한 기억은 없습니다만 1980년 4월말경인가 5월 초순경 權正達 정보처장이 金鍾泌, 李厚洛, 朴鐘圭 등의 이름이 기재된 명단을 주면서 이들에 관한 비위자료를 수립, 정리해서 보고해 달라고 했습니다. 본인이 中情으로부터 넘겨받은 존안자료와 정보처 요원들이 수집한 정보를 기초로 3~4일에 걸쳐 작업을 해 늦어도 5월10일 이전에 權正達 처장에게 보고했습니다. 5월 초순 許和平 비서실장으로부터 서울대의 趙淳, 孫製錫 교수를 접촉해 보라는 지시를 받은 일도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보면 적어도 5월 이전에 계획이 입안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국회 그냥 두고는 집권 어려워
-부정축재자 처리는 대공처 소관이 아닌가요.
“연행.조사는 대공처 소관이지만 비위자료 수집은 정보처 소관입니다”
-許和平 비서실장이 진술인에게 趙淳 교수 등에 대한 접촉을 지시할 때 분명히 國保委라고 하던가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앞으로 무슨 비상대책기구를 만든다고만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명칭은 1980년 5월17일 직전에 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軍部가 전면에 나서서 국회 해산과 비상기구 설치를 하겠다는 것은 결국 軍部가 다시 말하면 軍部를 장악하고 있는 全장군이 憲政을 중단시키고 정권을 장악하겠다는 뜻이 아닌가요.
“그렇게 볼 수 있지요. 정권 장악에 뜻이 없다면 국회를 해산하거나 비상기구를 설치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全軍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결의되지도 않고, 崔대통령이 재가하거나 결단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이미 소집공고된 임시국회 무산조치를 강행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崔대통령의 재가 여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사람들 뜻이 임시국회 무산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국회를 그대로 두고서는 집권할 수 없기 때문에 국회를 무기력하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엄법에 의하면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변경할 경우 국무회의 심의와 대통령 재가만 받으면 가능한데 굳이 全軍 주요지휘관회의 결의과정을 거친 이유가 무엇인가요.
“軍의 제도적 결의를 이끌어 냄으로써 계엄군의 자세를 재정립하고,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고취시키며, 대통령과 국무총리, 국무위원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1980년 5월17일 밤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심의하기 위한 국무회의가 열렸는데 그 국무회의 소집은 언제 결정된 것인가요.
“결정시기는 모르고 있었으나 그날 밤 국무회의가 열리기로 결정된 사실은 회의가 열리기 전에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국무회의에 참석한 국무위원들의 진술에 의하면 중앙청 현관에서 회의장까지 양쪽에 약 1m 간격으로 집총한 군인들이 도열해 있었다는데 중앙청과 국무회의장 주변의 軍병력 배치는 어떤 과정을 거쳐 행해졌는가요.
“국무위원들을 겁주기 위해 병력을 배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新軍部 의도대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더라도 1980년 5월20일 임시국회가 예정대로 열려 계엄해제를 의결하면 아무 소용이 없어지게 되므로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미리 軍병력을 국회에 투입, 5월20일 열리기로 되어 있던 임시국회 소집을 무산시킨 것 아닌가요.
“포고령으로 정치활동을 금지한 것은 임시국회를 겨냥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국회를 무력화하라
-진술인은 비상계엄 확대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나요.
“당시의 시국상황에서 혼란 수습을 위한 조치로 계엄확대가 충분히 검토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계엄확대를 계기로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國保委를 출범시키는 등의 조치가 수반된 것이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고소.고발인들은 체포.구금이나 신문, 방송에 대한 사전검열 등 특별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軍部의 권한을 계속 보유함으로써 정권찬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유지하고, 급기야 전국으로 확대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어떤가요.
“비상계엄 전국확대에만 그쳤다면 그런 주장이 나오지 않았겠지만 3金씨를 체포.연행하고, 國保委를 출범시켜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이 사실이므로 고소.고발인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소.고발인들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에 뒤이어 잇따라 나온 정치인 연행.체포, 국회봉쇄, 國保委 설치, 보안사 주도로 이루어진 헌법개정, 신당 창당 등 일련의 과정을 보면 5.17 조치는 軍部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軍部가 집권기반을 조성하는 방안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한 진술인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실제가 그랬습니다. 고소.고발인들의 주장을 반박할 만한 자료가 없을 것입니다”
-1980년 5월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와 동시에 모든 정치활동 금지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계엄포고령 제10호가 발령되었습니다. 포고령의 정치활동 금지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도한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명분은 소요를 부추기는 정치활동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실제로는 국회 무력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국회를 그대로 두고서는 집권을 추진하기 곤란했기 때문입니다”
-진술인은 포고령 10호의 검토, 입안에 어느 정도 관여했는가요.
“전혀 관여한 일이 없습니다. 포고령은 계엄사에서 입안하는 것이지만 1980년 5월17일 계엄확대와 동시에 발표된 포고령 10호를 보안사에서 미리 만들었다면 그것은 대공처에서 입안했을 것입니다. 당시는 현재 삼성그룹 고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인형무 변호사가 보안사에서 모든 법률적인 관계 문안 검토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고령으로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요.
“全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 조치로 3金씨가 배제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모든 정치활동의 금지와 같은 조치는 통치권자인 대통령도 감히 하기 어려운 조치인데, 계엄사령관의 포고령으로 이를 강행한 것은 결국 軍部가 정권 장악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요.
“3金씨를 배제하고 나면 崔대통령과 全斗煥 장군밖에 남지 않게 되므로 집권에 보다 가깝게 접근할 수 있게 되겠지요”
권력형 부정축재자 체포명단 작성
-1980년 5월17일 22시를 전후해 金鍾泌, 李厚洛, 朴鐘圭, 李世鎬 등은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金大中, 芮春浩, 文益煥, 金東吉 등은 소요 배후조종 혐의로 연행.체포했습니다. 이런 조치들은 언제 어떤 경위로 계획하고 결정된 것인가요.
“權正達 정보처장이 1980년 5월 초순 본인에게 부정축재자 명단을 주면서 비위자료를 수집하라고 한 것을 보면 최소한 4월말이나 5월초에 계획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요배후 조종 혐의자 연행 문제는 대공처 소관사항입니다”
-金大中, 金鍾泌, 金泳三 등 당시 大權경쟁을 하던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 구속, 연금하고, 계엄포고령으로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것은 이른바 집권계획의 일환인 舊정치인 제거조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그렇게 밖에 볼 수 없지요”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 해제 등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여야 합의로 임시국회가 소집 공고되어 5월20일 제104회 임시국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軍병력이 국회의원 등원을 저지하여 국회가 개회되지 못한 사실을 알고 있지요.
“당일 상황보고를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국회에 보안사 정보처 직원이 나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누구의 지시에 따라 군인들이 국회의원 등원을 저지한 것인가요.
“국회의원과 계엄군의 몸싸움이 있었다는 정도만 상황보고를 통해 알고 있었고, 구체적인 지시과정이나 현지 상황은 잘 모르겠습니다”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입안, 추진한 보안사 입장에서는 계엄해제를 논의하기 위한 임시국회 소집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全장군이 군인들을 동원해 국회를 봉쇄.점거한 것이 아닌가요.
“결과를 보면 그렇다고 봅니다”
-계엄군이 국회를 점령하고 국회의원의 등원을 저지하여 임시국회를 무산시킨 법적 근거는 무엇인가요.
“현지에 진주한 계엄군 입장에서는 포고령 10호에 의거 국회를 봉쇄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당시 국민들간에는 3金 중의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大權주자들인 이들의 체포, 연행, 연금 조치는 정권 장악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감히 추진할 수 없는 조치로 보여지는데 어떤가요.
“정권 장악에 뜻이 없다면 3金씨를 체포, 연행, 연금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계엄법에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령관이 행정, 사법사무를 관장하도록 되어 있으나 입법권은 여전히 국회 권한에 속하는데 포고령으로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등원하는 국회의원을 물리력으로 저지하고, 다수의 정치인을 체포, 연행, 연금하는 등 소집공고된 임시국회를 무산시킨 것은 명백한 憲政중단 조치가 아닌가요.
“본인도 憲政중단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광주에 살포한 삐라 문안작성
-당시 국회를 점령한 軍 관계자의 진술이나 陸本 계엄상황일지에 의하면 국회의원의 등원 저지는 상부 지시에 따라 행해졌고, 그 상황이 소상하게 계엄사에 보고됐습니다. 이는 이 조치가 軍 최고 지휘부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요.
“구체적인 지시 내용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중요한 문제를 현지 지휘관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진술인이 광주사태 발생을 처음 안 것이 언제인가요.
“보안사 내에 상시 설치되어 있는 종합상황실에서 해주는 상황전파를 통해 알았습니다. 현지 보안부대에서는 관내에서 발생하는 관련 사항에 대해 종합상황실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광주사태 발생 초기에는 權正達 정보처장이 全斗煥 보안사령관에게 광주상황을 보고했으나, 사태가 악화되면서부터 鄭棹永 보안처장이 보고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대통령이 광주에 내려가 한 일과 같은 일반사항은 정보처가, 軍 관련 사항은 보안처가, 체포자 수사사항은 대공처가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합상황실에 접수된 급한 상황보고는 종합상황실에서 처장을 거치지 않고 사령관에게 直報합니다”
-광주사태와 관련해 정보1과에서 사태 원인이나 대책을 세워 정보처장이나 보안사령관에게 보고한 일이 있는가요.
“없습니다. 광주사태와 관련해 일상적인 정보보고 이외에 본인이 한 일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광주사태 기간 동안 광주 전역에 주민 자제를 촉구하는 삐라를 살포한 일이 있는데 그 삐라 문안을 기안했습니다. 둘째, 許和平 비서실장의 지시를 받아 美 502 군사정보대 돌프 소령에게 광주 상황을 전파해 준 것입니다”
-광주사태 기간 동안 보안사의 崔禮燮 기획처장과 洪性律 1군단 보안부대장이 광주 현지에 파견되어 상황종료시까지 광주에 있었다고 하는데 그 두 사람의 역할이 무엇이었나요.
“崔禮燮 기획처장의 역할은 모르겠고, 洪性律 대령은 광주 출신으로서 정확한 정보를 수집, 보고함과 동시에 시민과 시위대와 분리공작을 추진하기 위해 내려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인이 洪性律 대령으로부터 직접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구성된 시민수습대책위가 강온파로 나뉘어 내분을 벌이는 바람에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을 때 洪性律 대령 등 광주 출신 장교들이 사복 차림으로 광주 시내에 들어가 정보를 수집하고 강경파에 대한 고립공작을 추진했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洪性律 대령이 한 역할이 바로 그것입니다”
-보안사가 광주사태를 간첩 내지는 불순세력에 의한 폭동으로 조작하기 위해 崔禮燮 기획처장과 洪性律 1군단 보안부대장을 광주 현지에 파견한 것이 아닌가요.
“정보를 수집하고 강경파와 온건파 간의 분리공작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었지 사건 자체를 조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술인은 광주사태의 발생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요.
“釜馬사태가 金泳三씨의 제명에서 비롯되었듯이 5.17 조치에 따른 金大中씨의 연행이 광주사태를 악화시킨 것입니다. 광주사태가 釜馬사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심화된 것은 金大中 추종세력들이 대거 광주로 잠입해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등 시민들을 조직적으로 자극했습니다. 광주의 학생.시민들이 계엄확대 조치에 반대하여 시위를 벌였으나 계엄군은 계엄령하의 시위는 불법이며, 초동 단계의 진압이 상책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저항과 진압이 가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61년 이래 정통성이 취약한 영남 출신 정권이 편향적 인사와 균형 잃은 경제정책으로 지역감정을 심화시켜 온 터에 이를 더욱 자극, 선동하는 유언비어가 난무했습니다. 계엄군이 시내 중심가에서 소요진압에 집중하는 동안 일부 시위대가 인근 변두리 지역으로 진출해 무기.화약.차량을 탈취해 시민군을 편성하여 조직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광주사태 발단은 軍의 계엄확대 조치와, 이를 반대하는 학생들의 충돌입니다”
-공수특전부대의 과잉진압이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공수특전부대가 과잉진압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은 교육과 교리의 소산일 뿐 특별한 의도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경위야 어떻든 공수특전부대는 과잉진압으로 시민들의 엄청난 저항을 불러일으켜 도청진압작전 수행시에는 일반 군복으로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불명예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全장군의 新軍部가 정권 부담을 우려해 자위권 발동을 최대한 억제하는 바람에 많은 인적피해까지 당하는 손실을 입었던 것입니다”
-최근들어 미국 국정의 피터슨 목사라는 사람이 1980년 5월20일 계엄군들이 헬기를 타고 시민들을 향해 기총소사를 하여 1백여명을 사상했다고 증언하고 있는데 당시 그런 보고를 받은 일이 있는가요.
“기총소사에 대해 보안사에 상황전파된 일이 없습니다. 외국 목사가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제기하는지 모르지만 적과의 교전 상태도 아닌데 자국 민간인을 상대로 기총소사를 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金大中 살리기
-당시 계엄사에서 돈 5백만원을 전남대 복학생 鄭東年에게 제공해 전남대와 조선대 추종세력을 조종.선동한 혐의로 金大中씨를 기소했는데 金大中씨가 광주사태나 광주 소요를 배후에서 조종.선동한 것이 사실인가요.
“돈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소요를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盧泰愚 보안사령관 시절 사형선고를 받은 金大中씨를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신병 치료를 빙자하여 미국에 내보내기로 결정할 때 진술인도 참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경위는 어떠한가요.
“金大中씨 재판과 관련해 미국은 케네디 상원의원을 중심으로 압력을 넣어 왔고, 일본은 부두 노동자들이 한국 물건 하역을 거부하는 등 국내외의 압력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盧泰愚 보안사령관이 金宗輝 국방대학원 교수의 조언을 받아 金大中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미국 정부로부터는 레이건 대통령 취임 후 외국 원수와의 최초 정상회담을 개최해 안보 공약을 확약받는 형식으로 全斗煥 정권의 정통성을 제고시키고, 일본 정부로부터는 한일간의 무역역조 시정론과 일본의 안보 무임승차론을 내세워 1백억 달러 수준의 차관을 받아 경제를 살리는 방안을 수립했습니다.
이 안을 본인으로 하여금 1981년 초순경 궁정동의 안기부 安家에서 브리핑하도록 했습니다. 당시 참석자는 鄭鎬溶, 黃永時, 兪學聖, 車圭憲, 許和平, 許三守, 權正達, 李鶴捧 및 裵命仁 검찰국장, 柳興洙 치안본부장, 鄭寬溶 선관위 사무총장, 玄鴻柱 안기부 국장 등이었습니다. 그 후 보안사에서 보고한 내용이 채택되어 金大中씨는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신병 치료차 渡美했고, 韓美정상회담은 孫章來 공사와 알렌 특보의 노력으로 성사되었습니다. 對日차관 문제는 난항을 거듭하다 다나카 수상의 결단으로 40억 달러로 낙찰된 것입니다”
-보안사령관 주도의 모임인데 왜 中情 안가에서 브리핑을 했는가요.
“당시 그 安家를 보안사에서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런 검토를 한 이유는 국민들에게 金大中을 ‘죽일×’으로 비치도록 해놓은 상태에서 그냥 내놓을 경우 통치권 부담으로 작용할 것을 우려한 때문입니다”
-고소.고발인들은 新軍部 세력들이 崔圭夏 정부를 무력화시키고 국민들 속에 정국안정을 책임질 수 있는 보다 강력한 정부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광주사태를 고의로 일으킨 것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진술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오히려 집권에 부담으로 작용할 일인데 그것을 고의로 일으켰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1980년 5월21일 申鉉碻 국무총리가 사퇴한 것은 광주사태 때문이 아니라 新軍部에서 申총리가 國保委 설치를 반대하는데 불만을 품고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할 듯한 태도를 보이자 申총리가 그 정보를 사전입수하고 지레 겁을 먹고 사퇴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인가요.
“광주사태 확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80년 5월27일 국무회의에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령안이 의결되었는데, 新軍部 내에서 비상권력기구 설치가 최초로 논의된 때가 언제인가요.
“전후 사정을 보면 1980년 4월말 내지는 5월초에 입안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초에는 4.19 기념일이 되면 대규모 소요사태가 일어날 것이므로 그 상황을 타고 國保委를 설치하기로 했다가 예상 밖으로 4.19가 조용하게 지나가자 5.17 계엄확대와 동시에 설치하려 했으나 崔대통령의 반대 등 사정이 여의치 아니하자 일단 보류하고 있다가 광주사태가 생기는 바람에 진압을 기다려 5월말 설치를 추진한 것이라는데 사실인가요.
“5.17 조치와 동시에 國保委 설치를 추진한 것은 사실로 알고 있으나 4.19 때 설치를 계획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
國保委는 準군정기관
-진술인은 國保委의 성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당시 정부나 軍 관계자들은 國保委가 학생소요, 노사분규, 그리고 國紀를 위태롭게 하는 국가적 위기에 대처해 국가보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계엄당국과 행정부 간의 긴밀한 협조로 조속한 위기극복과 안정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설치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國保委가 한 일을 보면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방불케 하는 혁명위원회와 같은 성격의 準군정기관이었습니다. 國保委는 국정전반에 관한 개혁정책과 사회정화를 추진했을 뿐만 아니라 5共 헌법을 마련함으로써 5共의 산실이 되었던 것입니다.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이전에 新軍部에 의해 설치 계획이 입안된 점이나 國保委 설치와 동시에 新軍部가 國保委를 통해 전면에 나서서 국정을 장악하는 등 본격적으로 권력을 행사한 점, 國保委 이름으로 혁명상황이 아니면 추진하기 어려운 과감한 조치들을 추진한 점 등에 비추어 보면 國保委는 틀림없는 準군정기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정기관과 準군정기관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군정기관은 군인들이 주축이 되는 것이고, 準군정기관은 군인 이외에 다른 사람들도 참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법적으로는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관 형식을 빌었지만 실질적으로는 軍部가 내각을 지휘하여 국정을 장악하고, 장차 집권을 하게 될 全斗煥 장군을 상임위원장으로 내세워 사실상 崔대통령을 배제 내지 후선으로 제치고 실질적으로 국정을 수행하기 위해 國保委를 설치한 것이 아닌가요.
“대통령을 자문.보좌하거나 내각을 조종.통제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崔圭夏 정부를 사실상 무력화시키고 상임위원장인 全斗煥 장군을 중심으로 한 軍部가 사실상 권력을 장악하여 집권기반 조성에 필요한 일들을 직접 추진한 것입니다”
-진술인이 國保委 활동과 관련해 안건을 제출하거나 주요 안건에 대해 의견을 제출한 일이 있는가요.
“없습니다. 다만 國保委 활동에 필요한 자료수집 및 보고, 예컨대 과외실태나 공무원 숙정에 필요한 기초자료 등을 수집.정리해 보고했습니다. 國保委가 추진한 모든 조치의 뒷받침을 보안사가 한 것입니다”
-진술인은 國保委가 설치령에 규정한 목적대로, 또 범위 내에서 자문.보좌기관으로 운영되었다고 보는가요. 아니면 설치령에 규정된 범위를 벗어나 사실상 비상기구로 운영되었다고 보는가요.
“운영실태를 보면 비상기구로 운영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國保委 설치령 어디를 보아도 입법기능은커녕 행정기능을 할 수 있는 근거규정이 없는데 공무원 숙정, 사회악 사범 일소, 과외금지 등 행정과 입법기능을 수반해야 하는 조치들을 國保委에서 어떻게 추진할 수 있는가요.
“초법적으로 운영된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崔대통령에게 보고할 때는 國保委를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관으로 설치하겠다고 하여 재가를 받아 놓고 실제로는 무소불위의 조치를 하는 기구로 운영했는데, 이는 결국 國保委의 성격, 역할, 권한 등에 관해 崔대통령을 속인 것이 아닌가요.
“崔圭夏 대통령이 당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全장군의 집권의도 못읽어
-자문기구 내지 보좌기관으로 설치한 國保委가 대통령 내지 행정부 소관사항인 위와 같은 조치들을 입안해 집행한 것은 월권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초법적인 조치라는 주장에 대한 진술인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초법적 내지는 비합법적인 조치라고 할 수 있지요”
-國保委에서 추진한 개혁조치들 예컨대 공무원 숙정, 과외금지 조치, 폭력배 검거 등은 국민의 환심을 사고, 다른 한편으로는 新軍部가 사회 각 부분을 확실하게 장악하기 위해 전격적으로 실시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진술인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집권에 필요한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그런 일들을 추진한 것이 사실입니다. 國保委 설치를 강행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지요”
-國保委가 출범한 이후인 1980년 6월12일 崔대통령, 朴忠勳 국무총리 서리, 申斗泳 감사원장 및 全 국무위원과 李熺性 계엄사령관, 全斗煥 中情부장 서리 등이 배석한 가운데 ‘국가기강 확립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면서 그 속에 1980년 10월말까지 개헌안 확정, 1981년 상반기선거, 1981년 6월말 이전 정권이양이라는 정치일정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崔대통령의 뜻이 석달도 되기 전에 좌절되어 중도 하야하고 全장군이 집권했습니다. 崔대통령이 全장군을 배석시킨 가운데 위와 같은 담화를 발표한 배경을 알고 있는가요.
“崔대통령은 全장군의 집권의도를 읽지 못하고, 뭔가 자신이 의도하는 대로 정치일정을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 9월29일 國保委 설치령을 국가보위입법회의 설치령으로 개정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5共 헌법에 따라 국회가 해산되니까 국회를 대신할 기구로 국가보위입법회의를 설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5共 헌법 제정안에 처음에는 國保委가 국회권한 대행기구로 되어 있었으나 최종단계에서 禹炳奎 정무수석비서관의 아이디어로 국가보위입법회의로 변경된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國保委는 설치 당시부터 비상권력기구로서 5.16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같이 입법 권한도 행사할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그야말로 일종의 軍政기관입니다. 다만 구성원에 민간인이 있어서 저는 그것을 準군정기관으로 파악하고 있을 뿐입니다”
-1980년 10월27일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같은 날 삼청동 國保委 사무실에서 全斗煥 대통령을 대리한 南悳祐 국무총리 주재로 첫 회의를 열어 국가보위입법회의법을 심의, 통과시켰다고 합니다. 대통령령에 의해 설치된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입법 권한을 갖게 된 근거가 무엇이었는가요.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등 각종 법안을 만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본인도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國保委 설치 직후부터 國保委 법사분과위원회를 중심으로 은밀히 헌법개정 작업을 진행한 사실을 알고 있나요.
“제가 알기로는 國保委가 공식으로 출범할 무렵 이미 朴哲彦, 禹炳奎씨 등이 보안사에 와서 별도로 헌법개정 작업을 진행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당 창당 인사 선별
-헌법개정 작업은 보안사 權正達 정보처장이 全斗煥 사령관의 지시를 받아 실무적으로 총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당시 朴哲彦과 禹炳奎의 공식 직책은 무엇이었나요.
“朴哲彦, 禹炳奎는 합수본부에 파견나온 형태로 權正達 정보처장 밑에서 일했으며 공식직함은 별도로 없었습니다”
-국회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 전문위원을 역임한 禹炳奎의 진술에 의하면 이 위원회에서 대통령, 국회의원의 선출시기 등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 전문, 본문 121조, 부칙 7조로 된 헌법개정안을 마련해 조문화까지 마친 상태에서 일체의 정치활동이 금지됨으로써 백지화되었다고 합니다. 국회에서 마련한 개정 헌법안을 잘 이용하면 되는 것이지 몇몇 사람이 모여 또 다시 헌법 개정 작업을 진행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요.
“新軍部가 집권에 대비해 미리 준비를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안사에서 權正達 정보처장 등을 동원해 헌법개정 작업을 은밀히 진행하도록 했다는 것은 그 때 이미 全斗煥 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新軍部가 집권에 뜻을 두고 새 공화국의 틀을 짜기 시작한 명백한 증거로 보여지는데 어떤가요.
“본인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보안사에서 신당 창당작업을 진행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요.
“國保委 설치 이후 곧바로 진행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언제부터인가요.
“國保委 설치 이후이니까 1980년 6월경부터 시작한 것이며, 그 때부터 보안사 내 의무실 옆 건물에 별도 사무실을 마련하고 權正達의 지시하에 李鍾贊, 李相淵 등이 신당 창당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진술인은 신당 창당 작업에 간여한 사실이 없는가요.
“정확한 날짜는 기억할 수 없으나 그 무렵부터 權正達로부터 신당에 참여할 인사들에 대한 자료수집 지시를 받고 자료를 수집해 넘겨준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창당된 후 각 지역에서 출마할 사람들은 당시 청와대 許三守 사정수석 주재하에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하고 그 명단을 盧泰愚 보안사령관 배석하에 제가 全斗煥 대통령에게 보고했습니다”
-신당 창당 작업에는 누가 참여했고, 진술인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다시 한번 진술하시오.
“權正達의 지휘하에 李鍾贊, 尹碩淳, 李相淵 등이 창당작업에 참여했고, 본인은 신당에 참여할 대상자에 대한 개인 신상자료 수집과 지역에서의 인기도 등을 조사해 창당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許三守 비서관의 주도로 이루어진 조직책 선정자 확정작업에도 참여했습니다”
-신당 창당작업과 병행해 정치활동 규제자 선별작업도 함께 추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때 진술인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玄鴻柱 中情 국장, 朴培根 치안본부 정보과장과 함께 각자 보관하고 있던 정치인별 신상카드를 토대로 대상자를 선정한 다음 본인이 全斗煥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 사회정화위원회에 넘겼습니다”
인위적인 세대교체
-1980년 단행된 언론인 해직과 언론사 통폐합 조치는 누가 주도한 것인가요.
“언론인 해직은 李相宰가, 언론사 통폐합은 許文道.李相宰 양인이 주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론인 해직과 언론사 통폐합을 추진한 배경이 무엇인가요.
“집권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언론 길들이기 차원이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 8월16일 崔圭夏 대통령이 하야했는데, 新軍部 내에서 처음으로 崔대통령의 하야를 논의하고 방안을 검토한 때가 언제인가요.
“1980년 7월 말경으로 기억되는데 崔대통령이 강릉을 갔다고 해 그 진상을 알아보니 대통령직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바람쐬러 갔다고 했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하야 의사를 알았습니다”
-崔대통령이 1981년 6월말 이전 정권이양이라는 구체적 정치일정을 공개적으로 밝혔음에도 新軍部가 崔대통령을 담화 발표 후 3개월도 안된 시점에서 하아케 해야 할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나요.
“모르겠습니다”
-고소.고발인들은 崔圭夏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스스로 물러날 이유가 없으므로 崔대통령의 하야는 분명 강제 하야이고, 따라서 이는 강제로 정권을 탈취한 것이므로 내란이라고 주장하는데 어떤가요.
“정황으로 봐서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지긴 합니다만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동시에 金鍾泌을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金大中과 그의 추종세력을 소요 배후조종 혐의로 각 연행하고, 金泳三을 가택연금에 이어 강제로 은퇴시킨 후,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3金씨를 포함한 舊정치인 8백53명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습니다. 아무리 국가상황이 긴박을 요하는 중대국면이라 해도 정치인의 세대교체 내지 정치질서 재편은 국민의 심판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보편적인 진리가 아닌가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자유 민주사회에서 인위적인 세대교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軍部의 쿠데타 방지업무를 지니고 있는 보안사가 직접 정치개입을 선도한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보안사가 5공화국 산실로 불릴 정도로 기관 전체가 朴대통령 시해 사건 직후부터 정치에 개입한 것이 사실입니다”
-朴正熙 장군이 집권한 과정과 全斗煥 장군이 집권한 과정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하는가요.
“朴正熙 장군을 중심으로 한 舊軍部는 여러 갈래의 인맥들이 정군파와 접맥했기 때문에 이념적 통일은 물론 단결력이 결여되었습니다. 또 문민정치를 회복시키려는 미국의 압력 또한 만만치 않아 난관에 봉착하게 됐습니다. 군사 쿠데타를 단행한 지 이틀만에 張勉 정부로부터 정권은 인수했으나 쿠데타 세력을 길들이고 軍部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며 미국의 압력과 이를 배경으로 한 민간 정치인들의 저항을 진정시켜 통치권을 장악하는 데는 2년 6개월간의 군정기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全斗煥 장군을 중심으로 한 新軍部는 新직업주의로 무장된 정치성이 강한 하나회 세력을 중심으로 12.12 군사반란을 통해 軍部의 헤게모니를 장악했습니다. 따라서 軍部를 제도적으로 활용하기가 용이했을 뿐만 아니라 비상계엄하에서 舊軍部가 구축한 통제체제를 최대한 작동시켰으므로 쉽사리 통치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全斗煥 집권은 쿠데타
-고소.고발인들은 新軍部 세력들이 행한 비상계엄 전국확대, 國保委 설치, 崔대통령 하야 등 일련의 과정을 통틀어 내란이라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한 진술인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내란과 쿠데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쿠데타란 정부요직에 있는 民이나 軍관계자가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여 비합법적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고, 내란은 두 개 이상의 정치집단이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싸움을 하는 것이므로 본인은 쿠데타 쪽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全斗煥 장군이 보안사령관과 中情부장이라는 요직에 있으면서 5.17 조치와 더불어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비롯한 보안목표를 점령했습니다. 또 國保委와 같은 準군정기관을 설치해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정권장악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한 다음 집권했기 때문입니다”
-1979년 10월27일 선포된 비상계엄이 1981년 1월24일 해제되었는데 비상 계엄해제가 그렇게 지체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왜 1981년 1월24일 해제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선 國保委의 존립 근거이고, 그 연장선상인 입법회의에서 여러 입법조치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981년 2월에 있을 예정인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선거를 무사히 치르기 위한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는 당분간 계엄상태가 필요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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