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은의 전신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고려때부터 사림의 교육기과이었는데 1572년(선조5)ㅇ0 서애 류성룡 선행이 지금의 병산으로 옮긴것이라고 한다.
병산이라는 뜻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607년 서애가 타계하자 정경세 등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613년(광해군5)에 존덕사를 창건하고 위폐를 봉안하였다. 1614년 병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복례문은 서원의 정문으로 지금은 주사의 왼편에 있는 문을 통해 서원을 출입할 수 있다.
(복례문에는 '내가 이곳에 들어가기전 예를 지킨다' 라는 뜻이 스며 있다고 한다.)
병산서원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적 건축물로서, 류성룡(柳成龍)과 그의 셋째아들 류진(柳袗)을 배향한 서원이다.
류성룡(柳成龍)선생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을 가르치던곳. 류성룡 선생의 문집을 비롯해 각종 문헌 1000여종 3000여책이 소장 되어 있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선생의 제자들과 유림이 뜻을 같이 하여, 서원 안에 사당(존덕사)을 세우고 위패를 모셔서 선생의 학덕을 이어받고 추모하며 향사(제사)를 올리던 서원이며, 이 제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만대루
유생들의 행사때 한자리에 모였던 대강당. 병산서원에서 가장 알려진 건물로서 건축과 조형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건물이다. 이곳 만대루에서 병산을 바라보며 시를 읊기도, 때론 가야금이 연주되기도 했단다.
서원이 있는곳은 어디든 풍경이 너무 좋다. 옛 유생들은 공부뿐만 아니라 멋과 풍류에도 능했다는 생각이 든다.
열공하고 있는 우리 친구들!!!
햇살이 따듯한 병산서원 강당에 앉아서 우리 친구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수업을 들었을까?
왼쪽 위에 있는 북은 서원에 급한일이 생기거나 유생들간에 분쟁이 생길때 치는거라고 했지?
병산서원앞 화산앞을 흐르고 있는 낙동강에서 신나게 놀기도 했지.
화산은 화산이 폭발하는 그런 화산이 아니고 꽃이 만개한것과 같은 모양이라 화산이라고 한단다.
낙동강에서 바라본 병산서원 전경
하회식당에서 우리는 정말로 맛있는 안동찜닭을 먹었지???
보기에도 먹음직 스럽게 생기지 않았니??? 쌤도 무척 많이 먹었단다^^
가운데 있는 담은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도록 쌓은것인데 이런 담을 차면담이라고 한단다. 무척 운치있어 보이지?
삼신당
삼신당은 하회마을에서 가장 높은곳이고 600년된 느티나무가 있단다.
소원을 적은 종이를 이곳에 걸어두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우리 친구들 어떤 소원을 적었을까? 쌤도 소원을 적어서 걸었는데,,,
모두모두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양진당
양진당은 겸암 유운룡(1539∼1601)의 집으로 매우 오래된 풍산 유씨 종가이다. 입암 유중영(1515∼1573)의 호를 빌어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유중영은 유운룡의 아버지이다. 양진당은 유운룡의 6대손 유영(1687∼1761)의 어릴 때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오른쪽 3칸은 대청, 왼쪽 1칸은 온돌방으로 바깥 주위에 툇마루와 난간을 둘러 마치 누(樓)집과 같은 인상을 주며 대청에는 문을 달아 3칸 모두 열 수 있게 하였다. 건물 안쪽 천장은 지붕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꾸몄고 한석봉이 쓴 ‘양진당(養眞堂)’이란 당호와 함께 여러 현판들이 걸려 있다.
건물 안쪽 일부 재료를 만든 수법이 뛰어나고, 일반 주택으로는 제법 규모가 큰 조선시대 별당건축물 중 하나이다.
양진당은 하회마을의 입향 시조인 유종혜가 처음 자리 잡은 곳에, 입향 당시인 13세기에 지어진 건물로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7세기에 중수하여, 고려 말의 건축 양식과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이 섞여 있다. 양진당은 유운룡의 6대손인 유영(柳泳)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다. 양진당은 하회에서는 드물게 정남향을 취하고 있다. 문간채와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고, ㅁ자형의 안채와 그 북쪽의 사랑채인 양진당을 一자형으로 배치하였다. 사랑채 북쪽에는 사당을 배치하였는데, 특이한 것은 별도의 사당 2개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입암 유중영과 겸암 유운룡 2명의 불천위(不遷位)를 따로 모시기 위한 것이다.
충효당
이 주택은 유성룡(柳成龍:1542~1607)의 집으로, 집의 구조는 남향하여 일자형 행랑채(12칸)가 있고 그 안쪽으로 口자형 안채와 일자형 사랑채가 붙어 있으며 그뒤로 사당이 있다. 행랑채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바로 보이는데, 사랑채는 보수공사 때의 개작(改作)으로 보이는 견치석(犬齒石)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사랑채는 홑처마의 팔작지붕으로 8칸의 대청 뒷면에 온돌방을 두어 6칸으로 되어 있으며 앞면과 옆면에 계자난간을 설치했다. 안채는 사랑채에 이어진 중간 행랑채의 중문을 통해 드나들도록 되어 있으며, 이 건물도 견치석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方柱)를 세웠는데 대청 전면은 두리기둥으로 되어 있다. 안채도 역시 홑처마의 팔작지붕이며 바닥은 우물마루인데 마루보다 방의 면적이 훨씬 넓다. 이 건축물은 상류층의 주택이면서도 모든 부분이 기능적으로 처리되고 방의 면적이 커지는 등 민간형을 따른 전형적인 상류주택이다.
사실 이곳은 배우 류시원의 집이라하여 보긴 하였는데 쌤은 개인적으로 류시원이라는 분을 안좋아해서 ㅋㅋㅋ
하회마을을 모두 둘러보고 주차장으로 가는길에 낙동간변이 있는 소나무숲
우리 친구들 와우^^ 그네도 잘 타더구나...
하회별신굿탈놀이
별신굿이란 3·5년 혹은 10년마다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서낭)님에게 마을의 평화와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굿을 말한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서는 약 500년 전부터 10년에 한번 섣달 보름날(12월 15일) 내지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무진생(戊辰生) 성황님에게 별신굿을 해왔으며 굿과 더불어 성황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탈놀이를 하였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각시의 무동마당·주지마당·백정마당·할미마당·파계승마당·양반과 선비마당·혼례마당·신방마당의 8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놀이를 시작하기 전 대내림을 하는데, 정월 초이튿날 아침 성황당에 올라가 당방울이 달린 내림대를 잡고 성황신을 내리면 당방울을 성황대에 옮겨 달고 산에서 내려온다. 성황대와 내림대를 동사 처마에 기대어 세우고 비로소 놀이가 시작된다. 등장인물로는 주지승·각시·중·양반·선비·초랭이·이매·부네·백정·할미 등이 있다.
파계승에 대한 비웃음과 양반에 대한 신랄한 풍자·해학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제사의식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각시탈은 성황신을 대신한다고 믿어 별신굿 외에는 볼 수 없고, 부득이 꺼내볼 때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 한다. 또한 탈을 태우며 즐기는 뒷풀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놀이에 사용되는 탈은 주지탈 등을 포함하여 모두 10종 11개로 오리나무로 만들었으며 옻칠과 안료를 두세겹 칠하여 색조의 강도를 높였는데, 원본은 1964년 하회탈 및 병산탈(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탈놀이의 반주는 꽹과리가 중심이 되는 풍물꾼이 하며 즉흥적이고 일상적인 동작에 약간의 율동을 섞은 춤사위로 이루어진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우리나라 가면극의 발생이나 기원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우리가 갔을때는 중이 나와서 웃음을 주었지?
처음부터 봤으면 더 좋았을것을...
안동은 먼곳이라 일찍 출발해서 우리 친구들 피곤했지?
그래도 이번 답사는 쌤이 말한것 처럼 감성답사여서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는 많지 않았을꺼라고 생각한단다.
여행처럼 다녀온 안동답사,,,
우리 친구들 모두 즐거웠길 바라고..............점점 추워지는 날씨
건강 조심하고 다음달에 행복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