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고속도로와 전주, 익산이 갈라지는 곳에 초남리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이곳이 바로 ‘호남의 사도’라고 불리는 유항검의 생가 터가 자리한 곳이다.
1754년 이곳 초남리에서 아버지 유동근과 어머니 안동 권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진산 사건으로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된 윤지충과 함께 전라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거의 절대적인 공헌을 한 초대 조선 천주교회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또 그의 아들 유중철(요한)은 이순이(루갈다)와 평생 동정부부로 살아간 것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들 동정부부는 1797년 혼인 후 1801년 치명할 때까지 4년간 이곳에서 동정생활을 했다.
윤지충과 이종 사촌간, 권상연과는 외종 사촌간이 되는 유항검은 전주 초남리에서 높은 덕망과 많은 재산을 소유한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많은 재산과 후덕한 인품으로 인근의 백성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됐던 만큼 그는 과거 급제를 목표로 학업에 정진했다.
대부분 양반의 길이 그러하듯이 유항검 역시 입신양명을 꿈꾸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벼슬길을 포기하고 일신의 수양을 통해 세상의 어지러움에서 초연하고자 했다. 유항검은 어머니 권씨를 통해 권철신과 일족이 될 뿐 아니라 이종 사촌인 윤지충을 통해, 이승훈, 정약전과 인척간이었으므로 이들을 통해 천주교의 교리를 접할 수 있었다.
1784년 늦은 가을 유항검은 양근의 권철신 집을 찾아가 그 집에서 천주교 서적과 천주상 등을 목격하고 권철신의 아우 일신에게서 교리를 들었다. 천주교 교리의 오묘한 진리를 들어 받아들인 그는 마침내 권일신을 대부로 하고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고향에서 암암리에 전교 활동에 힘쓰던 그는 1786년 봄,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이자 가성직 제도를 설정한 이승훈에 의해 권일신, 홍낙민, 최창현, 이존창 등과 함께 신부로 임명되었다. 그러던 중 1787년 그는 가성직 제도의 부당성을 깨닫고 이승훈에게 그 시정을 요청하는 한편 북경에 밀사를 보내어 오류를 범한 가성직 제도에 대해 정죄(淨罪)하고 선교사들의 지시를 받도록 촉구했다. 그리하여 윤유일이 밀사로 파견됐고 유항검은 그의 후견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초남리는 또한 1794년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외국인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유항검의 초청으로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주 신부는 그의 집에 머물며 성사를 집전하고 강론을 하는 한편 유항검과 함께 여러 가지 교리를 진지하게 토론했다. 이 때 그의 아들 유중철은 첫영성체를 하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의 회오리는 이곳 초남리에 거세게 불어 닥쳤다. ‘사학의 괴수’로 낙인찍힌 그는 전라도 지방에서는 가장 먼저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됐다. 외국인 신부의 입국을 도와 내통했고 사교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청원서를 냈다는 죄목으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를 적용해 머리를 자르고 사지를 자르는 능지처참(陵遲處斬)형을 언도받았다.
그리하여 다시 전주 감영으로 이송된 그는 그 해 10월 24일 참수되는데 이 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그리고 부인 신희, 큰아들 유중철, 며느리 이순이, 둘째 아들 유문석, 동생 유관검 등 그의 모든 일가친척들이 거의 처형되고 나이 어린 세 자녀는 유배되는 등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이들의 시신은 노복과 친지들이 거두어 백사발에 각각 이름을 적어 넣고 고향인 초남 땅에 묻지 못하고 들 건너 김제군 재남리(현 전주시 덕진구 남정동) 바우백이에 가매장했다.
1914년 4월 19일 전동 본당 초대 주임인 보두네 신부와 신자들은 바우백이에 모셔진 순교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치명자산으로 모셨다. 1993년 11월 29일 치명자산의 묘소를 개장하여 유해 확인 작업을 벌인 결과, 이 가족 묘소에는 7개의 옹기에 각각 유해가 담겨져 있었으며, 백사발에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고, 숯을 담은 채 옹기를 막아 놓아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다.
초남이 성지가 개발된 것은 1985년 전주교구 설정 50주년(1987년)을 앞두고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유항검 생가 터인 ‘파가저택’(破家瀦宅, 국사범에게 내려지는 죄목으로 집은 불사르고 집터는 웅덩이로 만들어 3대를 멸하는 조선왕조 500년사에 가장 큰 형벌로 누구도 다시는 그 터에서 살지 못하도록 흔적을 없애는 것) 부지를 매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전주교구는 유항검과 사돈간인 이우집의 문초 기록과 지역 토착민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파가저택지와 유항검의 생가 터에서 약 400여m 떨어져 있는 교리당 터도 확인했다. 또한 재남리 뒷산으로 추정해 온 가매장터가 초남이 성지에서 서쪽으로 600여 미터 거리에 위치한 밭터임도 확인했다.
전주교구는 유항검 생가 터를 호남 천주교의 발상지로 인정하여 1987년 성지로 축복한 후 성역화 작업이 진행하였다. 유항검 생가 터는 또한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부부가 4년여 동안 동정생활을 해온 곳이며, 전라도 지역에서 최초로 운영되었던 인근의 교리당 터는 주문모 신부가 호남에서 처음으로 미사와 성사를 집전한 장소이기도 하다. 2000년 9월 23일 생가 터에 피정의 집과 새 제단 및 각종 성인상을 마련하여 축복식을 가졌고, 2002년 6월 23일에는 종탑과 한옥 형태의 교리당(유항검 사랑채), 당시 사용했던 샘물인 ‘정지샴’을 복원하여 축복식을 거행했다.
2005년 5월 28일 사랑채 옆 교리당 부지에 30여 평 규모로 주문모 신부 미사 봉헌 기념경당을 일자형 한옥 형태로 건립하여 봉헌했다. 경당 안에는 미사를 봉헌하는 주 신부와 유항검과 신자들의 모습을 인형으로 제작해 놓았다. 2006년 10월 23일에는 파가저택 자리 한편에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부부가 4년간 살았던 행랑채를 복원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3칸짜리 한옥으로 지어진 행랑채는 유항검이 왕손을 며느리로 맞으며 황송한 마음에 따로 별채를 지어 아들 내외가 살 수 있도록 배려했던 곳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
초남리 - 호남의 사도와 동정부부 생가 터
호남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다가 전주 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와 전주 쪽으로 가다 보면 '동정 부부 생가 터'라는 안내 돌을 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 5km 정도를 더 가면 '류항검(아우구스티노)의 생가 터' 사적지가 나온다. 지금의 형정 구역으로는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초남 마을이다. 1754년에 류 아우구스티노가 탄생한 곳이자 동정 부부로 유명한 류중철(요한)과 이순이(누갈다)가 살다가 체포된 곳이다. 현재 이 지역을 관할 구역으로 하고 있는 동산동 본당에서는 1987년에 그 일대를 매입하여 사적지로 조성한 뒤 축복식을 했다.
류항검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윤지충과는 이종 사촌간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직후에 입교하였으며, 이후 전주 일대에 널리 신앙을 전함으로써 '호남의 사도'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는 초기 신자들이 임의로 마련한 가성직제(假聖職制) 아래에서 신부로 활동하기도 하였고, 집안의 부를 바탕으로 교회일을 열심히 뒷받침해 주었다. 그러다가 1791년의 박해로 이종 사촌이 체포되어 순교하자 잠시 몸을 피하기도 하였으나, 다음해에는 감영에 자수하여 신앙을 벌겠다고 다짐한 뒤 석방되었다. 물론 이것은 본심이 아니었다. 류항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켰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복음을 전하였다.
1795년에 류항검은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다 성사를 받고 교리를 배웠는데, 이때 류항검의 장남 류중철이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되었다. 류중철은 이내 훌륭한 하느님의 종이 되었다. 게다가 부친에게 허락을 받고 평생을 동정으로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 무렵 서울에서도 한 유명한 신자 집안의 딸이 동정을 맹세하고 있었다. 초기의 신자 이윤하(마태오)의 딸인 이순이(누갈다)가 그녀였다. 이러한 사실은 곧 주문모 신부의 귀에 들어갔고, 신부의 주선으로 1797년에는 초남리에서 전대미문의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류 요한과 이 누갈다가 '평생을 오누이처럼 살면서 동정을 지키겠다'는 동정 서원을 하면서 혼례를 올린 것이다. 바로 이들이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동정 부부였다.
그 동안 전라도 지역에는 신자들의 이주로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생겨났으며, 이후 10년 동안 고산, 전주, 무장 등을 중심으로 꾸준히 복음이 확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로 한국 천주교회의 반석이 무너지면서 전라도의 신앙 공동체도 와해되고 말았다. 이때 먼저 류항검의 아우인 류관검과 윤지충의 아우인 윤지헌이 체포되었고, 이어 류항검도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그들은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받게 되었으며, 마침내 능지처사의 판결을 받고 9월 17일(양력 10월 24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동시에 그들의 가산은 적몰되고 초남리의 집에는 연못이 만들어졌다. 그들의 순교로 전주 남문 밖은 다시 한 번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게 되었다.
이에 앞서 류 요한은 부친이 체포된 직후에 체포되어 전주 감영의 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9월 15일에는 동정 부인 이순이와 동생 문철(요한), 사촌 동생 중성(마태오)을 비롯하여 모든 가족과 노비들이 체포되었다. 그 중에서 중철과 문철 형제는 10월 9일 전주 감영에서 옥사하였고, 12월 28일(양력 1802년 1월 31일)에는 이순이 또한 전주 숲정이로 끌려 나가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드디어 승리의 날이 왔다. 옥에서 형장으로 가는 동안 류중성(마태오)은 매우 열렬히 늘어서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였고, 이순이(누갈다)는 두 여자 동반자, 특히 세 어린 자식이 귀양간 생각을 하면서 불안과 슬픔에 잠겨 있는 시어머니를 격려하고 권고하였다. 우리의 영웅적인 동정녀는 시어머니가 다시 천주님께 대한 신뢰를 갖도록 하면서 그의 용기를 되살려 주었고, 그의 마음을 이 세상에서 떼어 내 이제 문이 열리려 하는 천국으로 돌리게 할 줄을 알았다. 망나니가 관례대로 그들의 옷을 벗기려 하자, 누갈다는 매우 정숙하고 품위있는 몇 마디 말로 그를 물리치고 나서 스스로 웃옷을 벗고 손을 묶지 못하게 한 채 맨 먼저 조용히 자신의 머리를 칼날 아래 놓았다(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상, 554면).
훗날 다블뤼 주교가 순교자 전기에서 표현한 것처럼, 누갈다의 마지막 증언과 순교 모습은 "모든 조선의 순교자 중에서 우뚝 솟아난 하나의 아름다운 진주"였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11월호] |
~~~~~~~~~~~~~~~~~~~~~~~~~~~~~~~~~~~~~~~~~~~~~~~~~~~~~~~~~ |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1756-1801년)
전주의 초남에서 살았던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 1756~1801년)은 양반집안 출신으로 덕망이 높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는데, 그 외에 재산이 많아 상당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1791년 제사문제로 공식적인 사형집행으로 순교한 한국교회의 첫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의 이종사촌이기도 한 그는 사촌인 윤지충에게서 교리책을 빌려보고 관심을 가졌다. 유항검은 천주교 교리에 대해 더욱 깊이 알아보고자 하여 양근의 권일신을 찾아가 배우고 입교하여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집으로 돌아와 많은 가족들을 가르쳐 신자가 되게 하고, 친구와 이웃에게도 열정을 다해 교리를 전하였다. 그의 영향력과 한결같은 열성과 모범적인 신앙생활은 그로 하여금 반도의 남쪽 호남지역의 반석으로 인정받게 하여 우리는 그를 호남의 사도라 부른다.
그의 사도다운 면모는 그의 가족들이 천주교로 인해 참수 당한 모습에서도 충분히 볼 수가 있다. 우선 그의 동생인 유관검은 그와 함께 같은 날인 1801년 10월 24일에, 그리고 며느리인 이누갈다와 함께 동정부부 순교자로 유명한 장남 유중철 요한과 차남 유문석은 1801년 11월 14일에, 부인 신희와 조카 유중성 마태오, 옥중서간으로도 널리 알려진 며느리 이순이 누갈다 등은 1802년 1월 31일에 각각 순교하였다. 참으로 온 집안이 다 얼마나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는지 짐작이 될만하다.
단 한 사람의 선교사도 없이 자생적으로 시작한 명례방 김범우 선생 댁의 집회가 바로 그 이듬해인 1785년에 형조에 의해 발각되어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인 소위 을사추조적발 사건이 일어 났다. 한국교회는 그 첫 싹부터 잘리는 박해를 받아 집회는 해체되고 유림의 거센 반발 속에 버려졌다.
이러한 어려운 때에 권일신, 이승훈, 정약용 형제 등이 1787년경 교회재건운동을 벌이면서 평신도에 의한 임시 교계제를 설정하였다. 아직 교계제에 대한 교리 지식이 부족했던 그들은 스스로 사제직을 수행하기도 했는데, 이 때 유항검도 신부로 임명받아 동참했다. 고향인 전라도에서 설교하고 세례도 주고 고해와 견진성사를 집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리공부를 통해 이러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의심을 품게되어 북경 주교께 문의하여 잘못임을 알고는 즉시 중단하고 평신도로 돌아가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이 무렵 제사문제에 대한 북경의 회답도 있어 당시 많은 양반신자들이 제사를 드리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교회를 떠났다. 아직 신심이 깊지 못한 상태에서는 당연히 현실적 문제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항검은 이러한 난관 속에서 용기와 믿음을 잃지 않고 복음전파에 힘쓰며 윤지충과 함께 교리 공부에 더욱 충실하였다.
초기교회에서는 이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사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어렵게 전개한 사제영입운동이 성공하여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게 되었다. 유항검은 더욱 용기를 얻어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전라도 지방을 순회 사목하는 신부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 직접 보좌하였다. 엄중하게 비밀을 지키며 온갖 제약 속에 활동하던 그는 마침내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가장 먼저 체포대상으로 지목 받아 1801년 3월에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감사는 지방의 토호로 명망과 세력을 지닌 유항검을 다루기 위해 더욱 위엄과 절차를 갖추어 준엄한 심문과 고문을 했다. 유항검은 서양인을 청해오는데 비용을 부담했으며, 외국인을 입국시켜 자신의 집에 묵게 하고 사도를 널리 전했다는 점에 대해 심문을 당하고, 특히 서양의 선박을 초빙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려 했다는 소위 대박청래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고문을 당했다.
유항검은 서울로 압송돼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그는"나라를 위태롭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서양선박을 초빙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서양과 우리나라가 친교를 맺음으로써 새로운 문명의 혜택을 받아 우리도 남과 같이 잘살아 갈 방도를 취하려고 한 것이며, 이렇게 되면 조정에서도 천주교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어 탄압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라고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조정에서는 의심과 경계를 풀지 않고 유항검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다.
한때 그가 곤장을 맞고 성교의 신봉을 구태여 고집하지는 않았다고 하여 결코 그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그의 생애와 교회에 기여한 업적과 가족들과 그 자신의 순교는 오히려 그의 굳건한 신심을 의심할 수 없게 한다.
유항검은 수렴청정하며 박해령을 내렸던 김대비의 주장에 따라 호남인들이 천주교를 신봉하지 못하도록 경계하기 위하여 전주감영으로 보내져 전주성 내에서 참수되고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에 따라 호남의 사도 유항검은 옥중서간과 동정부부의 순교로 너무도 유명한 그의 며느리의 간절한 옥중기도 속에 1801년 10월 24일 사십 육세의 나이로 능지처참되어 자신의 한 때의 나약을 피로 씻는 순교의 영광 속에 주님께로 나아갔다. [출처 : 김길수, 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가톨릭신문, 2001년 11월 25일]
유중철(柳重哲) 요한(1779-1801년)
‘종석’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중철 요한은 1779년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그의 부친이고, 이순이(루갈다)는 그의 아내이며, 유문석(요한)은 그의 동생이다.
유중철 요한의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 부친 유항검이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면서였다. 이후 부친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였고,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요한은 일찍 세례를 받고 신앙 안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또 그는 한정흠(스타니슬라오)으로부터 오랫동안 글을 배워 어느 정도 학식도 갖추게 되었다.
“유중철은 성실하고 솔직한 신심, 굳은 신앙과 열렬한 애덕을 갖추고 있었다. 본분에 충실하고 올바른 생활을 하며, 세속의 모든 허영을 업신여겼으므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점잖고 진중한 어른 대접을 받았다.”
요한은 16세가 되던 1795년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초남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첫 영성체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 ‘동정 생활을 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주 신부와 부친 앞에서 털어놓았다.
그로부터 2년 뒤 주문모 신부는 한양에 살던 이순이 루갈다로부터 동정을 지키도록 도와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이에 신부는 전주에 사는 요한을 생각하고는 둘의 혼인을 주선하였고, 그 결과 1797년 10월 요한과 루갈다의 혼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다음해 9월 요한은 아내 루갈다와 함께 부모님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이후 유중철 요한은 동정 서약을 어길 마음이 생길 때마다 루갈다와 함께 기도와 묵상으로 이를 극복해 나갔고, 함께 순교의 길로 나가자고 굳게 다짐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 봄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게 되었다.
요한이 갇히게 되자, 동생 유문석이 줄곧 전주를 오가면서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의복만은 전해줄 수 없었으므로 한여름에도 겨울옷을 그대로 입고 지내야만 하였다. 그는 밤낮으로 목에 칼을 쓰고 있어야만 하였으며, 옥중의 고통은 그에게 진정한 형벌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보존하였다.
9월 중순에는 요한의 아내 루갈다를 비롯하여 동생과 다른 가족들도 체포되었다. 그리고 20여 일 후 포졸들은 유문석을 가족들에게서 떼어내 형인 유중철 요한에게로 데려왔다. 그런 다음 관장의 명에 따라 그 둘을 교수형에 처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11월 14일(음력 10월 9일)로, 당시 요한의 나이는 22세였다.
요한이 순교한 뒤, 옥중에 있던 아내 루갈다는 그가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순교하였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마침내 편지 한 장이 집에서 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러한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요한의 옷 안에서 자기 누이(즉 아내 루갈다)에게 보내는 쪽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쪽지에는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출처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2003년]
이순이(李順伊) 루갈다(1782-1802년)
사를르 달레는 그의 불후의 명작인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이순이(루갈다, 1781~1801년)와 유중철 요한 동정부부 순교자의 옥중 서간을 소개하면서 "일찍이 신앙과 순결과 순박과 예수 그리스도님에 대한 사랑이 이보다 더 아름다운 말을 한 적은 없다"고 감탄하였다.
루갈다는 '천주실의'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했던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의 8대 손인 이윤하를 아버지로, 그리고 한국천주교회 건설의 3대 공로자 중에 한 분이신 권일신의 누이인 권씨를 어머니로 하여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모범을 따라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성장했다. 그녀는 14살이 되던 해에 주문모 신부를 맞아 첫영성체를 하려는 간절한 열망으로 3일간 금식과 철야기도로 준비하여 성체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주님과 일치를 이룬 은혜를 감사하며 그 감격을 영원토록 간직하기 위해 순결을 지킬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풍습 때문에 양가의 규수가 독신으로 순결을 지키기는 불가능하였다. 어머니 권씨는 딸의 마음을 헤아리며 근심하다가 마침 주문모 신부의 주선으로 거룩한 삶을 원하던 유중철과 동정부부로 결혼하게 되었다.
1797년 호남의 사도인 유항검의 장남인 유중철과 부부가 된 루갈다는 이듬해 9월에 전주의 시가로 가서 첫날밤에 부부가 함께 동정서원을 하고 그 약속을 흠 없이 지키며, 마치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 같은 결혼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오누이처럼 지내며 남편은 아내를 늘 '누이'라고 불렀다. 루갈다는 시부모를 공경하고 그들에게 순종하며 너무도 겸손하고 감탄할 만큼 온순하며 그 많은 식구들과 조그마한 불화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덕행이 향기처럼 온 집안에 가득 찼다고들 했다. 그런데 그들의 아름답고 고결한 동정부부 생활은 4년 만에 순교의 거룩한 피로 성스럽게 끝맺는다.
1801년 최초의 전국적 박해가 시작되자 그 해 봄에 시아버지와 남편이 체포당하고 9월에는 루갈다와 나머지 집안 식구들도 함께 체포당했다. 친정의 오빠마저 서울에서 체포당한 가운데 그녀는 옥중에서 죽음을 앞두고 어머니와 친정 올케언니에게 편지를 남겼다. 이 옥중서간에서 그녀는 어머니께 처음으로 자신의 동정부부 생활을 고백하였다. "어머님을 영원히 떠나 다시는 어머니께 효성을 다할 기회를 잃게 되는 날을 앞두고, 어찌 일체의 인정을 억제할 수 있겠습니까? … 오라버니 이 가롤로가 서울에서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큰 은총이며 얼마나 큰 보호입니까? 저는 어머님의 행복을 찬양합니다. 4년 전에 어머님 앞을 떠나온 저는 제 마음의 모든 감정을 알려드릴 길이 없어 매우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어머님께 주셨다가 도로 거두시는데 이 모든 것이 그분의 섭리로 조절되는 것이니 그것을 너무 슬퍼하는 것은 교우로서는 웃음을 사 마땅한 나약이라 하겠습니다. 제가 시집에 이르렀을 때에 제 모든 불안의 대상이고, 제 모든 날의 걱정이던 것을 쉽게 얻었습니다. 남편과 아홉시에 함께 있게 되었는데 열시에는 우리 둘이서 동정을 지킬 것을 맹세하였고, 우리는 4년 동안 남매와 같이 지냈습니다."
죽음을 앞둔 딸이 친정어머니께 보낸 이 글을 보며 그들의 삶을 거룩하게 보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제 루갈다는 친정 올케언니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붓을 드니 할 말이 없군요. 불쌍한 우리 오빠가 돌아가셨나요? 살아 계신가요? … 어머님과 새언니가 어떻게 그것을 견딜 수 있겠어요. … 그것을 생각하면 오직 불안과 걱정 뿐 어떤 말로 제가 느끼고 있는 것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오빠가 돌아가셨다면 그 초상범절을 어떻게 지내셨으며, 만일 아직도 결말이 나지 않았다면 오빠가 그 추운 옥중에서 어떻게 견디겠어요. 오빠가 죽었거나 살았거나 우리 어머님의 간장이 탈 것입니다."
루갈다는 옥중에서 자신이 겪은 고통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다. 오직 남편과 가족의 순교만을 빌며 그들이 용감히 하느님을 증거하기만을 빌었다. 특히 남편이 장한 순교자가 되기를 노심초사했다. 그러던 중 남편의 순교 소식을 듣고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 … 마침내 편지 한 장이 집에 왔어요.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요.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제 모든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사실에 있어서 그의 모든 처신을 생각하면 뉘우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세속정신을 떨쳐버린 진짜 교우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 이 세상에서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이제는 제 애정을 사로잡고 제 머리를 번거롭게 할 수 있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제 머리에 생각이 하나 떠오른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향한 것이고, 제 가슴에 한숨이 한번 나오면 그것은 하늘을 향한 것입니다. …"
이 거룩한 동정녀는 1802년 1월 31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그는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름다운 동정과 순교의 꽃 중의 꽃으로 순교사에 곱게 피어있다. [출처 : 김길수, 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가톨릭신문, 2001년 11월 11일]
김천애(金千愛) 안드레아(1760-1801년)
고향을 알 수 없는 김천애 안드레아는 ‘전라도의 사도’로 유명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중 그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당시 유항검의 집은 전주의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있었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 안드레아는 자신의 신분을 뛰어넘는 고결한 마음으로 신자의 본분을 지켜나갔다. 그는 진리에 대한 믿음이 남달랐으며, 교리의 가르침을 굳게 지킬 줄도 알았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전라도에서는 아우구스티노가 가장 먼저 체포되었다. 그 뒤를 이어 김천애 안드레아도 그의 맏아들인 유중철(요한)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이내 감영에서는 안드레아에게 문초와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와 밀고를 강요하였지만,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경 동료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안드레아의 신앙은 형조에서도 한결같았다. 그는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으면서 “십계명을 버릴 수는 없으며, 한 번 죽는 것인 만큼 죽음을 달게 받겠다”고 진술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전주로 압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8월 27일(음력 7월 19일) 혹은 28일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그가 형조에서 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천주교는 큰 도리요 지극히 훌륭한 행위로, 여러 해 동안 깊이 믿어 이미 뼛속까지 사무쳐 있습니다. (저에게) 형벌과 죽음은 영예로운 일이니, 어찌 마음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범한 죄를 돌이켜보건대, 오직 빨리 죽기만을 원할 따름입니다.”
유문석(柳文碩) 요한(1784-1801년)
‘문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문석 요한은 전라도 전주의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거주하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1784년에 태어났다.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그의 부친이고, 유중철(요한)은 그의 형이며, 이순이(누갈다)는 그의 형수가 된다.
유문석 요한의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 부친 유항검이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면서였다. 이후 부친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였고,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요한은 어릴 때부터 신앙 안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1795년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초남이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요한의 나이는 12살이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그의 형 유중철과 이순이가 동정 부부가 되기를 서약하고 혼인을 하였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 초남이에서는 요한의 부친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이어 유중철과 친척들이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이때 요한은 다행히 체포되지 않았으므로 여름 내내 전주 옥을 오가며 형에게 음식을 전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해 9월 중순 무렵에는 유문석 요한도 남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이때 가족들과 함께 순교를 약속하면서 굳게 마음을 다졌는데, 그 내용은 그의 형수 이순이가 옥중에서 쓴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다섯 사람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천주님을 위해 순교하자고 언약하고, 철석같이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한 결과 우리의 원의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 자연히 온갖 후회와 근심 걱정이 잊혀졌습니다. 날이 갈수록 천주님의 은혜와 은총은 쌓이고, 우리 마음에는 신락(神樂)이 더해지며, 아무 걱정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어 전주 관장은 요한과 그의 가족에 대한 판결을 조정에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는 즉시 이를 담당할 관리를 전주로 파견하였다. 그 결과 요한은 11월 14일(음력 10월 9일)에 옥에서 끌려나와 형 유중철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17살이었다. 이때까지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었다. [출처 : 이상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2003년]
| |
박해시대의 동정부부
우리 나라 박해시대의 기록에 보면 몇 쌍의 동정부부를 확인하게 된다. 동정부부는 혼인한 뒤에도 성적 관계를 가지지 않고 동정성을 지키던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일반 상식과 매우 다른 삶을 살았지만, 박해시대 교회에서는 이러한 삶의 형태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동정부부의 존재는 19세기 당시 한국교회의 독특한 영성과, 수도원이 없었던 박해시대의 상황이 낳은 특이한 삶의 양식이었다.
동정부부가 출현하게 된 배경
박해시대 우리 나라에서는 그리스도교적 삶의 양식 가운데 독신의 금욕생활을 특히 중시하였다. 이 점은 당시 신자들이 널리 읽던 한글 교리서 등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성경직해광익」에 나오는 삼왕래조(주님 공현 대축일) 후 제2주일 복음묵상에서는 교회의 회중들을 세 가지 품격으로 나누어 평가하고 있다.
곧, 상품으로는 동정을 지키는 사람들을, 중품으로는 과부나 홀아비가 된 다음 다시 혼인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고 하품으로는 지아비와 지어미가 함께 사는 혼인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들었다. 그러면서 상품은 금이요, 중품은 은이며, 하품은 구리라고 비유하여 말했다. 이처럼 신자들을 그 삶의 방식에 따라 분명한 서열로 구별하였다. 이러한 등급이 정해진 까닭은 가족 문제에 마음을 쓰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일에만 투신할 수 있는 삶을 동신(童身) 내지는 독신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세계교회사의 전통을 보면 금욕생활을 높게 평가하는 관행이 존속해 온다. 일부 이단사상에서는 혼인제도 자체를 거부하거나 혼인의 가치를 낮추어 평가했다. 예컨대, 서기 2세기경 타티아누스(Tatianus) 일파나 13세기 전후 알비(Albi)파 이단에서도 그리스도교적 금욕의 이상형으로 혼인 금지를 내세우다가 단죄되었다.
한편,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유럽 교회에서는 얀세니즘이 강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엄격한 신앙의 실천을 위한 금욕생활을 강조했다.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던 정적주의 이단에서도 혼인생활을 경멸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유럽 교회의 일부 비뚤어진 영성이 박해시대 한문교리서나 일부 선교사를 통해서 전래되었다. 여기에서 박해시대 우리 나라 교회에서는 금욕생활을 완덕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통로로 인식하고 동정의 가치를 강조했다. 이러한 영성적 분위기에서 동정부부가 탄생하였다.
또 다른 배경으로는 박해시대 우리 나라에서는 공식적인 수도생활의 실천이 불가능했던 점을 들 수 있다. 수도생활을 지망하던 일부 신자들은 일종의 ‘위장 혼인’을 통해 동정부부로 지내며 수도자의 삶을 살려는 것이었다. 이처럼 동정부부는 19세기 한국교회의 교회사적 특성에 따라 출현한 삶의 한 형태였다.
동정부부의 사례
우리 교회사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동정부부로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부부를 들 수 있다. 유중철은 유항검의 맏아들이다. 이들은 동정으로 살고자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주문모 신부는 혼인이라는 외관 속에 이 두 마음을 결합시켜 그들 서로의 뜻대로 남매처럼 살도록 주선하였다. 이순이가 남긴 한글 편지를 보면 동정부부로 살면서 10여 차례 동정부부 파기의 ‘유혹’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혼인 뒤 4년 동안 부부가 아닌 남매처럼 지내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다.
동정부부에 관한 또 다른 사례는 유방제 신부의 편지에서 발견된다. 유 신부는 1834년에 입국한 뒤 ‘글라라’라는 신자를 만났다. 글라라는 혼인할 때부터 남편과 함께 평생 동정을 지키기로 약조하고 이를 실천해 오다가, 그의 ‘남편’은 신유박해 때에 주문모 신부와 함께 순교했다. 이 사례에서 교회 창설 초기부터 동정부부들에 관한 사례가 여럿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도 동정부부이다. 권일신의 딸 권 데레사는 1804년 친척들의 권유로 조숙에게 시집을 갔다. 혼인 첫날밤 권 데레사는 조숙에게 동정을 지키겠다는 자신의 의사를 알렸고, 원래 신자였던 조숙도 이에 동의하였다. 그들은 동정부부로 15년 간을 함께 지냈고, 이 부부는 1819년 서울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그러나 그 15년 동안 그들은 매일 순교해 왔을 것이다.
한편, 박해시대 교회사에서는 혼인생활을 하던 신자들이 금욕생활로 전환했던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유방제 신부는 ‘민(閔)가’라는 사람이 노년에 아내와 함께 하느님을 알아 정덕을 지키기로 결심하여 고신극기를 실천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 순교한 황석두도 그의 아내와 별거하면서 절제생활을 하기로 동의했던 사람이다. 이들 이외에 홀아비나 과부가 다시 혼인을 아니하고 금욕생활을 실천한 사례들도 찾아볼 수 있다.
남은 말
우리 교회사에 등장하는 동정부부들은 선교사의 격려를 받으며 자신들이 정한 방법에 따라 동정부부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극도의 금욕생활을 통하여 금과 같은 상품의 신자생활을 살고자 하였다. 그러나 동정부부의 관행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결코 이해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또한 이는 서유럽 교회 안에서도 존재할 수 없었던 특이한 삶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를 실천했던 신자들은 자신들이 새롭게 터득한 이념적 공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실험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완덕을 지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실험은 주문모 신부가 선교하던 18세기 후반기에 집중적으로 전개되며, 높게 평가받기도 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1857년 사목서한에서 수정(守貞)을 하고자 하는 부부도 사제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동정부부의 사례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보면, 동정부부의 풍조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한 이후 점차 소멸되어 간 듯하다. 이는 주문모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던 신학적 인식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겠다.
박해시대 신자들의 동정부부 생활은 수도자의 영성에 대한 모방일 수 있다. 당시는 신자들의 영성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일반 신자들은 일등이나 이등의 신분이 아닌 삼등급의 신분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학에서는 사회 안에 살면서 누룩처럼 사회를 복음화시켜 나가야 하는 평신도들만의 고유한 영성을 말하고 있다. 이 평신도 영성의 중요성이 성직자나 수도자 영성과 동일하게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수도생활을 지원하는 사람들은 수도회에 입회하여 자신의 원의를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박해시대 동정부부의 ‘비정상적’ 삶은 역사의 한 장면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유교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완덕을 수행하려 했던 그들의 과감한 결의만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깨우침을 재촉하는 죽비가 되어 우리 가슴을 울리고 있다. [출처 : 조광 이냐시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경향잡지, 2002년 8월호]
우리 역사 속의 동정녀
동정은 성적 욕망을 억제하고 신체적 순결성을 지키는 행위를 말한다. 이와 같은 금욕적 삶의 형식은 이미 그리스도 탄생 이전부터도 존재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이 독신생활을 격려하기도 하였다(마태 19,10-12). 그리스도교 교회사의 초기부터 “몸과 마음을 거룩히 하고, 주님의 일에만 마음을 쓰는”(1고린 7,32-34)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 한국교회사에는 초창기부터 신체적 순결성을 존중하는 동정에 관한 적지 않은 기록이 나오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삶을 오로지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스스로 동정서원을 발하고, 이를 실천하는 동정생활을 택했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 동정녀의 길을 걸으며, 수도회가 없던 사회에서 수도의 길을 걷고자 했다. 그리하여 동정생활은 박해시대 이래 교회 안에서 중요한 삶의 형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 교회사에서 동정과 동정녀
1835년 조선에 입국하고자 시도하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을 안내해 준 중국인 신자 왕(王) 요셉을 통해 조선 교우들과 한문으로 글을 써서 문답을 나누었다. 왕 요셉은 조선 교우들에게 “조선 교우들 중에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 분들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 질문의 뜻을 조선인 신자들은 정확히 알아듣고 “여자들 가운데는 수절한 사람들이 많으나 남자 교우들 가운데는 그보다 적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 대화를 통해 박해시대 당시 조선인 신자들은 동정을 지키는 사람들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 분들”로 이해하였고, 남녀 수절 교우들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박해시대 우리 교회사에는 여러 명의 동정녀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동정녀들의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신유박해(1801년) 때 윤점혜(아가타), 문영인(비비아나), 이순이(루갈다) 등을 비롯한 여러 명의 동정녀들의 기록이 있다. 을해박해(1815년) 때에는 동정생활을 그리다가 좌절된 이시임(안나)의 삶이 돋보이며, 기해박해(1839년)에서는 김효임(골룸바)과 김효주(아녜스) 자매를 비롯하여 그 밖의 동정녀들이 순교했다.
동정을 지키고자 하던 원의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 신도들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순이와 함께 지내다 신유박해 때 순교한 유중철(요한)을 남성 수절자로 먼저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1815년 대구에서 순교한 최봉한(프란치스코)도 한때 동정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다. 같은 시기에 김시우(알렉스), 최 마르티노도 동정서원을 발하고 수절자의 삶을 살았다. 조숙이나 정하상도 이와 같은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이들이 동정생활을 택하게 된 가장 근본적 이유는 하느님의 사업에 전념하여 하느님을 더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1801년 당시 강완숙이 지도하던 여성공동체에서 같이 생활하던 동정녀들에게서도 부분적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기해박해 때에 순교한 동정녀 김효임의 증언을 통해서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그는 자신을 신문하던 관장에게 “천주교인들의 눈에는 동정이 더 완전한 지위로 생각되며, 자기들은 하느님을 더 기쁘게 해드리려고 동정을 지키기로 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한편, 당시 신자들은 성모 마리아나 성 요셉을 비롯한 로마 시대의 박해에서 순교한 동정녀들에 대한 신심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교회 내에 감돌던 이 같은 정서적 배경도 그들의 동정생활을 격려하는 일이었다.
동정녀들의 생활
교회사의 기록에 따르자면, 이들은 기도와 금욕생활을 철저히 실천하고 있었다. 물론 인간이었던 그들에게 동정생활은 결코 만만한 삶이 아니었다. 정약종의 딸 정정혜(엘리사벳)의 경우에는 동정을 서원했지만, 30세쯤 되었을 때 2년 이상이나 강력한 유혹을 받은 바 있다. 그는 반발하는 육체를 끊임없는 극기와 금식기도[大齋]로 공격하고, 주야로 하늘의 배필이신 예수께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눈물은 마침내 승리를 가져오고야 말았다. 동정녀들 가운데는 일주일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대재를 지키고, 고기와 생선을 절대로 입에 대지 않은 사람도 있다.
한편, 동정녀들은 그 긴 기도문들을 외웠고, 기도의 정신이 가득해서 밭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그들은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사람들의 곤란을 덜어주려고 필요한 것까지 포기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신앙을 갖도록 권고하였다. 그들은 굳은 신앙을 가지고 순교에 임해서도 다른 이들을 격려해 주었다. 이처럼 그들은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면서, 고통과 보람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동정이라는 삶의 방식은 당시 사회에서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유교 문화는 나이가 차면 혼인하여 가족을 이루는 것이 당연하고 떳떳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지방에 부임한 수령들도 의지가지 없는 외로운 사람들을 돌보고 과년한 사람들의 혼인을 주선하는 일에 힘써야 했다. 이러한 유교적 문화풍토에서 동정생활이란 이해될 여지가 없었다. 그러기에 1839년에 발표된 ‘척사윤음’에서는 “음양이 있으면 반드시 부부가 있음은 바꿀 수 없는 이치인데, 저들은 시집가고 장가들지 않은 것을 망녕되이 정덕이라 가탁하니, 이로 말하면 인류가 소멸될 것이다.” 하고 지적했다.
정부에서 동정을 거부하던 것과는 다른 이유로 당시의 교회에서도 동정생활에 신중을 기하도록 했다. 물론 18세기 말엽 교회 창설 초기에는 주문모 신부 등에 의해 동정생활이 인정되고 축복되기도 했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는 1857년 신자들에게 사목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이 경계하고 있다. “성교회법에 동정 지키고자 하는 자가 혼자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는 법이라. 마땅히 탁덕과 자세히 의론하여 할 것이니, 그 허락 없으면 아니 되며, 수정(守貞)하고자 하는 부부도 이 법과 같이 할지니라.”
남은 말
19세기 중엽의 교회에서 동정허원과 동정생활을 제한하고자 했던 일은 하느님께 대한 허원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교리적 측면이 있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의 그 말은 당시의 문화풍토를 감안한 말이었다. 곧, 당시 조선의 문화풍토에서 동정생활이란 유별난 행동이었다. 그러므로 동정생활은 자신이 신자라는 사실을 드러내어 박해를 자초할 수 있는 빌미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동정녀를 둔 신자 가정에서는 적지 않은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의 신도들에게 동정생활은 새롭게 터득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철저히 실천하고자 한 결의의 표현이었다. 그들이 동정생활을 결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절을 중시하던 유교적 문화풍토나, 독신생활을 기본으로 한 불교적 수행의 전통이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의 동정생활은 이러한 전통과는 일정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기존 문화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 도전을 통해 그들은 새로운 삶을 실험하고 있었고, 새로운 삶이 통할 수 있는 새 사회를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출처 : 조광 이냐시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경향잡지, 2002년 7월호]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완덕의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동정부부로
유중철(柳重哲 요한, 1779-1801년)은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초남마을에서 아버지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 1756-1801년)과 어머니 신희(申喜, ?-1801년)의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부모에게 받은 신앙과 교육으로, 그를 본 사람들은 “성실하고 솔직한 신심, 굳은 신앙과 열렬한 애덕을 갖추었다. 본분에 충실하고 올바른 생활을 하며, 세속의 모든 허영을 업신여겨 젊은 나이에도 점잖고 진중한 어른 대접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1795년 주문모 신부님이 방문했을 때 첫영성체를 하였고, 동정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드러냈습니다.
이순이(李順伊 루갈다, 1782-1801년)는 서울 중림동에서 아버지 이윤하(李潤夏 마태오, 1757-1793년)와 어머니 권씨(1754-1835년)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나, 아버지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어머니에게서 글을 배웠습니다. 오빠인 이경도 가롤로는 1801년에 서울에서, 동생 이경언 바오로는 1827년에 전주에서 순교하였습니다(2008년 1월호 참조).
그녀는 1795년에 주문모 신부님께 첫영성체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자신을 거룩하게 보존하고 예수님을 영혼의 배우자로 삼아 사랑하는 주님을 즐겁게 해드리고자 동정으로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녀의 믿음살이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초대교회의 위대한 네 동정 순교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3세기에 순교한 동정순교자 아가타 성녀였습니다.
유교사회에서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1797년 딸의 결심을 들은 어머니는 주 신부님과 상의를 하였고 신부님은 유중철 요한을 떠올렸습니다. 완전한 하느님의 자식이 되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완덕의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며 살기를 열망하는 두 남녀의 성소를 지켜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형식을 빌려 둘이 동정의 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혼인을 주선하였습니다.
드디어 1798년 10월 둘은 시부모 앞에서 동정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살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부모님께서 재산과 가업을 물려주시면 서너 몫으로 나누어서 한 몫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한 몫은 시동생에게 넉넉하게 주어 시부모님을 모시도록 하고, 세상이 좋아져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면 각각 헤어져 살자고 약속하였습니다.
이렇게 둘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동정부부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동정서약을 어길 유혹이 생길 때마다 둘은 믿음과 사랑 속에 기도와 묵상으로 극복해 나갔고, 함께 순교의 길로 나가자고 굳게 다짐하며 4년의 살얼음판 같은 동정살이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피묻은 쌍백합, ‘누이여, 하늘나라에 가서 만납시다’
유중철 요한은 1801년 3월 초순 신유박해에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전주 옥에 갇혀 밤낮으로 목에 칼을 쓰고 있어야만 하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보존하다가 그해 음력 10월 9일 교수형으로 동생 문석과 함께 순교하였습니다.
유품 속에 루갈다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는데, 신앙을 잘 지켜나갈 것을 당부하고 위로하며, “누이여, 하늘나라에 가서 만납시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요한에게 루갈다는 믿음의 아내, 희망의 벗, 성실한 사랑의 반려자였습니다. 두 사람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삶의 표본으로 남겨주신 은총이었습니다.
이순이 루갈다는 9월 중순 체포되어 전주감영에 끌려갔습니다. 그녀는 감옥에서 어머니에게 서한을 보냈습니다. “주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순교의 열매를 맺는 날이면, 어머니께서도 자랑스러운 자식을 두었다고 여기실 것이고, 저 또한 어머니의 떳떳한 자식이 될 것입니다. … 이 세상 삶을 다 마치시면, 못난 자식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영광을 받아, 가이없이 행복한 모습으로 손을 마주잡고 하늘나라로 모셔 들여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렵니다.”
두 언니에게도 서한을 보냈습니다. “좋은 기회가 오면 주님을 위해 목숨 바칠 뜻을 마음속 깊이 정하고, 이 뜻을 가슴에 새기고 새기며 그 준비에 힘썼어요. … 시어머님, 시숙모님, 시동생, 시사촌동생과 더불어 다섯 사람이 서로 약속하기를,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자 하였고, 각자 결심한 뜻은 쇠와 돌처럼 아주 굳었어요. 서로 마음이 통하고 뜻이 같으니, 가득한 믿음과 사랑이 다섯 사람 사이에 조금도 다름이 없었기에 가슴에 가득 찼던 설움이 자연히 잊혀지고, 갈수록 주님 은총을 입어 영혼의 기쁨이 넘쳐나 아무 근심걱정이 없게 되고 마음에 걸리는 잡념이 사라졌어요.
…이 세상에서는 다시 돌아보아도 마음 둘 데가 없어 생각하는 것은 오직 주님이며, 제 마음이 향하는 곳은 하늘나라뿐입니다. … 언제나 힘껏 뜨거운 사랑을 실천하시고, 깊이 뉘우치는 뜨거운 사랑이 아주 없을지라도 힘써 사랑을 실천하면서 주님께 간절히 구하면, 주님께서 착하게 살아 복된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한때나마 방심하였거든 깊이 뉘우치고 깨우쳐서 열심히 주님께 뜨거운 사랑을 드리면 점점 주님께 가까워지실 것입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착한 일로 공을 쌓으시고, 몸 건강하시고 영혼과 육신을 정결하게 하시어 다 함께 하늘나라에 가서 대부모이신 하느님과 부모님을 즐겁게 모시고, 형제가 영원히 함께 살면서 즐거움을 누리기를 바라고 바라며, 죽어서도 끊임없이 주님께 간절히 청하겠습니다. …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말은 참되다 하지요. 곧 죽게 될 제가 드리는 이 말이 그르지 않을 것이니 꼭 명심해 주셔요.”
루갈다는 그해 음력 12월 28일에 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두 분의 신앙과 삶을 본받고자 2001년부터 해마다 전주교구가 주최하고 전북, 전주시가 후원하는 순교현양 문화축제 ‘요한 루갈다’제가 열립니다. 1994년에 치명자산에 두 순교자의 기념성당이 봉헌되었습니다. 초남이 성지에서는 둘이 살았을 세 칸 한옥의 행랑채를 복원하고, ‘이순이(루갈다) 시집온 날’ 기념미사를 2001년부터 봉헌하고 있습니다. 2004년에는 오페라‘쌍백합, 요한 ∙ 루갈다’(호남 오페라단)가 전주에서 공연되기도 하였습니다.
읽을 책으로는 “피묻은 쌍백합”(김구정, 가톨릭출판사), “누이여, 천국에서 만나자”(노순자, 성바오로), “이순이 루갈다 남매 옥중편지”(김진소 편저, 호남교회사연구소) 등이 있습니다. [출처 : 여진천 폰시아노, 원주교구 배론성지 담임, 경향잡지, 2008년 2월호]
남녀의 새로운 위상, 동정 부부 : 이순이 누갈다의 편지
들어가는 맡
박해 시대의 신자들은 넘치는 신앙에의 기쁨과 교회에 대한 사랑을 담은 글들을 남기고 있다. 그 글들은 일기나 편지의 형태로, 또는 “옥중기”나 “천주가사”의 형태로 그리고 저서로 정리되어 오늘의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 글들은 박해 시대 신자들이 가졌던 믿음이나 생각의 특성을 가장 잘 전해 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초기 교회에 관한 자료 중에는 이순이(李順伊) 누갈다가 남긴 두 통의 편지가 있다. 흔히 ‘이 누갈다 서한’으로 불리고 있는 이 펀지는 1801년 신유 교난 당시의 우리 나라 교회 상황을 간접적으로 전해줌과 동시에 순교를 목전에 둔 한 아녀자의 올곧고 고운 마음씨를 전해 주고 있다.
새로운 깨달음의 시대
이순이(1781~1802년)는 새로운 깨달음의 사태를 살았던 순결한 여인이었다. 그가 살았던 당시는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때에 이르러 양반 사대부 중심의 사회 질서가 이른바 ‘아랫것들’에 지나지 아니하던 민인(民人)들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었다. 남성 중심의 사회 문화는 서서히 흔들려 갔으며, 여성들의 새로운 각성이 일어나고 있었다. 또한 불평등한 사회 질서를 지탱해 주던 성리학(性理學) 일변도의 사상계에도 새로운 변화가 기대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관련하여 천주교 신앙이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천주교 신앙은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깨닫고 이를 바로잡아 보려고 노력하던 일단의 지식인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또한 이 새로운 신앙은 역사의 현장에서 주인공으로 성장해 왔던 민중들에 의해 수용됨으로써 그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이때의 천주교 신앙에서는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한 존재임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천주교에는 선각적 지식인들과 억눌려 지내던 민중들이 입교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평등을 강요당하던 여성들도 이 새로운 종교 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바로 이와 같은 사회 문화적 분위기에서 이순이는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고 순교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순이와 그 형제들
우리 나라 여성의 이름 가운데 가장 순박하고 정감 어린 이름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순이라는 이름이리라. 그러기에 예로부터 많은 문학 작품에서 ‘순이’가 등장하고 있으며, 오늘의 작가들도 ‘순이’를 즐겨 들먹이고 있다. 우리 교회사에 나타나는 많은 여인 중에서도 ‘순이’들을 찾을 수 있으며, 그 가운데 ‘이순이’는 ‘강완숙’과 함께 초기 교회사의 전형적 인물이다.
순이네 집안 내력은 이러하다. 그의 아버지는 지봉 이수광(李晬光)의 후손인 이윤하(李潤夏)였다. 이윤하는 근기(近畿) 남인 계통의 지식인으로서 이가환(李家煥) 등과 친밀히 지내고 있었다. 순이의 어머니는 당시에 가장 저명한 학자였던 권철신(權哲身)의 동생이었다. 순이의 오라버니 이경도(李景陶)는 1801년의 박해 때 순교했고 오라비 이경언(李景彦)도 1827년에 순교했다. 물론 이순이도 1801년에 시작된 신유 교난의 과정에서 순교를 하여, 그의 집안은 천주교 신앙을 증거하다 철저히 파괴되었던 초기 교회의 대표적 가문이다.
이순이는 바로 이와 같은 자기 집안의 분위기에 힘입어 천주교를 알게 되었고, 새로운 신앙을 가장 철저히 실천하기 위해 동정의 삶을 살기로 했다. 이순이는 당시의 사회 관습상 호남 벌의 부호 유항검의 아들 중철(重哲)과 결혼을 했었다. 그러나 유중철과 이순이는 여느 부부들과는 달리 남매처럼 지냈던 동정 부부였다.
편지가 쓰여진 까닭
1801년은 우리 나라의 초기 교회에 있어서 무척이나 괴로운 시련의 시기였다. 이때 전국적인 규모의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다.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서울이나 경기 그리고 충청도 내포 지방과 전주에서는 신도들이 줄뒤짐을 당했고, 순교와 배교가 연이어 졌다.
이때 전주 지방의 대표적 신도였던 유항검도 체포되어 순교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항검의 가족 거의 모두가 체포되었고, 이 과정에서 유중철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했다. 유항검 · 유중철 가족 구성원 중 아녀자들은 당시의 연좌율(連坐律)에 의해 시골 관아의 관비(官婢)로 보내져야 했다. 그러나 이순이를 비롯한 그의 시어머니, 시숙모 등은 자신들의 천주교 신앙을 고백하며, 자신의 남편 및 형제들과 함께 공동 정범(共同正犯)임을 선언하고 연좌율의 적용을 거부했다. 이로써 그들도 신유년 말경에(양력으로는 1802년 1월 31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당해 순교했다.
이순이는 전주 옥에서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며 두 통의 편지를 쓰게 되었다. 이 편지 중 하나는 그의 어머니 권씨에게 보내는 짤막한 글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의 친언니와 올케에게 보낸 상당히 긴 편지이다. 이순이는 자신의 신앙과 자신의 처지를 전하고, 살아 지낼 친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다.
편지에 담긴 내용
이순이는 이 두 통의 편지를 통해 자신의 열렬한 신앙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그는 여기에서 주문모 신부로부터 받아 모신 성체에 대한 짙은 신심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1798년 유중철과 함께 동정 서원을 한 이후 이를 지켜 왔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편지에서 형제에 대한 애틋한 우애를 드러내고 있으며 내세에 대한 그리움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현세적 고통에 대한 인내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성숙시킬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이 편지에 나타나는 바와 같은 그의 신앙과 삶은 18세기 후반기를 막 넘어선 당시의 상황에서는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성리학적 윤리관에 대한 결연한 거부를 표현했다. 그의 동정 생활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봉헌한 삶을 뜻함과 동시에 남편에 얽매어 지내야 했던 여인네의 일반적 관행에 대한 일대 도전이기도 했다. 그는 이로써 성리학적 남녀 윤리를 거부하려 했고, 남녀의 새로운 위상을 정립하려 했다. 편지에서 나타나는 그의 따뜻한 마음씨는 이땅에 새로운 사랑의 불을 지피려 했던 결단의 표현이기도 했다.
남은 말
‘순이’라는 이름은 순해 터진 이땅의 아낙네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그 순한 아낙들의 강인한 삶이 우리 역사와 문화의 반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순이는 나약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나약하지만은 아니했으며, 그 굳고 질긴 믿음을 통해 이땅에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해 준 인물이었다.
이순이의 편지는 그의 큰오빠 이경도가 1801년에 순교하기 전날 어머니 권씨에게 보낸 편지 및 1827년 전주옥에서 유사한 동생 이경언의 편지 등과 함께 “발바라 초남이 일기 남매”라는 제목으로 필사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중 이순이의 편지는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한 “순교자와 증거자들”, “한국천주교회사”(상권) 등에도 수록되어 있다. [출처 : 조광 이냐시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경향잡지, 1990년 8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