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와 성선설에 대하여
케케묵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악이 가득찬 세상에서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앞뒤가 안맞을지도 모른다. 며칠 전 맹자에 관한 책을 읽으며 맹자의 위대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뭐 별게 있으려나 하지만 이 사람 지금으로부터 2,300 여년 전 사람이지만 결심한 바를 이루기 위해 남다른 공부와 수련을 감당한 정신을 배우게 된다. 우리 역사로 치면 아직 고구려, 백제, 신라도 생기기 전의 일이 아닌가. 그 보다 더 오래 전에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평화를 생각했다니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서양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도 다 고대인이긴 하다만 어찌되었건 그 오래 전에 인간은 어떠해야 한다고 정의를 내려보려고 시도하고 또 나름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찾았다는 것은 놀랄 일이다. 그의 발견도 놀랍지만 그는 이런 인간에 대한 발견을 통해 자신 또한 그런 인간의 정점인 성인이 되고자 결심한 것은 더더욱 놀랍다. 그의 결심이 뭐냐 하면 요임금이나 순임금도 자신과 동일한 인간이지만 성인이 된 점을 발견하고 자신도 노력하고 애쓰면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고 반드시 그렇게 되고자 한 정신이다. 지금에 그를 보면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당연히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누가 그를 알아주었을까? 그러나 그는 호연지기와 부단한 수신과 수학을 통해 마침내 그 뜻을 이루었다. 이는 곧 누구든지 주어진 도덕의 마음을 갈고 닦는다면 그런 최고의 도덕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증거가 되고도 남는다. 2,300년 전에 이미 그것을 몸소 증명했다니 참으로 놀랍다.
그의 생각이 무엇인가? 사람은 누구나 선하게 태어났다는 생각이다. 어찌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그는 사람이 코로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혀로는 맛있는 음식을 찾고 귀와 눈으로는 아름다운 소리와 아름다운 꽃을 찾고자 본능적으로 하듯, 사람의 마음도 본능적으로 선한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사람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름하여 측은히 여기는 마음, 부그러워하는 마음, 겸손과 양보의 마음,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으로 일컬어지는 사단의 마음이다. 누가 가르쳐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날때부터 주어졌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온전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작은 실마리 형태, 즉 단서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실마리를 잘 기르고 길러 마침내 온전하게 만든다면 누구나 성인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깊은 사색의 결론이다. 그는 하늘을 믿었고 사람을 믿었다. 짧은 시간에 이것을 이룰 순 없지만 오래 가르치고 오래 키운다면 마침내 그런 열매를 맺어 온 세상은 반드시 태평한 시대를 맞이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익과 부국만을 생각하던 그 시대에 맹자는 거부되었다. 충분히 공감이 간다. 전국시대 후기의 유학자 순자는 맹자를 부인했다. 오히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기심을 가지고 태어나 이것이 결국 악의 근원으로 작용한다는 성악설을 주장하였다. 인간은 교육과 훈련없이는 하늘의 뜻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일게다. 틀린 말은 아니다. 순자도 나름 많은 것을 생각하고 많은 것을 배우고 수련하여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들고자 하는 원대한 뜻이 있었음에 분명하다.
나는 맹자의 생각에 온전히 동의할 순 없지만 사람은 선하게 태어났으므로 충분히 수양을 한다면 누구나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성선설이 참으로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마음에 대한 사색과 도덕에 대한 교훈, 의와 인을 중요시하며, 최소한 배운 사람으로서 성인이 되고자 한다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내용은 참으로 신선하다. 또한 그런 사람이 왕이 되어 정치를 하는 왕도정치와 왕도정치를 통한 태평시대를 소망한 그의 사상은 참으로 크고 원대하다 아니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무항산 무항심이란 용어를 통해 백성이면, 다시 말해 국민이면 누구나 최소한의 소득이 주어져야 한다는 사상은 오늘날 우리가 보아도 너무나 신선하다. 요즈음 소위 말하는 기본소득 사상이나 아니면 최저임금 등의 복지제도와 일치하는 것 같다.
오늘 이 시대는 과거 2,300여년 전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시대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변함없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 그 오래 전과 비교해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음에는 틀림없다. 정말 우리는 평화롭고 태평한 세상을 꿈꾸는가, 아니면 나혼자 잘 사는 세상을 꿈꾸는가? 나 혼자 잘사는 세상은 불가능하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행복하고 또 세상은 의로움과 평화로 충만해져야 하지 않을까? 당신은 어떤 세상을 꿈꾸는가? 그것을 꿈꾸어야 할 것이다. 최소한 개인과 개인간에는 싸움과 살인이 없어야 하며, 국가와 국가간에는 전쟁이 없어져야 할 것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차마 입에 올리기 어려운 뉴스가 방출되는 이 시대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규명이나 탐구는 해야하지 않을까? 교화가 되고 정화가 된다면 뭐라도 해야하지 않을까. 성서, 에베소서 2장에서 바울은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선한 의도로 지음을 받았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선한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맹자가 지혜의 한계속에서도 인간을 탐구하고 그것을 통해 유토피아적인 국가비전을 제시했다면 바울은 본질 그 자체를 이야기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함을 추구하고자 방향을 잡고 결심을 해야할 것이다. 타고난 선한 마음을 붙잡고 길러야 할 것이다. 나는 그런 가치와 그런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을 꿈꾼다.
나에게 글을 쓰고 싶은 감동과 영감을 준 책, 맹자에게 배우는 나를 지키며 사는 법, 김월회, 2023. 2.EBS 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