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열증에 시달리는 아들
증언자 : 김오식(남)/정금자(어머니)
생년월일 : 1961. 2. 4(당시 나이 19세)
직 업 : 고등학생(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8. 12
개 요
김오식 씨는 당시 송정리 정광고 2학년으로 조대부고로 전학 수속을 밟고 있는 중이었다. 20일쯤에 피투성이가 된 채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 이후 계속 정신분열증 증세가 심화되어 현재까지 고통스럽게 지내고 있다. 김오식 씨의 어머니가 증언하고 있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우리 오식이는 3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똑똑하고 착한 아이였는데, 5·18 이후 전혀 정상인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서 태권도 시범경기를 한다고 해서 구경간 적이 있었다. 오식이가 어찌나 늠름하고 의젓한지 나는 저 아이를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식이는 무엇보다 심성이 착했다.
나는 남편과 상의해서 우리 오식이가 월야중학교 1학년이 되던 해인 1974년초에 광주로 이사를 했다.
남편은 원래 둘째아들이었지만 인공 때 시아버지와 시아주버니가 돌아가신 까닭에 사실상 장남이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광주로 이사를 나올 때 가슴 아픈 일이 많았다. 분가해서 따로 살기는 했지만 시골에는 시어머니와 형님이 의지할 곳도 없이 생활하고 있었다. 시누이조차 인공 때 남편을 잃고 혼자 살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 기막힌 형편을 뿌리치고 나오기까지는 모진 결심을 해야 했다.
우리가 광주로 이사 나올 때 시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내가 죽으면 누가 나를 묻어줄꺼나' 하면서 눈물을 뿌리셨다. 내 살길만 찾아나오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지만 자식들 잘 가르쳐볼 욕심으로 모질게 떠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 때 너무 모질게 했기 때문에 벌받느라고 우리 오식이가 저 지경이 되었지 싶다.
광주로 이사온 뒤 남편은 한 친구의 소개로 부동산소개업에 손을 댔는데 하는 일마다 잘 되어갔다. 우리 오식이는 충장중학교로 전학했다. 충장중학교에서 개근상을 받고 졸업한 뒤 고등학교를 배정받던 날 오식이가 내게 말했다. 새로 배정받은 학교가 숙문고등학교인데 학교에 가보니 어찌나 심난한지 도저히 그 학교에 다닐 마음이 없다는 것이었다. 1년을 쉬고 나서 다른 학교로 가겠다는 것이다. 나는 1년을 이유 없이 쉬는 것이 좋지 않다며 그냥 다닐 것을 고집했다. 그런 데 그것이 실수였던 것 같다.
그 학교가 변두리에 있어서인지 학교 주변에는 불량배들이 많았다. 한참 예민한 때라 오식이도 차츰 그 무리에 물이 들었던가보다. 오식이는 원래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라 나는 그 아이가 친구들과 몰려다녀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2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집에 안 들어오기 일쑤였다. 한번은 담임선생님이 전화로 오식이가 학교를 안 나왔는데 집에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전까지는 꼬박꼬박 학교에는 나가는 것으로 알았던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뒤로도 자주 그런 일이 발생해 학교에서 퇴학시키려고까지 했다. 결국 3학년 때 담임선생이 전화로 우리 오식이를 퇴학시켜야겠다고 하였다. 우리 부부가 학교에 찾아가 사정을 해보았지만 다른 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고 하면서 결국 퇴학을 시켰다. 학교에서는 오식이의 장래를 위해 '병고'로 인한 자퇴로 처리해 주었다.
그렇게 학교를 그만둔 오식이가 1980년이 되자 다시 학교에 보내달라고 졸랐다. 다시는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식이는 송정리 정광고등학교에 2학년으로 전학하게 되었다.
1980년 5월까지 학교를 다니던 오식이가 교통도 불편하고 나이 차이도 많은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기가 껄끄럽다며 한사코 조대부고로 전학해 달라고 졸랐다. 내가 쫓아다니며 조대부고로 전학시키려 수속을 밟았다. 그날이 1980년 5월 14일인데 전학에 필요한 서류를 정광고등학교에서 떼어다가 그날 밤은 집에서 자고 다음날인 15일에 다시 조대부고를 갔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서류를 접수받지 않고 다음날 다시 오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서류를 만들어놓고도 접수시키 지 못하고 있는데 5·18이 일어났다.
피투성이로 돌아오더니
우리 식구는 5·18 기간 동안 우리 오식이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모른다. 남편은 오식이가 집에 들어온 날이 20일 아니면 21일쯤이라고 말하고 있어 확실하지는 않다.
부상자 신고를 하면서 안 사실인데, 오식이 국민학교 동창인 이근동이 1980년 5월 18일에 조대 운동장에서 오식이가 맞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어쩌다가 그 지경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20일쯤에 대문에서 신음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피투성이가 된 오식이가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방안으로 옮겨놓고 보니 온몸에 피멍이 들어 있고 곧바로 혼수상태에 빠져버렸다. 그 뒤로 의식은 돌아왔으나 머리가 자주 아프다고 했다. 코가 깨지고 온몸이 심하게 피멍 이 든 상태라서 식구들은 머리 아프다는 소리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뒤부터는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잠을 자지 못하고 자주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서울까지 가서 약을 지어다 먹였으나 별 차도가 없었다. 동생이 아무래도 서울에서 치료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서울로 보냈는데 동생한테 다시 연락이 왔다. 우리 오식이가 심상치 않다며 나에게 올라오라고 했다. 오식이는 가만히 있다가도 갑자기 소리를 지르거나 뭐라고 중얼거렸다. 동생과 무슨 병원인 줄도 모르고 무심코 따라간 곳이 답십리에 있는 어떤 정신병원이었다. 그냥 진찰만 하는 것으로 알았던 나는 오식이가 곧바로 입원되자 몹시 충격을 받았다. 그 병원에서 2주 정도 입원치료를 하고 2주 정도는 통원치료를 했다.
조금 좋아진 것 같아서 집으로 데리고 내려왔는데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상태가 악화되었다. 이번에는 아주 난폭해져 버렸다. 태극기만 보면 머리에 질끈 맸다. 또한 몽둥이나 긴 막대기가 있으면 그것으로 온 집안을 다 부수었다. 그러면서 소리를 지르는 말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 소리가 뭔지 몰랐다. 나중에 자세히 들어보니 '조인트 까지마'라는 말이었다. 아마도 군인들한테 맞던 기억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것 같다. 갑자기 기가 발동하면 집을 때려부수기가 다반사고 심지어는 식구도 못 알아보고 두들겨팼다.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을 잡고 죽도록 때린 적도 있다. 도저히 어떻게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걷잡을 수 없이 오식이의 상태는 나빠져갔다.
숨죽여 살아온 지난날
우리 식구는 누구한테 하소연 한마디 못 했다. 도리어 다른 자식들에게 피해가 될까봐 5·18 당시 부상을 당했다는 사실을 숨겼다. 오식이가 하도 극성스럽게 난폭해지자 오식이 동생들은 도저히 집에서 함께 생활할 수 없었다. 지금은 모두 따로 방을 얻어 나가 자취생활을 한다.
나는 한편으로는 오식이가 원망스러워 차라리 그때 죽어버리지 그랬냐고 속으로 몇 번이나 외쳤는지 모른다. 그러다가도 어렸을 때 내게 극진하게 대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병을 낫게 해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요즘에는 신앙생활(남무묘호령계교)을 하면서 오식이의 병을 낫게 해보려고 노력한다. 진심으로 내가 지은 죄를 속죄하고 세상과 이웃을 위해 기도한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들어 오식이는 많이 누그러졌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걸핏하면 오식이한테 두들겨 맞아 갈비뼈가 부러지거나 얼굴이 찢겨져 상처가 아물 날이 없다. 누구한테도 이런 사정 얘기를 못 하고 사는 동안 내 가슴은 쥐铸을 놓은 듯 옭죄어야 했다.
이번에 주위에서 사정을 아는 몇몇 남편 친구들이 신고를 하라고 권유했다. 망설인 끝에 겨우 신고를 했는데 벌써 2번씩이나 불인정 판정을 받았다. 불인정 사유 근거로 우리 오식이가 숙문고(현 송원고)를 자퇴할 때 자퇴사유가 '병고'였다는 것을 들었다.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퇴학당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 '병고'로 처리한 것인데 이제 와서 그것이 현재의 정신질환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누구한테 말 한마디 못 하고 살아온 것도 원통하고 서러운데, 얼토당토 않은 근거로 사람을 두 번 죽이려 하고 있다. 그때 정말 정신병이었다면 어떻게 다시 정광고등학교로 전학할 수 있었으며 조대부고에서는 받아준다고 했겠는가. 하도 기가 막혀 부상자 신고하는 것을 반대했던 나도 이제는 부상자로 판정받을 때까지 재신청을 거듭할 작정이다.
신고를 하려고 인우보증인을 찾던 중 오식이가 우리 식구들에게 했던 말을 더듬더듬 기억해 보았다. 오식이가 집에 들어온 뒤 점수는 도망가 버리고, 근동이는 상무대로 끌려갔다는 말을 한 기억이 났다. 점수라는 친구는 나의 친정 사촌동생의 아들 이름이었다. 연락을 해보니 진주에서 군생활을 하느라 연락되지 않는다고 했다. 근동이라는 친구는 월야국민학교 동창이었는데 고향으로 수소문해 광주에 사는 것을 확인했다.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연락을 했다. 만나기 전에 전화로 우리 오식이를 아느냐고 물으니 안다고 했다. 그는 오식이가 조대 운동장에서 맞는 것을 보다가 자기는 상무대로 끌려갔다고 했다. 내가 사정이야기를 하자 근동이는 기꺼이 인우보증을 서주겠다고 했다.
이근동은 현재 시내에서 태권도학원 관장을 한다고 했다. 5월 18일에 상무대로 끌려간 그는 21일 석방되었고, 그것에 관한 서류는 조대부고 선생이 없애주었다는 말도 해주었다. 그래서 근동이가 시청에 가서 직접 인우보증을 섰다.
그 밖에도 예전에 오식이한테 들었던 말은 조대 운동장에서 맞다가 군용트럭에 죽은 사람, 산사람 할 것없이 실렸다고 했다. 차 안에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그 차에 실려서도 정신이 썩 빠져버릴 정도로 맞았다고 한다. 그런 속에서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겨우 도망을 왔다는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그 말들이 제정신으로 한 말이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이근동이 실제 인물인 것을 보면 허튼소리는 아닌 것 같다. 이근동이 조대 운동장에서 우리 오식이가 맞는 것을 보았을 때, 오식이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금방 눈에 띄었고 오식이인 줄 알아보 았다는 것이다.
8년 동안 오식이는 서울의 정신병원, 광주, 목포 등의 병원을 전전하며 치료를 받았다. 그때마다 조금씩 차도가 있어 집에 데려오면 다시 재발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작년(1987) 9월 24일 이후에는 아예 병원에 가지 않고 부처님께 빌고 있다. 나는 우리 오식이가 병만 낫는다면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 오식이가 저렇게 된 뒤 우리 식구는 사는 것 같이 산다고 할 수 없을 만큼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만큼 고통을 당하고 오식이의 병이 완치되는 것말고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