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동포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피땀으로 가꾸어 온 재독동포사 45년의 생생한 역사를 '재독동포사회 45년을 돌아본다'라는 제목으로 교포신문사에서는 격주로 총 40회(약 1년 6개월)의 계획으로 2면에 걸쳐 연재한다.
이 연재물에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이곳 독일 땅에 오기까지의 과정과 독일에서의 정착 및 재독동포 사회의 건설, 2세들을 위한 헌신, 한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등 그 절절한 사연들을 담게 된다.
이 연재물은 지난 1년간 준비위원으로 수고해 주신 김무현, 나복찬, 이종진 준비위원님들의 헌신적인 활동에 기초를 두고 있기에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이다.
교포신문사의 금번 '재독동포사회 45년을 돌아본다'라는 연재물이 우리 재독한인사회의 온전한 45년의 역사를 담기 위해서는 독자분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많은 분들의 참여를 정중히 요청하는 바이다. -편집실
간호사 서독 취업을 이끈 두 사람의 공헌자들
2. 이종수박사
1966년 한국인 간호사의 대규모 파독이 있기 전, 일부 간호학생이 이종수의 주선으로 파독해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며 간호사 대규모 파독을 예비하고 있었다.
이종수박사는 간질환 전문박사로 1929년 전남 영암에서 빈농의 6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7년 대전사범학교를 좁업한 뒤 1958년 장학재단의 후원으로 독일에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유학 1년만인 1959년 간염에 걸려 간과의 인연을 쌓았다. 1962년 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하고 1964년 박사학위까지 받은 뒤 1975년엔 동양인 최초로 종신 교수직에 올랐다.
이 박사가 간호사 파독을 생각하게 된 것은 1959년말 독일 뒤셀도르프 병원에 간염으로 입원, 의사와 간호사 등 독일 의료진의 모습을 보고서부터다. 선진적인 의료기법과 최선을 다하는 태도에 대해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그는 한국농어촌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문제는 의료봉사 인력의 확보였다. 농어촌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하기 위해선 양질의 의료 인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위해 한국의 간호학생을 독일 병원으로 데려와 훈련시키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감리교 신자였던 이 박사는 뒤셀도르프대학 목사의 도움으로 프랑크푸르트 주재 미국감리교선교본부측과 접촉했다. 처음 반응은 냉담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의 감리교병원인 베티니언병원의 병원장을 만났다. 긍정적인 답변이었지만, 조건은 상당히 열악했다. 즉, 월급은 20마르크에 불과했으며, 여비도 한국감리교회측이 부담하고 심지어 독일 수녀복을 물려 입는다는 조건까지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박사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물꼬를 트기 위해서 한국감리교회를 통해 간호학생 2명을 독일로 데려왔다. 이종수 박사에 의한 첫 간호학생 파독이었다. 이때가 1960년의 일이다.
간호학생은 독일에서 보통 1년간 예비훈련생으로서 적응훈련을 한 뒤 3년간 병원실습과 견습생활을 한다. 야간 근무는 없고, 4년 과정을 마치면 간호사가 된다. 보통 예비훈련생 때에는 세면대와 침대시트 교체, 식사 준비와 설거지, 세탁물의 분류 배치, 오물 수거와 병실청소, 침구정리 등 잡일을 주로 한다.
1년간의 예비훈련생 과정이 끝나면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전염병동 등 5개 병동 돌아가며 한 학기에 한 병동씩 간호사 밑에서 견습했다. 주로 처방전 처리와 투약, 주사, 신생아 돌보기, 환자의 체온과 맥박, 혈압측정 등. 한국에서 온 간호학생 2명은 어린 나이에 언어문제와 향수 등을 극복하며 열심히 근무하고, 공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곧 좋은 평을 얻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인 간호원 파독시대의 개막을 예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종수 박사는 이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1963년부터 1964, 1965, 1967, 1968년 매년 20명씩, 100명의 간호학생 파독을 주선했다. 간호학생의 파독이 계속되면서 근무 여건도 차츰 좋아졌다. 기숙사에 보통 2명이 한 방을 사용했고, 침식과 세금을 빼고 100-300마르크 정도를 올라갔다. 하지만 한국농어촌 의료봉사인력을 배출하겠다는 이 박사의 구상은 차츰 어긋나기 시작했다. 일부는 언어장벽 극복 등 현지 적응에 실패했고, 현지생활에 적응한 상당수 간호학생들조차 간호학생보다는 봉급이 많은 간호보조원으로 전환해서 일했기 때문이다. 간호사와 간호조무사간 기본임금과 결혼수당, 자녀수당 등에서 큰 차이가 없어, 굳이 4년의 과정을 밟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이종수 박사는 간호학생보다 간호원 파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는 감리교선교회 등과 한국 보건사회부 등에 간호사 채용과 파독을 제의했다. 한국 정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이 박사는 1966년 여름 휴가를 이용해 독일인 에서씨와 함께 한국 보건사회부를 방문, 간호사 100명을 파독하기로 서로 합의하고 1966년 7월 주무기관인 해외개발공사의 선발로 독일에 진출했다. 이수길 박사에 의해 간호사 대규모 파독이 이뤄진 6개월 뒤다.
간호사, 간호보조원이 한국난민구호병원 건립찬조기금과 난민구제회본부 운영비로 각각 20마르크와 2.5마르크를 월급에서 공제하는 조건으로 이뤄졌는데, 이것은 나중에 국내외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사회문제로 부각되기도 했다. 이 박사는 이밖에도 150명의 간호조무사도 파독시키는 등 1968년 3월까지 간호학생, 간호사, 간호조무사 등 1200여명을 파독시켰다. 1965년까지 종교계를 중심으로 수녀 복장을 한 870명이 한국인 파독 간호요원의 전부였지만, 이수길 이종수 두 박사의 노력으로 1969년까지 간호사 2273명, 간호조무사 547명 등 모두 2820명으로 늘었다.
이렇듯 이수길박사와 이종수박사 두 민간인에 의하여 시작된 간호사들의 서독 취업 사업은 1969년부터 정부가 해외개발공사를 통해 개입하여 1977년까지 1만 371명의 간호사가 서독에 취업하게 되었다. 1973년 당시에는 서독 전체 병원의 12.6%에 해당하는 452개 병원에 6,124명의 간호사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첫댓글 독일에 한국간호원들이 어떻게 오게 되었는가하는 귀한 글이 있어 저의 카페에 글을 스크렙해갑니다. 만약 원하지않으시면 글을 즉시 내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