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시집-안상학 시집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안상학 시인은 1962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여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1987年 11月의 新川」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그대 무사한가』, 『안동소주』, 『오래된 엽서』, 『아배 생각』,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안상학 시선』,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이 있다. 이 외에도 동시집 『지구를 운전하는 엄마』, 평전 『권종대-통일걷이를 꿈꾼 농투성이』, 시화집 『시의 꽃말을 읽다』가 있다. 고산문학대상, 권정생문학상, 동시마중작품상, 5․18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 속 대표시 |안상학
바닥행 외 4편
어둠 같은 것 겨울 같은 것 말고 바닥을 달리 뭐라 할까요. 두 동강 난 동맥 같은 것, 16층과 결별하는 것 따위를 바닥이라 할까요. 살 땅을 찾아 나섰다가 죽어 땅에 오른 시리아 소년의 발바닥이 딛고 있는 허공을 바닥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 땅에서 저 땅으로 건너가는 컨테이너에 갇힌 발바닥에게는 사방 육방 바닥이 되는 그런 바닥 말고 진정한 바닥은 어디 있을까요. 바닥을 쳤다고, 오를 일만 남았다고 발을 굴렀을 때 허방처럼 빠져드는 그런 바닥은 대체 뭐라 이름 불러야 할까요. 아침이 오고 있다는, 봄이 오고 있다는 말 같지 않은 말의 타이밍은 어느 페이지에 끼워 넣어야 적절할까요. 동강난 동맥을 이어붙인다고 기도에서 호흡이 재생될까요. 16층 바닥과 결별하고 만난 바닥을 치면 날아오를 수 있을까요. 기어서라도 오를 수 있을까요. 아침도 봄도 아닌 시절에 나팔꽃은 시계방향으로 감아 올라가고, 박주가리는 반대방향으로 올라가며, 더덕은 왼쪽 오른쪽 자유자재 올라가는 풍경의 역방향, 코앞은 숨이 멎을 것만 같은 바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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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거처
당신은 인생길에서 돌아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까
나는 갈 수만 있다면 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다만
1978년 여름 한 달 살았던 불암산 아래 상계동 종점
가짜 보석 반지를 찍어내던 프레스가 있던 작은 공장
신개발 지구 허름한 사람들의 발걸음
먼저 자리 잡고 프레스를 밟던 불알친구
비만 오면 질척이던 골목 안 그 낮은 지붕 아래
시를 처음 끼적여 본 공책이 놓여 있던
내가 살아 본 이 세상 가장 먼 북녘 거처
돌아갈 수만 있다면 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그해 여름 안동역에서 청량리행 열차를 탄 열일곱 소년
행복과는 거리가 먼 러셀의 책 한 권
싸구려 야외전축 유행가 레코드판 몇 장
세 번째 아내를 둔 아버지가 살던 셋방을 벗어난 까까머리
전형처럼 후줄근하게 비는 내리고 청량리 앞 미주아파트
식모 살던 동생이 남몰래 끓여 준 라면 한 끼 훌쩍이던 식탁
누이동생이 그토록 다니고 싶어 한 학교를 자퇴한 소년
상계동 종점 창이 없는 그 집 열일곱 한 달
그 어느 하루로라도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지금은 지하철 4호선 종점 당고개역 솟은 그 너머
아배 편지 한 장 받아들고 눈물 찍으며 돌아섰던
이제는 의지가지없는 그곳
불알친구는 십 년 뒤 낙향하여 낙동강에 목숨을 흘려보냈고
편지 한 장으로 나를 불러내렸던 아배도 오래전 소식 없고
누이동생도 다른 하늘을 이고 산 지 오래
열일곱 소년만 꼬박꼬박 혼자서만 나이 먹어 가며
이 낡은 남녘에서
다 늦어 또다시 가출을 감행할 꿈을 꾸며
그 북녘을 떠올려 봅니다만, 진작부터 야외전축도 없고
난 정말 몰랐었네 최병걸 레코드판도 없어진 지 오랩니다만,
갈 수만 있다면 단 몇 시간만이라도
그동안 써 왔던 시들을 하나하나 지워 가며
내 삶의 가장 먼 그 북녘 거처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
당신은 인생길 어디 돌아가고 싶은 길목이 없습니까
있다면 남녘입니까 북녘입니까
북녘입니까 남녘입니까
미안한 일인지 어떤지 나는 아직 그 북녘입니다만,
당신, 당신들은 지금 어느 녘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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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식혜
일찍이 어매 없이 자란 나는 당연히 우리 집 식혜 맛을 알지 못해서 어쩌다 고것이 땡기는 겨울날이면 내 그리움은 구름재 너머 맏어매 집을 기웃거리곤 하는데, 그 어느 맵찬 설날 아침 차례를 지내러 큰집 가는 길에도 여느 차례 음식보다 먼저 떠오르곤 하던 식혜
차례 음식상 물리고 나면 한 보시기 담겨 나오던 고것, 살얼음 사각대는 맑고 발그레 싹싹한, 생강과 고춧가루와 엿지름을 한데 훌 버무려 걸러 짜낸 물에 뽀얀 찹쌀과 노리끼리한 차좁쌀로 쪄낸 밥알 사이사이 깍둑썰기를 한 무꾸 조각들이 서성이는, 그 위에 채를 친 밤과 땅콩 몇 낱 고명으로 올린, 고소, 시원, 달콤, 매콤, 얼콤한 그 맛은 대개 부뚜막 외진 곳이나 뒤란 축뚜막 위에서 얼거니 녹거니 하며 종래에는 새콤한 맛까지 드는 것으로 설날부터 보름까지 날매동 다른 맛의 깊이를 더해 갔는데, 세배 다니는 집집매동 맛도 생김새도 하나같이 달랐는데
세월은 턱없이 흘러 겨울을 건너는 중 어쩌다 낯선 타관을 떠돌거나, 고향에 있어도 쓸쓸하고 차가운 밤이면 문득 떠오르곤 하는데, 기중 생각나기로는 구름재 너머 맏어매 집 부뚜막이나 뒤란 축뚜막에 자리 잡은 것으로, 마음은 벌써 달큰한 항아리 곁을 어리대곤 하는데, 그래도 고것과 같이 떠오르는 손맛의 주인이 어매가 아니고 맏어매여서 다행한 일이라고 골백번 생각하며 그리움을 제우 달래나 보는 것인데, 고것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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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서 쓰는 편지
독수리가 살 수 있는 곳에 독수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나도 내가 살 수 있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자작나무가 자꾸만 자작나무다워지는 곳이 있었습니다
나도 내가 자꾸만 나다워지는 곳에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내 마음이 자꾸 좋아지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자꾸만 좋아지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자꾸만 당신다워지는 시간이 자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 당신을 나는 아무렇지도 아니하게 사랑하고
나도 자꾸만 나다워지는 시간이 자라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나를 당신이 아무렇지도 아니하게 사랑하는
내 마음이 자꾸 좋아지는 당신에게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도 자꾸만 마음이 좋아지는 나에게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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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 까치구멍집
내가 한 일은 다만
1948년 그 사내가 안동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
제주 도민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린 지휘관을 암살한,
국군이 국민에게 결코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던
대한민국 제1호 사형수 문상길 중위
고향이 어디인지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향년 스물셋 사내, 고향은 안동
내가 한 일은 다만 그 사내의 내력을 찾아낸 것
임하댐 수몰된 안동 마령리 이식골
남평 문씨 종갓집 막내아들, 그 사내가 살던 곳
그 사내가 떠난 곳,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곳
사내처럼 사라진 마을, 흉흉한 소문 떠도는
쉬쉬대며 살아온 일가붙이들 산기슭에 남은 곳
내가 한 일은 다만 그 사내의 사진 몇 장 찾은 것
소년처럼 해맑은 사내의 마지막 웃음
두 손 철사로 묶인 채 나무 기둥에 결박당한 몸
가슴에는 휘장 대신 표적, 흑백사진 붉은 피는
두 눈 가린 채 목이 꺾인 사내의 최후 진술;
내 비록 미군정 인간의 법정에서는 사형을 받고 사라지나
공평한 하늘나라 법정에 먼저 가서 기다릴 것이다
내가 한 일은 다만 그 사내가 살던 집을 찾아낸 것
당당하게 살아남은 그 사내의 흔적
300년 문화재 기와 까치구멍집 건재한 사내의 생가
수몰을 피해 남후면 검암리로 옮겨 앉은 남평 문씨 종가
그를 기다린 40년 고향을 뒤로하고
1988년 옮겨 앉은 낯선 땅 32년, 기다리고 기다린
72년 만에야 불귀 주인 소식 전해들은 까치구멍집
무자년 사내가 가고 72년 만에 내가 한 일은 다만 그의 흔적을 찾은 것일 뿐, 고작 대문간에 막걸리 한잔 올리고 그의 죽음을 전하는 일이었을 뿐, 그사이 하늘나라 법정에서 받아놓았을 그 사내의 판결문을 이 집 우체통에 전해주는 일은 그날 이후 남겨진 모든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하며 음복주를 마셨다. 경자년 경칩 무렵, 복수초가 까치구멍집 화단에 피어 있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