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다양한 견해 -
죽음을 상품으로 보는 사람들이 실재할까? 소설 ‘설계자들’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보험금을 타려고 남편을 살해하는 아내의 얼굴을 스스럼없이 tv를 통해 보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 개인적인 살인부터 국가 전복을 꿈꾸는 듯한 음모론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이 ‘푸주’로 불리는 곳이다. 우리네 소시민들이 반상회에서 자녀교육이나 지역민원에 대해 토론하듯이 암살자들은 ‘푸주’에서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좋은 소설은 설계를 잘 한 소설이다. 그런 면에서 ‘설계자들’은 좋은 소설이다. 전반부는 킬러 래생의 업무인 암살 과정을 디테일하게 보여주고 이어서 살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생리와 어두운 사회구조를 넓게 묘사해 간다. 후반부에 접어 들면서 암살자에게 명령을 내리는 설계자와 도우미 역할을 하는 트래커, 정보를 물어다 주는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독자를 몰입하게 만든다. 이러한 과정을 일관하는 주인공 래생의 심리 묘사가 건조하면서도 깊이있게 펼쳐져 작가의 역량을 신뢰하게 된다.
돈 꼴레오네가 토마토 밭에서 물을 주며 손자와 놀이를 하다 쓰러져 사망하는 장면은 말론 브란도의 연기로 더욱 '갓 파더'의 최후답게 그려진다. '설계자들'에서 작가가 초입에 그려놓은 추레한 노인이 지닌 거대한 산의 위엄을 읽으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대부'의 한토막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특히 노인의 얼굴을 '슬프거나 분노했을 때도 웃는 형상을 하고 있는 하회탈 같다'고 서술했으니 영화 ‘대부’에서 말론 브란도의 캐릭터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없다. 주인공 래생이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인간이라는 종은 창세기에서부터 서로를 끊임없이 죽이면서 살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말하는 살인청부업의 대부 너구리 영감의 가르침을 받으며 래생은 킬러의 길을 15년 째 성실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레옹에게 마틸다가 있듯이 래생에게 미토가 나타난다. 설계자 미토의 등장부터가 코믹하다. 래생의 변기에 폭탄을 설치해서 자신을 찾아오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유일한 친구인 그림자 정안과 함께 변기 폭탄을 추적하여 미토에게 다가가는 과정에서 너구리의 라이벌 한자에 의해 정안이 살해 당하게 된다. 이미 아버지같이 따르던 훈련관 아저씨와 추를 죽인 한자를 래생은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다. 그들의 죽음에 이어 다음은 자신의 차례가 될거라는 위기감까지 느낀 래생은 먼저 설계자 한자를 치기로 결심한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죽음을 맞게 되어있다. 소설 ‘설계자들’은 누군가의 죽음을 여러 가지 이유로 설계하고 집행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수많은 죽음들을 뒤에서 계획하는 설계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 대표적인 캐릭터로 미토가 그려진다. 불행한 어린시절 속에서도 노력과 뛰어난 지능으로 의사가 된 미토가 처음엔 부모의 원한을 갚기위해 살인세계에 뛰어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상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괴물이 된 자신을 발견한다. 미토는 자신이 속한 살인청부업의 두 거대세력인 ‘도서관’과 ‘한자’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고독한 전쟁을 시작한다. 여기에 래생이 끼어들면서 피가 난무하는 과정을 거치고 래생은 허물어진 도서관을 떠나 한자와 함께 죽음을 맞는 것이다.
나는 죽음을 생각할 때 마다 각 사람의 죽음의 무게가 얼마나 다를까? 라는 기본적인 질문에 골똘해지곤 한다. 이 소설에서도 낙엽지듯 쉽게 죽어가는 사람들과 큰 비중을 가지고 드라마틱하게 죽는 사람들이 있다. 스토리없이 떨어지는 낙엽이 있을까? 모든사람은 누군가의 아들,딸이고 이웃일 텐데...
온갖 못된 짓을 서슴치않아서 별명마져 '오케이'라던 김사장이 살해당한 날 화장한 시신에서 어이없게도 열세개나 되는 사리가 나온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땡추 혜초스님이 이 사리들을 거금으로 사겠다고 제안하는 것인데 그 이유가 자신이 죽기 직전에 사리를 삼켜서 자신의 다비식에서 사리가 추출되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김언수 작가의 갈 데 까지 간 인간과 종교에 대한 불경스러운 상상력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렇듯 이차원의 캔버스(인간에게는 관심이 없는 건조한 세상)에 삼차원의 두터운 유화를 그려내듯 굴곡진 인생군들을 덧칠해가는 작가의 실력이 볼만하다.
대부에서 레옹으로 다시 쟈칼로 이어지는 이야기
"현대에서 문맹은 글을 못읽는 게 아니라 이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헝가리 출신 사진작가 라슬로 모홀리 나지는 말했다. '설계자들' 은 영화의 시나리오 스타일로 구성되어있다. 독자는 시종일관 상상 속에서 주연과 조연을 섭외하고 세트장을 인테리어 해나간다. 글을 읽는 게 아니라 동적인 이미지를 구성해나가는 것이다.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바탕으로 인생의 깊이와 사랑의 온기를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것은 많은 작가들의 욕심일 것이다. 소설'설계자들'은 이런 욕심을 꽤 많이 충족시킨 성공작이다.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책들을 폐기처분하는 너구리 영감
친철한 말 한마디에 총을 더하면 더 우호적인 대화를 할 수 있다. 알카포네
특이한 평범함. 그림자로 불리는 정안 이라는 인물은 누구보다도 평범할 수 있기 위해 꾸준히 공부한다. 모든 사람은 타인에게 기억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안은 기억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설계자들'을 읽는 내내 어떤 영화가 머리에서 맴돌더니 너구리영감의 라이벌 한자와 래생의 만남에서 비로소 그 영화를 기억해냈다. 말쑥한 샐러리맨 차림으로 회사에 출근해서 하는 일이 살인청부업인 지형도 과장이 어느날 평범한 일상을 꿈꾸며 모든 암살자들의 표적이 되는 영화. 소지섭 주연의 '회사원'이란 영화다. 강남대로 한복판에 보안회사 사무실을 운영하며 살인을 주업무로 하는 한자의 모습에서 소지섭의 킬러본색이 보이는 것이다. 영화 '회사원'이 2012년에 개봉되었고 소설'설계자들'이 2010년에 초판을 인쇄했으니 소설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셈이다.
타인을 죽여서 목숨을 이어가는 자신의 삶을 하찮게 생각하던 래생이 자신도 한 인간으로서 존재의미를 찾게 되는 것은~
이야기가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이 점점 더 강해진다. 박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