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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01 교부와 성인 이야기
사순시기가 되면 교우들 중에는 금연과 금주를 결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교우들도 이 시기동안 제법 굳건하게 자신의 결심을 잘 지킵니다. 이 결연한 수행이 사순시기의 단식과 함께 의미 있는 절제행위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단식이란 음식을 절제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건강을 이유로 단식하거나 외적 용모 때문에 단식하는 경우가 있고, 투쟁에 혹은 수행 자체에 목표를 두고 단식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금연과 금주도 육체적인 절제에 그리고 더불어 건강을 회복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맑아지는 열매를 맺는 것, 마음의 순결함을 진정한 목표로 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사순시기의 강론하면, 레오 대 교황(440-461)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느님의 지배를 받는 영혼은 육체의 주인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 만일 우리가 단식하면서 우리 생활이 완전한 절제에서 오는 순결함과는 동떨어져 있다면, 불신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마땅합니다. … 단식의 핵심은 음식의 절제에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일 마음이 불의에서 되돌아서지 않고 혀가 악담을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육체에 음식을 줄이더라도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합니다.” 레오 대 교황은 또 이렇게 강론합니다. “단식의 경기장에서 음식만 절제하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으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육체에 음식을 줄이면 영혼은 강해집니다. 사람이 외적으로 약간 고통을 당하겠지만 내적으로는 영양을 섭취하게 됩니다. 육체에게는 육적 풍만이 줄어들지만 정신은 영적 즐거움으로 강인해질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교부들과 성인들은 인간의 영혼과 육신이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려고 무던히도 애썼습니다. 그들은 몸의 절제 자체에 목표를 두지 않고 절제를 통해 가고자 하는 더 높은 영적 목표를 늘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교부 요한 카시아노(365?-435)에 따르면, 농부는 풍요로운 수확을 통해 안정된 생활을 진정한 목표로 삼기 때문에 땡볕에서도 쟁기질하며 땅을 고르는 수고를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단식을 비롯하여 금연과 금주 등의 육신적 절제가 향하는 진정한 목표에 대한 생각, 영적 열망이 우리 마음 안에 생생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육신적 절제와 더불어 우리의 영적인 노력이 함께 하는 사순을 지내시길 바랍니다. [2018년 2월 25일 사순 제2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02 교부와 성인 이야기
1) 사막 교부들
성령의 지시에 따라 예수님께서 광야로 들어서셨듯이 우리도 재의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얹고 사순 시기의 광야로 들어섰습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화려함과 풍족함을 피하고 광야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광야’라는 말은 ‘사막’과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사막에서 생활하라는 소명이 복음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3세기경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분의 가르침을 온전히 실현하기 위하여 이집트 사막으로 간 수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사부 내지 스승으로서 명성을 떨치던 수도자들을 일컬어 ‘사막 교부들’이라고 합니다.
사막 교부들의 과거는 무척 다양하고 흥미롭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이집트 농부 출신이었지만 그들 가운데는 상인과 대장장이, 심지어 노예 출신도 있었습니다. 악명 높은 강도들이 회개하여 유명한 수도승이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강도들 사이에서 사악함과 잔인함으로 악명을 떨쳤던 모세라는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4명의 강도가 모세의 암자를 습격합니다. 모세는 그들을 꽁꽁 묶어 교회로 데리고 갔는데, 모세는 이 강도들의 운명을 사제들이 결정하게 합니다. 강도들은 자기들이 약탈하려 했던 인물이 그 악명 높은 모세였다는 사실을 알고서 회개하고 수도승이 되었다고 합니다. 교부들의 과거가 어떠했든 그들은 모두 하느님만을 위하여, 하느님과 함께 살려는 의지로 사막으로 갔습니다.
2)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
초기 이집트 사막 교부들의 지혜들을 모아 담은 문헌집을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이라 합니다. 이것은 분명 책인데 저자가 없습니다. 저자를 굳이 말한다면 200년의 시간에 걸쳐 등장한 250명의 수도승들이 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술 연대도 측정하기 어렵고 그저 사막에서 어느 시점부터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어느 경우는 몇몇 수도승간의 대화이고, 다른 경우는 ‘압바’라는 칭호가 붙는 스승 둘이 형제애를 나누는 내용입니다. 아울러 제자와 그의 스승과의 개인적 면담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막 교부들의 일화를 처음 접하게 되면, 불교의 선방(禪房)에서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는 인상을 갖게 됩니다. 다양한 과거, 예측 불가능한 언행, 단순성, 본질과 핵심을 꿰뚫는 혜안, 분별력 등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일찍이 토마스 머튼은 사막 교부들과 중국 선사들의 유사성에 주목한 바 있습니다. 우리도 이 금언집을 구하여 읽음으로써 광야 한 가운데 자리 잡음이 어떨까 싶습니다. [2018년 3월 4일 사순 제3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03 교부와 성인 이야기
무겁거나 가볍거나
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나오면 몸과 마음 모두가 가벼워졌다는 것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혹은 마음을 짓누르던 무언가를 벗어버리게 되면 몸과 마음 모두가 가벼워집니다. 이는 무겁거나 가볍거나 하는 것이 단순히 물질의 무게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또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특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특성에 관해서 성 요한 카시아노(356년경-435년)는 자신의 저서 『담화집』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영혼의 특성은 매우 가벼운 깃털이나 날개깃에 비유할 수 있다. 만약 그 깃털이 외부로 온 어떤 액체가 묻어서 방해받지 않는 한, 본래의 가벼움 때문에 아주 미약한 바람에도 자연스럽게 하늘 높은 곳으로 날아간다. 그러나 깃털에 어떤 액체가 뿌려지고 쏟아진다면 본래의 가벼움을 잃어버려 하늘 위로 올라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깃털이 머금은 액체 때문에 낮은 땅으로 주저앉게 되고 말 것이다.”
영혼이 무거워지는 것은 액체에 젖어들 때입니다. 요한 카시아노는 이 액체가 무엇인지를 바로 설명합니다. “만일 우리 마음을 공격하는 세상의 악들과 세속을 향한 애착들로 인하여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방탕이라는 해로운 액체 때문에 마음이 손상을 입지 않는다면, 우리 마음은 순수함이라는 타고난 선물로 인해 가벼워질 것이고 영적 묵상이라는 미미한 바람에도 하늘로 높게 치솟는다. 즉 우리 마음은 낮은 땅의 장소를 뒤로하고, 볼 수 없는 천상적인 곳으로 옮아가게 된다.”
우리가 본연의 가벼움으로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그 해로운 액체란 바로 우리의 영혼을 붙들고 있는 악덕들과 세속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애착 그리고 방탕함입니다. 요한 카시아노는 주님의 권고로 루카복음 21장 34절을 제시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이 구절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은 영혼의 지방층을 형성하고 그에 따르는 과중함이 우리의 영혼을 짓누르고 있음을 말합니다. 지방제거 다이어트는 몸만이 아니라 영혼에게도 해당됨을 알 수 있습니다. [2018년 3월 11일 사순 제4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04 교부와 성인 이야기
참된 눈물과 거짓 눈물
성 암브로시오는 죄를 씻는 눈물의 힘에 대하여 강조하였습니다. 죄를 고백하는 데는 참된 참회의 표시로 눈물이 함께 한다고 그의 저서 『과부』에서 말합니다. “영혼이 슬퍼할 때 눈물이 함께 나옵니다. 그러나 눈물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고, 고생을 가볍게 만들어 주고, 고통을 없애 주며, 부끄러움을 가시게 하여 새 힘이 솟아나도록 도와줍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을 위해 늘 기도하던 어머니 성녀 모니카를 회고하면서, 한 주교님이 어머니에게 ‘아들을 위해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리셨으니, 그 아들은 절대로 잃어버린 아들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고백록』에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눈물이 갖는 효과는 큽니다.
눈물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눈물을 예로 들며 성 암브로시오가 『루카복음 주해서』에서 전합니다. “베드로는 슬피 울었습니다. 그는 많이 울어서 그 눈물로 자신의 잘못을 씻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도 용서를 받으려면 눈물로 당신의 죄를 씻으십시오!”
또한 눈물은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합니다. 다윗왕도 범죄한 후 눈물로 죄의 용서를 청함으로써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백성들을 멸망시키려던 뜻을 취소하셨습니다. 이처럼 암브로시오는 여러 가지 예를 들면서 눈물의 막강한 효과를 『통회』에서 강조합니다. “이만큼 참회의 힘은 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분명히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그런데 인위적으로 혹은 외적으로만 흘리는 눈물에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그런 경우 앞서 말한 눈물의 효과를 전혀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 요한 카시아노는 『담화집』에서 말합니다. “비록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 그러한 눈물을 얻을지라도, 그들은 결코 자연스러운 눈물의 풍요로움에 도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시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정신을 아래로 끌어 내리고, 인간적인 관심에 빠지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아가 메마르고 강요된 눈물은 병을 키우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악어는 음식을 먹을 때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자신의 먹이가 된 동물의 죽음을 슬퍼해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눈물샘의 신경과, 입을 움직이는 신경이 같기 때문입니다. 먹이를 삼키기 좋게 수분을 보충시켜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악어의 눈물은 거짓 참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악어의 눈물은 생물학적 반사작용으로서의 눈물이기에 인간의 거짓 눈물과는 오히려 구별된다 하겠습니다. 성 요한 카시아노의 말대로 거짓 눈물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기는커녕 결국 우리를 병들게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2018년 3월 18일 사순 제5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05 교부와 성인 이야기
성인 명가(名家)
신학교 교수 신부님께서 강의 중에 우리 한국 천주교회에는 순교성인은 많지만, 신앙을 평생의 삶으로 증거한 수덕성인이 아직까지는 없으니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또렷합니다.
교황 요한 23세는 어린 시절부터 영적 일기인 『영혼의 일기』를 평생에 걸쳐 썼습니다. 이 일기에서 그는 수시로 성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을 표현했습니다. 자신의 사제품 25주년을 앞둔 1928년 12월 24일에 그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번 영신수련 중에 나는 실로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를 생생하게 몇 번이나 느꼈다. 주님께서는 ‘만약 내가 성인이 되기를 바란다면 필요한 시간과 은총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간절함을 담아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님, 저는 모든 은총을 당신께 돌리며, 지금부터라도 성인이 되도록 모든 제 노력을 다하겠나이다. 하늘과 땅 그 모든 곳에서 당신께 약속드리나이다. 자비로우신 성모 마리아님 그리고 사랑하는 제 보호자 성 요셉이여, 두 분을 예수님의 옥좌 앞에서 행한 오늘 제 약속의 보증인으로 삼으려 하오니, 저를 도와주시어 충실한 생활로 이끌어 주소서.”
동방 교회 4대 교부 중 첫째로 손꼽히는 성 대 바실리오(328경~379)는 터키에 있는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리아에서 부유하고 신심 깊은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성인의 가족은 교회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가문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성인 명가입니다. 아버지 바실리우스와 어머니 엠멜리아도 성인이었고, 할아버지는 순교했으며, 할머니 마크리나도 신앙 때문에 추방된 적이 있는 성녀였으며, 대 바실리오의 스승이기도 했던 누나 마크리나도 성녀이고, 두 동생인 니사의 주교 그레고리오와 세바스테의 주교 베드로도 성인입니다. 대 바실리오의 절친인 나지안주스의 주교 그레고리오도 교부이자 성인입니다. 대 바실리오의 동생 니사의 그레고리오와 함께 이들 셋은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라 불립니다.
한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 집안도 성인 명가입니다. 어머니 논나, 동생 카이사리오, 여동생 고르고니아, 이들 모두가 성인입니다.
선대에 성인 한 분만 계셔도 큰 영광으로 여기는 우리의 시선에서 보면 놀라운 일입니다. 어느 후배 사제의 영명 축일에 선배 사제가 이런 글귀를 선물로 보낸 것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인증하는 성인 사제되시오!”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이 우리 안에 자리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2018년 3월 25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06 교부와 성인 이야기
바실리아드
플래너건 신부(Flanagan,1886~1948)는 1917년 집 없는 아이들을 위한 가정을 만들어 그들과 함께 생활한 것을 그 시작으로 ‘보이스 타운’(Boys town)을 설립하였습니다. 작년에는 미국의 연방조폐국이 ‘보이스 타운’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주화도 발행하였습니다. 플래너건 신부의 지도하에 ‘보이스 타운’은 점점 발전하여 큰 공동체가 되었는데, 학교, 교회, 우체국, 체육관 등 생활에 필요한 시설들을 갖추고 자체 ‘소년 시장’까지 선출하는 마을이 되었습니다. 1938년에는 이 이야기가 영화화되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스펜서 트레이시는 이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였습니다. 한국전쟁 후 전쟁고아들의 문제로 우리나라를 방문하기도 한 플래너건 신부는 시복을 앞두고 있습니다.
‘보이스 타운’과 같은 사회복지 시설은 교부시대인 고대교회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대 바실리오는 사회복지는 물론 병원의 역사에서 선구자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시설인 ‘바실리아드’를 주교가 된 후 카이사리아 외곽에 설립합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바실리아드’는 성인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368년 대 바실리오가 사제일 때 카파도키아에는 극심한 기근이 들게 됩니다. 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급식소를 열었습니다. 기록에 보면 369년에 대 바실리오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스프와 고기를 내놓았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당시의 기근은 후에 급식소로 만족하지 않고 시설을 더 확장해야겠다는 동기를 부여했을 것입니다. 그의 의지가 실현되어 설립된 ‘바실리아드’에서 대 바실리오 주교는 허리에 앞치마를 두른 채 가난한 이들을 접대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이 보호하는 이들의 영혼을 돌보았습니다.
‘바실리아드’는 대 바실리오가 그리스도교 복음 정신으로 사회적 이상을 구체화시켜 만들어 낸 ‘사랑의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복합적인 자선 단체로서, 가난한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이자 병원, 호스피스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거리를 무상으로 나누어주는 곳이었습니다.
대 바실리오의 절친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는 ‘바실리아드’를 이집트의 피라미드 등과 같은 불가사이한 일들 중 하나로 비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전합니다.
“바실리오의 관심사는 오직 병자들을 치료하고 상처를 낫게 해주고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나병환자들을 깨끗이 씻어 주었습니다.” [2018년 4월 1일 주님 부활 대축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07 교부와 성인 이야기
부자의 심보
“저렇게 돈 많은 사람은 평생 자신의 돈을 써도 남을 텐데, 왜 남의 돈을 탐하고 부정축재하고 그랬을까?” 사람들이 그 답에 대해 알 듯 모를 듯해 합니다. 나라면 재산이 어느 정도가 되어야 모아둔 재산을 잘 쓰는 일에 집중할 수 있을까?
언젠가 한 사람이 이제는 돈을 여생을 감당할 만큼 충분히 벌었다고 생각하는데 여전히 돈 버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가 그 돈으로 좋은 일에 쓰면서 여유롭게 살면 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는 늘 자신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까 하는 불안감 속에 있고, 그래서 계속 재산증식을 해야 마음이 놓인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재산이 늘지 않고 멈춰 있어도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자신 주변의 부자들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도 알려 주었습니다.
대 바실리오(328경~379)는 이런 부자들에게 『부자에 대한 강해』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대는 자신이 가난하다고 주장합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많은 것이 부족한 사람이고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 때문에 그대 역시 많은 것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대는 그대가 받은 십 탈렌트에 부지런히 십 탈렌트를 더 보탰고, 이십 탈렌트에 이십 탈렌트를 더 보탰습니다. 그러나 이런 끝없는 축적 때문에 그대의 욕망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불타올랐습니다. 포도주 한 잔이 술꾼에게는 더 많이 마시게 만드는 기회가 되는 것처럼, 새로운 부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가졌음에도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계속되는 축적이 그들의 병을 더 깊어지게 만듭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구가 결국에는 그들을 해칩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그들은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해 기뻐할 줄 모르고, 아직 갖지 못한 것 때문에 슬퍼하며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발을 내디디며 꼭대기에 오를 때까지 쉬지 않고 한 계단 한 계단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이 사람들도 정상에 오를 때까지 정상을 향한 경주를 멈추지 않다가, 거기 올라가면 추락하여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맙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349/50-407)는 『마태오 복음 강해』에서 돈에 대한 애착의 정도가 가난한 자보다 부자가 훨씬 크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부자들의 경우 돈에 대한 애착이 폭군처럼 지배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재산의 증식은 우리 욕구에 더 큰불을 일으켜 부족함을 훨씬 더 크게 느끼게 되고 그 결과로 우리가 그런 욕구의 무게에 짓눌려 살다가 추락하여 곤두박질치게 됨을 요한 크리소스토모도 경고하고 있습니다. [2018년 4월 8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08 교부와 성인 이야기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1
우리가 육교를 건너가다 보면 추위와 더위에도 머리를 땅에 숙이고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 도움을 청하는 이를 간혹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는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그를 다른 이가 그 자리에 데려다 놓았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의 도움이 배후의 누군가에 이용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에게 도움주기를 망설입니다. 도와주는 경우에도 그냥 지나치는 경우에도 마음의 찜찜함이 남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누군가를 돕기에 앞서 생각이 많아지는 이에게 이런 상황에 마주하게 될 때 해답을 주는 교부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 오늘은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345/6경-399), 다음번에는 요한 크리소스토모(349/50-407)의 글을 살펴봅니다.
교부 에바그리우스는 창세기부터 요한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악한 성향과 생각들을 거슬러 싸우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련의 성경 본문들을 인용하는 작품 『안티레티코스』를 썼습니다. 이 작품에는 각각의 악한 생각에 대응하여 반박하는 의미를 가진 성경인용구절 487개를 담고 있습니다. 참고로 ‘안티레티코스’는 ‘반박’ 내지 ‘논박’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안티레티코스』에서는 그 전개방식에 따라, 먼저 우리가 맞서야 할 악한 생각이 제시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물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양식과 의복을 궁핍한 이들과 나누지 않으려는 생각에 맞서”
그리고는 이 생각에 대한 부연설명과 함께 반박하는 성경구절을 제시합니다.
“그 생각은 틀림없이 우리 앞에 있는 사람보다 더 약하고 궁핍한 다른 사람이 있는데, 수고하지 않고 먹고 입으려 하는 게으른 이 사람보다, 그에게 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우리에게 제안한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안셀름 그륀 신부는 자신의 저서 『내 영혼의 치유제』에서 『안티레티코스』의 내용을 우리에게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합니다.
“물론 지하철 역의 동냥꾼이 ‘거지 조직’의 일원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등쳐먹으려 하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러나 에바그리우스는 이런 생각에 반대합니다. 다만, 가진 것을 나누어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만 상기시킬 뿐입니다. 그 사람이 과연 도움 받을 가치가 있는지, 받은 도움을 제대로 활용하는지, 그런 건 에바그리우스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2018년 4월 15일 부활 제3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
STORY 08 교부와 성인 이야기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2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388년 혹은 389년경 차후에 『부자와 라자로』라는 책으로 엮어진 일련의 강론을 하였습니다. 이 강론들에서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 그는 자신이 선호하였던 주제들을 다룰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 두 번째 강론은 부자와 라자로, 두 사람의 죽음 이후(루카 16,22-24 참조)를 다루고 있습니다. 죽음은 누가 진정 부자이고, 누가 진정 가난한 자인지를 밝혀냅니다. 이 강론에서 그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향해 마땅히 가져야 할 사고와 행동에 대해 담백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에 따르면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사건(창세 18,1-15 참조)에서 아브라함의 지혜로운 처신을 본보기로 세웁니다.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바와는 달리 아브라함은 길손 셋이 누구인지, 출신지가 어디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지나는 이들 모두를 맞이하여 환대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바로 이 사실에 주목하며 말합니다.
“가난한 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자신의 가난함, 즉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에게서 그 이상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그 가난한 이가 정말 사악한 자일지라도, 그에게 음식이 필요하다면 여러분은 그의 배고픔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 자비로운 이는 곤궁에 처한 이들에게 항구와 같습니다. 항구는 파선하여 배에서 탈출한 사람들 모두를, 악한 자인지 선한 자인지 상관하지 않고 받아들여 위험에서 구해줍니다. 항구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위험에 빠진 이들을 피신처로 맞이합니다. 여러분 또한 가난으로 지상에서 파선의 고통을 겪는 이를 보면, 그를 판단하거나 그에게서 설명을 요구하지 말고, 그를 위험에서 구해 주십시오. 여러분은 왜 쓸데없이 스스로 골머리를 앓습니까? 하느님께서는 그런 온갖 종류의 불안과 노고로부터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가난한 이를 도울 때, 필요 이상으로 세세한 것에 궁금해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 그 자체로 우리가 도움 주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도움 받는 자가 어떤 품성과 자질을 지닌 자인지를 놓고 문제 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벗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그의 성덕 때문이 아니라 그의 어려운 처지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는 주님의 큰 자비를 입게 됩니다. 우리 자신도 합당한 자격이 없지만 그분의 호의를 누립니다. 우리가 동료 종들에게 해명을 요구한다면, 우리 자신도 위로부터 호의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2018년 4월 22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신기배 사도요한 신부(신곡1동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