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박사는 황해도 평산의 군량굴이라는 곳에서 양녕대군의 후예인 이경선 공의 3남매 중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세살 때 서울로 이사해 와 남대문 밖 염동과 동대문 밖 홍수동, 즉 지금의 창신동에서 자랐다. 李박사의 두 손위 누님 중 큰 누님은 연백의 우씨 가문에, 작은 누님은 심씨 가문에 출가했다. 나는 우씨 가문에 출가한 李박사 큰 누님의 손자가 된다.
李박사의 고향이 군량굴이라 우리 동네에서는 내 할머니를 군량굴댁이라고 불렀다. 李대통령 친척이라곤 큰 누님으로부터 내 조부인 우종구 씨와 작은 누님에서 심종철 씨의 두 생질과 그 가족이 있을 뿐이다.
나는 어려서 연백의 고향에서 할아버님으로 부터 "할머니의 동생 되는 할아버지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가끔 들었다. 그리고 30년대 전반기까지만 해도 1년에 서너번씩 편지와 돈이 오곤 했다. 봉투에 영어가 기재돼 번역하러 영어 아는 사람을 찾아가곤 하던 기억이 난다.
대기 할머님 생신과 추석·섣달 그믐께 돈이 왔던 기억이다.
미국에 계신 할아버지로부터 편지가 오는 날이면 순사들이 달려와 편지 내용을 알아가곤 했었다.
할아버지와 편지 왕래가 있던 무렵 키가 작고 얼굴 왼편에 푸른 반점이 있는 부인이 우리집에 가끔 들었다. 李박사의 부인이던 박승선 할머니다.
박할머니는 우리 집에 와서는 내 부친에게 "외삼촌한테서 편지왔느냐"고 李박사 소식을 캐물었다.
李박사는 1912년 두번째 미국으로 떠날 때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박할머니와는 "내가 언제 돌아올 기약이 없으니 헤어지자"고 해서 사실상 이혼을 한 사이이기 때문에 일체 연락이 없었던 것이다.
박할머니는 李박사가 미국으로 떠난 후 기독교인이 되어 신학 공부를 했다. 이미 그때는 해주 · 원산 · 진남포 · 평양 등지에서 전도사를 하고 있었다. 이 할머니는 내 아버님한테 "혼자 살 수가 없어 아들을 하나 정해서 의지하고 지낸다"는 얘기를 했다. 양자를 한 아들은 목수라고 했다.
박부인과의 사이에서 李박사는 태산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李박사가 망명한 후 하와이에 자리를 잡았으니 선교사편에 보내라고 해 배를 타고 하와이에 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홍역을 앓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李박사는 1912년에 미국으로 가면서 내 아버님을 미국으로 데려 가려고 하인 편에 말을 보낸 일이 있었다고 한다.
李박사의 매형인 내 조부께 李박사는 "종구를 미국에 데려가 공부도 시키고 독립운동을 같이 할테니 머리를 깍아 서울로 보내달라"는 편지를 했다.
이 편지를 본 조부께서는 "아니 저나 개명했다고 머리를 깍았으면 됐지, 남의 종손까지 머리를 깍는 상놈을 만들겠단 말이냐"고 노발대발하며 거절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李박사는 집에서 어릴 때 정혼한대로 박승선 부인과 결혼은 했지만 별로 두터운 정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구한말에 7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미국에 건너가 박사 학위를 따고 1910년에 돌아오니 박부인이 그동안 1천 2백 2평짜리 앵두밭을 절에 시주해 李박사로부터 큰 노여움을 받았다. 우리가 알기로는 이 일이 박부인 소박을 받게 된 펴면적 동기다.
할아버니는 이미 배재학당에 다닐 때부터 기독려인이었기 때문에 절에 앵두밭을 시주한 것에 특히 격노했던 것 같다. 당시 李씨 가문의 재산은 창신동에 3백 40평 대지의 집과 1천 2백 71평의 밭, 69평짜리 땅과 그 앵두밭이었다.
내가 李박사를 처음 뵌 것은 환국 직후 조선호텔에 계실 때다. 나는 그때 조선은행에 근무하고 있었다. 李박사가 환국했다는 벽보를 보고 다음 날 가족사진과 李박사가 우리 집에 보낸 편지를 갖고 조선호텔에 갔다. 정문에서 미군 MP가 제지해 편지를 보였더니 봉투에 쓰인 영어를 읽어 보고 들어가도 좋다고 했다. 조선호텔에 들어가 윤치영씨를 만났다.
"李박사를 뵈러 왔습니다."
"당신 누구야."
"손자 되는 사람입니다."
"李박사 친척이 어디 있소."
그래서 사진과 편지를 보잉고 사정을 했더니 그것을 李박사에게 보인 뒤 들어 오라고 했다. 들어가니 백발 노인이 혼자 있어 큰절을 했다.
"자네 종구인가. 제하인가"
"예, 제하입니다. 할아버님 소식은 전부터 듣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와 있었나."
"얼마 전부터 서울에 와 있었습니다."
"자주 찾아와, 오늘은 바빠."
그후 자주 李박사에게 출입을 했으나 뵙기가 쉽지 않았다.
박승선 할머니는 해방 때 연백에 있다가 李박사 환국 소식을 들었다. 그곳에서 정미소 하던 송사장이란 분이 의복과 자동차를 주선해 줘 돈암장으로 李박사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비서들이 따돌렸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가 할아버지를 뵐 기회가 있어 "박씨 할머니가 오셨다가 못만나 뵈었다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李박사는 "만나 봤으면 좋을 걸 그랬지"하고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얘기했지만 박할머니의 행당도 모르겠고, 프란체스카 부인 문제도 있어 면접을 적극적으로 주선하지 못했다.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