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논산간 국도 1호선 중 호남선 개태사역과 양촌 사거리를 지나면, 도로 왼편에 돈암서원(사적 제383호)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이 나온다.
돈암서원은 조선 예학의 태두인 사계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죽은 지 3년 뒤인 1634년(인조 12년) 제자들이 사계가 살던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사우를 짓고 위패를 모신 것이 시초이고, 25년 후인 효종 10년(1659) 돈암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은데 이어서 1년 뒤인 현종 1년(1660) 재차 사액을 받은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돈암(遯巖)이란 이름은 당시 서원 근처의 ‘돈암’이라는 큰 바위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하는데, 현종은 ‘이미 효종 때 선액 되었기에 중첩해서 사액하는 것은 부당하지만, 김장생을 경모하는 여러 선비들의 요청을 가상히 여겨서 특별히 허락한다’(書院謄録 庚子(현종1), 2월19일 기사)고 한 점에서 사계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서원인 향현사(鄕賢祠)와 구별되는 사액서원은 임금이 사당이나 서원의 이름을 지어서 판자에 새긴 현판을 내려주는 사액을 할 때 많은 책과 노비며 전답을 함께 하사하는 것이 보통인데, 유명한 선현을 모신 서원은 지방관청보다 더 위력을 발휘했다.
정문에서 바라본 돈암서원, 돈암서원 장경각과 장경각 내부. |
창건 당시에는 김장생을 주향으로 했으나, 효종 9년(1658) 김장생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을 추배하고, 숙종 14년(1688)에 동춘당 송준길을, 숙종21년(1695)에는 우암 송시열을 각각 추배했는데, 한 가문에서 문묘에 2인이 모셔진 것은 김장생과 김집 부자, 한산이씨 이곡과 이색부자, 송시열·송준길 등 은진 송씨 3가문뿐이라고 한다.
1871년(고종 8년) 대원군이 전국의 600개가 넘는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는 일대개혁 때에도 존치되었던 돈암서원은 고종 18년(1880년) 서원이 있던 숲말의 지대가 너무 낮아서 뜰 앞까지 침수되자 남쪽으로 약1.5㎞쯤 떨어진 지금의 장소로 옮겨지었다.
하지만, 이때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사우와 양성당만 이전한 뒤, 1972년 대강당인 응도당(보물 제1569호) 장판각, 정회당, 좌앙루 등 옛 이름을 딴 건물들도 이축했지만, 당초의 서원 배치형태를 복원하지 못했다.
홍살문의 위치며 홍살문 바로 옆에 하마비가 세워진 것도 약간은 격식에 맞지 않은데, 경내에 정면으로 김장생이 생전에 학문을 연구하던 강당인 양성당을 중심으로 양쪽에 동서재가 있지만, 서원을 이축하기 전까지 서원의 중심이던 응도당은 현재 사당과 직각을 이룬 동향 구조로서 배치가 알맞지 않다.
응도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에 가운데 3칸에는 마루를 깔고, 뒤쪽은 쪽마루로 만들었고, 양성당 앞에 돈암서원의 역사와 구조, 업적 등을 기록한 서원원정비(문화재자료 제366호)를 세운 것도 그렇다.
양성당 뒤편에는 학자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숭현사가 있으나, 현재 보수공사중이어서 올해의 추향제도 양성당에서 지냈다.
양성당 왼쪽에는 서원의 학생들의 경전을 출판하는 목판인쇄물을 보관하는 장판각(도유형문화재 제9호)이 있다.
돈암서원 대강당인 응도당 전경. 양성당과 동서재, 홍살문 전경. |
고려 말 충선왕 때 안향·백이정, 이제현 등 선구적인 학자들에 의해서 도입된 성리학은 주자의 이원론적인 이기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1세기가 지나는 동안 많은 학자들의 연구 덕택에 성리학의 토착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조선건국 후 치국이념이 된 성리학은 크게 주기설과 주리설로 나뉘는데, 중소지주와 같이 가진 비교적 안정된 생활기반을 가진 주리파의 선구자는 이언적(1491∼1553)이고, 이것을 집대성한 사람은 중종 때 퇴계 이황(1510 -1570)이다.
이황은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퇴계집 등을 저술하여 '동방의 주자'로 불렸는데, 선조 때 율곡 이이(1536∼1584)는 주기론 입장에서 경험적 세계를 조화하는 새로운 철학 사상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효종·현종 때 윤휴가 정통 주자학을 비판하고, 성리학의 기본서적인 주자서에 자기의 주석을 넣는 등 파격적인 행위를 하자 주자학의 정통을 이어받은 송시열이 그를 '사문난적'이라고 매도함으로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대립이 시작될 때, 영남학파는 이황의 학설을 따랐고, 기호학파들은 대개 이이의 학설을 따랐다.
그 결과 영남학파는 이황을 모신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남명에 의해서 학풍이 이어졌고, 기호학파는 율곡의 학설을 계승한 김장생에게 이어져서 돈암서원을 중심으로 송시열 등에게 이어졌다.
돈암서원이 17세기를 대표하는 기호학파의 중심지가 된 것은 연산 지방이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집권과 호서지방을 중심으로 대대로 벼슬을 하여 명문거족이 된 광산 김씨의 본거지이었던 영향이 크다.
전라도 광산(光山)을 본관으로 하는 광산 김씨는 본래 나말 여초에 신라의 왕자이던 김흥광이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서울인 경주를 떠나서 현재 전남 담양군 평장동인 무주 서일동에 은거했다가 고려 태조의 즉위 후 그를 '광산부원군'으로 삼은 뒤부터 후손들이 본관을 광산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일동은 김흥광의 후손들 중에서 평장사(정2품)를 8명이나 배출하자 마을이름도 평장동으로 바꿨다.
이런 광산 김씨가 충청도 연산에 정착해서 집성촌을 이루게 된 것은 사계의 8대조인 김약채가 충청 관찰출척사를 할 때 인연을 맺고, 예문관 검열을 역임한 그의 아들 김문이 일찍 죽자 17세 된 부인 양천 허씨가 어린 아들 김철산을 데리고 시가에 안착한 것이 계기라고 한다.
김철산은 훗날 좌의정을 역임한 김국광, 염광 등 4형제를 낳으면서 사헌부감찰과 광성부원군으로 추봉되면서 논산군 연산 일대는 광산 김씨의 새로운 정착지로 굳어졌지만, 사실 연산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접경지역이라는 지리적 이점도 갖고 있다.
광산김씨는 왕비 1명, 영의정 5명, 대제학 7명, 청백리 4명, 공신 7명, 문과 급제자 265명을 배출했는데, 조선시대 대제학 7명을 배출한 집안은 광산 김씨 이외에 왕족인 전주 이씨, 연안 이씨뿐이라고 한다.
대사헌을 지낸 김계휘의 아들로 태어난 김장생은 13세 되던 1560년(명종 15)부터 율곡 이이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나, 그의 생애는 4대 사화가 일어나고 임진·정유재란 등 내우외환과 중종·광해군을 축출하는 인조반정 같은 정변 등 사회가 극도로 혼란하자 광해군 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뒤 가족과 동족상호간의 의식을 바로잡는 예학(禮學)과 친족공동체의 결합을 중시하는 보학(譜學)에 열중했다.
그의 명성은 조정까지 알려져서 나라의 전례나 행사시에는 그를 찾아와서 자문을 받기도 할 정도여서 그를 ‘조선예학의 태두’라고도 불렀는데,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80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호란 이후 조정에서는 그에게 형조참판(종2품)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고향에서 학문을 가르치다가 84세 되던 1631년(인조 9년) 죽었다.
기호학파의 중심지이던 돈암서원은 최근 방학 때마다 예학강습을 하고 있으며, 올해 모 언론에서 기호 유교문화권 개발방안과 기호유교문화를 대표하는 돈암서원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기호유교문화 세미나’를 개최했지만, 아직은 모든 것이 크게 부족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법무사>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새해에는 회장님 이하 회원 모두에게
항상 건강하고 좋은 일만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