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역전 대화재(1953.11.27) 모습
1953년11월27일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에서 발생하여, 부산역과 부산우체국 주변으로 확대된 대형 화재 사고.
역사적 배경
부산의 도시 기반 시설은 일제 강점기 30만 명의 인구가 생활할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6·25 전쟁 중
피난으로 인해 약 100만 명의 인구가 부산에 집중되면서 주거지를 비롯한 기반 시설의 극심한 부족을 겪게 되었
다. 특히 주거지 부족으로 부산 시내에는 판잣집이 등장하였다. 판잣집은 용두산, 대청동, 보수동, 부평동, 충무
동 등 빈 공터만 있으면 만들어졌다. 하지만 판잣집의 증가에 따른 상수도와 전기 시설을 비롯한 사회 기반 시설
은 턱없이 부족하였다. 항상 화재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고, 하루에도 몇 건의 화재가 발생하였다.
1953년 7월 휴전이 되어 피난민들의 환도와 귀향이 증가하기는 했지만, 전쟁 중 부산으로 유입되지 못했던 피난
민과 새로이 시골을 떠난 유랑민들의 이주로 부산 인구는 더욱 증가하였다. 정부와 부산시는 전쟁 동안 무질서한
주택 문제와 도시 정비를 위해 판잣집 철거를 꾸준히 추진했으나 부실한 대책 때문에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화재의 위험은 전쟁이 끝나도 없어지지 않았다.
경과
1953년 11월 27일 오후 8시 20분경 당시 부산시 중구 영주동 17통 16반 허도영(許道榮)의 방에서 난로 불 부주
의로 발생한 화염은 시속 11.8㎞[30리]의 강풍으로 순식간에 확대되었다. 14시간에 걸친 화마는 부산역전을 중
심한 번화가의 주요 건물 및 민가 등 약 1,250호를 태우고 다음 날 오전 10시 20분에 완전 진화되었다.
결과
부산역전 대화재로 주택 3,132채가 완전히 소실되었고, 사상자 29명, 이재민 6,000여 세대 3만여 명이 발생하였
다. 피해액은 총 2000억환(현재 금액 추산 1조7700억원)으로 추산되었다. 부산역, 부산우체국, 미후방기지사령
부 등 중요 시설들이 사라졌다.
이재민은 동아 극장, 영선초등학교, 부산 극장 등에 수용되었다. 정부는 ‘부산 화재 사건’ 구호 대책을 협의하여
‘긴급 구호 본부’를 설치하였다. 이재민들은 부산화재지구 복구위원회연합회를 조직하였다. 부산시는 이재민
입주주택을 화재 지역 이외에 건축하기로 결정하고 부산시 부산진구 양정동과 영도 청학동에 재건 주택을 건설
할 계획을 세웠다. 부산역전 대화재를 계기로 전쟁 중에 만들어졌던 판잣집 철거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화재 지역 이외 에 판잣집이 많던 충무동, 보수동, 대청동 등 판잣집이 철거되고, 여기에 살던 피난민들이 부산
외곽으로 이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부산역전 대화재는 전후 부산의 도시 계획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향토사 연구의 자료가 된다.
[위 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발췌]
주민등록상 내 생일이라서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부산역과 부산세관 1,2부두 모습 1920년대 (뒤편 중앙 멀리 신선대와 오륙도가 보인다)
화재 발생전 중앙동 "구"부산역 모습 1950년대 초반
화재 발생전 중앙동 "구"부산역앞 주변 모습 1950년대 초반
화재후 모습, "구"부산역 맞은편에서 뒤편"구"부산시청 방향, 왼편에 영도 봉래산이 보인다.
"구"부산역 맞은편에서 뒤편 "구"부산시청 방향
불타버린 부산역 모습, 앞벽만 남아 있다. 앞벽 뒤쪽은 다 타 버렸다.
뒤편에 영도 봉래산이 보인다
뒤편에 영도 봉래산이 보인다
화재나기 얼마전의 부산역 맞은 편 모습 1953, 아래사진 3개 처럼 불터버렸다.
옛 부산역 위치 : 현 부산무역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