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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7월 30일 대면강의 시작합니다.> - - -
[67] 摩耶夫人天主光(마야부인천주광)
마야부인과 천주광녀를 친견하고
[ 마야부인 실상(實相)으로 들어가는 총의(總義)가 되고,
나머지 10人은 별의(別義)가 됩니다. ]
42) 摩耶夫人(마야부인)
부처님이 탄생하실 적마다 그 어머니가 되십니다.
마야부인 이하 다른 분들은 찌개 조미료, 앞 접시입니다.
이 세상에 부처님을 탄생시키는 사람은
전생도 지금도 마야부인입니다.
전생도 지금도 부처님의 시자는 아난존자입니다.
마야부인은 이미 보살의 큰 원과 지혜가 환술과 같은 해탈문
[菩薩大願智幻解脫法門(보살대원지환해탈법문)]을 성취하였으므로
항상 여러 보살의 어머니가 되었다.
마야부인이 지금 세존에게 어머니가 되듯이
지난 옛적에 계셨던 한량없는 부처님들에게도 어머니가 되었다.
영원한 불모(佛母) 마야부인.
43 天主光女(천주광녀)
33천왕의 딸 정념(正念)
무애념청정장엄해탈(無碍念淸淨莊嚴解脫)을 얻어
깨끗한 대자비심으로 부처님 신통력을 보여줍니다.
모든 부처님들의 8상성도를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천주광녀부터는 졸병들입니다.
☛ 마야부인천주광 등각선 지식입니다.
청량국사가 그렇게 과판을 했습니다.
[68] 徧友童子衆藝覺(변우동자중예각)
변우동자사와 지중예동자와
44) 가비라성 徧友童子(변우동자)
깜깜한 생사의 밤에 잠깐도 혼미하지 않음.
45) 가비라성 善知衆藝童子(선지중예동자)
선지중예해탈문을 얻어
갖가지 예술과 문자를 지혜롭게 이해함.
[69] 賢勝堅固解脫長(현승견고해탈장)
현승우바이와 견고해탈장자
현승견고해탈장 할 때 사람이 다른 분들입니다.
현승우바이는 여자 분이고,
견고해탈장은 남자분입니다.
46) 마갈제국 바달나성 賢勝優婆夷(현승우바이)
무의처도량해탈문(無依處道場解脫門)을 얻어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잘 알고 근심이 없음.
47) 沃田城(옥전성) 堅固長者(견고장자)
무착념청정장엄해탈(無着念淸淨莊嚴解脫)을 얻어
시방불의 처소에서 부지런히 정법을 구합니다.
일체에 집착 없는 견고함으로 비옥한 밭이 됨.
[70] 妙月長者無勝軍(묘월장자무승군)
묘월장자와 무승군장자
48 묘월장자(妙月長者)
정지광명해탈문(淨智光明解脫門)을 얻어
묘한 광명이 있는 집에 머물며 사자후를 함.
49) 出生城(출생성) 無勝軍長者(무승군장자)
무진상(無盡相)해탈문을 얻어
형상이 없음을 깨달아 무진장 복덕을 베풂.
[71] 最寂靜婆羅門者(최적정바라문자)
50) 법성(法城) 최적정바라문(最寂靜婆羅門)
성원어해탈문(誠願語解脫門)을 얻어
변재가 무애하고 진실하여 뜻대로 성취됨.
최적정, 바라문자 여기 부분이 뭐 좀 발음이 이상합니다.
최적정 3자, 바라문자 4자 앞부분과 밸런스가 잘 안 맞아요.
현승견고 4자, 해탈장 3자. 묘월장자 4자 무승군 3자. 하다가
4, 3으로 쭉 오다가, 갑자기 3, 4가 되니까 삐끗합니다.
최~~ 적정바라문자 최~를 쭉~ 빼면 괜찮아요.
누구는 최적정자 4, 바라문 3. 이렇게
‘최적정자 바라문’ 하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72] 德生童子有德女(덕생동자유덕녀)
51) 덕생동자와 52) 유덕동녀를 친견했네
덕생동자, 유덕동녀는 두 사람이지만 법문은 하나입니다.
환주해탈(幻住解脫)을 얻어
일체법이 허깨비와 같이 머무릅니다.
일체법이 환술과 같음.
선재동자는 점점 남쪽으로 가다가
묘한 뜻의 꽃 문성[妙意華門城]에 이르러
환술처럼 머무는 해탈[菩薩幻住解脫]을 얻은
덕생동자와 유덕동녀를 만났다.
환술처럼 머무는 해탈을 얻은 덕생동자와 유덕동녀를 만남은
다음 법문에 萬法이 唯識(만법유식)이라는 암시입니다.
夢幻法門(몽환법문) 구름과 환술, 꿈과 환술,
헛것에 대해서 법문 제일 잘한 사람이 미륵보살입니다.
금산사, 동화사, 법주사 미륵대불. 유식종, 미륵종입니다.
미륵이 제일 잘한 법문이 몽환법문입니다.
夢幻. 꿈 몽자ㆍ헛것 환자.
우리의 일체 심식(心識)의 세계가 꿈과 같고 헛것 같습니다.
三界唯心(삼계유심) 만법유식(萬法唯識). 만유유심(萬有唯心)
이것도 저것도 실제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생각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환망(幻妄)으로부터 깨어나는 것.
이것이 미륵법문의 주특기입니다.
그럼 덕생동자와 유덕동녀는 다음에 미륵을 만납니다.
12인연 한번 봅시다.
12달을 살며 1년씩 가니까 열둘,
띠가 쥐띠부터 돼지까지 12띠니까 열둘.
계절이 3개월씩 4계절로 열둘,
세상 돌아가는 이치나, 사람 태어나는 이치나
마냥 같습니다.
“미혹이는 초 팔고,” 그냥 재미로 들으세요.
1번ㆍ8번ㆍ9번. 업이고
2번째하고 10번째는 업을 조작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업은 무명無明이 연행緣行. 행(行)이 작용입니다.
2번째 行 = 행동, 행업, 작용했다. 이겁니다.
‘무명’이란 놈이 잘못 했으니까
경찰서로 연행 된다고 한글로 생각해요.
다음에 열 번째는 有. 유라고 하는 것이 조작이다.
그러니까 愛(애착)와 取(취착)을 가지고
결국은 업을 조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업을 有. 조작하고 보니까 유 연생(有 緣生).
결국은 태어나는 것이 있고,
태어나는 것이 있으니까 사(死) 죽습니다.
이 두 번째하고 열 번째는 업이 됩니다.
미혹이는 절에서 초 팔고요.
1번ㆍ8번ㆍ9번. 초 파는데 단돈 20원. 계산서는 없습니다.
땡칠이는 쓰리고, 우리 “땡 처리 한다.” 그럽니다.
나머지 일곱 개는 설위고,
說爲(설위) = 뭐라고 말한다. 고(故)라고 말한다.
영어로 하니까 “쓰리고”가 되고요.
한문으로 하면 說爲故(설위고)가 됩니다.
“쓰리고” 는 [무명無明이 행行 연식緣識] 3개는 놔두고 갑니다,
名色, 六入, 觸, 受, 愛 5가지가 있습니다.
옛날에 행업을 저질렀던 것을 이 5가지 현재의 과보가,
다시 현재의 애착과 취착으로 유有, 있어서.
조작을 해서 生ㆍ死. 뒤에 2가지 있잖아요.
앞에 5가지ㆍ뒤에 2가지. 그럼 땡 7.
나머지 일곱 개는 설위고說爲故라고 한다.
부모님 뱃속에 있는 것도 생장과 숙장 사이에,
익은 음식과 익지 않은 음식,
똥하고 음식 사이에 끼여서,
비좁아 터진 자궁 속에 쪼그려서 있으니까
뱃속에 생길 때부터 고통입니다,
태어나서도 부잣집ㆍ가난한 집.
신분 따라서도 또 고생이고,
먹고 살아야 되니까 고생이고,
나는 것도 고생이고 죽는 것도 고생이라.
생노병사우비고(生老病死憂悲苦)라고 합니다.
生死를 늘이면 생노병사生老病死 이렇게 얘기하고,
정신적으로는 生注異滅(생주이멸).
바깥의 현상경계의 물질적인 것은 成住壞空(성주괴공).
성주괴공이든지 생노병사든지 생주이멸이라든지
이와 같은 것들은 다 幻妄(환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법이 다 환술처럼 머무는 것이니
‘나’라는 아견 소견 따위의
갖가지 환술과 같은 인연으로 생기는 탓이며,
모든 세상이 다 환술처럼 머무는 것이니
‘나’라는 아견 소견 따위의 뒤바뀐 지혜로 생기는 탓이며,
중생의 업과기시(業果起始) 중생기시(衆生起始) 세계기시(世界起始),
화엄경에서는 세계성취품에 자세히 나오고,
능엄경에도 나옵니다.
그 부분을 보면 자기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줄 압니다.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연도 아니고,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도 아니다.
보고ㆍ듣는 것이라고 아난존자가 대답하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모든 중생의 생기고 없어지고
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운 것이
다 환술처럼 머무는 것이니
허망한 분별로 생기는 탓이라고 하였습니다.
보살마하살은 한량없는 착한 뿌리를 심어야 하며,
보살마하살은 한량없는 중생 세계를 교화해야 하며,
보살마하살은 한량없는 번뇌를 끊어야 하며,
보살마하살은 보살의 갖가지 행을 알아야 하며, 열 가지 나오고,
또 선지식에 대하여 좋은 말이 나옵니다.
선지식은 어머니와 같으니 부처의 종자를 내는 연고며,
아버지와 같으니 광대하게 이익되게 하는 연고며,
유모(乳母)와 같으니 보호하여 나쁜 짓을 못하게 하는 연고며,
스승과 같으니 보살의 배울 것을 보여주는 연고며,
선지식을 섬기는 방법은
땅과 같은 마음을 내야 하나니
무거운 짐을 지어도 고달프지 않은 연고며,
금강과 같은 마음을 내야 하나니
뜻과 소원이 견고하여 깨뜨릴 수 없는 연고며,
철위산과 같은 마음을 내야 하나니,
모든 괴로움으로 요동칠 수 없는 연고며,
또한 하인과 같은 마음을 내야 하나니
여러 가지 일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연고며,
주옥같은 얘기들이 쭉~ 있습니다.
이 선지식을 만나서 법문을 제대로 들으려면
저기 가서 미륵을 만나야 된다고 하니까
선재동자가 드디어 미륵을 만났습니다.
미륵을 만나자마자 아쉽게도 이제까지 배웠던 법문을
전부 다 홀딱 잊어버립니다.
미륵을 만나서 법문을 잊어버려야 미륵을 만난 것입니다.
미륵을 만났는데 그것 안 잊어버리고,
‘난 안 잊을 꺼야.’ 이러면 그것은 아만만 남은 것입니다.
오늘 화엄경약찬게 했는데 여러분이 법문 다 보고 듣고,
각자 절로 돌아가서, 집에 가는 즉시 싹 다 잊어버리거든요.
콩나물시루에 물이 쫙 빠져버리듯이
안 잊는 것은 강사나 하는 몫입니다.
강사는 잊어버리면 안 되거든요.
여러분은 무조건 다 잊어버려야 되지요?
노~ ,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일여평등입니다.
다자 탑 앞에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서 가졌습니다.
잊어버리면 절대 안 됩니다.
콩나물 물은 빠져도 콩나물은 자란다.
그러나 신경 끄셔도 됩니다.
오늘 들었던 인연공덕 하나로도
우리는 무조건 자라게 되어있습니다.
스쳐 지나는 바람결에 꽃은 핍니다.
그 바람은 없을지라도, 안 머물러도.
공덕은 그대로 남습니다.
[73] 彌勒菩薩文殊等(미륵보살문수등)
미륵보살과 문수보살님
53) 미륵보살
미륵보살문수등 성만선지식
미륵ㆍ문수ㆍ보현 이 3분의 얘기를 하자면,
너무나 방대해서 이 좁은 난에 축약해서 올려놨습니다.
53 미륵보살 삼세의 일체 경계를 잊어버리지 않는 지혜로
장엄한 해탈을 얻은 미륵보살을 만나서 이제까지 배웠던 모든 법문들을
찰나지간에 몽환처럼 잊어버리게 된다.
54) 보문국 소마다성 문수보살
때 마침 오른손을 들고 110城을 지나오는 문수보살을 만나
선재동자는 마정수기를 받는다.
“그대가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오늘의 이 경지를 이를 수 있겠는가?”
오른손은 정법을 110성은 무수한 법문의 원만성취를 뜻한다.
[74] 普賢菩薩微塵衆(보현보살미진중)
보현보살까지 티끌 수 같은 대중들이
55) 보현보살
금강도량 보배연꽃 사자좌에 앉은 보현보살을 친견하고
선재동자는 다시 마정수기를 받는다.
보현보살의 노래
이 세상에 태어나신 우리 부처님
그 마음 청정하기 허공같은데
밝은 빛 지혜로서 어두움을 밝히시네
마음으로 세계티끌 수를 헤이고
온 바다 한꺼번에 다 마시고
바람을 잡아매고 허공을 잰다 해도
부처님의 공덕은 다 말할 수 없으리.
미륵보살은 자비, 문수보살은 지혜, 보현보살은 행원을 뜻한다.
☛ 번호)는 55)이지만 무수가 2번 겹치고,
51) 덕생동자와 52) 유덕동녀가 같은 법문으로 1명으로 칩니다.
그래서 53선지식이라고 합니다.
[75] 於此法會雲集來(어차법회운집래)
이 법회에 구름처럼 몰려와서
[76] 常隨毗盧遮那佛(상수비로자나불)
비로자나 부처님을 항상 따르면서
[77] 於蓮華藏世界海(어연화장세계해)
연화장세계 바다에서
[78] 造化莊嚴大法輪(조화장엄대법륜)
대법륜을 조화롭게 장엄하고
[79] 十方虛空諸世界(시방허공제세계)
시방 허공 모든 세계에서도
[80] 亦復如是常說法(역부여시상설법)
또한 이와 같이 항상 법을 설하시네.
진실로 보현보살의 티끌같은 권속들은
이같은 법회에 항상 구름처럼 몰려오고
언제나 비로자나부처님을 따라 다니며
연화장세계에서 무궁한 조화를 장엄하며
대법륜을 굴림으로써 허공과 같은 시방세계에서
똑같이 법회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화엄경은 한때 설해진 옛날 그 옛날 얘기가 아니라,
언제나 지금도 설해지는 상시(常時)설법입니다.
허공도 설하고ㆍ바람도 설하고, 주산신ㆍ주주신ㆍ주수신ㆍ
햇빛도 설하고요. 그렇습니다.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온통 향기도 법을 설하고.
털구멍도 법을 설하합니다.
화엄경은 한 군데만 아니라
보광명전에서 ‘싹 다~ 설했다.’는 것입니다.
보리수 하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온 천상과 온 보광명전에 법신이 가득했습니다.
제가 오늘 내는 목소리가 어디로 갔습니까?
앞으로도ㆍ뒤로도ㆍ온 시방에 우주 끝까지 갔지요.
사라지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그러했고, 선지식이 그러했고요.
사라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묻으려 해도 어둠은 이 빛을 묻을 수가 없습니다.
저 조그만 별빛 하나도 섣달그믐의 캄캄한 어둠도 못 묻습니다.
어떻게 무명번뇌가 우리의 진여의 빛은 묻을 수 없습니다.
세세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입니다.
아무리 시달리는 번뇌 쪼가리라도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사로잡히지만 않는다면 그것을 묻을 수는 없습니다.
항상 비로자나부처님을 따른다는 것은
흔들림 없는 본심으로 살아간다는 말이며,
연화장세계해에서 대법륜을 조화롭게 장엄한다는 것은
진흙탕에 젖지 않는 연꽃처럼 생멸 법에 오염되지 않고
거룩한 정법을 구현한다는 말입니다.
도표에 첫 대목에서 화엄경의 첫 품인 세주묘엄품의 대중들을,
다음 대목에서는 각 회에 설법주들 법혜공덕금강당
다음에는 입법계품의 대중들 광염당급수미당 대덕성문사리자
끝에는 39품의 품명을 밝힌다.
세주묘엄여래상 보현삼매세계성 나오는 대목 있지요.
도표 없는 분은 대면 강의에 오시면 도표를 드립니다.
도표를 옆에 두고 보면서 해야 좋습니다.
A4 용지 작은 도표도 좋습니다.
육육육사급여삼 三十九品
[81] 六六六四及與三(육육육사급여삼)
6품과 6품과 6품을, 4품과 3품을 설하시고,
1회 차 설법, 6가지 한 번 해봅시다.
1) 세주묘엄품, 2) 여래현상품, 3) 보현삼매품, 4) 세계성취품,
5) 화장세계품, 6) 비로자나품.
[82] 一十一一亦復一(일십일일역부일)
1품 후에 11품을, 또 1품 후에 1품을 더 설하시니
[83] 世主妙嚴如來相(세주묘엄여래상)
1회차 1) 세주묘엄품, 2) 여래현상품.
[84] 普賢三昧世界成(보현삼매세계성)
3) 보현삼매품, 4) 세계성취품.
[85] 華藏世界盧遮那(화장세계노사나)
5) 화장세계품, 6) 비로자나품.
이렇게 6 품입니다.
‘비로자나품’을
약찬게 외울 때는 “로자나” 아니고, “노사나” 합니다.
60화엄경에는 “노사나불 품” 이라 되어있습니다.
[86] 如來名號四聖諦(여래명호사성제)
다음에 六ㆍ六. 할 때 두 번째 6품 가운데
7) 여래명호품, 8) 사성제품
[87] 光明覺品問明品(광명각품문명품)
9) 광명각품, 10) 보살문명품
[88] 淨行賢首[須彌頂] (정행현수 수미정)
11) 정행품, 12)현수품
수미정은 3회 차 설법입니다.
제1회 6품(11권)
1세주묘엄품. 2여래현상품. 3보현삼매품. 4세계성취품.
5화장세계품. 6비로자나품.
도표에 이렇게 해놨습니다.
제1회에 6품, 제2회에 6품, 제3회에 6품, 제4회에 4품,
제5회에 3품, 제6회에 1품, 제7회에 11품, 제8회에 1품,
제9회에 1품이 설해진다.
☛ 제1회에는 6품, 11권.
1세주묘엄품. 2여래현상품. 3보현삼매품. 4세계성취품.
5화장세계품. 6비로자나품.
설해진 장소 : 아란야법보리장.
설법 주 : 보현보살.
설법내용 : 부처님의 依報와 正報.
방광 : 여래현상품.
삼매 품: 보현삼매품.
주제 분류(信) : 擧果勸樂生信分(거과권락생신분).
부처님의 결과물(果)을 들어내어서 중생들에게
이고득락 할 수 있는 樂을 권장해서 믿음을 내게 하는 부분이다.
이렇게 1회 차 설법이 끝납니다.
☛ 2회 차 설법은 6품 4권이 설해지는데
7여래명호품. 8사성제품. 9광명각품. 10보살문명품.
11정행품. 12현수품.
정행품은 화장실에 가서 용변보고 손 씻고 이럴 때,
더러운 똥오줌 버리듯이 내 마음의 탐진치를 버려라.
그것이 다 정행품에 나오는 얘기들입니다.
곧은길을 볼 때는 곧은길을 생각하고,
내리막길을 볼 때는 또 어떤 것을 생각하고,
그러니까 좋은 것을 보든지 싫은 것을 보든지
스님의 청정한 행을 얘기하는 것이 정행품입니다.
정행품보다 좀 더 업그레이드 된 것이 뒤에 범행품입니다.
범행품에 가면 마지막에 나오는 유명한 게송이
初發心時便正覺(초발심시변정각)입니다.
범행품 다음에는 초발심공덕품이 나옵니다.
초발심이라는 것은 믿음이 무르익었을 때 나오는 것입니다.
정행품 다음에 현수품이 나옵니다.
화엄경의 게송 한 품만 뽑으라면 현수품만 뽑을 수 있습니다.
현수품은 품 전체가 일곱 자 게송으로 가득 찼거든요.
오늘 제가 한 번 노래를 한번 하겠습니다.
♪꽃♪피♪는 ♪동♪백♪섬♪에♪
나♪모♪라♪ 다♪나♪다♪라♪
누구 노래냐? 조용필이 아니고 산승의 노래입니다.
부르는 사람의 노래입니다.
화엄경도 오늘 보는 사람의 화엄경입니다.
보광명전에서 세 번 설법이 있었는데,
제2회 6품, 4권은
7여래명호품. 8사성제품. 9광명각품.
10보살문명품. 11정행품. 12현수품.
설해진 장소 : 보광명전에서 제1차.
설법 주 : 문수보살.
법문내용 : 十信.
주제(解) 분류 : 修因契果生解分(수인계과생해분)
방광은 광명각품에서.
삼매는 없습니다.
[89] 須彌頂上偈讚品(수미정상게찬품)
13) 승수미산정품. 14) 수미정상게찬품
[90] 菩薩十住梵行品(보살십주범행품)
15) 십주품. 16) 범행품.
[91] 發心功德明法品(발심공덕명법품)
17) 초발심공덕품. 18) 명법품.
☛ 제3회 설법에는 6품이 설해지는데 권수로는,
분량으로는 3권에 불과합니다.
13승수미산정품. 14수미정상게찬품. 15십주품.
16범행품. 17초발심공덕품. 18명법품.
설해진 장소 : 도리천
설법 주 : 법혜보살.
법문내용 : 十住.
방광은 수미정상게찬품에서
부처님께서 발가락에서 방광하시고,
삼매는 10주품에서 들겠지요?
범행품의 그 유명한 게송 初發心時便正覺은 법성게에도 나오고
약찬게에도 똑 같이 나옵니다.
약찬게하고 법성게하고 똑 같은 구절이 初發心時便正覺.
그 한 구절이 있습니다.
얼마나 좋으면 그대로 해놨을까요?
그것은 범행품, 말미에 나옵니다.
그런데 80화엄경에는 ‘초발심시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나오고,
60화엄경에는 초발심시변성정각 이라고 나옵니다.
初發心時便正覺이라고 80화엄에 안 나오고,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이렇게 나오지요.
정각은 無上正等正覺(무상정등정각)입니다.
이것도 도표 밑의 오른쪽에 써놨습니다.
☛ 제4회 차 설법은 4품으로 3권입니다.
[92] 佛昇夜摩天宮品(불승야마천궁품)
19) 승야마천궁품.
[93] 夜摩天宮偈讚品(야마천궁게찬품)
20) 야마천궁게찬품.
[94] 十行品與無盡藏(십행품여무진장)
21) 십행품. 22) 십무진장품.
19승야마천궁품. 20야마천궁게찬품. 21십행품. 22십무진장품.
방광은 당연히 노래 부르는 게송 찬탄하니까,
야마천궁게찬품. 수미정상게찬품. 도솔궁중게찬품.
삼매는 십행품에서 들어갑니다.
삼매에 들어간 보살은요? 공덕림보살
법문은 10행 법문.
☛ 제5회 차는 3품 12권이 설해집니다.
무려 11권 분량의 10권 반쯤 되는 것이 십회향품입니다.
10회향으로 넘어가기 전에 십행품 다음에 십무진장품.
행을 행하고ㆍ행하고, 공덕을 행하다 보면 창고가 생깁니다.
무진장(無盡藏)한 자기의 보배창고가 생깁니다.
무진장창고를 가지고 있으면 남들에게 회향할 능력이 됩니다.
십무진장품이 나오면 다음에는 뭐겠습니까?
‘아~, 회향을 설하려고 준비 중이시구나!’
얼른 알아차려야 합니다.
비가 딱~~ 왔다. 이러면 후라이팬 달구면 뭘 합니까?
‘와~, 오늘 지지미 구워 먹겠구나!’ 금방 알아야 됩니다.
십무진장품(十無盡藏品).
나눠주려고 무진장(無盡藏)가지고 있습니다.
무진장이니 10회향 품 분량이 무진장 많습니다.
무진장 가지고 있는데 무진장 나눠줘야지요.
해가 저렇게 밝은데 온 세상을 비춰야지요.
해가 저렇게 밝은데 가둬놔서
자기 방 안에만ㆍ골목에만 비추면 되겠습니까?
자기 얻은 만큼 환하게 회향하는 것이지요.
제5회 차는 3품.
[95] 佛昇兜率天宮品(불승도솔천궁품)
23) 승도솔천궁품.
[96] 兜率天宮偈讚品(도솔천궁게찬품)
24) 도솔천궁게찬품.
[97] 十回向及十地品(십회향급 십지품)
25) 십회향품.
23 승도솔천궁품. 24 도솔천궁게찬품. 25 십회향품.
도솔천궁게찬품은 양 무릎에서 방광하고,
십회향품에서 삼매에 들겠지요.
삼매는 智光三昧(지광삼매). 보살 지혜광명 삼매.
10지 품에서는 보살 大智光三昧.
그 이치만 알면 금방 아는데, 이치를 모르니까 죽을 고생입니다.
10회향 품 게송
心不忘取過去法(심불망취과거법)
亦不貪着未來事(역불탐착미래사)
不於現在有所住(불어현재유소주)
了達三世悉空寂(요달삼세실공적)
심불망취과거법- 마음에 망령되이 지나간 일에,
약점이 많은 사람이 과거를 자랑 많이 합니다.
“내 왕년에...”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역불탐착미래사- 사기꾼 같은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서
“이것이 뭐 될 것이다.” 허황되게 남을 꼬십니다.
불어현재유소주-현재 여기서 거들먹거리거나 기 죽지 않으면,
요달삼세실공적- 과거ㆍ현재ㆍ미래가 텅 비어서,
중생회향ㆍ보리회향ㆍ실제회향의 3처 회향이 될 것이다.
이것이 화엄경 10회향 품 제 6번째 나오는 게송인데요.
제6 회향에 나오는데 6회향은 한 3권쯤 됩니다.
그렇게 많습니다. 6회향이 반야바라밀입니다.
봤냐? 봐라 봐라 밀,
거기 가면 주옥같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해서 화엄경 한번 보십시오.
☛ 제6회 1품(6권)
26) 십지품,
10바라밀에 맞추어서 수행경지를 설한다.
제1 바라밀, 환희지(歡喜地)는 보시바라밀.
제2 바라밀, 이구지(離垢地)는 지계바라밀.
제3 바라밀, 발광지(發光地)는 인욕바라밀.
발광지 = 빛이 난다. 이겁니다.
☛ 제7회 차는 11품으로 품이 많습니다.
보광명전에서 제2차 설법입니다.
11품은 27 십정품. 28 십통품. 29 십인품. 30 아승지품.
30 여래수량품. 32 제보살주처품. 33 불부사의법품.
34 여래십신상해품. 35 여래수호광명공덕품.
36 보현행품. 37 여래출현품.
부처님 삼매는 십정십통십인품중에서 선정삼매 10정 품입니다.
여기서 그 유명한 刹那際三昧(찰나제삼매)에 먼저 들어가시고,
제일 끝의 품인 여래출현품에서는 백호미간에서 방광하시고,
나중에 입에서 방광하시는 것은 보현보살이지요.
백호미간에서 방광하신 것은 여래성기묘덕보살의
정수리에 쏟아붓는다고 배웠습니다.
[98] 十定十通十忍品(십정십통십인품)
27) 십정품과 28) 십통품 29) 십인품
[99] 阿僧祗品如壽量(아승지품여수량)
30) 아승지품과 31) 여래수량품 32) 여래수량품.
법화경에도 나옵니다. 여래수량은 무량수무량광입니다.
여래수량이란 이 생멸의 몸뚱이 말고 진여자성의 목숨입니다.
[100] 菩薩住處佛不思(보살주처불부사)
32) 제보살주처품. 33) 불부사의법품.
보살주처품을 읽어 보면
금강산에는 법기보살. 아미산에는 보현보살,
청량산에는 문수보살이, 보타낙가산에는 관세음보살,
이와 같은 분들이 전부 제보살주처품에 많이 나옵니다.
불부사의품은 대중들의 생각에 낱낱이 대답하는
10자재해탈과 무애 등 부사의를 설합니다.
[101] 如來十身相海品(여래십신상해품)
34) 여래십신상해품.
이런 데에도 가보면 방광을 굉장히 많이 나타냅니다.
천 방광ㆍ만 방광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큰 강만 줄기 잡아서, 9도 방광ㆍ10방광 얘기하는 겁니다.
자질구레한 방광들이 너무 많아 그런 것은 방광취급도 안합니다.
설법주가 설법하기 전에 부처님께서 보여주신
그 방광만 여기 써놓은 겁니다.
[102] 如來隨好功德品(여래수호공덕품)
35) 여래수호공덕품
[103] 普賢行及如來出(보현행급여래출)
36) 보현행품. 37) 여래출현품.
방광은 여래출현품에서 하고,
이때 설법주는 세존과 보현보살입니다.
10정품에서 부처님께서 삼매에 드시고,
보현보살이 등장하기전에 보현보살에 대해서
“이런 사람이 보현보살”이라고
7회 차 설법에서 무지막지하게 찬탄하십니다.
그리고 보현보살이 나와서 거기에 걸맞게 설법을 또 합니다.
화엄경은 보현경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현사 보다 문수사가 더 많은 것 같아요.
관음사는 더 많은 것 같아요.
지장사도 많은 것 같고요.
보현사는 왜 그리 인기 없는지 몰라요.
드문ㆍ드문 보이기는 하는데...
[104] 離世間品入法界(이세간품입법계)
☛ 8회에는 1품 7권, 오직 한품이 설해집니다.
38) 이세간품.
그 한 품은 이세간품입니다.
보혜보살이 구름이 일듯 200가지로 묻고,
보현보살이 병의 물을 쏟듯이 2000가지로 대답한다.
병의 물을 쏟듯이 2000가지로 대답 : 甁斜二千(병사이천).
기울일 斜자. 급경사. 전번에 절 얘기 했지요.
제일 많은 절 이름 급경사.
보현보살의 2000行門. 이때는 뭡니까?
1회 차에 信 : 擧果勸樂生信分(거과권락생신분).
2~ 7회 차에 解 : 修因契果生解分(수인계과생해분)
바라밀행을 닦아서 부처님의 결과에 계합하려면
그런 이론을 내게 하는, 生解하는 부분이다.
8회 차에 行 : 托法進修成行分(탁법진수성행분)
지금 이세간품은 托法 = 법에 의지해서,
이제까지 선지식들이 가르쳐준 법이라든지 이런 것,
설법주 보살들이 설해준 법에 의지해서
進修 = 점진적으로 닦아나가서 성행분(成行分).
원만한 바라밀행을 이루는 것이 離ㆍ世ㆍ間ㆍ品입니다.
39) 입법계품
마지막으로 제9회 1품 입법계품입니다.
세존의 삼매와 방광으로 근본법회가 열리고
문수의 指南(지남)으로 선지식의 법계로 들어간다.
지남철 할 때 지남(指南)이 나침판입니다. 나침판.
指南 = “남쪽으로 가라.” 이러면,
‘수행 열심히 하라’ 이렇게 들으면 됩니다.
문수 지남(指南)이라고 하지요.
근본법회는 실라벌성 서다림의 급고독원에서 시작 됐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급고독원입니다.
급고독원 장자는 수잣타.
수잣타의 며느리 이름이 “옥야”입니다.
옥야는 아만이 탱천해서 부처님 말씀도 안 듣고,
부처님이 급고독원 장자 집에 와서 법문하면 나오지도 안하고,
가만히 방에만 있으니까 수잣타 장자가 근심걱정 하면서
“부처님, 우리 며느리하나 봤는데요. 지체 높은 가문이 명망도 있고.
인물도 잘생기고, 애가 배운 것도 많고, 똑똑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지 도대체 법문도 안 듣고, 밥도 안 하고,
아만이 하늘을 찌른다고 부처님이 어떻게 좀 도와주세요.
부처님이 오셔도 방에서 나오지도 않은 겁니다.
부처님이 신통력을 보여서 집을 유리로 싹~~ 만들어버리니,
누워 있다가 놀라서 후닥닥 일어나서 옷 걸쳐 입고 나와서,
“아이고, 부처님 오셨습니까?”
“옥야야, 잘 들어봐라.
남편을 원수 같이 여기는 부인이 있고,
남편을 종처럼 여기는 부인이 있고,
남편을 부모처럼,
남편을 형제처럼,
남편을 선지식처럼,
악독한 것 서너 가지. 이렇게 쭉~~~ 해서
너는 뭐가 될래?” 이러니까
“저는 종 같은 아내가 되겠습니다.”이래서 제압당합니다.
그 이야기가 옥야경에 나오지요.
심심하면 오늘 참석하신 분들 옥야경 한 번 읽어보세요.
제일 못된 부인은 뭐냐 하면,
남편이 죽기를 바라는 그런 부인도 있습니다.
지금도 사실 벌어지는 일들이 더러 있지요.
給孤獨園(급고독원)이라고 할 때,
給이라고 하는 것은 ‘공급한다. 준다.’ 이런 뜻입니다.
고독(孤獨)한- 외롭고, 쓸쓸한 사람에게 준다.
어릴 적에 외로운 사람들ㆍ힘든 사람들을 孤兒(고아)라고 하죠?
독(獨)이라 하면 우리처럼 늙어서 獨居老人(독거노인).
어려서 외로운 것을 고(孤)라하고,
늙어서 외로운 것을 독(獨)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소년ㆍ소녀 가장이라든지,
독거노인한테 이런 데에 도와주는 것을 뭐라 합니까?
급고독(給ㆍ孤ㆍ獨)이라고 합니다.
금강경에도 보면 보시바라밀 제일 먼저 등장합니다.
보시 없으면 나머지 아홉 바라밀은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보시는 1번이 재물입니다.
재시(財施)가 제일 먼저입니다.
배고파 죽겠는데 화엄경 설하면 귀에 들어옵니까?
안 들어옵니다.
무조건 무물(無物)이면 무성의(無誠意)라.
오가는 물건이 없으면 성의가 없는 겁니다.
“내 뜻은 안 그런데 많이 벌면 다음에 잘해 줄께.”
형식적인 것은 무가치입니다.
누가 떡 좀 해 오면 떡 먹어 가면서 떡이 되든지,
화엄경이 되든지, 떡을 먹어 가면서 떡이 화엄경이 되는 겁니다.
서다림의 급고독원에서 근본법회가 시작 됐다는 겁니다.
그 다음 거기서 나가서 복성(福城) 동쪽 장엄당 사라숲에서
문수보살의 지말법회가 시작 됩니다.
근본법회는 실라벌성 서다림 급고독원.
서다림이라은 유리태자한테 억울하게 죽은 기타태자입니다.
부처님한테 동산을 “제타 숲”이라고 하지요.
제타 림ㆍ祈陀林(기타림)ㆍ서다 林.
금강경에서는 祇樹(기수)라고 하지요. 기수가 여기는 서다.
인도 발음을 옮겨서 그렇지요? 祈陀라 하든지 서타림.
나무 숲, 수풀 림(林)자를 써서 서타 林 =
제타 림 = 祇樹林. 기타태자의 동산이었다는 말입니다.
금강경 ‘기수급고독원’은 기타태자는 땅을
급고독 장자는 돈으로 사서 세워진 절입니다.
그래서 [기수 + 급고독] = 기수급고독원, 기원정사.
입법계품이 끝나서 화엄경의 39품의 이름을 다 외웠습니다.
1회 6품
世主妙嚴如來相 普賢三昧世界成 華藏世界盧遮那
2회 6품
如來名號四聖諦 光明覺品問明品 淨行賢首[須彌頂]
3회 6품
須彌頂上偈讚品 菩薩十住梵行品 發心功德明法品
4회 4품
佛昇夜摩天宮品 夜摩天宮偈讚品 十行品與無盡藏
5회 3품
佛昇兜率天宮品 兜率天宮偈讚品 十回向及
6회 1품 十地品
7회 11품
十定十通十忍品 阿僧祗品如壽量 菩薩住處佛不思 如來十身相海品
如來隨好功德品 普賢行及如來出
8회 1품 離世間品
9회 1품 入法界品
39품에 이어서 流通正法(유통정법)이 이어집니다.
= = = (7월 30일) 설잠스님 법성게 본문 = = =
1. 法性圓融無二相 법성원융무이상
법(法)과 성(性)이 원융(圓融)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으니
☀ 이제 본론인 법성게에 접어들었다.
법성(法性)이란 말은 법과 성으로 읽기도 하고,
법의 본성으로 읽기도 한다.
설잠스님은 법과 성으로 해석하였다.
그동안에는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했든지 모두 내려놓고
천하의 매월당 설잠스님 해석을 의지하고 따라가 보자.
이런 설명을 어디서 만나겠는가.
法者는 卽六根門頭에 森羅萬像인 情與無情也요
법자는 즉육근문두에 삼라만상인 정여무정야요
“법(法)”이란
곧 육근(六根) 문 앞의 머리에,
삼라만상인,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이요,
性者는 六根門頭에 常常受用하대
성자는 육근문두에 상상수용하대
“성(性)”이란 육근의 문 앞에서 끊임없이 수용(受用)하되
計較摸索不得底消息也요
계교모색부득저소식야요
계교(計較)하고 모색할 수 없는 바의 소식이니라.
☀ 법이란 우리가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의식으로 보고 듣고 인식하는 온갖 삼라만상과
산천초목과 유정 무정들의 차별 현상을 모두 한꺼번에 일컫는 말이다.
성이란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의식으로 보고 듣고 인식하는
온갖 삼라만상과 산천초목과 유정 무정들의 차별 현상들을 모두
수용하되 그 수용하는 당체며 본질이니 근본 성품을 뜻한다.
圓融者는 一切法이 即一切性이며 一切性이 即一切法이니
원융자는 일체법이 즉일체성이며 일체성이 즉일체법이니
“원융(圓融)”이란 일체의 법이 곧 일체의 성이며
일체의 성이 곧 일체의 법이니,
即今의 靑山綠水가 即是本來性이며 本來性이 即是靑山綠水也요
즉금의 청산녹수가 즉시본래성이며 본래성이 즉시청산녹수야요
곧 지금의 푸른 산 맑은 물이, 바로 본래의 성품이며
본래의 성품이, 바로 곧 푸른 산 맑은 물이니라.
☀ 원융하다는 것은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의식으로 보고 듣고 인식하는 온갖 삼라만상과
산천초목과 유정 무정들의 차별 현상들을 수용하는 본성과 그 차별 현상들이 곧 하나이기 때문에
따로따로 나누어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無二相者는 靑山綠水와 本來性이 元是一箇王太白일새
무이상자는 청산녹수와 본래성이 원시일개왕태백일새
“두 가지 모양이 없음”이란 푸른 산 맑은 물과
본래의 성품이, 원래 한 개의 아주 깨끗한 바탕[王太白]이라
本來無二也로대 但以世人이 妄生分別로 遂有我人하도다
본래무이야로대 단이세인이 망생분별로 수유아인하도다
본래 두 가지가 아니건만 다만 세상 사람들이
부질없이 분별을 냄으로써 드디어 나와 남이 있게 되었도다.
☀ 무이(無二)란 불이(不二)와 같은 뜻이다.
불이 법문은 유마경에서 유마거사가 표현한 침묵이 최고 으뜸이다.
청산녹수와 그 청산녹수의 본래의 근본 성품이 원래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니라면
구태여 둘이 아니라고 말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저 묵묵히 있을 뿐이다. 청산은 청산대로 녹수는 녹수대로
그냥 그렇게 여여하게 있기 때문이다.
왜 굳이 설명하여 너니 나니 나누는가?
於淸淨無礙中에 瞥生異念할새 揑作十法界하야 熾然作用하니라
어청정무애중에 별생이념할새 열작십법계하야 치연작용하니라
또 청정하여 걸림이 없는 가운데서, 별안간 다른 생각을 냄으로써
열 가지 법계를 날조하여, 맹렬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捏날;반죽
☀ 사람들이 사량하고 분별하는 의식작용은 대단히 위대한 능력을 갖췄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놀라운 문명의 발달을 가져왔으나
한편 그 분별하는 생각으로 인하여 각양각색의 차별상을 만들었다.
이를테면 십계(十界) 또는 십법계로 법화경에서는 6가지 범부의 세계인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을 두었고,
다시 성인들의 세계인 성문, 연각, 보살, 부처를 말하였다.
이러한 차별 현상들이 세상을 온통 천태만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要知不礙底消息麽아, 微塵刹境에 自他가 不隔於毫釐하고
요지불애저소식마아, 미진찰경에 자타가 불격어호리하고
걸림이 없는 바의 소식을 알고자 하는가?
“미진수의 세계 경계에서 자타가, 털끝만큼의 간격이 없으며,
十世古今에 始終이 不離於當念이로다
십세고금에 시종이 불리어당념이로다
십세(十世)의 고금(古今)이, 처음과 끝이, 이 순간의 생각[當念]을
떠나지 않았도다.”
☀ 설사 그렇더라도 그와 같은 차별형상들과 천태만상들이
서로서로 걸리지 않는 도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자 하는가?
밝은 눈을 뜨고 보면, 미세 먼지와 작은 세포들에서부터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70억 사람들과
또 그 수천만 배나 많은 다른 생명체와 우주 공간에 있는 무량 무수한 별들의 세계와 모든 존재가
공간적으로 털끝만큼의 간격이 없다.
또 수억만 과거와 수억만 미래 안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또 그 과거에서 다시 과거, 현재, 미래 등으로 무한히 나눠지고
세분화되는 시간이 지금 이 순간을 떠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2. 諸法不動本來寂 제법부동본래적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부터 고요하도다.
☀ 이 이치는 묵묵히 스스로 계합할 뿐이요.
“움직이지 않는다느니, 본래부터 고요하다느니”하는 표현들은
처음부터 큰 모순을 뒤집어쓰고 하는 말이다.
흙이 잔뜩 묻은 걸레로 깨끗한 방을 청소하려는 격이며,
건강한 피부를 긁어서 상처를 내는 일이다.
諸法은 即前에 現前一切受用也요
제법은 즉전에 현전일체수용야요
“모든 법이란” 곧 앞에, 나타난 일체를 수용(受用)하는 것이요,
不動者는 即前에 計較摸索不得也요
부동자는 즉전에 계교모색부득야요
“움직이지 아니함”은 곧 앞의 헤아리고 찾아도 찾을 수 없음이요,
本來寂者는 即前에 無二相이니
본래적자는 즉전에 무이상이니
“본래부터 고요함”이란 곧 앞에서 말한 “두 모양이 없음”이니,
所謂不動絲毫하야 合本然也이어니와
소위부동사호하야 합본연야이어니와
이른바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 그 자리에 합한 것이다.
道箇本然이 早是動也니
도개본연이 조시동야니
“본래 그러한 자리”라고 부르면 벌써 움직인 것이니
畢竟에 如何오 痴人面前에 不得說夢이로다
필경에 여하오 치인면전에 부득설몽이로다
필경에 어떠한 것인가. 어리석은 사람 앞에서 꿈을 말하지 말라.
☀ 그러나 어찌하랴.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부터 고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려는 방편을 쓰지 아니하면 그나마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 앞에서 꿈을 말하지 말라.”라고 한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꿈 이야기를 잘못하면 그 꿈이 꿈이 아니고 사실인 줄 알아듣고는
동네방네에다 퍼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중에 다행히도 밖에 호랑이가 왔다는 말을 듣고 울음을 그치는 아이들도 있으니 말이다.
3. 無名無相絶一切 무명무상절일체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일체를 여의었도다.
☀ 금강경 오가해 서문에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이름과 형상이 없으나 고금을 관통하였고,
작은 먼지 속에 있으나 동서남북과 상하를 다 에워싸고 있도다.”라고 하였다.
또 육조스님은 “한 물건이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이름도 없고 명자도 없으나
위로는 하늘을 버티고 아래로는 땅을 버티며 밝기는 태양과 같고 어둡기는 옻과 같아서
항상 움직이는 가운데 있으나 움직이는 가운데서
거두어 드리지 못하는 것이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到這裏하야는 非佛非菩薩이며 非二乘非凡夫며
도저리하야는 비불비보살이며 비이승비범부며
非法非非法이며 非法性非非法性이며 非緣起非證分이니
비법비비법이며 비법성비비법성이며 비연기비증분이니
여기에 이르러서는 부처님도 아니고 보살도 아니며,
이승(二乘)도 아니고 범부(凡夫)도 아니며,
법도 아니고 법이 아님도 아니며,
법성(法性)도 아니고 법성이 아님도 아니며,
연기(緣起)도 아니고 깨달음[證分]도 아니니
可以名으로 目耶아 可以相으로 知見耶아
가이명으로 목야아 가이상으로 지견야아
이름으로 지목할 수 있겠는가? 모양으로 알아볼 수 있겠는가?
一切攀緣과 擬議가 都沒하니 奈何方信道리오
일체반연과 의의가 도몰하니 내하방신도리오
일체의 반연(攀緣)과 헤아림이 모두 사라진 것이니,
어찌하랴 바야흐로 사실인 것을.
欲言하대 言不及하니 林下에 好啇量이어다
욕언하대 언불급하니 림하에 호적량이어다
“말하고 싶지만, 말이 미치지 않으니, 숲속에 들어가서,
잘 생각해 보라.”
☀ 산속에 들어가서 참구하는 일도 이것을 참구하는 일이며,
선방에 앉아서 참구하는 일도 이것을 참구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모든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이것이 작동하는 것이며,
일분일초도 이것이 빠지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어서
자나 깨나 가나오나 앉으나 서나 시키지 않아도 너무나 잘 사용하고 있건만
그것을 달리 찾고 있으니 어쩌자는 말인가?
4. 證智所知非餘境 증지소지비여경
깨달은 이의 지혜라야 알바요 그 밖의 경계가 아니로다.
☀ 화엄경에서 밝히고 있는 이치는 모두가 쉽게 납득이 되는 내용들이 아니다.
즉 화엄경 첫 구절부터 살펴보자.
“세존이 처음으로 바른 깨달음을 이루고 나니 그 땅들이 모두가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졌더라.”라고 하였다.
무엇을 깨달았는가.
그 한 물건의 실체를 깨달았다.
그 한 물건의 실체를 깨닫고 나니 그 순간 세상이 온통 금은보화와 다이아몬드로 이루어 졌으며,
또 차디찬 바위 위에 앉아 있었으나 그 바위는 너무나 화려하고 크고 높으며
그 역시 금은보화로 꾸며진 사자좌였더라.
그래서 무비스님은 화엄경의 종지(宗旨)를 이렇게 읊었다.
“아름다워라 세상이여,
환희로워라 인생이여.
아! 이대로가 화장장엄세계요,
이대로가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인 것을.”
이러한 경지를 어찌 아무나 알 것인가.
깨달은 이의 지혜라야 알 수 있는 도리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젠가 이러한 이치를 반드시 깨달아야만 한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과제다.
三世諸佛之所證이 證此者也요
삼세제불지소증이 증차자야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깨달은 바가 이것을 깨달은 것이요,
歷代禪師之所悟도 悟此者也니
역대선사지소오도 오차자야니
역대 선사가 깨달은 바도 이것을 깨달은 것이니,
自靈峰少室已後로 代代相承하야 連芳續焰者가 不知其幾何로대
자령봉소실이후로 대대상승하야 연방속염자가 부지기기하로대
영축산 봉우리와 소림굴(少林窟)로부터, 이후에 대대로 이어받아서,
향기를 이어가고 불꽃을 이은 사람이, 그 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으니.
但契此而已라
단계차이이라
다만 이것에 계합(契合)하였을 따름이다.
☀ 불교의 역사란 다름이 아니다.
오직 이러한 이치 하나를 깨달아서 수많은 사람에게 가르쳐서 수천 수만년을 이어가도록 하는 일이다.
불교는 사람들에게 평생토록 호의호식할 수 있도록 물질을 제공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와 같은
이치를 깨닫고 인과의 이치를 깨닫도록 하는 일이 무엇보다 값지고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境者는 如上所云의 絶一切者니 非啇量에 有分之境也라
경자는 여상소운의 절일체자니 비적량에 유분지경야라
“경계”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체를 떠난 것이니.
생각의 여지가 있는 경계가 아니다.
伊麽인댄 則這个境이 與世間境으로 同耶아 異耶아
이마인댄 즉저개경이 여세간경으로 동야아 이야아
이러한즉, 이 경계와 세간의 경계가 같은가? 다른가?
☀ 불교의 가르침은 모두가 인생교과서다.
더구나 화엄경은 그 많은 8만대장경 가운데서도 가장 우수한 인생고과서다.
그렇다면 그 경계가 아무리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일체를 여의었도다.”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5온과 6근을 가진 세속적 삶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런데 생각으로 이르러 갈 수 없는 그 경계와 세상 사람의 망상분별의
경계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필자가 스스로 대답한다.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다.
결국은 같은 것과 다른 것이 둘이 아니다.
良久云 大丈夫가 秉慧釼하니 般若鋒兮여 金剛焰이라
양구운 대장부가 병혜일하니 반야봉혜여 금강염이라
잠자코 있다가 이르되,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았으니,
반야의 칼날에 금강(金剛)의 불꽃이구나.
非但能摧外道心이요 早曾落却天魔膽이로다
비단능최외도심이요 조증락각천마담이로다
다만 능히 외도(外道)의 마음만을 꺾은 것이 아니라
벌써 천마(天魔)의 간담을 떨어뜨렸다네.”
咄, 再犯을不容이로다
돌, 재범을불용이로다
“돌(咄). 재차 범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으리라.”
☀ 설잠스님은 그렇게 길지 않은 글인데도 선문을 자주 인용하였다. 이 글은 영가스님의 증도가의 한 구절이다.
앞에서 밝힌 그 고준한 경계,
즉 “깨달은 이의 지혜라야 알바요 그 밖의 경계가 아닌”
세계를 불교의 정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으로서 지혜의 칼을 지닌 사람들의 경계이다.
정법과 거리가 있는 소승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나 기타,
다른 종교나 다른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로서는 감히 엿볼 수 없는 경지이다.
더이상 왈가왈부하지 마라.
그것이 “돌(咄)”의 의미다.
5. 眞性甚深極微妙 진성심심극미묘
참다운 성품은 깊고 깊어서 지극히 미묘하니
☀ 진실로 “참다운 성품은 깊고 깊어서 지극히 미묘하다.”
수많은 중생이 의상스님만 바라보고 있으니 설사
허물을 뒤집어쓰더라도 자비심이 많은 보살은 그냥 있지 않는다.
앞에서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일체를 여의었으므로 깨달은
이의 지혜라야 알바요, 그 밖의 경계가 아니로다.”라고만 하고
보살 성인이 조용히 침묵만을 지키고 자신의 인기관리만 하고
있다면 그것이 무슨 보살인가. 그것이 무슨 화엄행자인가.
설사 똥칠을 하고 흙칠을 하더라도 그 지극히 미묘한 이치를
헐어서 중생들에게 맛을 보여야 할 것이다.
若論大華嚴의 重重無盡法界ᅟᅵᆫ댄 不渉唇吻하야 早是說了也며
약논대화엄의 중중무진법계ᅟᅵᆫ댄 불섭진문하야 조시설료야며
不干敎乘하야 早已演了也라
불간교승하야 조이연료야라
만약 대화엄의 중중(重重)하여 다함이 없는 법계를 논할진댄
입술을 거치지 않고서 벌써 설하여 마친 것이며,
교승(敎乘)에 관계치 않고서 벌써 연설하여 마친 것이다.
☀ 중중, 중중하고, 무진, 무진한 우주 법계란 실로 불가사의하다.
사람의 신체를 중심으로 하여 작은 쪽으로도 무한히 작게 세분하여도 그 끝이 없으며,
큰 쪽으로 무한히 확대해 나아가도 또한 그 끝이 없다.
경전에서 2천 6백여 년 전에 일찍이 한 방울의 물속에 8만 4천의 충이 있다고 하였다.
요즘의 과학으로 우리 몸속에 1백조의 세포가 있고,
그 낱낱 세포 속에 다시 또 1백조의 세포가 있어서
무한 분화가 되고 복제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 우주과학이 발달하여 얼마나 멀리까지 위성들의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을 아는가.
허블망원경으로 수백억광년 저 멀리까지도 우주가 무한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다 보고 있는 시대다.
그래서 지구와 똑같은 자연환경을 지닌 별을 찾기에 과학자들은 혈안이 되어 있다.
이 또한 화엄경에서 설하고 있는 화장장엄세계 그대로다.
直饒溪聲으로 爲舌相하고 山色으로 爲身噐하고 盡山河大地로
직요계성으로 위설상하고 산색으로 위신기하고 진산하대지로
爲寂場하고 惣情非情으로 爲衆會라도 言說을 不着이요 讃揚을
위적장하고 총정비정으로 위중회라도 언설을 불착이요 찬양을
難盡이어늘 相師가 入無綘罅處하야 强生穿鑿하니
난진이어늘 상사가 입무봉하처하야 강생천착하니
所謂彼旣無瘡이어든 勿傷之也라
소위피기무창이어든 물상지야라
설사 시냇물 소리로 혀를 삼고,
산색(山色)으로 몸을 삼으며,
온 산하대지로 적멸도량(寂滅道場)을 삼고,
모든 유정(有情)과 비정(非情)으로 대중들의 모임을 삼더라도,
말을 붙일 수 없고, 찬양을 다하기 어렵거늘,
의상법사가 구멍을 꿰맨 데가 없는 곳에 들어가
억지로 천착(穿鑿)을 내었으니,
이른바 “그에게 이미 상처가 없다면 더이상 상처를 내지 말라.”고 한 것이다.
☀ 당송팔대가 중의 한 사람인 소동파(蘇東坡) 거사가
무정설법(無情說法)의 이치를 깨닫고 지은 시가 있다.
흔히 그의 오도송이라고도 한다.
계성변시광장설(溪聲便是廣長說)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곧 부처님의 크고 큰 설법이거늘
산천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어찌 청정법신 부처님이 아니랴.
밤이 되니 8만 4천의 게송이나 되는 것을
다른 날 이 이치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겠는가.
눈을 뜬 사람들의 안목에서 보면 저 드넓은 우주에서부터
산하대지와 산천초목들이 본래 그대로 아무런 탈이 없는
존재이거늘 달리 무슨 입을 놀려 왈가왈부하겠는가.
雖然이나 敎海波瀾이 不碍默味ㄹ새 相師가 坐寬하사 蕩蕩地하야
수연이나 교해파란이 불애묵미ㄹ새 상사가 좌관하사 탕탕지하야
任他道하대 法性圓融無二相하니 諸法不動本來寂이요
임타도하대 법성원융무이상하니 제법부동본래적이요
無名無相絶一切하니 證智所知非餘境이라 四句가 道盡了也니
무명무상절일체하니 증지소지비여경이라 사구가 도진료야니
不搽紅粉에 便有風流의 氣象이로다
부차홍분에 편유풍류의 기상이로다
비록 그러나 가르침의 바다가 넓고 깊음이
침묵의 맛에 방해되지 아니하기에 의상법사가 포용[坐寬]하여
걸림 없이 탕탕하게 이르되
“법(法)과 성(性)이 원융(圓融)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으니,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부터 고요하도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일체를 여의었으니,
깨달은 이의 지혜라야 알바요 그 밖의 경계가 아니로다.”라고
한 이 네 구절에서 모두 다 말해버린 것이니
붉은 분(粉)을 바르지 않고도 곧 풍류(風流)가 있는 기상(氣象)이다.
☀ 고인이 승찬대사의 신심명(信心銘)을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 단막증애(但莫憎愛)
통연명백(洞然明白)이라”는 네 구절에서 모두 다 말해버렸으며,
그리고 그 이하는 모두가 네 구절의 주석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설잠스님은 법성게가 앞의 네 구절에서 하고자 하는 뜻을
다 말해버렸고 나머지는 화장이며 장엄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법성게를 공부하는 이들은 이 말의 의미를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且道하라 四句에 還有你思量計較와 分別意識也無아 自寂場으로
차도하라 사구에 환유니사량계교와 분별의식야무아 자적장으로
至于今日히 便是一條鐵이라 無你接觜處로대 相師가 慈悲之故로
지우금일히 변시일조철이라 무니접자처로대 상사가 자비지고로
不惜眉毛하고 有落草之談하야 便道하대 眞性이 甚深하야
불석미모하고 유낙초지담하야 변도하대 진성이 심심하야
極微妙라하니 早是十分帶泥帶水去也어든 山僧이 今日에
극미묘라하니 조시십분대니대수거야어든 산승이 금일에
重爲注脚하니 葛藤이 不少로다
중위주각하니 갈등이 불소로다
또 일러보아라.
이 네 구절에 또한 그대의 사량계교와 분별의식이 있는가? 없는가?
적멸도량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가
바로 통째로 무쇠덩이라서 그대의 주둥이를 댈 곳이 없는데
의상법사가 자비한 까닭에 눈썹을 아끼지 않고
바닥에 떨어진 말을 하여 곧바로 이르되,
“참다운 성품은 깊고 깊어서 지극히 미묘하다.”라고 한 것이니,
벌써 충분할 만큼 진흙과 물을 뒤집어 쓴 것인데
산승(山僧)이 오늘 거듭 주각을 내니 허물[葛藤]이 적지 않도다.
☀ 적멸도량[寂場]이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도량을 말한다.
“적멸도량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가
바로 통째로 무쇠덩이라서 그대의 주둥이를 댈 곳이 없다.”는 것은
부처님이 이미 입을 다물었거늘
누가 무엇을 안다고 부처님이 깨달은 것에 대해서 횡설수설할 수 있겠는가.
모두가 큰 허물을 뒤집어쓰고 자신의 잘못을 감수하면서 왈가왈부해 보는 일이다.
그래도 깨달은 사람들의 자비심은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지 않는다.
그래서 바닥에 떨어진 말이라도 하는 것이다.
“참다운 성품은 깊고 깊어서 지극히 미묘하다.”라고 하면서
비로소 천하의 제일가는 명언을 우레처럼 진동하여 세상에
큰비를 내려 흠뻑 적시게 된 것이다.
어찌 “진흙과 물을 뒤집어 쓴 것이라.”고만 할 것인가.
설잠스님도 “주각을 내어 허물이 적지 않다.”라고는 하였으나
그 또한 기존의 교리적 해석에서 선사의 안목으로
선리(禪理)로 거량하였으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만약 설잠스님의 말씀대로라면 이 산승은 어쩌란 말인가.
前에 云한 法性者는 融淨穢하고 通眞俗하야 所謂不可取不可捨니
전에 운한 법성자는 융정예하고 통진속하야 소위불가취불가사니
若除一切ㄴ댄 不得全法界之智하고 若添一事ㄴ댄
약제일체ㄴ댄 부득전법계지지하고 약첨일사ㄴ댄
不得名淸淨之界者也어니와
부득명청정지계자야어니와
앞에서 말한 “법성(法性)이란 정(淨)과 예(穢)를 융화하고
진(眞)과 속(俗)에 통하여 이른바,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함이니,
만약 일체를 제한다면 법계(法界)의 지혜를 온전히 얻지 못하고,
만약 하나의 일이라도 덧붙이면
청정법계(淸淨法界)라는 이름을 얻지 못할 것이다.
☀ 진성(眞性)의 의미가 법성(法性)의 의미와
다르다는 뜻을 밝히기 위하여 다시 법성의 뜻을 거론하였다.
법성이란 정(淨)과 예(穢)를 융화하고 진(眞)과 속(俗)에 통하여
이른바,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본래 그대로이다.
달리 무슨 취할 것이 있고 버릴 것이 있겠는가.
그래서 이 세상과 이 우주가 본래로 청정법계인 것이다.
그러나 세분해서 말하면
진성과는 다르면서 같고 같으면서 다른 점이 있다.
此云 眞性者는 別取有情門中에 證入分하니 退身一步하야
차운 진성자는 별취유정문중에 증입분하니 퇴신일보하야
假作眞性之名이요 非指法性外에 別有一段眞性也라
가작진성지명이요 비지법성외에 별유일단진성야라
여기에서 말한 진성(眞性)이란 따로 유정문(有情門) 가운데서
참다운 지혜로 진리를 증득하는 것[證入分]을 취한 것이니,
몸을 한발 물리어 임시로 진성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요,
법성 밖에 따로 일단의 진성이 있다고 지시한 것은 아니다.
☀ 크게 보면 진성도 모두 법성에 포함되지만
굳이 진성이라고 했을 때는 사람으로서
참다운 지혜로 진리를 증득하는 그 참 성품을
임시로 가설하여 진성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법성 밖에 따로 진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도 사람의 참 성품도 모두가 법성 안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若是藏人이 竪看에 有分커나 若是圓頓機中에 橫看인댄
약시장인이 수간에 유분커나 약시원돈기중에 횡간인댄
早是錯了也니 不竪不橫하고 且道하라 是什麽消息고 橫竪는
조시착료야니 불수불횡하고 차도하라 시심마소식고 횡수는
且置一邊하고 作麽生是甚深底道理오
차치일변하고 작마생시심심저도리오
만약 장교(藏敎)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차제(次第)를 밟아 보게 되어 있다거나[竪看有分]
만약 원돈(圓頓)의 근기에 속한 사람 중에서는
일거에 보기 마련이라고[橫看] 하면 벌써 틀려버린 것이니,
차제도 말고 일거도 말고서 어쨌든 말해보라.
이것이 어떠한 소식인가.
차제니 일거니[橫竪] 함은 우선 치워두고 무엇이
이 “매우 깊다.”는 바의 도리인가.
☀ 장교(藏敎)를 배우는 사람이란 즉 삼장교(三藏敎)인 수다라장(修多羅藏)과 비니장(毘尼藏)과
아비담장(阿毘曇藏)을 배우는 사람을 말하며, 대승과 소승에 다 통하는 말이지만
이것은 특히 소승교를 달리 칭하는 말이다.
그래서 소승교의 사람들은 범부에서 성불에 이르기까지
3아승지겁 등의 세월을 거치면서 수많은 차제를 밟아 올라가게 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반대로 화엄경과 같은 원돈교(圓頓敎)의 이치에 속한 사람은
처음 발심할 때에 곧바로 정각을 이루어서
시간을 요하지 않고 일거에 모든 수행을 다 마쳐버린다.
아무튼 이 2가지를 다 제쳐두고
“매우 깊다.”라는 도리란 무엇인가?
以謂眞也에 全是夢幻이요 以謂假也에 純是實相이니 非性非相이며
이위진야에 전시몽환이요 이위가야에 순시실상이니 비성비상이며
非眞非假로대 而性而相하며 而眞而假일새 故로 云하대
비진비가로대 이성이상하며 이진이가일새 고로 운하대
甚深也라하니라
심심야라하니라
진(眞)이라고 말함에 전부가 몽환(夢幻)이요,
가(假)라고 말함에 순전히 실상(實相)이니,
성품도 아니고 형상도 아니며
진(眞)도 아니고 가(假)도 아니지만 성품이면서 형상이고
진이면서 가이기 때문에 “매우 깊다.”고 한 것이다.
☀ “참다운 성품이 매우 깊다.”라는 도리를 설명하였다.
참다운 성품을 누가 알랴.
참다운 성품이라고 하니 어느새 낱낱이 꿈이요 환영이며,
거짓 성품이라고 하니 어느새 낱낱이 순전히 진실한 모습이다.
그 물건은 참도 되고 거짓도 되며,
성품도 되고 형상도 되는지라 진실로 종잡을 수 없다.
화엄의 안목으로 보면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다.
그것을 양면을 다 부정하면서 양면을 다 수용하는
중도적 견해라고나 할까. 그래서 “매우 깊다.”고 한 것이다.
契文殊之妙智하대 宛是初心이니 則深也를 不可得이요
계문수지묘지하대 완시초심이니 즉심야를 불가득이요
入普賢之玄門하대 曾無別體니 則淺也를 不可得이라
입보현지현문하대 증무별체니 즉천야를 불가득이라
문수(文殊)의 묘지(妙智)에 계합하되 완연히 초심(初心)이니
“깊다”함이 있을 수 없는 것이요,
보현(普賢)의 현문(玄門)에 들어갔으되
일찍이 별체(別體)인 적이 없으니 “얕다”고 함이 있을 수 없다.
☀ 사람들이 불법을 만나 수행하고 또 수행해서 궁극에
이르러 갈 수 있는 경지가 문수보살이 터득한 미묘한 지혜라고
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것은 본래의 첫 마음 그대로다.
그런 것을 달리 “깊다”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설사 보현보살의 현묘한 경지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특별한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또한 사람 사람이 본래로 갖춘 것이어서 “얕다” 할 것은 아니다.
妙有는 得之而不有ㄹ새 眞也를 不可得이며 眞空은 得之而不空일새
묘유는 득지이불유ㄹ새 진야를 불가득이며 진공은 득지이불공일새
假也를 不可得이라 理絶名言이 謂智斷修證일새 故로 云하대
가야를 불가득이라 이절명언이 위지단수증일새 고로 운하대
極微妙也라하니 還會麽아 莫謂如來가 成斷滅하라 一聲이
극미묘야라하니 환회마아 막위여래가 성단멸하라 일성이
還續一聲來로다
환속일성래로다
묘유(妙有)는 이것을 얻되 있지 아니한
까닭에 진(眞)이 있을 수 없으며,
진공(眞空)은 이것을 얻되 공 하지 아니한 까닭에
가(假)라 함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치가 이름과 언어를 여읜다 함은
지혜가 닦아 증득함을 떠나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미묘하다.”고 한 것이다.
도대체 알기나 하는가?
“여래(如來)가 단멸(斷滅)을 이룬다고 하지 말라.
한 소리가 또한 한 소리를 잇대어 오도다.”
☀ 묘하게 있음도 진성(眞性)을 얻어서 있으므로 있으나
있지 아니하여 참됨을 얻을 수 없으며,
참으로 비었음도 진성을 얻어서 비었으므로 비지 아니하여
거짓을 얻을 수 없다.
이름이나 말로는 표현할 수 없고,
지혜는 닦아서 증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극히 미묘하다.”고 한 것이다.
흔히 진공이라고 하면 진공을 터득한 여래는
아무것도 없다[斷滅]고 하지만 그렇게 알지 말라.
실체가 없는 소리도 다시 소리가 이어져서 계속된다.
그것이 묘유이다. 그렇다고 해서 또 묘유에 집착하지 말라.
묘유인 진공이다.
6. 不守自性隨緣成 불수자성수연성
자성을 지키지 않고 인연을 따라 이루도다.
☀ 사람을 위시하여 일체 존재는 현재 상태로 고정되어 있으면서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
자세히 살펴보면 시시각각으로 천변만화하면서 생로병사하고
또 생로병사하고 또 생로병사하면서 무한히 이어진다.
춘하추동이 그렇고 생주이멸이 그렇고 성주괴공이 그렇다.
그러므로 어떤 변화든 모든 변화를 당연한 것으로 알아야 한다.
지극히 미묘한 진성(眞性),
참 마음의 변화무쌍한 작용이야 무엇인들 되지 않겠는가.
인연만 되면 부처도 되고 보살도 되고 지옥, 아귀, 축생 무엇이든 다 된다.
一切法은 本來無性이요 一切性은 本來無住니 無住면 則無體요
一切法은 本來無性이요 一切性은 本來無住니 無住면 則無體요
無體면 則隨緣不碍라 隨緣不碍ㄹ새 故로 不守自性하야
무체면 칙수연불애라 수연불애ㄹ새 고로 불수자성하야
而成十方과 三世矣니라
이성십방과 삼세의니라
일체의 법은 본래 자성이 없음이요
일체의 자성은 본래 안주함이 없으니
안주함이 없으면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으면 인연을 따라 걸리지 아니하고
인연을 따라 걸림이 없기에 자성을 지키지 아니하여
시방과 삼세를 이루는 것이다.
☀ 사람의 이 한 몸이 중생의 몸도 되고, 국토의 몸도 되고,
업보의 몸도 되고, 성문, 연각, 보살, 부처의 몸도 되고,
지혜의 몸도 되고, 법의 몸도 되고, 허공의 몸도 되고
시방과 삼세, 무엇 하나 되지 않는 것이 없다.
自性者는 諸法無相한 本來淸淨之體也니라 會麽아 去年梅에
자성자는 제법무상한 본래청정지체야니라 회마아 거년매에
今年柳여 顔色과 馨香이 捴依舊로다
금년류여 안색과 형향이 총의구로다
捴依舊로다
총의구로다
자성이란 모든 법이 형상이 없어 본래 청정한 체(體)이니라.
아는가?
“지난해의 매화에 금년의 버들이니 안색과 소리가 모두 옛날과 같도다.”
☀ 무엇이든 다 되는 모든 법의 그 자성은 아무런 형상은 없지만 본래로 청정한 그 자체이다.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는 이 도리를 알겠는가?
천 번 태어나고 만 번 태어나면서 성씨도 다르고 얼굴도 다르면서 참 마음인 그 한 물건의 작용은
영원히 변함없다.
7. 一中一切多中一 일중일체다중일
하나 가운데 일체며 많은 가운데 하나로다.
☀ 사람이든 사물이든 일체 존재를 화엄경의 안목으로 보면
모두가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고, 또 많은 것이 하나이기도 하다.
예컨대 손톱만 한 컴퓨터의 칩 속에는 큰 도서관에 있는 수 만권의 책이 다 들어 있으며,
수 만권의 책은 손톱만 한 하나의 칩이다.
또 한 사람은 1백조의 세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세포 하나하나 속에도
또한 한 사람의 모든 정보를 다 가지고 있다.
흙 한 줌이나 돌 하나에도 지구의 수십억 년의 정보가 다 담겨있다.
컴퓨터 칩이나 사람뿐만 아니라
식물이나 모든 사물도 모두가 그와 같은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와 많은 것이 서로서로 수용하면서
각각 독립되어 혼동하지 않는 것이
마치 텅 빈 방에 천 개의 등불을 밝힌 것과 같다.
천 개의 등불을 하나의 방에 밝혔어도 서로서로 방해하지 않고
자신의 빛을 모두 발휘하면서 다른 등불과 조화를 이루고
융화하여 더욱 아름답고 밝게 비춘다.
우리 사람도 70억 인구가 이 지구촌이라는 한 방에 같이 살면서
더욱 융화하면서 즐겁고 환희로워야 하리라.
이것이 화엄경의 안목이다.
所以는 不守自性하야 隨緣而成故니 一法이 無自性故로 具一切하야
소이는 불수자성하야 수연이성고니 일법이 무자성고로 구일체하야
而成一하고 一切法은 無自性故로 以一法으로 而成一切라 是故로
이성일하고 일체법은 무자성고로 이일법으로 이성일체라 시고로
一中에 一切하야 多가 不碍於一하고 一切中에 一하야 一이
일중에 일체하야 다가 불애어일하고 일체중에 일하야 일이
不碍於多니라
불애어다니라
그 까닭은 자성을 지키지 아니하여 인연을 따라 이루기 때문이니 한 법이 자성이 없기에
일체를 갖추어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요.
일체의 법이 자성이 없기에 하나의 법으로써 일체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하나 가운데 일체이어서
많은 것이 하나에 걸리지 않고,
일체 가운데 하나이어서 하나가 많음에 걸리지 않는다.
☀ 만약 사람이나 사물들의 자성이 고정불변하여
그대로 있는 것이라면 어찌 눈 앞에 펼쳐진 것과 같은
천변만화가 성립되겠는가.
인연을 따라 무한히 변화하고 발전하므로
어린아이는 어른이 되고 범부는 성인이 되는 것이다.
또 봄날의 어린싹은 가을에 무수한 결실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런 이치를 모르고 눈앞에 보이는 사실만을 가지고
섣불리 사람들을 판단해 버린다면 그 얼마나 큰 실수인가.
살피고 또 살필 일이다.
伊麽인댄 則一毫端裏에 三世諸佛이 處處度生하고 無邊刹海에
이마인댄 즉일호단이에 삼세제불이 처처도생하고 무변찰해에
一切衆生이 箇箇涅槃이어나와 毫端과 刹海는 空花中의 境界요
일체중생이 개개열반이어나와 호단과 찰해는 공화중의 경계요
諸佛과 衆生도 夢幻中의 物色이라
제불과 중생도 몽환중의 물색이라
이러한 즉, 한 터럭 끝에서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곳곳에서 중생을 제도하며
가없는 세계바다에서 일체중생이 낱낱이 열반하거니와
터럭 끝이든 세계바다든 허공 꽃 가운데의 경계요,
모든 부처님이든 중생이든 꿈과 환영 가운데 물색(物色)이다.
☀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으므로 아주 작은 미세먼지 속에서도 과거 미래 현재의
모든 부처님이 곳곳에서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한다.
또 수십억 광년 저 멀고 먼 세계에 있는 일체중생들은 낱낱이 다 열반에 든다.
작은 미세먼지든 드넓은 우주든 부처든 중생이든 모두가
몽환(夢幻)이며 공화(空華)다.
몽환과 공화를 무엇 때문에 수고로이 붙잡으려 할 것인가.
譬如虛空이 雖遍一切하대 而亦不離於一塵이니 要識虛空建立底消息麽아
비여허공이 수편일체하대 이역불리어일진이니 요식허공건립저소식마아
倚簷山色은 連雲翠요 出檻花枝는 帶露香이로다
의첨산색은 연운취요 출함화지는 대로향이로다
비유하자면 허공이 비록 일체에 두루 하지만
또한 먼지 하나를 떠나지 않음과 같으니라.
허공이 건립하는 바의 소식을 알고자 하는가?“
처마에 기대인 산색은 구름에 연이어 푸르고,
난간을 벗어난 꽃가지는 이슬과 향기를 띄었더라.”
☀ “한 터럭 끝에서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곳곳에서 중생을 제도하며 가없는 세계바다에서
일체중생이 낱낱이 열반하는 도리”를
비유하여 밝히기를 허공은 모든 것에 두루 하지만
하나의 먼지를 떠난 것이 아닌 것과 같다고 하였다.
온 우주 법계가 아무리 드넓다 하더라도
작은 미세먼지에 즉(卽) 해 있어서
시간적으로 한순간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며,
공간적으로 1미리도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설잠스님은 선미(禪味)가 풍기는 선시로 착어(着語)하였다.
“처마에 기대인 산색은 구름에 연이어 푸르고,
난간을 벗어난 꽃가지는 이슬과 향기를 띄었더라.”
8. 一即一切多即一 일즉일체다즉일
하나가 곧 일체며 많은 것이 곧 하나이다.
☀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으며
많은 가운데 곧 하나인 이치가 완연하다면
그것은 저절로 하나가 곧 일체가 되며 많은 것이 곧 하나가 된다.
깨어있는 눈으로 볼 때 우리는 본래로
“하나 가운데 일체며 많은 가운데 하나.”라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융화하여 살아야 한다.
즉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70억이 생각하고 행동하듯이 하고,
70억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설사 서로 다르더라도 곧 한 사람이 하듯이 해야 한다.
그것이 본래로 완벽한 조화의 세계인 화엄장엄세계다.
所以는 一中에 一切며 多中에 一故니 以有一法故로 即有一切하고
소이는 일중에 일체며 다중에 일고니 이유일법고로 즉유일체하고
以有一切故로 即有一法하며 以有衆生故로 即有諸佛하고
이유일체고로 즉유일법하며 이유중생고로 즉유제불하고
以有諸佛故로 即有衆生이라
이유제불고로 즉유중생이라
그 까닭은 하나 가운데의 일체며 많은 가운데의 하나이기 때문이니,
한 법이 있기에 곧 일체가 있고
일체가 있기에 곧 한 법이 있는 것이며,
중생이 있기에 곧 모든 부처님이 있고
모든 부처님이 있기에 곧 중생이 있는 것이다.
☀ 하나 가운데의 일체며 많은 가운데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각각 아무리 다르고 많더라도
근본적으로 차별이 없다.
부처님이 있어서 중생이 있고 중생이 있어서 부처님이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서로서로 걸림이 없고 원융한 이치가 바로 화엄에서 보는 이치이다.
虛空이 無碍하야 生과 佛이 無二요 緣生이 無住하야 因果가
허공이 무애하야 생과 불이 무이요 연생이 무주하야 인과가
同時일새 無量圓因이 不出於刹那하고 無邊果海가 不離於當念이니
동시일새 무량원인이 불출어찰나하고 무변과해가 불리어당념이니
要識虛空動作底消息麽아 竹影掃階塵不動이요 月穿潭底水無痕이로다
요식허공동작저소식마아 죽영소계진부동이요 월천담저수무흔이로다
허공이 걸림이 없어 중생과 부처가 두 가지가 아니고
인연으로 생기는 것이 머무름이 없어서 원인과 결과가 동시이다.
한량없는 원만한 원인이 찰나를 벗어나지 않고
가없는 불과의 바다가 현재의 생각을 여의지 않는 것이다.
허공이 동작하는 바의 소식을 알고자 하는가?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되 먼지는 일지 않고,
달빛이 연못 바닥을 뚫되 물에는 흔적이 없도다.”
☀ 여기에 이어지는 글이 있어서 그 뜻을 더욱 분명하게 하고 있다.
“물은 급하게 흘러도 주변 경계는 항상 고요하고 [水流任急境常靜],
꽃잎은 비록 어지럽게 떨어져도 마음은 스스로 한가하네 [花落雖頻意自閑].”라고 하였다.
지극히 미묘한 참 성품의 자리에서 볼 때 중생이면 무엇하고 부처면 또 무엇 하겠는가?
모두가 한갓 말에 불과할 뿐이다.
선시란 아름다우면서도 여운이 깊고 오래간다.
부디 연이어서 읽고 또 읽어가며 음미하기를 바란다.
죽영소계진부동(竹影掃階塵不動)
월천담저수무흔(月穿潭底水無痕)
수류임급경상정(水流任急境常靜)
화락수빈의자한(花落雖頻意自閑)
굳이 뜻을 다 알 필요가 있겠는가.
반만 알고 반은 남겨뒀다가 다음에 알면 된다.
- - - 7월 30일 여기까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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