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올렸던 글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가 있었던 사천성(四川省) 기강(綦江)을 찾아가면서 호남성 지강(芷江)에서의 일들을 혼동하여 서술함으로써 큰 오류가 있었습니다. 이에 내용을 정정(訂正)하여 다시 올립니다.
사천성(四川省) 기강(綦江)을 찾아서
1.
1937년7월7일 발생한 노구교(蘆溝橋)사건 이후, 일본은 관동군(關東軍)과 조선주둔군을 끌어들였고, 이로 인해 장개석의 국부군(國府軍)과 일제(日帝)사이에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상해(上海)에서 시작된 임시정부(臨時政府)는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서 정세가 장개석군(軍)에 불리해지자 국민당(國民黨)정부가 있던 남경(南京)근처의 진강(鎭江)으로 그리고 이후 다시 장사(長沙)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전황이 불리해짐에 따라 다시 장사(長沙)를 떠난 것은 임시정부가 장사로 옮겨온지 8개월이 되는 1938년7월19일 이른 아침이었다.
1938년10월12일, 일주일 이내에 광주(廣州)시와 부근 각 현진(縣鎭)에 일본군의 침입이 있을 거라는 소식이 들려옴에 따라 장개석군의 정부기관과 대한민국임시정부도 피난을 다시 준비하게 되었고, 1938년 당시 광주(廣州)였던 현 베트남 하이퐁 부근에서 운남성(雲南省)쪽으로 긴 강을 따라 이동하게 되고 당시 중경(重慶)이었던 지금의 판츠화(攀枝花)지역에 안착하게 된다. 이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청사가 위치했던 곳이 현 판츠화(攀枝花)시의 아래쪽 즉 양자강(揚子江)을 건너 남쪽으로 40여리(16-18km)떨어진 곳에 위치한 기강(綦江)지역이었다.
1941년12월9일 임시정부(臨時政府)는 일제(日帝)에 대해 역사적인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했다.
2.
일제(日帝)는 1945년 8월6일과 9일의 원자폭탄 세례를 받고, 동월 15일 포츠담 선언 수락 및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고 9월 2일 도쿄 만(灣)에 정박한 미주리함에서 연합국 대표단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장개석(蔣介石) 당시 중화민국 국방최고위원회 위원장은 9월3일을 경축일로 정하고 이어 9일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에서 약 20분간 항복 서명식을 가졌다.
1937년7월 이후 벌어진 중일전쟁은 1945년 8월21∼23일 호남성 지강(芷江)에서의 ‘수항(受降·항복 접수)’으로 끝났다. 일제(日帝)는 이곳에서 중국 전역에 배치된 100여만 일본군의 배치도를 제출하고 무장해제 등 항복 절차에 관한 명령이 적힌 ‘비망록’을 받았고 대륙 내 일본군 항복의 세세한 내용과 남경(南京)의 항복 서명식 등이 호남성(湖南省) 지강(芷江)에서 결정됐다.
김준엽(金俊燁,1920-2011)선생은 그의 항일독립투쟁 기록인 ”장정(長征)“에서 당시 100만의 일본군 중에 한적(韓籍)사병(士兵)이 약 10만명이었고, 장개석과 웨더마이어의 협조아래 이들을 교육시켜 모조리 조선광복군(KIA)에 편입시키고, 조선독립군 총사령관(總司令官) 이청천(李靑天)장군이 말을 타고 늠름한 모습으로 정식적인 사열(査閱)을 받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비록 반도라는 초라한 지역이었으나 조선광복군 10만을 이끌고 들어가 일시에 친일파와 왜놈을 척결하고 사회를 안정시켜 부국강병을 일순간에 이룩할 혜안(慧眼)을 백범(白凡)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가지고 있었으나 역사(歷史)의 신(神)은 우리 조선민족(朝鮮民族)에게 다시 한번 뼈아픈 고통의 시간을 예정하고 있었으니 바로 반도의 관할권이 1945년9월1일을 기해 무지한 미군(美軍) 사령관인 맥아더에게 넘어갔던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며 김준엽 선생은 ”千秋의 恨‘이라 울부짖고 있다. 그 10만의 무장 광복군(光復軍)이 반도에 들어왔던들 어찌 남북한 전쟁이 있었을 것이며, 이승만의 독재이후 40년동안 질곡(桎梏)의 역사가 있을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어리석은 후인들이 간교한 독재자와 친일파들이 왜곡 기술한 역사의 똥물에 빠져 맥아더가 대한민국(大韓民國)존립에 심각한 부작용을 가져온 어리석은 미국 장성이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일제의 항복을 전후해 국민당(國民黨)육군총부(陸軍總府)는 남경(南京)에서 지강(芷江)으로 옮겨와 항복절차를 총지휘했으며, 지강(芷江)에 항일전쟁승리기념관을 세우고 1년내내 무료 개방했다.
1945년8월21일 오전11시반 지강(芷江)공항에 도착한 이마이 등 대표단은 항복의 뜻으로 백기(白旗)를 단 차량을 타고 기강(綦江)에 오후3시40분쯤 도착했고 일본 대표단 신분 확인과 일본군 병력 배치도 및 항복 절차에 관한 ‘1호 비망록’ 접수 등 첫 의식은 오후 4시부터 1시간가량 진행되었다.
당시 일본의 항복은 국민당(國民黨)과 장개석(蔣介石)이 받았다.
지강(芷江)은 예로부터 ‘전검문호(滇黔門戶-雲南省과 貴州省으로 통하는 문) 전초인후(全楚咽喉-초나라 전체로 통하는 목구멍)’라는 말이 있듯 중국 서남부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여서 장개석은 1936년부터 이곳에 비행장을 짓기 시작했다.
당시 지강(芷江)공항은 상해(上海)의 홍교(虹橋)공항 다음으로 규모가 커서 많은 대표단이 참가할 수 있어 국민당 정부는 이곳을 수항식(受降式)장소로 선택하게 되었다.
또한 기록에 따르면, 지강(芷江)에서 일본과 국부군(國府軍)이 1945년4월9일부터 6월9일까지 ‘최후의 전면전’을 벌인 것도 이곳이 수항식(受降式)장소로 결정된 이유 중 하나이며 ‘상서(湘西)회전’ 또는 ‘지강(芷江)보위전’으로도 불리는 이 전투에서 일본은 1만5,676명, 중국은 1만2,483명이라는 많은 사람이 숨졌다고 한다.
현재 지강(芷江)은 지명이동되어 대륙조선 호서(湖西)지역에 위치했던 계룡산(鷄龍山)과 차현(車峴)의 좌측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귀주성(貴州省)과 호남성(湖南省)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의 사천성(四川省)과 귀주성(貴州省)의 경계가 기강(綦江)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역사기록을 중심으로 놓고 고찰해 보면, 현 귀주성(貴州省)이 바로 역사의 한족(漢族)강역상 호남성(湖南省)이 되므로, 장개석(蔣介石)이 일제(日帝)로부터 수항식을 받은 지강(芷江)의 원래 위치는 현 운남성(雲南省)과 귀주성(貴州省)의 경계위치로 비정되어야 타당성을 갖게 되는데, 확연히 보이는 커다란 비행장을 염두에 두고 찾아보면 검서남포의족묘족자치주(黔西南布依族苗族自治州)지역이 유력하게 떠오르게 된다.
3.
현재의 지명이동된 지리(地理)를 보면 중경(重慶)에서 기강(綦江)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75km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몇몇 독립투사들의 기록은 일관되게 중경(重慶)에서 양자강(揚子江) 건너 아래쪽으로 약40리길(16-18km)거리에 기강(綦江)이 위치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를 지도로 고찰해 보면 아래와 같다.
2022.12.30. 松溪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송계 선생님,
귀한 글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도 건필하시길 기원드립니다~^^
호심인님 그동안 별거 없으셨는지요? 올 한해 무탈하게 그리고 건강하게 지내시길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