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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사평론 - 정론직필을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하나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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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맥아더 포고령
맥아더 포고령´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소개합니다. Proclamation No. 1 by General of the Army Douglas MacArthur To the People of Korea: As Commander-in-chief, United State Army Forces, Pacific, I do hereby proclaim as follows: By the terms of the Instrument of Surrender, signed by command and in behalf of the Emperor of Japan and the Japanese Government and by command and in behalf of the Japanese Imperial General headquarters, the victorious military forces of my command will today occupy the territory of Korea south of 38 degrees north latitude. Having in mind the long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nd the determination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the Korean people are assured that purpose of the occupation is to enforce the Instrument of Surrender and to protect them in their personal and religious rights. In giving effect to these purposes, your active aid and compliance are required. By virtue of the authority vested in me as Commander-in-Chief, United States Army Forces, Pacific, I hereby establish military control over Korea south of 38 degrees north latitude and the inhabitants thereof, and announce the following conditions of the occupation : Article I All Powers of Government over the territory of Korea south of 38 degrees north latitude and the people thereof will be for the present exercised under my authority. Article II Until further orders, all governmental, public and honorary functionaries and employees, as well as all officials and employees, paid of voluntary, of all public utilities and services, including public welfare and public health, and all other persons engaged in essential services, shall continue to perform their usual functions and duties, and shall preserve and safeguard all records and property. Article III All persons will obey promptly all my orders and orders issued under my authority. Acts of resistance to the occupying forces or any acts which may disturb public peace and safety will be punished severely. Article IV Your property rights will be respected. You will pursue your normal occupations, except as I shall otherwise order. Article V For all purposes during the military control, English will be the official language. In event of any ambiguity or diversity of interpretation or definition between any English and Korean or Japanese text, the English text shall prevail. Article VI Further proclamations, ordinances, regulations, notices, directives and enactments will be issued by me or under my authority, and will specify what is requried of you.Seventh day of September 1945Douglas MacArthurCommander-in-Chief, United StatesArmy Forces, Pacific
태평양방면 미육군총사령관 맥아더 포고령 제1호 조선인민에게 고함.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으로서 나는 이에 다음과 같이 포고함. 일본 국 정부의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항복은 우 제국(諸國) 군대간에 오랫동안 속행되어온 무력투쟁을 끝냈다. 일본천황의 명령에 의하여 그를 대표하여 일본국 정부와 일본 대본영이 조인한 항복문서 내용에 의하여 나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 조선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하고 조선인민은 점령목적이 항복문서를 이행하고 자기들의 인간적 종교적 권리를 보호함에 있다는 것을 새로히 확신하여야 한다. 태평양방면 미국육군부대 총사령관인 나에게 부여된 권한에 의하여 나는 이에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조선주민에 대하여 군사적 관리를 하고자 다음과 같은 점령조건을 발표한다. 제1조.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통치의 전권한은 당분간 나의 권하하에서 시행한다. 제 2조. 정부의 전 공공(公共) 및 명예직원과 사용인 및 공공복지와 공공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 기관의 유급(有給) 혹은 무급 직원 및 사용인과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기타의 모든 사람은 새로운 명령이 있을 때까지 그의 정당한 기능과 의무를 실행하고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 보호해야 한다. 제3조. 모든 사람은 급속히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하에 발한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부대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혹은 공공안녕을 문란케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이다. 제4조. 제군(諸君)의 재산소유 권리는 존중하겠다. 제군은 내가 명령할 때까지 제군의 정당한 직업에 종사하라. 제5조. 군사적 관리를 하는 동안에는 모든 목적을 위하여서 영어가 공식언어이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혹은 일본어 원문간에 해석 혹은 정의에 관하여 어떤 애매한 점이 있거나 부동(不同)한 점이 있을 때에는 영어 원문이 적용된다. 제6조. 새로운 포고, 포고규정 공고, 지령 및 법령은 나 혹은 나의 권한하에서 발출(發出)될 것으로 제군에 대하여 요구하는 바를 지정할 것이다. 1945년 9월 9일 http://815family.or.kr/board/view.php?id=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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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태평양 방면 총사령부 포고령 제2호 본인이 지휘하고 있는 군대의 안전과 점령지역에서 공공의 치안을 위해 미 태평양방면 총사령관으로서 본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어떤 사람도 항복문서의 조항과 또는 미 태평양방면 총사령관의 권한 아래 내려진 포고, 명령, 지시에 위반하거나, 미국과 그 연합국의 국민 또는 재산의 질서, 생명, 안전, 치안을 해치는 행위, 공공의 안녕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 정의로운 행동을 수행하지 못하게 하는 행위, 또는 연합국에 대하여 고의로 적대행위를 하는 자는 점령군의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포함한 기타의 판결에 처해질 것이다.
1945 년 9월 11일 요꼬하마에서 미 태평양방면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http://cafe.daum.net/jeoneupsar/8TFS/21?q=%B8%C6%BE%C6%B4%F5%20%C6%F7%B0%ED%B7%C9%202%C8%A3&r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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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사령관 치스차고프 포고문(1945. 8. 25) 조선 인민들에게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연합국 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 략탈자들을 몰아냈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신조선 역사의 첫 페이지가 될 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노력과 고려(顧慮)의 결과이다. 이와 같이 조선의 행복도 조선 인민이 영웅적으로 투쟁하며 꾸준히 노력하여야만 달성할 수 있다. 일제의 통치하에 살던 고통의 시일을 추억하라! 담위에 놓인 돌멩이까지도 괴로운 노력과 피땀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가?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일하였는가? 왜놈들이 고대광실(高臺廣室)에서 호의호식하며 조선 사람들을 멸시하며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모욕한 것을 당신들이 잘 안다. 이러한 노예적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진저리나는 악몽과 같은 그 과거는 영원히 없어져 버렸다. 조선 인민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여러분들 수중에 있다. 여러분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여러분에 달렸다. 붉은 군대는 조선 인민이 자유롭게 창조적 노력에 착수할만한 모든 조건을 만들어 놓았다. 조선 인민은 반드시 스스로 자기 행복을 창조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공장, 제조소 및 공작소 주인들과 상업가 또는 기업가들이여! 왜놈들이 파괴한 공장과 제조소를 회복시켜라! 새 생산 기업체를 개시하라! 붉은 군대 사령부는 모든 조선 기업소들의 재산을 보호하며 그 기업소들의 정상적 작업을 보장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원조할 것이다. 조선 노동자들이여! 노력에서 영웅심과 창작적 노력을 발휘하라. 조선 사람의 훌륭한 민족성 중 하나인 노력에 대한 애착심을 발휘하라. 진정한 사업으로써 조선의 경제적 및 문화적 발전에 대하여 고려하는 자라야만 모국 조선의 애국자가 되며 충실한 조선 사람이 된다. 해방된 조선 인민 만세! 붉은 군대 사령부 http://www.lightearth.net/index.php?mid=history&page=6&document_srl=58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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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문서 내용에 의하여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 조선인민은 점령목적이 항복문서를 이행하고 자기들의 인간적 종교적 권리를 보호함에 있다는 것을 새로히 확신하여야 한다. 항복문서의 조항과 포고, 명령, 지시에 위반 점령군의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포함한 기타의 판결에 처해질 것이다. |
미국이 일본을 대신해서 조선영토를 점령하는데 그 목적은 항복문서를 이행함에 있으며 반항하면
사형에 처해질 수 있음
남한의 정치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관심과 애정이 있는 분들은 (꼭두각시 조정을 통하여)조선점령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쉬 알아차리실 수 있죠
미국이 항복문서를 이행하기 위해 조선영토를 점령한다는데... 그 숨은 의미를 찾자면 긴 역사의
맥락을 살펴봐야 합니다. 지금부터 써내려가는 얘기는 검증되거나 치밀한 분석에 의한 결과가
아님을 주의하시고 본인의 가치관과 다르거나 하더라도 이런 생각도 있구나! 하시면서 너그러이
양해해 주세요
Ⅱ. 조선의 역사
1.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E. H. 카)라고 주장하는 유명한 분도 계셨죠
제 생각에는 역사란 역사가 등이 과거가 기록된 역사(이하 ‘기록된 역사’)와 이긴 놈이 이 역사를
고쳐 쓴 역사(이하 ‘고쳐 쓴 역사’) 사이를 갈팡질팡 하면서 만들어 놓은 과거를 인식하는 사고체계
라는 것입니다
2. 고쳐 쓴 역사
일본이라는 유대의 사냥개가 조선사편수회 등를 통하여 조선의 기록된 역사를 장장 24년에 거쳐
고쳐 썼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고쳐 쓴 역사를 잘 배우고 있죠^^
이 고쳐 쓴 역사는 우리들의 과거역사에 대한 사고체계로 확고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일제는 조선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취조국을 두었고, 그 역할은 1915년 중추원 편찬과, 1922년 조선총독부 직할의 조선사편찬위원회를 거쳐 1925년 조선사편수회가 담당하게 되었다. 일본과 조선의 학자들이 자료 수집과 집필에 참여하였고, 1938년 《조선사》 37권이 간행되었다. -위키백과사전 참조- |
일본의 조선사 말살 진행과정과 실제 [ 최태영박사 ] ......1985년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으로 있던 서희건씨의 『단군조선은 이렇게 말살됐다』를 장기 연재할 수 있도록 지면을 할애해 주고 격려를 해준 분들이 안병훈(安秉勳; 1938∼) 조선일보 전무(편집인), 인보길(印輔吉; 1940∼) 디지틀조선일보 대표이사, 조병철(曺秉喆; 1935∼) 전 주간조선 주간(전 조선일보 편집국장대우), 이남규(李南圭; 1936∼) 전 조선일보 편집부국장 겸 문화부장입니다. 1910년 한국을 강탈한 일제는 심지어 우리 소학교(현 초등학교) 교과서까지 거두어 불태웠습니다. 1910년 8월 29일 한국을 강탈한 일제는 1906년에 설치했던 통감부를 '조선총독부'로 바꾸고, 1910년 10월 1일 관보(官報)를 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하면 일본 군부의 최고 권력자였고, 한국민의 민족운동을 압살했던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 케(寺內正毅)는 취임하자, 1910년 11월부터 전국의 각 도·군 ·경찰서를 동원하여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 속된 제1차 전국 서적 색출에서 '단군조선' 관계 고사서 등 51종 20여만권의 사서를 수거·불태웠다고 광복 후 출간된 ≪제헌국회사≫와 문정창(文定昌)씨의 저서인 ≪군국일본조선 강점36년사≫는 밝히고 있습니다. 사료 수집기간은 1910년 11월부터 ≪조선사≫ 완간 직전인 1937년까지 27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단군조선 등 우리의 역사를 왜곡·말살 하기 위해 마련한, 1938년 6월에 발행된 ≪조선사편수회사업 개요(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에서는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동안 차입한 사료가 무려 4천 9백 50종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1910년 11월부터 1년 2개월 동안 수거된 서적이 51종에 20여 만권이라면, 그 뒤 15년 동안 차입한 사료가 4천 9백 50종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우리 서적을 압수하고, 불태웠는지 알 길이 없는 것이지요.......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4∼7면을 보면, 한국사료의 대량 분서와 한국사의 왜곡편찬 배경을 극명하게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서(즉 왜곡된 역사서)를 읽히는 것이 조선인에 대한 동화(同化)의 목적을 달성하는 첩경이며, 또한 그 효과도 현저할 것이다…. 이것이 조선반도사 편찬이 필요한 이유 요, 또한 편찬사업의 근본정신이다} 조선총독부가 중추원을 앞세워 전국적으로 각 도청·군청· 경찰서 등 위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벌린 제2차 '사료수색' 에서는 '역사'와 '전통문화예술' 그리고 '인물' 등 압수범위도 오히려 늘어났습니다. 헌병경찰제도로 무단통치를 강행했고,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말살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던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일본 내각 총리대신으로 전임하고, 그 뒤 3·1운동을 철저히 탄압 했던 제2대 총독에 이어, 1919년 8월 12일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교활하게도 한국사람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소위 '교육시책'에서 {먼저 조선사람들의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선조와 선인들의 무위(無爲), 무능과 악행 등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사적, 일본인물, 일본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라고 1922년 총독사이토가 '조선사편수사업'을 지휘하며 말하기도 했습니다 http://blog.daum.net/rione30/17044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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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심지어 우리 소학교(현 초등학교) 교과서까지 거두어 불태워 1910년 11월부터 전국의 각 도·군 ·경찰서를 동원하여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51종 20여만권의 사서를 수거·불태웠다 1938년 6월에 발행된 ≪조선사편수회사업 개요(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에서는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동안 차입한 사료가 무려 4천 9백 50종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4∼7면 새로운 사서(즉 왜곡된 역사서)를 읽히는 것이 조선인에 대한 동화(同化) 이것이 조선반도사 편찬이 필요한 이유 조선사람들의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 선조와 선인들의 무위(無爲), 무능과 악행...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 |
일제는 심지어 우리 소학교(현 초등학교) 교과서까지 거두어 불태워
소학교 교과서에 반만년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황하문명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으니 전부 수거해서
불태웠겠죠.
※ 황하문명(중화(中華)문명): 대륙의 중심 황하유역 황제가 계신 지역(중국)에서 찬란한 문명의
꽃이 피었는데 이를 중화라 표현하고 사해(중국에서 동서남북으로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 사는
지역)의 여러 나라(소화)에도 중화의 꽃을 피우고자 했던 것이 중화사상임
51종 20여만권: 대략 1종에 3,921권 정도네요
4천 9백 50종: 위에 기준을 적용하면 4천 9백 50종은 19,108,950권?
당시에 대량인쇄기술이 없어 목판이나 금속활자로 출판하던 때에 1천9백만권이면 한반도는
최고의 출판문화국이라는 것인데...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네요...
하여튼 당시 (영국)유대의 괴뢰로 전락된 왜놈들은 유대의 명에 의해 중화문명의 역사기록을
말살했고 그중 중요한 사서들은 황실에서 비밀리에 보관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새로운 사서...조선반도사 편찬
고쳐 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새로 만들었다네요... 반만년 중화(조선)의 역사를 반도에 꾸겨 넣으려니
얼마나 머리가 아팠을까요?
새로운 사서...조선반도사 편찬이 필요한 이유
조선사람들의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선조와 선인들의 무위(無爲), 무능과 악행 등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
조선사를 반도에 꾸겨 넣었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지우고 선조와
선인들의 무위(無爲), 무능과 악행 등을 과장해서 조선사를 아예 쓰레기로 만들려고 했군요
3. 고쳐 쓴 역사가 아닌 기록된 역사
기록된 역사를 보시면 고려는 지방을 성으로 나누었고, 조선은 유교사관(중화사상)에 의해 8도로
나누었습니다.
고려사 공민왕편(19년 6월)에 향시 선발 정원(출처: 공민왕 19년(1370) 경술년) 1. 향시(鄕試)에서는 각 성(省) 및 직할 부(府)·주(州) 등지를 모두 합해 5백 명을 선발 정원으로 한다. 인재가 많은 지역은 정원수에 얽매이지 않으며, 만약 인재가 부족해 정원을 채우지 못할 경우 실제 형편에 따라 공생(貢生)을 충원한다. 각 성의 정원은 다음과 같다. 하남성(河南省) 40명, 산동성(山東省) 40명, 산서성(山西省) 40명, 섬서성(陝西省) 40명, 북평성(北平省) 40명, 복건성(福建省) 30명, 강서성(江西省) 40명, 절강성(浙江省) 40명, 호광성(湖廣省) 40명, 광동성(廣東省) 25명, 광서성(廣西省) 25명. 수도에서 치르는 향시의 정원 및 직할 부와 주의 정원은 합해 1백 명으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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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 서문 (http://blog.naver.com/stsanha/140005726144) 공손히 생각건대, 우리 태조 강헌대왕이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한양에 도읍을 정하시어 열성(列聖)이 서로 이으니, 강토가 날로 개척 되어 8도(道)로 정하였으니, 사방의 복판에 있는 것을 경기라 하고, 서남은 충청, 동남은 경상, 남쪽에 치우친 것은 전라, 정동은 강원, 정서는 황해, 동북은 영안(永安 함경(咸鏡)), 서북은 평안이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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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도는 주역의 8괘의 차용이며 도(道)는 방향(길), 진리의 의미로 황제의 도가
대륙전체 중심과 7방향으로 펼쳐져 천하가 교화된다는 중화사상을 상징하고 있음
※ 중국(중화)의 의미
훈민정음 언해(訓民正音諺解)는 한문으로 된 《훈민정음》에서 어제 서문과 예의(例義) 부분만을 훈민정음 언해는 대개 15장으로 되어 있다. 판본은 몇 가지가 전하고 있으며 1459년(세조 5년)에 간행된 《월인석보》 권두(卷頭)에 실려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으로 합본된 월인석보본과 박승빈(朴勝彬)이 가지고 있다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의 육당문고에 소장된 판본이 주로 활용되는 판본이다. 일본 궁내성과 일본인 학자가 가지고 있는 판본도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D%9B%88%EB%AF%BC%EC%A0%95%EC%9D%8C_%EC%96%B8%ED%95%B4
http://cafe.daum.net/bushcraft/KBmJ/1801?q=%C8%C6%B9%CE%C1%A4%C0%BD%20%BE%F0%C7%D8%BA%BB&re=1
中 듕 國 ·귁 은 皇 황 帝 ·뎽 :겨 신 ·나 라 히 ·니 ·우 ·리 나 ·랏 常 썅 談 ·땀 ·애 江 강 南 남 ·이 ·라 ·하 ·나 니 ·라 |
훈민정음 언해(訓民正音諺解) 1-2쪽 사이에 중국의 뜻을 다음과 같이 언해했습니다.
中 듕 國 ·귁 은 皇 황 帝 ·뎽 :겨 신 ·나 라 히 ·니 ·우 ·리 나 ·랏 常 썅 談 ·땀 ·애 江 강 南 남
·이 ·라 ·하 ·나 니 ·라
중국(中國) = 황제가 계신 나라 = 우리나라 쌍땀(常谈)에 강남
※ 常谈: 늘 하는 말. 일상적인 이야기. 평범한 말.
(다음 중국어 사전 http://dic.daum.net/word/view.do?wordid=ckw000012677&q=%E5%B8%B8%E8%AB%87)
‘우리나라 쌍땀(常谈)에 강남’이라는데 쌍땀(常谈)은 지금은 중국어로 분류되 있네요
‘늘 하는 말. 일상적인 이야기. 평범한 말.’이란 현지 사람들이 쓰기 시작해서 널리
쓰이게 된 말이라는 의미로 강을 눈으로 보고 사는 현지 사람들이 강(당시 황하강 중류
)의 남쪽을 강남이라고 부르기 시작해서 강남이라는 지명이 전국적으로 통용된 경우죠
이와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도 서울 한강 이남의 땅을 서울 사람이 눈으로 보기에 강의
남쪽이니 강남이라고 불렸으며 이 현지어가 전국적으로 통용되었죠
왜놈들이 반만년 찬란한 문명을 일으킨 황제국(중국) 역사를 왜곡하려니 너무나 방대하여
차마 엄두가 나지 않은 바, 근 30년간 전국방방곡곡의 사서를 이 잡듯이 뒤져서 앞에
3000년 단군의 역사는 싸그리 말살하고 나머지 역사는 한반도에 구겨 넣었는데...
목숨을 걸고 꽁꽁 숨겨 왔던 이런 사서(훈민정음언해본)가 세상에 나오면 악질 조작질이
탄로가 나죠
3000년 단군의 역사는 싸그리 말살하고 눈이 안 감겨 죽지 못하겠는지 단군에 대해
양심선언 했지만 삼국 이후에 대한 역사 왜곡은 (현재진행형이라) 차마 고백하지는
못 하고 지옥 불에 떨어졌네요.
단군은 신화아닌 우리국조 - 원로 문헌 사학자 이병도(이병도)씨 조선일보 특별기고 - 〈조선일보 1986년 10월9일(목)자〉 다음글은 일제사관의 앞잡이 '이병도'씨가 단군은 신화라고 주장하다가 죽기전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입니다. *순한글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신문을 그래픽으로 올렸습니다. 1-1."역대왕조의 단군제사 일제때 끊겼다" 대체 천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지만 그중에서 천을 군장의 뜻으로 해석할 때에는 개천절은 즉 「군장을 개설한다」는 것이 되므로 개국, 건국의 뜻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이른바 개천은 즉 최고 시조인 단군의 즉위와 개국을 의미하는 개천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1-4.당시 평양은 다른 곳 ...김부식이 평량이 선인(단군)왕검의 댁이라고 명기...우리 민족이 여러차례의 국난을 겪으면서도 단군묘에 제사하며 국가의 대행사인 축제때에는 노래(세년가)에 의하여 단군의 사적을 전해 내려온 사실은 너무도 명확하다. 세종실록권40 세종10년 무신6월조에 유관의 상서를 보면 문화현 구월산 동령허리에 신당이 있는데 어느 때에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북벽에 환웅천왕, 동벽에 환인천왕, 서벽에 단군천왕을 모셨는데 문화현 사람들은 이를 삼성이라고 일컬으며 산아래 부락을 성당리라고 한다고 하였다. 유관은 그 상서중에서 「구월산은 현의 주산이던 단군조선 때에는 아사달산이라고 하였으며... 1-5.두 수의 시에 나타나 문화의 동쪽에 장장이라고 하는 지명이 있다. 부로들이 전하기를 단군의 도읍지라고 한다‥」하였으며 「구월산하에는 환웅을 남면으로 모시고 동서향으로 환인과 단군을 모신 삼성당이 지금도 존재하며 단군이 입도하였다는 자취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문헌비고에 의하면 조선조 성종13년에 황해도 관찰사 이예지의 말에 좇아서 구월산에 삼성묘를 세우고 평낭(토량)의 단군묘의 예에 따라서 매년 향축을 보내어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권42 문화현사묘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삼성사는 환인 환웅 단군의 사이다. 춘추로 제사를 지내며 가물 때 빌면 효험이 있다.」「동국여지승람 권51 평낭조」에 보면 두 수의 시를 통하여 「개국한 지가 멀고 먼 단군은 조선시조이다... 거금 사천년이며 단군묘를 남겼다」고 하였는데... 1-6.세종때 새 사당 지어 문헌비고 권13 여지고1 역대국계1에서는 단군조선국을 첫머리에 싣고 유사의 기록을 인용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백악은 지금의 문화현이며 구월산의 본명은 궐산인데 단군의 궁궐터가 있기 때문이다. 궐산은 소리를 느리게 내어 궐산이 구월산으로 와전되었으며 구월산의 장당경은 또 장장평으로 와전되었을 것이다. 세종때의 사은주부 정척(정척)의 상서에 의하면 「평낭의 기자사당에 가보니... 이상에서 보면 단군은 역대왕조에서는 국조로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었으니...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 인용 http://cafe.daum.net/emptymyself/FzQo/117?q=%C0%CC%BA%B4%B5%B5%20%C0%AF%BE%F0&r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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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황조에서는 단군을 국조로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냈으며 아사달은 한반도 평양이 아니라
고구려의 평양이 있었던 구월산(문화현 동쪽 장장)임
구월산 동령허리에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삼성당이 있으며 조선조 성종13년에 삼성묘를 세움
(구월산) 평낭(토량)에는 기자사당과 단군묘가 있음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구월산(九月山)은 현 중국대륙 중원인 산서성 예성현 구봉산(九峰山)임
이 부근에 아사달 궁성터, 삼성당, 삼성묘, 기자사당, 단군묘 등이 지금도 있을 가능성이 있음
http://blog.joins.com/media/index.asp?page=52&uid=slsung&folder=0&viewTyp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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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서성 최남단 황하변 예성현(芮城縣)에는 영락진(永樂鎭)이라는 지명이 있고, 원래 그곳에는 영락궁(永樂宮)이라는 행궁이 있었다. 역사상 영락이라는 연호를 쓴 황제는 고구리 광개토호태왕과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 뿐이다.......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4554
한단고기/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 王介甫曰淵蓋蘇文非常人也...... 墓在雲山之九峰山也 연개소문의 묘는 운산의 구봉산 http://blog.daum.net/rkdauddbs/16487501?srchid=BR1http://blog.daum.net/rkdauddbs/16487501
중국, 의자왕·연개소문 아들 묘 등 조사중국의 허난 성 뤄양 시 망산 일대 고분 문물에 대한 조사 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이 곳에 있는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의 묘지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중국 언론에 따르면, 일명 ‘북망산’으로 널리 알려진 이 일대에 대한 조사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이 일대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뒤 끌려왔거나 망명했던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과 남산, 백제 의자왕의 아들 융, 흑치상지 장군 등의 묘지도 있어, 관련 자료가 발굴될 수 있을 지 주목된다. 입력시간 : 2006-11-07 14:24 http://kids.hankooki.com/lpage/news/200611/kd2006110714234877120.htm |
현 중국대륙 중원인 산서성 예성현 구봉산(九峰山) 아래 영락진(永樂鎭)... 영락궁(永樂宮)
영락이라는 연호...고구리 광개토호태왕과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 뿐
단군조선의 아사달(구월산=구봉산)이 고구려 평양성이었고 여기에 고구려 광개토호태왕의
영락궁이 있었음
연개소문의 묘는 운산의 구봉산
아들들(남생과 남산)이 미치지 않고서야 한반도 평양에서 수천리 떨어진 산서성 구봉산에
아버지를 묻나요?
섬서성 장안(서안)이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고 수당의 대군으로부터 황제국을 호위한 4천년
역사상 최고의 영웅(신채호 평)이 었기에 국조 단군이 묻힌 구봉산(=구월산)에 같이 묻힌 거죠.
허난 성 뤄양 시 망산 일대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과 남산, 백제 의자왕의 아들 융, 흑치상지 장군 등의 묘지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과 남산은 지들끼리 권력 다툼을 하다 결국에는 당(신라)에 투항하고
신라의 수도인 낙양(뤄양)에 동북쪽 북망산(北邙山)에 묻혔음
홍만종의 소화시평 362쪽 최기남의 한식도중에 보면, 최기남은 동양위 신익성의 궁노로 호는 구곡이다 그의 한식도중은 다음과 같다. 샛바람 가랑비에 긴 방죽 지나려니 풀빛은 안개와 어우러져 바라볼수록 아득하구나 한식날 북망산 가는 길에는 들까마귀 백양숲에 날아올라 우네 http://cafe.daum.net/greatchosunsa |
고전번역총서 >간이집 >간이집 제7권 >송도록(松都錄) > 북망(北邙)에서 옛날 성곽 동북쪽으로 꽉 들어찬 무덤들 / 古城東北塚??당시에 나라가 망하는 걸 누워서들 보았겠지 / 臥閱當年國祚移다사다난한 인생 접고 이제 잠시 쉬는 몸들 / 多疊如今應暫定그대들 앎이 없는 것이 나그네 오히려 부럽도다 / 客心猶羨子無知 http://cafe.daum.net/greatchosunsa |
갈암집 별집 제4권 김씨(金氏)에게 출가한 누이에 대한 제문 아, 슬프다 / 嗚呼痛哉내 차마 내 누이를 묻을 수 있으랴 / 吾尙忍埋吾妹也乎 ...... 상여가 북망산으로 돌아가서 / 輀車返於石邙누님의 묘 옆에 자리했으니 / 依姊氏之幽宮 http://cafe.daum.net/coreahistech |
한국민속문학사전 >판소리 >단가 <한로가(恨老歌)> ......초로같은 우리 인생은 아차 한번 죽어지면, 육진장포 일곱 매를 상하를 질끈 묶어 소방산 대뜰 위에 떵그렇게 올려 매고, 북망산으로 돌아들어 사토로 집 삼고, 송죽으로 울을 삼아, 두견 접동 벗이 되니, 산은 첩첩, 밤은 깊은데...... http://folkency.nfm.go.kr/munhak/dicPrint.jsp?DIC_ID=7629&xslUrl=dicPrint_Pop.jsp&printYN=Y |
[판소리]사철가 가사(구전문학) 어화 세상 벗님네들 이내 한말 들어 보소인간이 모두가 백년을 산다고 해도병든 날과 잠든 날 걱정 근심 다 제하면단 사십년도 못 살 인생아차 한번 죽어지면 북망산천의 흙이로구나사후에 만반진수 불여생전 일배주만도 못하느니라. ....................................# 설화나 민요가 춘향전이 그러하듯이면면히 내려온 구전문학에는우리 한겨례의 혼이 서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http://upman4u.egloos.com/6575672 |
북망산(北邙山)은 신라와 백제의 왕과 지배계층 등 많은 조선의 무덤이 있으며 이 주변에
조선인들이 살았음
시는 개인적인 감정을 노래하는 것으로 정신병자가 아니고야 거짓을 적을 리 없고
민요, 판소리 등 구전문학은 자신들이 공감하지 않는 거짓내용이 구전될 수 없으며 많은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오면서 한 개인만이 아닌 전체 백성의 한과 혼이 서려 있음
※ 중화(中華)사상
황제가 계신 중국(中)에서 문자를 기반으로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우고(華) 가운데
높이 솟은 태양(태극=황제=명황)의 밝은 빛이 사해(중국 주위의 동서남북 동이, 서융,
남만, 북적)를 밝게 비춰 사해의 여러 소국(小)에서도 찬란한 문명의 꽃이 피도록(華)
하자는 사상
조선 황제국의 국조 단군왕검의 건국이념인 광명개천(光明開天),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제세이화(濟世理化)≒이화세계(理化世界)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상
조선 황제국을 배신하고 왜놈들의 하수인이 된 이병도가 죽기전에 양심고백 했듯이
역대 조선황조에서는 국조 단군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면서 단군의 건국이념을 가슴에
깊이 세기고 이를 천하에 실현하고자 헸음
※ 명황(明皇): 태양과 같이 밝은 빛을 백성에 비춰주는 명철하신 황제
조선왕(황)조실록에 이 명황이라는 단어가 수도 없이 들어 있는데 조선사편수회에서 역사를 고쳐 쓰면서
전부 명나라 황제로 그 행위 주체를 뒤 바꾸는 왜곡을 해 놓았음
실록은 오로지 황조(중화)에서만 쓰는 것으로 세계에서 고려와 조선 밖에 없었으며 기타 제후국(소화)들의
역사는 조선시대에 (중국) 23사(명사, 청사는 이후 작성)로 정리되어 있었음
목민심서 서(牧民心書序)
...講修己之學。旣而曰學學半。乃取二十三史及吾東諸史及子集諸書。選古司牧牧民之遺跡。上下紬繹。彙分類聚。以次成編。而南徼之地。田賦所出。吏奸胥猾。弊瘼棼興。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M&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M&seojiId=kc_mm_a597&gunchaId=av012&muncheId=07&finId=079&NodeId=&setid=138788&Pos=0&TotalCount=24&searchUrl=ok
주7) 23종의 중국 역사서. 중국 역대의 정사에는 25종이 있는데 ,즉 사기, 한서,후한서,삼국지,진서,송서,남제서,양서,진서,후위서,북제서,후주서,수서,남사,북사,구당서,신당서,구오대사,신오대사,송사,요사,금사,원사,신원사,명사.이것을 통칭 25사라고 한다. 이중 신원사를 빼고 24사라고 한다. 다산이 말한 23사란 알 수 없다. -목민심서 1권 정약용저 민족문화추진회역음 솔출판사. 2003.10.22. 자서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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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화사상은 태극기에서 적나라게 드러나는데...
가운데 태극[중화=중국=황제(中)가 계신 울타리(國)=황제와 황후를 상징: 당시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과
8괘(8괘가 너무 복잡하다해서 나중에 4괘로 바꿈)는 당시 조선대륙과 중화사상을 형상화한 것 이었습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5%AD%EC%9D%98_%EA%B8%B0_%EB%AA%A9%EB%A1%9D |
<2편 계속> 4. 훈민정음 창제 / 반만년 중국 황제사의 대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