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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소시집|한보경
트와일라잇 존 twilight zone 외 4편
해거름에 본 어제 꽃이 그랬습니다
가까운 거리부터 재는 습관을 길들이는 중이야
머나 먼 심연에 닿기 위해, 실눈을 뜨고
깊숙이 숨을 들이마시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고 있어
가까운 거리는 어디까지니
참지 못해 묻고 또 묻습니다
눈인사만 쨍하게 던지고 마는 꽃
가까운 거리를 재려면 눈인사만큼 적절한 것이 없어
실눈으로 꽃을 따라합니다
늘 같은 자리에서 내일의 운명이 달라지기를 기다리는 못된 오늘처럼
똑같은 내일을 되풀이합니다
캄캄한 미혹입니다
푸른 칠이 벗겨진 너의 빗장을 열어도 되니, 녹슨 두 귀를 가까이 대어도 되니
너의 아래는 아직도 내게 너무 먼 곳
빠르고 느린 시간의 경계, 멀고 가까운 거리의 경계들이 사라진
내가 모르는 어떤 세상이 있기는 한 거니
꽃은 제 몸을 뚫고 내려가는 눈인사를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짧은 눈인사는 가장 길고 긴 꽃의 말입니다
불가침의 거리를 잴 수 없는 나의 눈인사는 한동안 길어지고
점점 꽃은 멀어집니다
덩달아 문장들은 쓸데없이 길어질 것입니다
오늘 아침 미지의 혹한을 뚫고 어제 핀 꽃 한 송이가 스러졌습니다
가까운 곳에 닿지 못한 내 눈인사 때문입니다
스러진 꽃의 목에 걸린 빗장을 열고
꽃이 남긴 신탁을 꺼내봅니다
지난 꽃과 아직 오직 않은 꽃의 틈새 거기, 아래의 아래라는 미지에서
명랑한 오늘이 잔뿌리를 내리고 어제의 꽃보다 더 꽃처럼 피기도 합니다
문득 환하고, 불현듯 어두운 그것,
한때 꽃이었거나, 꽃인 척 하던, 꽃 아닌 꽃들을
당분간 꽃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끝없는 유예의 시공을 떠다니다 끝내 닿지 못한
나의 미지를 닮았습니다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당분간, 꽃처럼 살겠습니다
*트와일라잇 존(twilight zone) : 수심 30m~150m 사이 중광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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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앞에서
손바닥을 뒤집는다
졸지에 손바닥은 손등이 된다
어딘가 두고 잊은 오래된 바깥이 훅 치고 끼어든다
그것은 불현듯 생각난 것이고, 아주
가까스로 일어난 일이다
한때 뒤에서 앞을 들추며 들어와 기꺼이 곁이 되겠다 고집하던 것
여전히 기다릴 거라고 묘하게 변한 눈빛을 던진다
안이 된 바깥, 아직은 착하다
감춘 속의 색깔은 다만 보이지 않게, 여전히
내 뒤통수에 줄줄이 줄 서는 것들
바깥이 아니고 안이 되겠다고
부적절하게 유기한 나의 어둠을 삼키지 못해 신물 나도록 물고 있다고,
숨겨둔 진짜 눈알을 슬쩍 꺼내 보였다 바로 감추는
그것, 신물 나게 지겨운 맛이다
싫증 난 앞은 던져버려야지, 손등을 뒤집는다
손바닥은 다시 손바닥으로 돌아눕는다
어쩌다 안이 되었던 바깥이 울타리 밖으로 나가 더 바깥으로 떨어진다
너무 익숙하게 도로 바깥이 되고만, 안은 이제 뻔뻔해질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울타리마다 아예 넘나들 수 없는 금줄을 칠 작정을 한다
도로 데려다 놓아도
바깥은 영원히 안이 될 수 없다고 금줄을 친다
금줄 위에서 넌출넌출 소란스러운 춤을 춘다
뒤집고 뒤집히고, 들어오고 나가고, 치고 걷고
소란한 춤의 궤적을 그리는 손바닥과 손등이었던 것,
참 쉬운 운명들이다
거부와 수긍의 강요에 흠뻑 빠진, 안과 바깥은 수긍과 거부를 쥐고
엄청나게 시끄럽다
부서지고 산란하는 실시간의 이력들, 도저해질 수 있을 것인가
어쩌다 그 중 하나는
울타리와 울타리를 넘어가서
어떤 것도 넘을 수 없게, 무자비한 울타리가 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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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
한빛병원 영안실 101호
높다랗게 걸린 네가 웃음기 거둔 나를 내려보며 빙긋 웃고 있다
눈싸움을 멈추자 하고 다시 눈싸움을 걸어오며 웃는다
지금 네 웃음에는
네가 지운 너무 많은 빚들이 눈부신 빛이 되어 뭉치고 있어서
캄캄한 슬픔이 환해진다
내 마음대로 우기던 지난날들이 힘없이 드러나 헛말이 되고
지켜보던 조용한 네 침묵은 그새 더 힘을 키워서
지금은 죽어도
나는 너를 이기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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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르는 게 많아서
일단 손을 씻는다 하고 발까지 씻는다
먹을 것이 무르익어가는 엄청나게 뜨거운 가을날인데
운명선이 희미한 왼쪽 손바닥을 가진 우리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다른 쪽 손바닥이 쥐고 있을 운명을 걱정한다
어쩌다 손을 씻는 그들은
시든 잎사귀에서 감자 꽃이 떨어질 때마다 허기진 허리를 더 숙인다
혀끝이 아린 감자가 익기를 기다리며
씨가 여물지 않은 오이밭에서 오이라는 이름만 따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들이 사는 집 앞으로
한 손을 담글 수 있는 얕은 시내가 흘러가고
흙담 아래 엎드린 집보다 더 낮게 엎드린 텃밭에는
간혹 수캐 한 마리가 암캐들을 빙빙 좇다가 망연히 돌아가고
손을 씻지 않고 그들은 평화로운 잠자리에 든다
파미르 고원의 그늘이 키운 모든 운명선들은 가늘고 맑아서
아무리 얽혀들어도 끊어지지 않고 잘 풀어진다
타지키스탄의 운명도 그러하다고
아프가니스탄을 지척에 두고 그들의 마음과 마음은 지척보다 가깝다
오늘도 어제처럼
높고 황량한 고원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단지 바람이 불어와서, 그들은 내일도 연을 날릴 것이다
씻지 않는 손으로 연을 날리고
씻지 않은 발바닥을 굴리며 바람의 뒤를 따라가며 카이트 러너가 된다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은
우리는 가끔 타지키스탄의 떠도는 구름 사이로
한 점이 되어가는 연을 그윽하게 바라보다가
폐기물로 만든 자전거를 타는 타지키스탄 소년들의 씻지 않은 까만 발바닥을
당나귀와 이방인처럼 바라본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오늘과 다른 내일이 두려운 우리는
손부터 씻어야 한다고 발을 씻는다
손바닥에 가득 움켜쥐고 더 많은 손과 발이 간절한
우리는 알고 있는 게 너무 많은 우리를 버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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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싱페이퍼
당신이 웃고 있어
푸르스름한 안개 사이로 비밀의 문이 열렸다 닫히고,
당신의 입술은 무척 낯설어
당신 안에 내가 모르는 당신의 오지가 있다는 소문을 믿을까, 잠시 망설이고 있어
깊이를 알 수 없는 몽환의 안개 속, 하염없이 떠있던 오제의 습지처럼
설명할 수 없는 오지를 가진 당신에게 무작정 질투가 나
트레이싱페이퍼가 있다면
짙은 안개를 술렁술렁 걷어내고 당신의 오지만 고스란히 빼내오고 싶어
끝없이 이어진 목도를 걸어가서
막다른 황폐함이 다시 시작되는 그 끝에서
길을 잃고 헤맨 기억이 있다면
방향 잃은 기다림 따위, 부서진 선착장 앞에 다 두고 왔을 거야
시간이 망가뜨린 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안개도 아니고, 삐꺽거리며 울고 있던 목도도 아니고
부서진 기다림 속에 홀로 버려진 선착장도 아니었어
다시 시작해도 되니
내가 아니고, 당신이 그랬던가
눈부시게 찬연한 조우가 터무니없는 환상이라고 당신이 아니고, 내가 그랬던가
기억 속 당신은 늘 빛을 등지고 있고, 나는 당신을 볼 수 없었어
언제라도 불완전한 예측인 당신,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는 나
불길한 예감 위에 사각의 트레이싱페이퍼를 조심스럽게 펼치고
예측불가의 불길함을 도려내는 상상을 해
트레이싱페이퍼는 쉽게 어긋나고, 흔들리다 구겨지고, 힘없이 너덜거려
역광이 그린 무채색의 당신을 찢고
찢어진 당신이 토해내는 아픈 곡절의 하소들도 찢고 말거야
당신의 오지가 사각의 종이 속에 갇혀버리기 전에, 트레이싱페이퍼를 찢어
불안과의 지루한 동거를 내색하지 않고, 내 색으로 나의 오지를 그릴 수 있을까
찢어진 트레이싱페이퍼의 네 귀를 붙이고 움직이지 않게 내 위에 펼쳐
뜻밖의 적요가 고여 들지 몰라
설명할 수 없는 낯선 행복에 젖을 수 있을지 몰라
비밀의 문이 열렸다 닫히던 당신의 입술처럼
오래도록 내가 품고 상상하는 오지는 그렇게 불현듯 올지도 몰라
기다림을 버려야 다다를 수 있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습지의 끝을 지키던 선착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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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나의 헤테로토피아, 나의 시,
경주에는 ‘어디에나 있는 서점, 어디에도 없는 서점’이라는 이름을 걸어둔 책방이 있다. 특별하고 이색적인 공간이어서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이들도 그 공간이 품고 있는 분위기를 좋아해 꽤 입소문이 난 곳이다. 그곳에 가면 반드시 ‘정숙’이 기본이다. 그러니 많은 이들이 섞여 있어도 소란스럽지 않다. 선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전시 책을 들추어보거나 서점의 특이한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소품 하나하나를 살펴보는 시간은 꽤 흥미롭다. 방문객들은 고즈넉하고 복고적인 서점 분위기에 젖어 특별한 문화 체험을 한다.
경주의 서점 이름에서 헤테로토피아를 떠올린다. ‘어디에나 없’지만 ‘어디에나 있’다는 공간 ‘헤테로토피아’. 푸코는 상상의 공간이자 현실의 공간이며, 탈주의 공간이자 전이의 공간을 헤테로토피아라고 구획했다. 현실적인 맥락 속에 존재하는 유토피아, 기존의 공간에 이의를 제기하는 공간, 이질성의 공간인 헤테로토피아는 지도 위에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의 대척적 개념은 아니다. 상상할 수 있지만 현실 세계에 존재할 수 없는 유토피아가 아닌, 여기 현실에 존재하는 유토피아적인 공간, 그것을 헤테로토피아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무의미했던 공간이 의미있는 공간이 된, 헤테로토피아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다.
어떤 공간만이 지닌 작고 각별하고 세심한 스토리를 좋아한다. 아마도 그것들은 주인장의 손때 묻은 과거의 기억에서 시작된 것이리라. 그러다가 그곳을 다녀간 많은 이들의 것으로 옮겨가고 겹겹이 새로운 시간이 공간의 깊이를 더해 깊숙한 공감의 연대가 쌓이고 기억들의 연대기로 확장된 것이리라. 작지만 커다란 부피를 가진 그러한 공간을 좋아한다. 오롯이 혼자만 아는 비밀 같은 시간이 축적된 곳, 내게 어떤 의미가 된 공간, 거기에서 바깥세상과의 짧은 단절이 주는 새로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최상의 공간이 아닐까.
유년의 나는 어디에 있어도 불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타고난 성정 탓인지 걱정과 불안 없이 마음껏 놀이에 빠져 살았던 유년에는 놀 수 있는 놀이터에서 놀던 시간은 모두 달콤한 유토피아 같았다.
청소년기에 어쩌다 우울감에 빠질 때도 있었지만 그 시간이 나쁘지는 않았다. 감상感傷을 추스를 혼자의 골방이 필요했을 뿐이다. 골방은 어둡고 뒤안이고 좁았지만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의 실체를 들여다볼 수 있어 좋았다. 스스로를 추스를 수 있던 공간.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혼자만의 공상과 상상이 허락된 그때의 공간, 작고 어두웠던 나의 골방은 성장기의 헤테로토피아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가끔 은밀한 금기를 깨고 금지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금기를 깨는 두려움과 걱정과 호기심이 뒤섞인 긴장과 전율은 일상의 무료함을 깨기에 효과적인 각성제 같았다. 그 속에 묘한 설렘이 있었다. 덜컹거리던 문소리가 신경이 쓰여 주위를 오래 살피며 살짝 들어선 만화가게의 가장 구석진 자리, 숨죽인 2시간의 어둠이 묘약이 되어주던 영화관,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도망가듯 숨어든 먼지 쌓인 다락방, 그때의 그 장소들은 내게는 단순하고 흔한 공간이 아니었다. 등을 펴기도 힘들었던 낮은 다락은 덜 익은 상심을 달래주던 적소였다. 실수로 낸 구멍 같은 창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 속에 붕붕거리며 떠다니던, 켜켜이 묵은 먼지알갱이들을 멍하니 쳐다보노라면 어떤 상심들도 더 아프거나 슬프지 않았다. 그때의 불편하고 후미진 공간들은 위안이고 격려이고 용기의 헤테로토피아였으리라.
몇 해 전 텃밭이 딸린 작은 집이 생겼다. 연거푸 힘든 일을 겪고 난 뒤 몸과 마음에 이런저런 탈이 나기 시작했다. 통증 앞에서 우습게도 유년의 다락이, 컴컴했던 영화관이, 냄새나던 만화방이 문득 그리울 때가 많았다. 복잡한 인간관계를 벗어나 혼자서 마음을 추스르고 몸을 쉴 수 있는 공간이 간절했다. 절박했던 몸과 북받치던 감정의 끝에서 우연히 만난 작은 마당과 텃밭과 작은 방이 있는 곳, 무루無淚에서 어쩌다 꽃농부가 되었다. 그 덕에 몸 이곳저곳에는 스스로 매단 훈장 같은 햇볕에 그을린 반점들이 생겨났지만 성내고 욕심내던 순간들은 점점 잦아들고 있다. 무루無淚는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헤테로토피아가 되었다.
무루에는 생명들이 자란다. 꽃과 풀과 잡초들이 자라고 동네 길고양이 모녀가 자란다. 그들은 한결같다. 극진히 나를 돌본다. 나를 돌보는 소중한 생명들, 그들도 나의 헤테로토피아들이다.
무엇보다 나는 헤테로토피아에서 헤테로토피아에 대한 시를 쓰고 싶었다. 이런저런 시들 속에는 내가 그린 나의 헤테로토피아들이 있다. 때론 밉고 멀리하고 싶은 것도 있고 가끔 곱고 아름다운 것도 있기는 하다. 아직 흡족하지 않아 내팽개쳐 두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내쳐진 서운함을 오래 삭이며 내가 찾아주기를 기다리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이 도로 나를 잘 봐주라고 도닥여준다. 어쩌다 그런 시들이 내게 또 다른 헤테로토피아가 시작될 거라는 시그널을 보내오기도 한다.
《사이펀》에 실린 5편의 신작시들도 그런 시들이다. 꽃이라는 미지, 현존하는 것과 현존하지 않는 것의 경계, 거울, 영안실에 높이 걸린 눈빛, 몰랐던 세상 속으로의 여로, 친밀함으로 가린 가짜들이 숨긴 진짜와 진짜가 숨겨진 오지들은 모두 헤테로포피아의 다른 얼굴들이다.
철학적이고 충격적인 공감이 불러온 ‘헤테로토피아’에 대한 호기심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것은 주요한 탐색이다. 불가능과 가능을 반복적으로 오가는 시도와 확인이기도 하다. 그러함에도 헤테로토피아의 개념에 대한 나의 접근법은 철학적 논리를 많이 벗어나 있어서 헤테로토피아라는 공간의 경계는 두루뭉실하다. 지독한 오독과 착각일 수 있다. 우습게도 나는 그런 오독과 착각을 고집하려 한다. 고집을 버티게 하는 어떤 힘이 있어서일까.
그 힘은 오래된 노트북 15인치의 헤테로토피아 안에 들어있다. 너무 무겁고 고장 나기 직전인 나의 헤테로토피아들이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사과의 말: 가을호 사이펀에는 편집부 실수로 마지막 문단이 잘려져 게재되지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음호에 다시 전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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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보경
-1959년 출생
-2009년 《불교문예》 등단.
-시집 『거기가 여기였을 때』, 『덤, 덤』
-《사이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