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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묘장춘의 증손녀 묘고미향이 맨 처음 자신의 전부를 바쳐 사랑했던 인물은, 애독자님이 기억하실지 모르나, 바로 삼칠성 노성주의 외아들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배신과 처절한 실연의 아픔을 당한 후, 그녀는 검 하나를 들고 네 아리하를 휘젓고 다니며 검과 미모로 분란을 일으키고 뭇 남성들을 골려주게 된다.
노성주의 외아들은 그 후 얼마 있지 아니해 돌연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어쩌면 거기엔 묘고미향의 한이 얽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애증과 영웅심, 옛 애인에의 그리움, 일말의 보복심 등이 한데 얽히고설킨 복잡한 심사로, 묘고미향은, 강산을 떠돌던 어느 날 엉뚱하게도 삼칠성을 찾아가 노성주에게 무예 대결을 요청한다. 자신이 이기면 성을 접수하고 성주가 승리하면 자신을 첩으로 맞이해야 한다는 기괴한 조건을 내걸고. 이 사실은 앞에서 기술했으므로 중언부언하지 않겠다.
노성주와의, 운명을 건 일전에서 패배한 그녀는 노성주의 요구에 따라 그의 양녀가 된다. 노성주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죽은 아들과 한 때 정분이 났던 여인을 어찌 첩으로 맞이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그 직후 이 무슨 괴변인가? 의부義父인 노성주가 그녀에게 차마 해서는 안 될, 몹쓸 짓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것을 부자父子에게 연달아 짓밟힌 그녀는, 절망감과 치욕감에 어찌할 줄 모르며 삼칠성을 떠나게 되고, 마침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자결하기로 결심한다.
그 때 문득 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은, 그녀가 열두 살 소녀 시절 은근히 동경하며 사모하던, 아니 그녀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렸던, 그리고 자신을 그토록 예뻐해 주던, 또 아직까지 잊지 못하며 연련해하던, 아버지의 멋진 미남 부하 장수, 지금은 아남성 성주로 있는 여을이었다.
‘짓밟힌 내 인생. 나를 그리도 예뻐해 주시던 그분께 의탁하면 혹시 그분이 날 받아주시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남자는 젊은이든 늙은이든 죄다 미웠다. 오직 그분, 여을님만을 제외하고.
어린 시절 여을과의 추억을 쌓고서, 세월은 이미 십 수 년이 흐른 후다. 여을을 찾아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이 세상 마지막 걸음이 되지 않기를 하늘에 간절히 빌면서, 그녀는 밤중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무장한 채 아남성 관아의 성벽을 넘고 청사의 담을 월장해, 청사에 밤늦도록 홀로 남아있던 여을의 방에 출현한다.
여을을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여을의 따스한 낯에서 한 가닥 희망을 걸고, 대담하게도 여을에게 자신을 첩으로 받아달라고 간청한 것이다. 끝내 여을이 거절하면 미련 없이 자결하기로 결심하고서.
이런 사정을 전혀 알 리 없는 여을은 처음에 몹시 놀라며 그녀의 청혼을 일언지하에 사절했으나, 그녀의 강경한 말을 듣고 만일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리라 예감했다.
그녀의 이런 태도가 납득 되지 않았으나 여을은 마지못해 그녀의 청혼을 수락한다. 그리고 다음 날 낮에 그녀의 신상에 관해 자초지종을 듣고서 그녀의 애달프고 처연한 운명을 자신의 몫에 보태기로 굳게 결심했던 것이다.
여을의 첩으로 들어갔으나, 그녀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단번에 간파한 여을의 장남 해로운은 그 때부터 그녀를 은근히 핍박하기 시작한다. 해로운과 여을의 다른 아들들에게 모진 박해를 당하며 일 년의 세월을 버티던 그녀는, 그리하여 핏덩이 아들 해모수를 빼앗기고 그 집에서 나와야 했다.
여을의 집에서 쫓겨나 절치부심하던 묘고미향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망설이다가, 이를 악물고 생을 택한다. 그것은, 설사 자결해 죽더라도 자신의 죽음은 모든 원한을 풀고 난 이후의 일이어야 한다고 굳게 결심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 속담을 되새기며,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오욕을 안겨준 삼칠성의 의부를, 그녀는 다시 찾아간다. 참으로 무서운 여인이었다. 비록 그가 처절하게 미웠지만, 두 눈 딱 감고 그에게 의탁해, 골수에 사무친 원한을 갚고야 말겠다는 칼날 같은 집념이, 그 내면에 도사리고 있지 않았겠는가?
무슨 수를 쓰든 삼칠성과 아남성 둘 사이에 사단을 만들어 내고, 삼칠성 노성주와 아남성의 해로운이 상호 혈전을 벌이게 해, 양패구상兩敗具傷, 동귀어진同歸於盡(둘 다 망함)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억울함과 원통함을 풀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에 자신의 미색까지 동원할 수 있었으니, 이 일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았겠는가?
‘삼칠성 노성주에게 울며 고하리라. 여을의 아들들이 내 몸에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노라고. 아남성에 또 찾아가서는 여을에게 울먹이며 이르리라. 삼칠성 욕살이 양녀인 나를 계속해서 짐승처럼 짓밟았노라고.’
‘반드시 임금을 알현해, 양측의 짐승 같은 비행을 직고하리라. 그 후에는 어떤 수단방법을 써서라도 양 가문이 피비린내 나는 혈전에 돌입하게 만들리라. 나의 비상한 머리로.’
이런 악념들이 그녀의 뇌리에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삼칠성에 다시 들어간 후 그녀는 일생일대의 심령변전心靈變轉을 겪는다. 그것은, 삼칠성 장서각에 보관되어 있던 다물 임금의 <행심록>을 발견한 후였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글을 배워, 책을 몹시 좋아하던 터다.
그 책에서 어떤 기이한 위안과 서광瑞光을 얻은 그녀는 거기에 심취해, <삼일신고>와 <삼백육십육사> 등 신교神敎(창조주 삼신일체 하나님을 섬기던 배달겨레의 전통 종교)의 가르침에 깊이 침잠하게 되고, <행심록해>라는 저술까지 낸다.
그 후로 그녀는 자신의 의부뿐만 아니라, 자신을 괴롭히고 내쫓은 여을의 아들들을 마음으로 용서하며 잊어버린다. 이것은 그녀의 심령에서 일어난, 타인들은 도저히 믿기 어려운,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일대 혁명이었다.
노성주가 죽자, 성녀聖女 소리를 들으며 삼칠성 성민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던 그녀는 노성주의 양녀로서 대를 이어 삼칠성의 성주로 화려하게 등극한다.
그 사이 자신의 유일한 혈육 해모수를 어찌 잊을 수 있었겠는가? 사자를 보내 멀리서 해모수의 동정을 소상히 파악하며 십육칠 년 세월에 걸쳐 그를 가슴에 품어오던 묘고미향은, 마침내 해모수를 유인해 그를 삼칠성 근처의 지하 석실 속에 가두고 그 속에서 삼년 이상 모진 훈련을 받게 한다.
세상의 애증과 정리情理, 허욕虛慾은 이미 버렸으나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며 늘 하나님께 기도하던 묘고미향이 취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책은, 모진 마음을 먹고 자기 아들 해모수를 나라의 동량으로 키우는 것이었다.
해모수의 화려한 등극 이면에는 그의 생모 묘고미향의 처절한 과거사가 묻혀 있었다. 묘고미향으로서는 해로운에 대한 복수심을 오래 전 버렸다 하더라도, 해로운의 안목으로 볼 때는 자신과 그녀의 대결에서 자신이 결국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해로운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쓸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해모수에게 가서 축하인사를 전한 후, 내가 죽거든 선산에 묻어달라고 부탁해 주게나. 그리고 만백성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이 나라를 굳건하게 세워 달라고 전해 주게.”
해로운의 여윈 얼굴에서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일신의 영화가 무언가? 세상의 부귀와 공명이 너무나 허무하고 헛되구나. 이렇게 죄다 버리고 가야 하는 것을.”
해로운은 탄식해 마지않았다. 아불한이 그를 위로했다.
“나리, 그런 말씀 마소서. 속히 완쾌되어 옛날 같은 기백을 보이소서.”
“일세의 영웅도 한 줌 흙으로 돌아가니, 이 세상에 내가 왜 태어났는가?”
기침을 멈추지 못하며 자탄하던 해로운이 아불한에게 물었다.
“자네는 <행심록>이라는 책을 읽어보았는가?”
“아뇨, 읽어보지 못했사옵니다.”
“그것은 선친께서 다른 형제들을 모두 제쳐놓고 나와 해모수에게 먼저 한 부씩 하사하신 책인데, 그 책은 인생살이의 온갖 비밀을 풀어놓고 있지. 자네도 시간 내서 한 번 정독해보게나. 내가 저지른 악이 너무나 크네. 천제님도 날 용서하지 않을 걸세.”
“나리, 어찌 그런 말씀을. 나리께서는 일세의 영웅이시고 만방의 호걸이십니다. 그런 나약한 마음은 내려놓으시고 속히 자리에서 일어나소서.”
“아니다. 내 병은 내가 잘 안다. 난 얼마 못가 이대로 죽을 거다. 아우와 기타 많은 사람들에게 저지른 악에 대한 상제님의 천벌이니, 당연하지.”
“······.”
아불한은 더 이상 아무런 대꾸를 못하고 앉아 있었다.
“나가서 채비를 갖추고 웅심산성으로 곧장 출발하게. 내가 사죄謝罪의 편지를 한 통 써줄 테니, 가서 은밀히 전해주게. 난 그의 낯을 볼 면목이 없네.”
해로운은 문방사보를 가져오게 해, 아불한에게 그가 구술하는 대로 글을 쓰게 했다. 대필이 끝난 후 해로운은 직접 편지를 읽어본 다음 건네준다.
“이 편지를 봉해서, 해모수에게 전달해 주게나.”
아불한이 대답하고 다시 한 번 위안의 말을 던진 후 나가려 하자 해로운이 그를 힘없는 목소리로 다시 불러 세웠다.
“그리고 지금 즉시 설이매 공주님과 기비 기진 번조선 왕세자 남매에게 자유를 주게. 대신들에게 내 뜻을 잘 말해 주게.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폐하를 알현해, 내 주청을 대신 전해 올리게나.”
잠시 숨을 몰아쉰 해로운은 힘에 겨운 듯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해모수를 양자로 삼아, 폐하께서 붕어하신 후에는, 해모수를 임금으로 추대하도록 하는 게 좋겠다고.”
해로운은 기운이 없는 듯, 이 말을 끝으로 눈을 감으며 손을 휘저어 아불한에게 나가라는 시늉을 했다.
아불한은 인사를 한 후 해로운의 병상을 물러나왔다. 그가 나가자 해로운이 힘겹게 홀로 중얼거렸다.
“지금쯤 거의 바보가 되어 있을 해모수가 도대체 어떻게 멀쩡하지? 천하는 넓고 숨은 기재奇才는 많구나.”
하지만, 그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그 일에서조차 하늘의 도우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천하의 어떤 명의가 해모수의 독을 치료한 것으로 믿고 있었으니.
해모수의 생환 소식을 전해들은 고열가 임금은 어느 날 의관을 갖추고 문무백관을 소집했다.
“경들도 모두 들었을 터이오. 동북부여후 해모수 공이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을. 그리고 중부여후 해로운 공이 그의 가신장을 통해 내게 주청해 왔소. 해모수를 양자로 삼아, 내가 죽은 후 그에게 나라를 물려주라고.”
오가의 대신들은 모두 침울한 얼굴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임금은 별 소득 없이 회의를 끝내고 다시 친정親政 체제를 굳히고자 했으나 대신들은 임금의 명을 잘 받들지 않았다.
삼칠성에 내려가 있던 성주 묘고미향은 해모수의 백악산아사달 접수 및 웅심산성 재입성이라는 희소식을 전해 들음과 동시, 중부여후 해로운의 와병 칩거 소식도 듣게 된다. 그 때 해모수로부터 사자가 찾아와 해모수의 친필 편지를 전한다. 웅심산성으로 올라와 새 궁궐 기공식에 참석하고 장래 일을 함께 의논해 보자는 내용이었다. 그 즉시 삼칠성주는 연은소와 함께 말을 재촉해 스무 날이 못 되어 웅심산성에 도착했다.
연금에서 풀려난 설이매가 설레는 가슴을 안고 웅심산성을 찾아간 것은, 오월 중순경이었다. 기비와 기진 남매도 번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녀와 동행했다. 푸른 초목과 오월의 시원한 바람은 그들에게 환희의 인사를 건네는 듯하고 북아리하(송화강) 강물은 여느 때처럼 탕탕하게 흐르고 있었다.
강을 건너 웅심산성에 당도했을 때, 그들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미리 전해들은 해모수는 친히 웅심산성 밖 십리까지 십여 기만을 거느린 채, 그리고 그들보다 먼저 도착한 어머니 삼칠성주 묘고미향, 누이동생 연은소를 마차에 태운 채, 직접 마부석에 앉아 오호거를 몰고 마중을 가나갔다.
해모수가 눈을 들어 바라보니, 멀리서 새하얀 백마를 타고 새하얀 옷을 입은 낭자가 이쪽을 향해 말을 몰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두 남녀가 역시 각각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는데, 기비와 기진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이었다.
설이매 공주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차갑고 고고한 기품에 흰 눈 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곧추 세운 채 별빛 같은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오랜 만에 보니, 그녀의 자태가 한층 매혹적이고 황홀해 보였다.
기진도 역시 한 떨기 난초 같은 향기와 의연한 자색을 잃지 않은 채 해모수의 가슴을 설레게 할 만큼 충분한 미태를 내뿜으며, 발그스레한 얼굴에 고혹적인 기운을 가득 담고 해모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해모수가 마차를 세우고 내렸다. 다섯 필의 백마가 이끄는 마차 뒤에는 마병 십여 기가 멈추어 섰다. 마병들은 설이매 공주 일행이 다가오자 일제히 말에서 내려 설이매 공주와 기비 남매에게 인사한다.
설이매가 해모수의 외관을 보니, 머리에는 까마귀 깃털로 장식한 멋진 관을 쓰고 있었다. 그것은 수년 전 어전친위무사단 부단장 취임 시 기진에게 축하 선물로 받은 것이다.
허리에는 고열가 임금에게 받은 천광검을 차고 있었는데, 누가 보더라도 그의 자태는 해처럼 밝고 환하고 아름답고 위풍당당해 보였다.
해모수가 세 사람에게 겸손하게 절한 후 흑진주 같은 눈동자를 굴리며 그들을 번갈아 보고 문안했다.
“설이매 공주님, 기비 왕세자님, 기진 공주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덕분에요.”
설이매의 목소리가 짤막하고 냉엄하다. 기비와 기진 남매도 맞절을 한 후 대답했다.
“공을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소. 그 동안 도대체 어디에 있었소? 공의 장례식 날이 하마터면 우리들의 장례식 날이 될 뻔했소.”
“저 때문에 욕을 보셨습니다.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천만에요.”
이 때 마차에서 내린 삼칠성주와 연은소도 설이매 공주 등에게 인사를 올린다.
“어서 성안으로 들어가시죠. 마침 잘 오셨습니다. 내일 천제 하나님께 대제를 올리고 새 궁궐 기공식을 열 예정입니다.”
“흥! 벌써 임금이 되셨나 보군요?”
설이매가 빈정거린다.
“어떻게 생각하시든 상관없습니다. 천제님께서 제게 맡기신 천명이 있습니다. 그것을 충성스럽게 이행하는 게, 제가 배달나라에 태어난 목적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모든 제왕들이 보좌에 오르면서 하는 말이 그거 아닌가요?”
설이매가 역시 싸늘한 어조로 반문했다.
“공주님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저의 소원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백성들이 평안하고 행복하게, 위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아래로는 서로 사랑하면서 태평성대를 열어갈 수 있다면, 더 이상 원이 없습니다.”
“그 소원이 꼭 이뤄지길 바랍니다.”
기비의 말에 기진공주가 응답했다.
“암은! 그렇고말고요. 반드시 조선에는 태평성대가 다시 열릴 것입니다. 우리 상제님께서 도와주실 거예요.”
“근데 난 뭐죠?”
설이매의 난데없는 질문에 해모수가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대부여국의 청진공주마마가 아니신가요?”
조선은 47세 고열가 임금의 선대인 44세 구물 임금의 즉위 원년(서기전 425)부터 이미 국호를 조선에서 대부여국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삼국유사>는 단군조선의 존속연한을, 서기전 2333년부터 서기전 425년까지, 1908년으로 기술한다.
“그걸 누가 모르나요?”
“하하! 다 아시는 걸, 왜 제게 묻는지 궁금합니다.”
“당신은 지금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아니면 시치미를 떼는 거예요?”
설이매의 속뜻을 모르는 해모수가 아니었다. 그녀의 말은, 이제 모든 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으니 속히 두 사람이 혼례식을 올려야 되지 않겠느냐는 뜻이었으리라. 하지만, 이미 연나라 예 공주와 혼인을 한 해모수가 어떻게 설이매를 맞이할 수 있겠는가? 설사 새로운 아내를 둔다 하더라도, 예 공주가 정실이니, 다른 이들은 측실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국의 공주가 어찌 측실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해모수가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설이매가 오호거를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이건 뭐예요? 우리 조선의 것과는 식양이 아주 다른 화려한 마차군요. 언제 어디서 이런 진귀한 것을 구했나요?”
“차츰 말씀 드리겠습니다.”
해모수가 즉답을 피하고 그들에게 앞장서기를 권했다.
설이매가 두 눈을 부릅뜨고 해모수를 쏘아보았다.
그들이 신시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을 때 해모수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저는 이미 혼인한 몸입니다. 연나라 예 공주와 그 사이에 혼인예식을 치렀습니다. 이 마차는 그녀에게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네?”
설이매 공주뿐만 아니라, 기진 공주, 기비 왕자까지 대경실색했다.
해모수는 두말도 하지 않고 앞장서서 그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설이매와 기비, 기진은 서로의 눈을 쳐다보다가 말없이 해모수의 뒤를 따른다.
설이매는 의외로 얼음장 같이 차가운 얼굴을 유지하며, 걷다가 돌연 해모수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지금 당신이 몸에 지닌 물건 가운데 가장 먼저 받은 선물이 무어죠?”
“네?”
해모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다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허리에 찬 천광검을 가장 먼저 받은 것 같습니다.”
“그 다음은요?”
“물론 오우관입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
해모수가 그 흑진주 같은 눈으로 설이매를 쳐다보았다.
“아바마마께서 하사하신 그 천광검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에요. 그건 부마도위에게만 주시는 선물입니다. 아시겠어요?”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나, 해모수는 잠자코 있었다.
“그 때 이미 아바마마께서는 저의 은밀한 소청에 따라 저희들을 한 쌍의 원앙으로 맺어주신 거예요. 다만 예식만 치르지 않았을 뿐이죠.”
그 때였다. 갑자기 기진 공주가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해모수 좌측, 설이매의 맞은편으로 말을 몰아 다가갔다. 설이매는 해모수의 우편에서 그와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가고 있었다.
“해모수 공자님!”
기진이 해모수를 예전 호칭으로 부르며 아름다운 향취를 가득히 풍겨왔다.
해모수가 고개를 돌려 기진을 바라본다.
“설이매 공주님의 말이 지당해요. 하지만 제가 드린 오우관도 의미가 없는 게 아니에요. 전 그 때 공자님과의 약혼 선물로 그 관을 드린 거예요.”
“네? 하지만, 그 땐 그런 말씀을 못 들었는데요?”
“꼭 말해 주어야만 아나요? 공자님은 총명한 것 같으면서도 좀 어리바리할 때가 있어요. 물론 그게 매력이지만요.”
그 때 뒤에서 기비 왕세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누이동생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진조선 제실이 우리 번조선 왕실과 연연세세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요.”
기비의 말을 듣고 해모수는 정신이 번쩍 나는 것 같았다. 기비의 말은, 번조선의 지지와 도움을 받으려면 기진과 혼인해야 한다는 은근한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에 하나 번조선이 해모수를 지지하지 않을 경우, 해모수는 비록 대부여 신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다 하더라도 남쪽의 막조선, 서쪽의 번조선 사이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중부여후 해로운이 아불한을 통해 고열가 임금에게 주청한 내용, 즉 해모수수를 고열가 임금의 양자로 삼아, 그에게 대부여의 황권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소청을, 기비와 기진, 설이매 공주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설이매는 해모수에게 자신을 정실로 인정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진도 나름대로 모든 것을 계산하고, 자신을 정실과 대등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도록 재촉했다. 실로 대담한 여인들이었다.
하지만, 전술했듯이 일부일처제는 조선의 전통이다. 이것은 황실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일부 임금들이 여러 아내를 거느린 것은 사실이지만, 백성의 정서에는 일부일처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앞에서 잠깐 비쳤듯이, 단군조선의 일부일처제 전통은 부여와 고구려를 거쳐 대진발해국까지 이어진다. 남송南宋 때 사람 홍호洪皓(1088-1155)는 그의 저서 <송막기문松漠紀聞>에서 말한다.
“거란이나 여진 여러 나라에는 모두 여자 창기娼妓가 있고 양인良人들이 다 작은 마누라와 시비侍婢를 두고 있지만 발해만은 없었다.”
해모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속으로 하나님을 불렀다.
‘하나님, 하나님, 비록 성현 같은 다물 임금도 여러 아내를 두었지만,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의 생각은, 그러나 그의 좌우를 막은 채 버티고 있는 여인들에게 갇혀 밖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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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3. 4. 14.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