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치는 여자
엘프리데 옐리네크 / 문학동네
내가 <피아노 치는 여자>를 만난 건, 순전히 이자벨 위페르 때문이었다. 프랑스가 사랑하고 전 세계가 극찬하기에 국민의 배우라기보다는 국가적 배우라 불러야 할 것 같은 현존 최고의 여배우. 그렇다고 내가 그녀의 영화를 많이 본 것은 아니다. 고작 두세 편(?) 겨우 그 정도 영화로도 수많은 여배우 중 단연 최고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도록 하는 것엔 아마도 스무 살 시절에 본 한 편의 영화를 통해서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다.
알 수 없는 분위기와 느낌이 묻어나는 제목에 이끌려 우연히 보았던 영화가 있었다. 주말의 명화인지 명화극장이었는지도 뚜렷하지 않지만, 영화를 사랑하던 청춘의 내게 단 한 번의 스침으로도 꼭 한 번은 다시 보고 싶은 영화로 각인을 시켜버린, 그 영화는 바로 <레이스 뜨는 여자>였다. 저 유명한 베르메르의 그림 한 점으로 시작된 파스칼 레네 원작의 동명 영화.
그 당시에도 아름다움으로 세계를 사로잡은 여배우들이야 충분히 많았지만, 별로 튈 것 없는 얼굴로 상처 입은 영혼을 그토록 무심히 전달하는 공허한 표정의 여배우는 흔치 않았던 것 같다. 아무런 대사 없이, 그러나 수많은 말을 담은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던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 후로 한동안 그 영화를 다시 볼 수 없을까 찾아봤지만, 이 고급 프랑스 영화는 대중에게 자애롭지 않았다. 단 한 번 침묵처럼 왔다 가슴 한 쪽을 먹먹하게 두드려놓고 두 번 다시 보여주지 않는 잔인한 보고픔을 던진 영화, 나에게 이자벨 위페르는 그렇게 남겨져 있었다.
내게는 영화를 볼 때 나만의 작은 원칙이 있다. 만약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을 먼저 보았다면 그 영화는 실망을 줄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되도록 피하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궁금하다. 만약 이자벨 위페르의 영화를 원작부터 먼저 보았어도 그런 후회를 했을까 하는 것이다. 우연이지만 그녀의 영화는 원작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영화로 먼저 만났던 것이다.
그녀가 주연했던 영화 <피아니스트>는 칸을 발칵 뒤집었다. 심사위원 대상과 남녀주연상이라는 주요부문을 석권한 영화라는 찬사도 그렇지만, 아름다운 제자를 사랑하는 나쁜 여자의 파격적인 설정이나, 애인을 찌르기 위해 칼을 품고 갔으나 결국 자신을 찌르던 마지막 소름 돋는 장면 등이 논란이 되었다. 역시 불꽃과 얼음을 동시에 지닌 위페르 다운 영화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원작이 <피아노 치는 여자>로 평단에서도 이미 파격적인 성애묘사 등으로 숱한 논란이 되었단 것과, 그 여류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단 것 모두 영화 이후에 일어난 화젯거리였다.
이제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영화의 원작을 뒤늦게나마 읽는 일이었다. 나는 <피아니스트>의 원작인 <피아노 치는 여자>를 한참 벼르다 뒤늦게야 보게 되었고, 원작이 지닌 예우를 벗어나 처음으로 원작보다 나은 영화를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피아노 치는 여자>는 우선 굉장히 불친절한 소설이었다. 혼선을 빚도록 설계된 대화체 문장이라든가, 무미건조한 상황 표현을 내면과 연결시키는 자세도 좀처럼 섬세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렇지 않게 에리카의 관음주의적 성향을 표현할 때는 책을 읽는 행위조차 불편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어머니의 그릇된 욕망에 사로잡힌 채 스스로의 하늘까지 쳇바퀴에 가둬버린, 그리하여 마침내 자아를 상실해버린 한 마리 서툰 새를 손에 떠안은 기분이었다. 품에 안기엔 그 펄펄 뛰는 심장이 두렵고 날려 보내기엔 너무나 치명적이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심정.
‘피아노 치는 여자’ 에리카는 서른 후반이 될 때까지 어머니에게서 자신을 분리한 적이 없다. 어머니의 병적인 집착에 의해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스파르타식으로 길러졌지만, 그저 음악원 교사로 살아갈 뿐이다.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해야 하는 어머니는 에리카의 귀가 시간과 옷차림 등에 병적으로 집착한다. 통상의 모녀관계에서는 볼 수 없는 둘의 이상증세는 아버지가 정신병원으로 가버리고, 그 빈자리를 에리카가 대신하도록 역할을 지운 데에서부터 그릇되어진다.
딸의 모든 사회적인 관계를 허용할 수 없어 자신의 둥지에서 길들여야 했던 어머니. 서로 머리를 뜯고 폭력적으로 살면서도 한 침대에서 살아가도록 길들여진 에리카. 이 두 여인 사이에 사악하도록 멋진 금발의 클레머가 등장한 것이다. 둘 사이에 지금껏 없던 위기감을 일으킨 이 연하남의 등장은 많은 것을 흔들고 있었지만, 정작 클레머에게 에리카란 자신의 여성편력의 연습대상에 불과했다. 그런 설정 또한 얼마나 잔혹한지?
에리카는 자신의 몸에 대해 그 어떤 것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 결핍의 상태로 육체란 영혼 없는 유령에 불과하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여자다. 늦은 밤 공원에서 다른 남녀의 성행위를 관찰하고, 핍쇼 장에 찾아가 여자들의 육체를 남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기도 한다. 남자들이 얼마의 돈을 지불하며 자위를 하는 과정들을 무심히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어머니가 씌운 남성성에 길들여졌다는 것을 대변한다 하겠다.
그러나 에리카는 남자가 될 수 없고 그것은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없는 변태적 행위로 비약되어 나타나는데, 그것이 에리카에겐 좀 더 복합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클레머를 유혹하려는 여학생의 호주머니에 유리조각을 넣어놓고 여학생의 손이 피로 물드는 장면을 바라보며 묘한 쾌감을 느끼는 장면이나,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의 조그마한 실수에 가혹한 질타를 서슴지 않는 장면이나, 천재 음악가들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행위에서 그녀의 가학적(사디즘)성향이 드러난다. 그런가하면 자신에게 접근해오는 클레머에게 침대에 묶은 채 때려달라고 편지로 애원하는 것에서는 피학적(마조히즘)성향이 드러난다. 이는 어머니의 강압적인 구속에 의해 자신의 자아를 상실한 채 복합적인 사도마조히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자신의 신체를 면도칼로 그어 피가 나오는 것을 즐기는 행위는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비릿함을 안겼다.
하지만 그녀는 진정한 사랑에 대한 욕망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 가두어 두었을 뿐, 좀체 드러내지 않는데, 클레머에게 자신의 삐뚤어진 판타지가 실현되지 않기를 희망하는 대목이다. 짐짓 정반대의 냉혹함으로 포장하였지만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피학성을 요구하는 것을 오직 책은 독자, 그러니까 그녀 내면만이 희미하게 인식할 뿐이다.
클레머의 화답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파괴적인 행위로 드러나고 만다. 맘껏 조롱하고 싶었다는 듯 폭력을 휘두르는 클레머의 행위나 그러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캠퍼스를 누비는 모습 등, 이해하지 못할 투성이들이 버젓이 생활되어지며 현실에 섞인다. 이 모든 파괴적인 성향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대미는 역시 에리카가 클레머를 찌르기 위해 준비한 칼로 자신의 어깨에 찌르는 마지막 장면이다. 그 상처를 두고 ‘다만 더러움 때문에 곪게 될까봐 걱정’이라 생각하는 에리카의 영혼 없는 얼굴 위로 이자벨 위페르의 표정이 오버랩 된다. ‘칼은 에리카를 뚫고 들어가고 에리카는 거기서 걸어 나온다.’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에리카를 돕지 않고 다만 ‘배 지나갈 때 갈라지는 물살처럼 무심히’지나쳐 버린다.
결국 에리카는 그토록 익숙한 어머니에게로 걸어간다. 너무 사랑해서 차라리 끔찍한 모녀관계는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묘하게 섬뜩하고 묘하게 여운이 남는, 그래서 이 영화는 이자벨 위페르만이 할 수 있는 광기의 영화가 되어 머릿속에서 다시한번 강렬해지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오래전에 본 영화라 내용을 읽으니 생각나네요. ㅋ 엘리네크의 소설 <연인들>을 읽고 참 독특한 글을 쓰는 작가구나 싶어 푹 빠졌던 기억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