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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7년
조영은 이루하가 품에서 내놓은 낡은 봉투를 열고 그 안에 든 문서를 재삼재사 세밀히 읽었다. 조영이 문서를 내려놓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것이 진정 사실이란 말이오?”
이루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왜 진즉 저에게 말해주지 않았소?”
“그건 불과 며칠 전에 영주의 부친께서 제게 인편으로 보내오신 거예요. 아버님 자신도 그런 게 있는 줄 모르셨대요.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하셨다는 거예요.”
“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조영은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다시 물었다.
“제가 우리 할아버지께 연락해서 이 사실을 확인해 봐도 괜찮겠습니까?”
“네, 물론 그렇게 하셔야죠.”
조영이 본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었다.
고승의 장손, 고중상의 장남, 고조영.
이아복고李阿卜固의 손녀, 이진영의 장녀, 이루하.
두 아이가 장차 배필로 맺어지기를 염원하며, 둘의 혼약을 고승과 이아복고가 상호 합의하고, 삼신일체 상제 하나님 존전에서 문서로 이를 인증하노라.
당唐 고종 함형咸亨 사년(673년), 상달 초하루
그 밑에는 고승과 이아복고의 친필 서명이 있고, 두 사람의 인이 찍혀 있었다.
그 날 조영은 즉시 서찰을 써서 영주 계성의 고가장에 있는 조부 고승에게 보내, 자신과 이루하가 어릴 적에 혼약한 것이 사실인지를 문의했다.
여러 날 후에 조부 고승으로부터 답장이 왔는데, 그런 일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나중에 이아복고가 사망한 후 이루하의 부친 이진영이 두 남녀의 약혼을 파기하자고 강력히 요청해, 결국 고승과 이진영 두 사람의 합의 하에 두 남녀의 이전 혼약은 무용지사無用之事가 되고 말았다는 내용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왜 이진영은 파기되어 효력이 상실된 혼약서를 새삼 자기 딸 이루하에게 뜬금없이 보냈는가?
그것은 조영의 당연한 의문이다. 조영은 그에 관해 다시 편지를 써서 조부에게 문의하며, 자신이 어릴 적에 어느 여아와 혼약했다고 하는데, 이루하와의 혼약이 파기되었다면 다시 혼약한 여아가 누구인지, 아니면 그 말이 이루하와의 파기된 혼약을 가리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조부 고승의 대답은, 이루하 말고 다른 여인과 혼약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조부는 이진영이 파기된 그 서류를 왜 보냈는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답하고, 이진영과 만나 그에 관해 상의하겠노라고 부언했다. 그리고 조영과 혼약한 다른 여아에 대해서는 지금 알 필요가 없다고 조부 고승은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이루하의 옥비녀 두 개를 내가 받아두었지만, 다시 돌려주는 게 옳다.’
조영은 일전에 있었던 극시아의 서신 사건에 옥비녀 문제까지 겹치니, 마음이 좀처럼 안정되지 않고 뒤숭숭했다.
삼일채 즉 이루하, 여미아, 미시아가 동일모양의 비녀를 각각 하나씩 지니고 있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 세 비녀 중 미시아 여미아의 것에는 “연연세세”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이루하의 옥비녀에는 “모란화”라는 세 글자가 명각되어 있었다. 합해서 “연연세세모란화”다.
미시아가 흑치상지의 집을 드나들던 어느 날이다. 돌궐족의 잦은 침략으로 당나라 서북쪽 변경이 불안해 무 태후가 흑치상지와 좌응양左鷹揚대장군 이다조를 삭주朔州로 파견하기 전이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이래저래 당에 투항한 고려와 백제의 장수들은 전장에 나가는 것이 곧 일상사였다.
미시아는 흑치상지와 사귀면서 이다조 장군과도 친해질 수 있었다. 그의 두 아우인 무후군 장수 이기원이나 고려여관 주인인 이기창과도 상당한 친분을 쌓았다.
무 태후는 미시아를 흑치상지의 사람으로 내어준 듯, 미시아의 자유로운 바깥출입을 간섭하거나 묻지 않았다. 무 태후가 그녀를 신임한 것은, 미시아가 무 태후에게 절대적 충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미시아의 가슴 속에서 자나 깨나 응어리를 맺고 있는 것은, 조부 임장청이 내려준 밀지다. 그것은 당나라 조정에 투신한 고려와 말갈, 백제 등의 세력가들을 회유해, 고려고토 회복의 대역사에 협력하게 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무 태후가 당나라 권력을 잃지 않도록 음으로 양으로 돕는 일이다. 여자가 황제노릇을 하는 공전空前의 사태 속에서 중국 내부가 혼란에 빠지고 당나라가 돌궐이나 거란과 자주 충돌하면, 고려가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다고 임장청은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그 날도 어찌하면 흑치상지, 이다조, 연헌성 등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하다가 미시아는 잠이 들었다.
낙양궁의 대전인 함원전含元殿에 문무백관이 도열해 있었다. 백관들 앞에는 무 태후가 황제의 홀을 잡고 엄숙하고 무서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미시아는 무 태후 옆에 기립해 있다.
무 태후가 문무백관 앞에서 미시아에게 책을 한 권 하사했다. 미시아는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책을 받았다. 책의 제목이 섬뜩한 모양의 핏빛 주서朱書다.
殺 生 符 籙 살 생 부 록
그 때 무 태후가 미시아에게 엄숙한 목소리로 명했다.
“책을 펴서 읽으라!”
미시아가 떨리는 손으로 책장을 넘기니 많은 이름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그녀가 부들거리는 목소리로 이름들을 읽어 내려갔다.
극시아, 고조영, 여미아, 사비우, 흑치상지, 연헌성, 이다조, 이진영, 이루하, 손만영, 이해고···.
먼저 중외인中外人들의 명단이 나오고 이어서 중화인中華人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설소, 이현, 이단, 이충, 이정, 무유서, 설회의, 태평공주 이영월, 내준신···.
“그들은 모두 죽어야 할 자들인가, 살아야 할 자들인가?”
무태후가 엄숙한 목소리로 미시아에게 물었다.
“그건 폐하께서 아시옵니다.”
“이 살생부를 누가 만들었느냐?”
그 때 미시아는 “폐하께서 만드셨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었는데, 자기 입에서는 이렇게 튀어나온다.
“제가 만들었습니다.”
미시아의 대답에 만장한 조정 남북 아문의 관리들은 모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년을 잡아 죽여야 한다. 저 미시아란 계집부터 잡아 죽여야 해!”
미시아가 깜짝 놀라 도망가려 하자, 무 태후가 징그러운 웃음을 보이더니, 손을 내밀어 미시아의 목덜미를 더럭 잡는 것이다.
“어딜?”
미시아는 소스라치게 놀라 무 태후의 손을 떨쳐버리고 몸에 찬 검을 빼들었다. 사방에서 군중이 구름떼 같이 모이며 미시아를 포위했다. 미시아는 손에 든 검을 전후좌우 사방팔방, 위 아래로 휘두르며 앞길을 가로막는 당장唐將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그 때 군중들 가운데서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멈추시오!”
깜짝 놀라 돌아보니, 군웅들 속에서 고조영이 엄숙한 얼굴로 손에 검을 쥐고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고조영이 일갈하자 모든 사람이 동작을 멈추었다. 고조영이 군중 사이를 뚫으며 마치 보리밭 속을 헤치고 나아가는 농부처럼 미시아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내 삼검三劍을 받을 수 있다면 보내주겠소.”
조영은 미시아에게 엄숙히 선언하며 날카로운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미시아는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돌연 화가 나서 일갈함과 동시에, 검을 들어 풍차같이 돌리면서 조영을 압박해 들어갔다.
수세에 몰린 조영이 이번에는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미시아는 차마 조영을 죽일 수가 없어서 손에 사정을 봐주었다. 그 때 갑자기 여기저기서 손에 무기를 든 궁성 남북아문의 장수들이 벌떼 같이 미시아에게 달려들어 윤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미시아가 그들에게 에워싸여 좌충우돌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군중 속에서 소리를 질렀다.
“언니, 검을 내려놓으세요!”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여미아였다. 여미아는 평소와 달리 아주 성난 표정이었다.
문득 잠을 깨니, 한바탕 무서운 꿈이었다. 이마가 식은땀에 흥건히 젖어 있다. 불을 켜고 이마를 훔치며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꿈에 읽은 “살생부록” 명단을 떠올려보았다. 너무나 생생해 모든 이름이 또렷이 기억났다.
미시아는 즉시 문방사보를 찾아, 꿈에 본 사람들의 성명을 종이에 적어, 깊숙한 곳에 은밀히 간직했다.
하지만 개꿈 같기도 해서, 맛이 개운치 않았다. 더구나 살생부록의 맨 첫 머리에 극시아, 고조영, 여미아가 들어가 있어서 그녀는 너무나 꺼림칙하고 무서웠다.
‘이건 내가 만든 게 아니고, 태후마마가 만든 거야. 꿈속에서도 분명히 나는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 중에 죽일 사람은 누구고 살릴 사람은 누군가?’
아무래도 석연하게 풀이되지 않았다. 이 꿈으로 며칠 고민하던 미시아는 상의할 사람이 여미아와 고조영 밖에 없다고 판단되어, 미시아는 좀처럼 찾아가지 않던 이루하의 집을 드디어 방문한다.
무더운 열기가 천하를 뒤덮고 있던 어느 날, 고조영은 이루하의 집으로부터 집에 좀 들러주셨으면 좋겠다는 전갈을 받았다. 무슨 일인가 궁금히 여기던 조영이 이루하에게 돌려주기 위해 옥비녀 두 개를 챙긴 다음, 단신으로 그녀 집을 찾아갔다.
대문에 들어서니, 여미아가 그를 보고 반색을 한다. 너무나 아름답고 고아하며 또한 친절한 태도다.
“공자님, 어서 오세요.”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저를 다 초대해 주시고.”
여미아와 함께 나와 있던 이루하가 대답했다.
“내 여종 여미아가 초청했습니다.”
여미아가 초청했다는 말에, 조영은 속으로 뜨끔하며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조영이 가슴을 억누르며 헛기침을 했다. 조영이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여미아가 입을 열었다.
“오늘 귀한 손님이 오실 것 같아요. 공자님과 그 분이 함께 만나야 할 듯한 예감이 들어 공자님을 미리 초대했습니다.”
‘난 또···.’
조영은 속으로 몹시 실망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쾌활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아가씨는 신통력을 지니셨나 봅니다. 어떤 귀한 손님이 오실지 몹시 기대되는 군요.”
그가 말을 마치지 못했을 때, 대문 밖에서 누군가가 여미아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두드렸다.
“여미아, 여미아!”
고조영이 깜짝 놀라 여미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미아가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닫아걸었던 대문을 다시 열었다.
대문 밖에서 상기된 표정으로, 장미꽃처럼 매혹적인 한 아가씨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는 마치 어느 남자의 아낙네처럼 머리를 위로 감아올리고 있었다.
조영이 그녀와 인사하고 뒤로 섰다. 그녀의 뒷머리에 꽂은 옥비녀가 햇볕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아, 내게 주었던 그 옥비녀가 아닌가?’
조영은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혀 말없이, 당시의 남녀간, 주종간 예절을 무시한 채, 여인들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조촐한 식사가 끝난 후, 네 사람 사이에서는 모처럼 만나서인지 저절로 이야기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서먹서먹했으나, 여미아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며 가끔씩 웃음을 이끌어냈다.
“여미아 아가씨가 말한 귀한 손님이 바로 미시아 아가씨인가요?”
조영의 물음에, 여미아가 그렇다고 공손히 대답하자 미시아가 무슨 말인가 해서, 조영과 여미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언니가 절 찾아올 줄 알고 있었어요. 오늘 새벽, 제가 기도 속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저의 임금께서 오늘 미시아 언니가 찾아온다고 일러주셨어요.”
“···?”
“왜 찾아오느냐고 여쭈어보았으나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없으셨어요.”
“네가 섬기는 임금께서는 만사를 신처럼 다 아시나 보구나.”
여미아가 말없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조영이 얼핏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니, 마치 어린아이가 해맑은 미소를 짓는 것처럼 천진난만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그 미소가 어찌나 순결하고 순수하고 청아한지, 조영은 속으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여인의 이 세외적世外的 초탈미超脫美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가?’
조영이 그런 생각을 하며 여미아를 흘끗 쳐다보다가 눈을 돌려 미시아를 바라다보았다. 미시아는 얼굴에 약간의 수색과 함께 처연한 빛을 띠고 있었는데, 여미아의 얼굴과 대조적이었다. 자신을 고요히 응시하는 그녀의 눈길이 어떤 애처로움과 원망을 담고 있는 것 같아, 조영은 속으로 다시 한 번 뜨끔했다.
“태자 전하, 제가 전하와 상의할 일이 있었는데, 마침 잘 오셨습니다.”
미시아가 솜에 물을 먹인 듯 무겁게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이루하를 동지로 간주했는지, 그녀 앞에서 조영을 “태자전하”라고 거침없이 불렀다.
“전하, 극시아가 별실에 구금되었습니다.”
그녀의 뜬금없는 말에 세 사람은 크게 놀랐다.
“무 태후의 총애하는 시비 단아團兒가 내게 일러주어서 알았습니다.”
조영이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숨을 쉬며 토로했다.
“일이 결국 그렇게 터지는 군요. 그렇지 않아도 일전의 편지 사건으로 마음이 불안했는데.”
“혹시 무엇 때문에 감금을 당했는지 알고 있는가요?”
이루하가 미시아에게 물었다.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 지난 번 극시아가 황태후 폐하 앞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말았는데, 아마도 극시아의 입을 봉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목숨을 보장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요?”
조영이 갑자기 분연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건 말도 안 되오. 내가 태후마마께 말씀을 올려야 되겠소.”
조영의 노기 띤 음성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실내는 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바깥에서 소낙비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지를 울리는 빗소리가 선남선녀들의 숨소리를 삼킨다. 미시아가 그 정적을 뚫고 입을 열었다.
“제가 며칠 전 너무나 무서운 꿈을 꾸었습니다.”
모든 이의 얼굴이 일제히 미시아를 향했다.
“꿈속에서, 태후마마가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살생부록殺生符籙을 보았습니다.”
모두들 아연한 표정이다. 살생부록이란 살릴 자와 죽일 자에 관한 일종의 예언서를 말한다.
“부록의 첫 머리에 극시아의 이름이 올라있었습니다.”
이내 미시아는 살생부록에 실린 이름들을 낱낱이 열거했다.
“거 참, 이상하군요. 그걸 무 태후가 만들었다면, 태평공주 같은 자신의 피붙이를 죽일 리는 없잖아요?”
“누가 알겠어요? 예전에 왕 황후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자기 친딸을 죽였다는 소문도 파다하던데요?”
“그게 사실이라면, 그녀는 아마도 귀신에게 씌워서 그런 행동을 했을 것이오.”
조영의 대답이다.
입을 다물고 있던 여미아가 조용히 말했다.
“소녀가 알기로, 꿈속에 본 그런 살생부록 같은 것은 믿을 게 못됩니다.”
모든 이의 눈이 여미아에게 쏠렸다.
“부록符籙이란 점괘로 얻은 일종의 예언서인데, 장래 일은 어떤 필연적 운명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하늘의 섭리 안에서 사람의 행위에 따라 좌우된다고 예전에 고양원 대덕님께 들은 바 있습니다.”
고양원 대덕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모든 젊은이들의 얼굴에 존경하는 빛이 떠올랐다.
“더구나 이것은 꿈에 불과합니다. 꿈과 예언서는 해석을 잘 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엉뚱한 오해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여미아, 그러면 묻겠는데 이것이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느냐? 꿈에 본대로 극시아는 생사를 알 수 없는 백척간두에 서있지 않느냐? 너도 알다시피, 폐하에게 밉보인 자들은 거의 다 주살당하거나 유배형을 당하고, 그녀의 눈 밖에 난 여인들은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언니, 그 꿈은 너무나 애매모호해요. 단순히 살생부록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죽일 사람인지 살릴 사람인지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여미아의 지적은 명쾌했다.
“그렇다면 그 중에서 우리가 살릴 자와 죽일 자, 즉 무 태후가 죽이고 싶어 하는 자들은 누구이고, 살리기 원하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선별해야 되는 게 아닐까?”
“그게 옳을 거예요. 하지만 꿈에는 자기 희망이 투사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게 무슨 말이지?”
“언니의 가슴 속에 잠재해 있는 욕구가 꿈으로 풀이되어 나왔을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네 말은, 살생부록의 생사生死 명부가 내 욕구에서 비롯되었다는 거냐?”
“그럴 수도 있어요.”
여미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여미아가 좌중을 둘러보고 덧붙여 말했다.
“옛말에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 했으나, 인명재기人命在己라는 말도 옳아요. 사람의 생사화복은 그 자신에게 달려 있는 거라고, 저는 고양원 대덕님께 배웠습니다.”
여미아는 천정을 우러러보며 뭔가가 그리운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니, 우리가 우리의 하늘 임금을 사모하고 사랑한다면, 어떤 환난이나 죽음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두려워할 게 없습니다.”
“네 말은, 내 꿈이 별 것 아니라는 거냐?”
“그래요. 우리가 늘 깨어서 삼신일체 상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며 조심한다면, 남에게 책잡힐 일이 없을 거예요. 설사 불가항력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하늘의 참다운 본향이 있어요. 환웅임금께서 말씀하시고 단군임금께서 풀이하신 것처럼, 저 천궁에 들어가 하나님을 뵈옵고 무궁한 쾌락과 행복을 누릴 수가 있어요.”
여미아의 말이 갑자기 도도해졌다.
“경교의 경전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임을 사랑하는 우리는 죽어도 산다고. 그러니 두려워할 게 무언가요?”
죽음까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역설하는 그녀의 언변 앞에, 다른 이들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모든 싸움과 고통은, 삶에의 애착과 죽음에의 두려움에서 온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를 억압하려는 이들은, 항상 이 두 가지를 이용합니다. 생에 대한 애착, 죽음에 대한 공포. 이 둘을 뛰어넘으면, 우리는 어떤 세력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폭군, 천지재난도 우리를 어쩌지 못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생사보다 임을 더 사랑한다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녀가 말을 그치니, 일순 실내는 정적에 싸이고 바깥의 비바람 소리는 더욱 요란하게 들려온다.
“극시아에 관해서는, 제가 어리지만 직접 폐하를 만나 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미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깥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바깥에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어서 모시고 들어오지 않고.”
이루하가 말했다.
“그런 손님이 아니라, 아씨께서 친히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루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잠시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왔다. 대문을 열고 보니, 뜻밖에도 무후군 장수 무유서가 하인 둘을 거느리고 바깥에 서 있었다.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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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4. 10. 15.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