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만든 대중음악 10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시를 가지고 곡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손 편지를 이메일이, 집전화기를 휴대폰이 대신하는 시대가 되면서 우리는 더 이상 은유적이거나 함축적인 표현보다는 직설적이고 단도직입적인 주장에 더 길들여지게 된 듯하다. 생활의 편리함과 빠른 의사소통이 다른 사람이 말을 하는 동안 기다릴 시간을, 혹은 내 스스로 말을 곱씹어보는 여유를 빼앗아 간 것은 아닐까. [그래 가끔은 하늘을 보자]라고 외쳤던 아날로그 시대의 영화 제목처럼 자극적인 말과 신조어로 가득한 세상을 한 번쯤은 벗어나서 시가 주는 여운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10곡만 뽑겠습니다. 더 좋은 곡들을 댓글로 부탁드립니다.)
1. 나도야 간다 - 김수철 /1984 (떠나가는 배 - 박용철)
김수철이 출연했던 1984년 영화 [고래사냥]의 주제가다. 갈 곳 잃은 젊은이들의 방황을 잘 나타냈다고 평가받았던 이 로드 무비는 그해 최고의 흥행작이었고 2011년 한국영상자료원이 뽑은 역대 한국영화 최고의 청춘영화로 뽑히기도 했다. 하지만 곡은 김수철이 ‘못다 핀 꽃 한송이’에 이어 후속곡으로 히트를 하려던 찰나에 표절시비에 걸렸다. 김수철이 작사한 이 가사와 거의 비슷한 느낌의 시가 있었던 것이다. 그 시는 박용철 시인의 ‘떠나가는 배’였고 유족들의 반대로 노래는 방송금지 처분이 내려졌다. 박용철 시인의 시가 일제 탄압을 못 견디고 방황하는 청춘을 그린 것이라면 김수철의 버전은 “사랑 찾아 꿈 찾아 나도야 간다”의 가사처럼 희망 없는 시대를 조금이나마 뛰어넘으려는 젊은 기운이 느껴진다.
2. 해야 - 마그마 / 1980 (해야 - 박두진)
- 이 시는 조지훈,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알려진 박두진 시인이 1949년 발표한 시집 [해]에 수록된 것으로 암울했던 조국의 현실을 ‘해’라는 긍정의 기운을 통해 돌파하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이 곡을 만든 조하문은 연세대 지질학과 학생들로 모인 마그마란 팀의 수장으로 박두진 시인의 ‘해야’를 개작해 1980년 제4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당시 조하문, 김광현, 문영식으로 이루어진 3인조 마그마는 이 단 한 곡으로 대학가요제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지금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너무 프로 같다”라는 말은 당시에는 ‘너무 잘하면 미움 받는’ 어떤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이 곡은 연세대의 응원가로 쓰일 만큼 유명해졌고 5년이 지나 조하문은 솔로 앨범을 내고 인기가수 반열에 오른ek.
이동원은 시를 가사로 자주 사용하는 가수다. ‘이별노래’는 정호승 시인, ‘마흔 살 되는 해는’은 천양희 시인, ‘애인’은 장석주 시인, ‘귀천’은 천상병 시인의 작품이다. 이 곡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1988년 자의, 타의로 북에 건너간 시인들의 시가 해금되었기 때문이다. 납북시인 정지용의 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동원은 서울 여의도의 한 서점에서 우연히 이 시를 읽고 반해 작곡가 김희갑을 1년간 설득했다. 완성된 곡을 본 후 다시 테너 박인수를 설득해 이 곡을 탄생시켰다. 앨범은 크게 히트했지만 박인수는 국립 오페라단에서 나와야 했다. 당시만 해도 클래식과 대중음악 사이에는 신분의 차이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곡을 계기로 91년 이문세, 테너 박정하가 부른 ‘겨울의 미소’를 거쳐 93년 KBS [열린음악회]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양 진영이 크로스오버 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
4.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유심초 / 1980 (저녁에 - 김광섭)
이 곡은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라는 시에 유심초의 한 후배가 만들었던 가사를 합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시가 가진 무한한 상상력을 ‘나비’와 ‘꽃송이’로 제한한 듯한 느낌이 들어 시가 주는 원래 그 느낌을 더 좋아하지만 베이스로 시작하는 인트로의 강력함과 후렴구의 마력은 가사와 상관없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유심초는 6형제 중 셋째와 넷째로 구성된 형제밴드로 이 곡과 ‘사랑이여’라는 곡으로 그해 MBC 신인상(데뷔한 것은 1975년이었지만)을 비롯해 거의 모든 가요제에서 주는 상을 싹쓸이하며 절정의 인기를 누린다. 이들은 이후에도 ‘사랑하는 그대에게’ 등을 히트시켰지만 두 형제 모두 사업가로 한 철을 보낸 후 2000년대 중반 다시 재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5. 소금인형 - 안치환 / 1993 (소금인형 - 류시화)
안치환은 이 곡 외에도 시로 표현한 곡들이 상당히 많다. 나희덕 시인의 ‘귀뚜라미’, 정호승 시인의 ‘우리가 어느 별에서’ 등을 가사로 노래로 만들었고 2000년에는 김남주 시인에 대한 트리뷰트 형식으로 만든 [Remember], 2008년에는 정호승 시인의 시를 통째로 앨범에 담은 [정호승을 노래하다] 등이 있다. 이 곡은 소금으로 만든 인형이 바다의 깊이를 재겠다고 바다로 내려가는 동안에 녹아 없어졌다는 인도의 한 이야기를 시인 류시화가 인용해 시를 지었고 그것을 안치환이 노래로 만든 것이다. 점점 시를 가사로 사용하는 빈도가 느는 이유가 있냐고 묻는 한 인터뷰에서 안치환은 언젠가부터 “가사를 쓰는 것이 힘들어졌다”고 고백했다. 개인적으로 안치환의 명반 [Confession]이 나온 후 그의 소극장 공연에 갔다가 이 곡에 압도된 기억이 있다.
6.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 활주로 / 1978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 김소월)
이 곡은 송골매의 전신이었던 홍익대의 블랙 테트라와 항공대의 활주로가 참여했던 TBC(동양방송)의 해변가요제에서 활주로가 불러 인기상을 받았던 곡으로 활주로의 실질적인 데뷔곡이다. 활주로는 그해 8월에 이 상을 받고 10월에 다시 대학가요제에 나가 ‘탈춤’으로 은상을 받으며 1979년 1집을 발표한다. 하지만 음악을 업으로 삼고 싶지 않은 친구들이 탈퇴하면서 해체하고 말았다. 이 가사는 김소월 시인의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를 거의 바꾸지 않고 약간만 개사했다. 아마도 가사로 쓰인 시 중에서 김소월 시인의 작품이 최다일 것이다. 김소월의 시로만 된 특선 가곡집이 있으며 1990년에는 신효범, 최진희 등의 가수들이 [김소월 시노래 모음] 컴필레이션 앨범을 발표했고 작곡가 박지만은 소월의 시로만 된 [그 사람에게]라는 김소월 프로젝트 앨범을 윤상, 하림 등의 뮤지션들과 발표했다.
7. 직녀에게 - 김원중 / 1985 (직녀에게 - 문병란)
시인 문병란이 70년대 중반 [심상]이라는 시지를 통해 발표한 시를 작곡가 김형성이 외국으로 망명한 한 친구가 통일에 관한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으로 만든 곡이다. 그 친구로 인해 해외에서 민중가요처럼 불렸고 외국에 들렀다가 이 곡을 접한 문병란 시인은 국내에서도 불리길 원해 한 후배에게 주었고 그 후배가 다시 가수 박문옥에게 주었다. 하지만 박문옥은 가곡풍이었던 원곡을 버리고 자신의 스타일로 다시 작곡했다. 박문옥이 불렀던 이 곡은 가수 김원중이 앨범으로 발표하며 인기를 얻었다. 단순히 사랑에 관한 노래일거라고 알고 있었고 ‘남북의 통일에 관한 노래’라고 들었을 때도 ‘해석만 그렇게 한 것이겠지’ 생각했었는데 문병란 시인 스스로가 원래 통일을 의도로 지은 시라고 밝혔다.
8.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 - 이제하 / 1998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 - 이제하)
이 곡은 ‘모란동백’이란 제목으로, 조영남이 MBC [놀러와]의 세시봉 특집에 나와 본인이 죽었을 때 장례식에서 본인의 대표노래로 불러주었으면 하는 노래라고 소개해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원래는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라는 소설로 유명한,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화가인 이제하 시인이 1998년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곡이다. 이미 고등학교 때 문단에 등단할 정도로 천재적 감성을 보였던 그는 시인으로 등단했음에도 소설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시는 20대까지 쓸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평소 지인들과 기타 코드 몇 개로 노래를 부르던 그는 동물원의 윤준열을 비롯한 후배들의 강력한 권고로 회갑 기념 시집음반을 냈고 거기에 이 곡을 수록했다. 개인적으로 조영남 버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9. 푸르른 날 - 송창식 / 1983 (푸르른 날 - 서정주)
이 곡은 1968년 미당 서정주 시인의 [동천]이란 시집에 실린 작품을 노래로 만든 것이다. 송창식은 이 시에 곡을 붙이고 서정주 시인을 찾아가 노래를 시연해 보이며 허락을 구했다. 서정주 시인은 생전 한 인터뷰에서 송창식의 노래에서 젊은 날의 푸르름을 보면서도 동시에 서러움을 보았다고 밝혔다. 이 곡은 송창식이 1983년에 발표한 앨범에 수록되었다. 앨범이 나올 당시에는 ‘우리는’만이 히트했지만 KBS에서 노랫말의 질적 향상이란 모토를 내걸고 만든 [가사대상]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이 곡도 크게 알려졌다. 금상은 박건호가 작사한 ‘아 대한민국’이였다. 원래 양희은을 위해 만들었고 양희은에게 부르라고 주었지만 잘 맞지 않았는지 송창식이 부르게 되었다. [불후의 명곡2 송창식편]에서 임태경이 불러 호평을 받았다.
10. 가을편지 - 최양숙 / 1971 (가을편지 - 고은)
노벨문학상 후보로 자주 거론되는 시인 고은의 작품에 약관의 김민기가 만든 곡이다. 당시 김민기의 앨범을 음악평론가이자 DJ인 최경식이 주선해주었고 김민기는 거기에 대한 보답으로 최경식의 동생인 최양숙이 앨범을 준비하자 이 곡을 만들어 주었다. 당시 최양숙은 성악가 출신으로 샹송을 잘 불렀으며 ‘황혼의 엘레지’란 곡으로 인기를 누렸다. 김민기는 최양숙의 앨범에 이 곡뿐 아니라 ‘꽃 피우는 아이’란 곡도 주었고 앨범에는 양희은이 불러 유명해진 고은 시인의 또 다른 작품인 ‘세노야’가 ‘세노야 세노야’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작곡가 김민기를 비롯해 아주 많은 가수들이 이 곡을 리메이크 했고 젊은 층에서도 박효신이 R&B 버전으로, 보아가 무반주의 짧은 버전으로 임팩트 있게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