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사시대
나주는 선사시대부터 영산강유역에 인류가 거주하며 독특한 형태의 문화를 생성시켜 왔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불미지국(不彌之國)이었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땅으로 발라(發羅)ㆍ통의(通義)라 불리웠다.
통일신라에 이르러 금산(錦山)ㆍ금성(錦城)으로 개칭되었으며 후백제시대에 와서 비로소 나주(羅州)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 고려시대
나주는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개국함에 있어 그 발판으로 삼았던 만큼 고려시대에 이르러 급격히 부상하기에 이른다. 나주는 왕건과 견훤이 후삼국의 패권을 잡고자 공방전을 벌였을때 왕건이 승리한 것을 계기로 역사의 중앙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왕건은 나주오씨와 인연을 맺었고 또한 아들을 낳았다. 이가 장화왕후와ㆍ고려 제 2대왕 혜종이다. 고려시대인 983년(성종 2) 전국 12牧의 하나로서 나주목이 되어 5개군과 11개현을 다스렸으며, 고려 현종때 현 전남지방에 유일하게 나주만이 목이 되어 이 지방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거란의 2차 침입때는 현종이 나주로 몽진와 10여일 머무르며 지금의 심향사(금성산기슭)에서 연등회와 팔관회를 개최케 하였다. 이는 전라도 지역에서 고려정부를 상징하는 거점으로서의 나주를 잘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와 나주에 진을 두었다가 후에 전라우영이 설치되었다. 그 후 1896년 나주관찰부가 폐지될때까지 약 천년간 306명의 목사가 부임하여 호남을 다스렸던 호남의 웅도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반란사건으로 비화된 기축옥사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으며, 영조조의 이인좌난이나 서원조직을 둘러싼 남인과 노론세력간의 끈질긴 경쟁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후기에 들어와 상인ㆍ향리세력의 성장이 가장 활발하였고, 구한말 보수와 개혁의 다양한 양상이 펼쳐지기도 하였다. 갑오농민전쟁동안 나주는 끝내 동학군들에 대항하여 읍성을 지켰으며 단발령사건ㆍ한말호남의병항쟁ㆍ궁삼면토지회수투쟁과 광주학생독립운동ㆍ나주농업보습학교생들의 만세시위사건 등 역사적 사건의 주무대이기도 하였다.
특히 나주의 금성산과 서울의 삼각산, 한강과 영산강, 남산 등 그 지세가 꼭 서울을 닮았다 하여 예부터 ‘小京' 즉 작은 서울이라 불러 왔다.
전라도라는 명칭이 나주와 전주에서 비롯된 것으로도 나주가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영산포는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와 내륙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고려때 조운제도에 의해 영산포에 진(津)이 설치되었다가 한때 왜구의 약탈로 쇠퇴하였다. 당시 왜구들이 현 서해안일대의 섬들을 노략질하여 사람들을 괴롭힐때마다 피난민들은 영산강을 따라 영산포까지 올라와 머무르곤 하였다. 그러는 사이 섬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게 된 것이다. 조선조에 이르러 조창제도가 부활되면서 세곡을 거둬 저장했다가 서울로 운송하는 국영창고로서 영산창(榮山倉)이 설치되었다. 영산창이 한창 붐볐을때는 나주ㆍ순천ㆍ강진ㆍ광산ㆍ진도ㆍ낙안ㆍ과양ㆍ화순ㆍ동복ㆍ고흥ㆍ무안ㆍ능성ㆍ영암ㆍ보성ㆍ장흥ㆍ해남ㆍ진원 등 17고을의 세곡을 저장하였고, 53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후 1512년 영산창의 수로가 험난해 해상사고가 많다 하여 영광의 법성창에 통합되었다.
-구한말
그러나 구한말부터 1960년대까지도 영산포는 포구의 역할을 가장 활발히 수행하여 고깃배며 소금배와 옹기배, 젓갈배들이 몰때마다 드나들어 성시를 이루었다. 현 영산동 40번지 일대가 당시의 선창거리 중심지로서 밤에도 대낮처럼 불이 환할 정도였다. 이와 함께 구한말 목포개항과 더불어 개화기를 거치면서 영산포는 여러 방면에서 전라도의 중심지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인들이 영산포를 전라도통치의 기반으로 삼고 각종 시설을 설립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교육과 상업시설적인 면에서는 그 현상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해방후 영산강 상류에 4개의 댐이 건설되고 하구언이 만들어지면서 수량이 급격히 감소하고 또한 육로교통이 발달하면서, 영산강을 무대로 발전했던 영산포는 영산강의 중심포구로서의 역할을 잃게 되었다.
- 1895년 고종32
1895년(고종 32) 8도를 23관찰부로 개혁할 때 16군을 관할하는 나주관찰부가 설치되면서 나주목은 나주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896년 지도군과 완도군을 창설할 때 나주군에 속했던 52개 섬이 떨어져 나갔고, 관찰부가 광주로 이전되었다. 1906년 지방구역정리때 금마ㆍ원정ㆍ종남ㆍ비음면은 영암군에, 삼향ㆍ망운면은 무안군에, 대화ㆍ장본ㆍ적량ㆍ여황ㆍ오산면은 함평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관할구역정리때 남평군이 폐군되어 편입되고, 함평군의 장본ㆍ적량ㆍ여황면이 다시 편입되어 왔다. 1929년 나주면과 나신면을 합쳐 나주면이 되었고, 1931년과 1937년에 나주면과 영산면이 나주읍과 영산포읍으로 승격되었다. 1949년 평동ㆍ삼도ㆍ본양면이 광산군에 편입되고, 나주와 영산포는 1981년 통합되어 금성시로 승격되었으며, 1986년 유서깊은 이름인 나주시로 개칭되었다. 1995년 1월 1일 나주시군이 통합되어 나주시로 하나가 되었으며, 1998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1邑 12面 6洞으로 편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첫댓글 나주의 역사에 대해 모르는점이 많았는데 공부를 많이 할 수 있어 유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