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윌리엄 터너 - 전함 테메레르
1870년대부터 외적, 내란을 맞아 제국의 공고화를 위한 노력이 있었다. 청조의 쇠락은 제 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1860년의 조약을 끝으로 일단락되었고, 이후 스스로의 중흥을 위한 노력을 행했다. 동치제에서 시작된 이 노력을 동치중흥(同治 restoration)이라 한다.
동치제는 1861년에 정변을 통해 등극하였다. 함풍제가 열하에서 죽은 후 서태후가 공친왕과 손잡고 다른 정파를 제거했으며, 당시 6세였던 동치제를 황위에 앉혔다. 이를 신유정변(辛酉政變)이라 한다. 신유년에서 갑오년까지 중앙과 지방에서 관료들을 중심으로 서양의 일을 익히자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반란이 진압되고 전쟁이 마무리되자 자강, 부강을 꾀하고자 하는 노력이 일어났다. 대단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되 청조 말기의 안정을 가져왔다. 대체로 근대적 자본과 군대의 양성을 위한 노력이었는데, 자강이나 부강을 달성하지는 못했으며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이후 힘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때문에 1890년대 후반부터 열강들이 중국을 반식민지 상태로 몰아넣게 되었다. 이것이 양무운동의 개요이다.
원래 양무(洋務)라는 말은 이무(夷務)에서 나온 말이다. 중화(中華)라는 말은 중심 이라는 뜻 보다는 가장 좋고 가장 화려한 것이라는 뜻이 강하다. 그런 관점에서, 문화적으로 이(夷)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아편전쟁 시기의 이무는 오랑캐와 관련된 사무, 즉 연안방어(海防)였다. 그러나 서양인들이 이(夷)의 뜻을 안 뒤로 격하게 항의하였고, 청조가 거부하자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후 조약 체결시 용어 교정을 요구하였고, 또 지방관들이 서양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자체적으로 양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이후 조야에서 이무 대신 양무라는 말을 광범위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 연안방어 이외에도 서양 세력과의 관계에서 광범위하게 사용하게 되었는데, 제조(군함, 포대 제작), 교안(敎案, 포교), 통상 의 업무를 포괄하는 용어가 되었다. 즉, 최종적으로는 서양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사무들을 원만히 처리하며, 서양을 배척하기보다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배우고자 하는 노력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태평천국이나 1차 아편전쟁 등으로 청조도 당금을 "수천년래 일찍이 없었던 기국(奇局)"이라 평가하며 위기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고, 이 위기는 일반적으로 왕조말에 찾아오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서양을 야만시하지 않고, 서양스럽게 자강과 부강을 이루자는 양무운동은 여러가지 스펙트럼이 존재하나 대체로 기술, 기예를 배우는 데에 중심을 두었을 뿐 정치나 사상에 대한 관심은 극히 적었다. 중학위체서학위용(中學爲體西學爲用), 즉 중체서용의 기조를 채택한 것이다.
1861년~1908년까지 전권을 장악한 것은 서태후였다. 1차 아편전쟁시 도광제의 아들 중 함풍제와 공친왕(4남)이 후계자로 거론되었으나 함풍제가 황제가 되고, 이후 둘의 사이는 상당히 좋았으나 둘 모두를 돌봤던 공친왕의 생모가 사망한 이후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다. 서태후는 난(蘭)이라는 이름의 귀인(貴人)이었으나 황자를 낳은 후 비(妃)를 거쳐 귀비(貴妃)로 봉해졌고, 황자를 낳았기에 후(后)라 불리워졌다. 이후 아들이 왕이 되면서 태후(太后)가 되었는데, 거처가 자금성의 서쪽에 있기에 서태후(西太后)라는 이름이 되었다. 함풍제가 2차 아편전쟁시 척사파들과 함께 열하로 몽진하고 북경은 서태후와 공친왕이 지켰는데, 사태수습 후에도 수도로 복귀하지 않다가 함풍제가 죽고 동치제가 즉위했다. 6세였기에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는데, 서태후는 신유정변을 통해 권력을 확고히 하고 대외적으로 타협적인 이들을 중용하여(1861년 11월) 양무파의 대두를 불렀다.
중앙에는 공친왕과 문상(文祥 ), 지방에는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 등이 자리잡은 양무파는 화려한 등장과는 달리 실질적인 변혁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서태후의 성향이 매우 보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은 1860년에 자신들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 공친왕이었기에 양무 정책에 호의적이었으나 동치제 재위기간(1861~1874), 그리고 그 후 광서제(1874~1908) 사망시까지 정권을 유지한 서태후로 인하여 중앙의 양무파는 혁신적인 정책을 시행하는 데 장애를 안고 있었다. 지방의 안정을 위한 양무는 계속 시행되었는데, 이는 근본적 혁신이라기 보다는 기존체제 강화 및 유지의 한 방법이었다.
1861년부터 상해, 남경 등 양자강 유역에 대규모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대체로 총포와 탄약을 만드는 군수공장이었고, 모두 24곳이었다. 지금까지는 없던 근대적 기계제를 도입했으나 기술, 자금, 원자재 등 모든 면에서 자체 운영이 불가능하여 서양인에 의해 운영되고 관료가 지도하는 방식을 취했다. 공장 가동을 위해 필요한 석탄, 철 등 광물을 위하여 광산 개발도 시작되었는데 이로서 근대적 광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서양 기술서적 번역과 그것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을 지방정부차원에서 만들어 근대적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고, 중앙에서는 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1874년 이후로는 해양 방어에 주력하기 위해 해군을 건설하고자 했는데, 이는 일본의 대만 출병과 관련이 있다. 강희제 이후 대만은 중국의 영토였으나 일본의 출병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면서 함대를 만들고자 했고, 발해만의 북양함대, 대만 인근의 복건함대, 대만 이남의 남양함대 등 3개 함대를 창설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점은 많고 위세만 당당한 함대였다. 주로 실제 전쟁 경험이 있는 상군계와 회군계 인사들이 함대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효율적 의사교류가 없기에 통제가 이뤄지지 않았고, 통일적 지취체계가 확립되지 않았으며, 훈련과 기율이 부족하고 전함의 표준화도 이뤄지지 않아 문제가 많았다. 청프전쟁에서는 복건함대가 궤멸되었는데, 이 시기에 양무와 자강 노력이 일시 좌절을 맞게 된다. 함대의 취약성은 계속되어 1894년에는 북양함대가 일본에게 대패하게 된다.
민간기업의 창설도 양무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1860년대 말까지는 군비증강에 주력하였으나 70년대부터는 일반 사회에서 수용되는 일반 공업에까지 손을 뻗쳤다. 이는 부국강병을 지향하면서 부국 이후 강병을 이루겠다는, 나름의 사고 전환이었따. 양무관료들은 서양의 경제적 부유함에 주목하고 광산이나 회사를 건설하면서 동시에 면방직공장을 설립했다. 그러나 일반인보다는 주로 관이 주도하였기에 기업 역시 행정기구의 보조적 성격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고, 관독상판(官督商辦)의 형태로 경영되었다. 설립시의 자본 역시 국가 세수로 충당하였는데, 간혹 민간에서도 자본을 끌어오고 경영을 맡기는 경우도 있었다. 외국 상인들과 접촉하여 외국문품을 거래했던 매판(買辦)들이 주로 그러한 역할을 맡았다. 후에 매판자본은 이익을 위해 국가나 민족은 생각지 않고, 서양 자본의 중국진출의 첨병 노릇을 했다는 등 부정적으로 인식되었으나, 이 단계에서는 그런 의미의 매판은 아니었다.
이처럼 양무 사업에는 언제나 관이 관여했는데, 문제점도 있고 이점도 있었다. 이점이라면 외국자본에 대한 경쟁에서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점과 세제상의 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이 있고, 문제점이라면 관의 보조적 행정기관으로 여겨졌기에 수시로 정부에서 기업 자금을 전용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관료 자본주의는 당시 나타나고 있었던 민간 자본주의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민간 자본주의로 형성된 자본은 후일 민족자본이라 일컬어지는데, 민족자본이란 외국 자본이 아니면서 관료 자본도 아닌 나머지 자본을 의미한다. 민간 자본가들 중 민족의식 있는 이들은 후에 제국주의적 압박에 대해 파시(罷市), 즉 점포 철거나 불매운동 등을 통해 항의하였다.
이러한 싹들이 양무운동기에 나타나게 되었다. 양무운동은 기존과는 다른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관이 관여한다는 사고는 변하지 않았기에, 개혁운동이기는 했으나 그 목표가 체제의 유지였던 자강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중국사 최초의 근대적 개혁 운동은, 훗날의 대변화를 야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우선, 자본주의와 공장제 기계공업의 발달을 들 수 있다. 대규모 임노동이 시작된 것이다. 둘째로, 민족자본의 형성이 시작되었음을 들 수 있다. 셋째로, 청조 체제 유지가 목적이었고 매우 취약했으나 전과 비교해 방위력의 증진을 가져온 새로운 군대의 건설이 이뤄진 측면이 있다. 넷째로 학교, 번역, 유학 등을 장려하여 근대개혁의 폭을 넓혔고, 마지막으로 상해 등의 개항장에서 상품경제가 시작되어 '팔기 위한 상품'을 다루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점을 양무운동이 가져온 변화로 제시할 수 있다.
양무운동의 실패는 추진주체가 취약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보수파의 견제로 인하여 양무파가 중앙정부의 핵심을 장악하지 못했고, 대부분의 개혁은 지방관이 분산적으로 알아서 추진하는 형태였다. 또한 지도사상의 한계로 인해 근본적인 개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1890년대 후반에는 변법운동이 실시되어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시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