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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유럽에 위치한 오스트리아 공화국(Republic of Austria)은 북쪽으로는 독일과 체코에, 동쪽으로는 슬로바키아와 헝가리에, 남쪽으로는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 서쪽으로는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에 국경을 접하고 있다. 국토의 면적은 8만 3845km2에 이르고, 800만 명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최고봉 그로스글로크너(Gro lockner:3797m)를 비롯하여 3000m 정도의 봉우리들이 늘어선 알프스 산지 지역과 호수, 도나우 강변과 보헤미아의 숲들 그리고 동유럽으로 퍼져 나가는 평원으로 이루어진 오스트리아는 지역에 따라 네 가지 기후를 지니고 있다. 북부는 온대성 기후, 동부는 대륙성 기후, 서부는 해양성 기후를 나타낸다. 사계절 모두 관광하기에 좋으나 특히 7~9월에 많은 관광객들이 몰린다. 수도는 빈(비엔나)으로 인구 15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주요 도시로는 그라츠(24만 3000명), 린츠(20만 명), 잘츠부르크(14만 명), 인스부르크(11만 7000명)가 있다. 오스트리아는 니더외스터라이히, 오버외스터라이히, 잘츠부르크, 티롤, 포어아를베르크, 케른텐, 슈타이어마르크와 부르겐란트 등의 8개의 연방 주로 구성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의 대부분은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알프스는 빈의 남쪽에서 시작되어 포어아를베르크를 지나 니스에 위치한 지중해까지 뻗어 있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국토에는 1919년 이래로 해안이 없다. II. 역사 로마 시대 때 지금의 오스트리아 도나우 강 남쪽 지역은 로마의 노리쿰(Noricum) 지방에, 동쪽 지역은 파노니아(Pannonia) 지방에 속해 있었다. 북부 지역은 게르만족의 마코마넨(Markomannen)족과 쿠바덴(Quaden)족의 거주지였고, 빈도보나(Vindobona:지금의 빈)와 라우리아쿰(Lauriacum:지금의 린츠)은 당시 도나우 강 경계를 확정짓기 위해 건설된 지역이었다. 서로마 제국이 476년 게르만족 출신의 오도아케르에게 멸망되고 그가 집권하는 동안, 또 오도아케르가 동고트족에 의해 살해되고 동고트 왕국이 이탈리아 지역을 지배했던 시기에도 오스트리아 지역은 이탈리아와 정치적으로 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나르세스(Narses) 장군이 동고트 왕국을 멸망시켰을 때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지역 사이의 정치적 통일은 깨어졌고, 오스트리아 지역에는 게르만족의 바이에른족과 슬라브의 카란탄(Karantan)족이 각기 정착하게 되었다. 알레마니언 공국의 포어아를베르크와 바이에른 공국의 티롤 그리고 잘츠부르크 지역은 프랑크 제국에 편입되었고, 케르텐과 동마르크 지역은 슬라브족 국가들과 경계를 이루어, 이들을 물리치면서 점차 바이에른인들이 정착하였다. 798년 대주교구 잘츠부르크가 바이에른과 마르크 경계 지역의 주교구들을 관할하였으며 프랑크 제국이 카를 대제 이후 동·서 프랑크 제국으로 분할될 때 바이에른 공국은 독일의 프랑켄, 작센, 슈바벤 등 다른 주요 부족들과 함께 프랑켄 부족의 콘라트를 독일 왕으로 추대하였다. 896년 마자르의 기마족이 헝가리의 저지대와 마르크 지역으로 침입해 와 약탈해 갔다. 독일 왕들은 마자르족에게 공물을 지급하다가 955년 레흐(Lech) 전투에서 하인리히 왕이 승리를 하고 나서야 마자르족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976년 오스트리아 지역은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2세에 의해 바이에른 후작의 변경령으로 정해지고, 이후 바벤베르크 변경백(나중에 공작으로 승격)이 통치하게 되다가 1278년 합스부르크가의 초대 황제 루돌프 1세의 영유지가 되었다. 합스부르크가는 이 곳 오스트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확장해 나갔다. 막시밀리안 1세 때 네덜란드를 병합했고, 혼인 정책을 통해 스페인 왕국과도 결합하였다. 카를 5세 때는 독일의 합스부르크령을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물려주었는데 페르디난트 1세가 헝가리와 보헤미아 지역도 손에 넣게 되어 카를 5세는 그의 제국에서는 해가 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지배권이 확대되었다(유럽의 지배 외에도 아메리카와 필리핀 등의 스페인 식민지들도 그에게 종속되었고, 필리핀은 합스부르크가의 펠리페의 이름을 따라서 불리게 되었다). 이렇게 광대한 합스부르크 제국에서는 많은 이민족과 상이한 언어들이 공존했고, 지역마다 자주적인 정치 체제와 경제 구조가 지배했는데 1556년 합스부르크는 나폴리, 시칠리아, 밀라노, 부르군트 등을 중심으로 한 스페인 합스부르크 세력과,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일부 지역과 보헤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오스트리아 세력으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 전 유럽으로 파급되는 종교 개혁의 소용돌이에서 오스트리아는 카톨릭을 엄격하게 수호하여(지금까지도 오스트리아인 대부분이 카톨릭이다), 신교 세력인 프랑스와 헝가리, 보헤미아 국가들과 대립하여 30년 전쟁을 벌인다. 한편 터키의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발칸의 대부분을 병합시킨 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공격하여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후 오스트리아의 빈을 포위 공격하였다. 오스트리아는 간신히 폴란드의 얀 소비에스키(얀 3세)의 도움을 받아 오스만투르크군을 물리치게 되고 이후 오이겐(Prinz von Savoyen Eugen)의 지휘로 헝가리 등 동유럽 지역과 북이탈리아, 남프랑스 등을 평정한다. 또 스페인 계승 전쟁에서는 영국, 네덜란드 해군의 힘을 빌어 프랑스를 격파하고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밀라노, 나폴리, 네덜란드 등도 획득함으로써 당시까지의 스페인 의존 체제에서 벗어나 프랑스와 대등한 유럽의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새롭게 등장하는 프로이센에게 독일의 주도권을 넘겨 주게 된다. 합스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의 영유권 문제로 프랑스, 러시아 및 독일의 여러 영방과 손을 잡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전쟁을 벌이나 성공하지 못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을 때 그 파급을 두려워했던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2세는 오히려 프로이센과 손을 잡고 프랑스에 간섭하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에게 패전을 거듭하고 1806년 나폴레옹이 라인 동맹을 결성하였을 때 프란츠 2세는 황제의 지위에서 물러나게 되어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 다시 메테르니히의 수완에 의해 오스트리아는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당시 유럽에서 태동하는 민족주의, 자유주의 운동을 억압하는 데 주력한다. 그러나 빈에서 3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메테르니히는 실각한다. 이후 이탈리아 통일 전쟁이 일어나 롬바르디아 지방을 상실하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패배한 오스트리아는 독일 연방을 탈퇴하고 독일의 주도권을 프로이센에게 완전히 넘겨 준다. 이에 따라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는 이민족들의 독립 운동을 억압하는 것이 어렵게 되어, 헝가리의 마자르 귀족과 타협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을 세웠다. 1871년 독일의 통일 후 비스마르크와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을 체결하였다. 당시 발칸 지역에서는 러시아의 슬라브주의와 독일, 오스트리아의 게르만주의가 대립하였는데, 1908년 투르크에 혁명이 일어났을 때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강제로 병합해서 세르비아와 러시아를 자극하였고, 발칸 전쟁 후의 영토 처분 때 불가리아를 지원하였기 때문에 세르비아와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결국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인에게 암살되자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1918년 연합국과의 휴전 조약이 체결된 후 혁명이 일어나 합스부르크가는 붕괴되고 공화제가 성립된다. 191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고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가 독립하였으며 갈리시아 지방은 다시 폴란드에게, 트란실바니아 지역은 루마니아에게 돌아갔다. 오스트리아 국토는 4분의 1로 축소되었고 전쟁 배상 의무와 산업 부진으로 인한 경제 대공황으로 재정적인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는 보수적인 기독교 사회당과 마르크스 이론에 입각한 사회 민주당이 서로 대립하여 있었고, 나치스가 집권한 독일과의 통합을 주장하는 세력도 활동하고 있었다. 1932년 기독교 사회당의 돌푸스가 쿠데타에 의한 독재 정치 체계를 수립하였으나 다음해 나치스 당원에게 암살되고 독일 나치스 압력에 굴복하여 독일 제국으로 합병되어 국가로서의 존재를 상실하게 되었다. 다음해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종전 후 소련에게 빈을 점령당한 후 새로운 정부가 재건되어 1955년 영세 중립의 전제하에 독립 주권이 회복되었다. 오스트리아는 1955년 UN(국제 연합)에 가입하였다. 빈은 1969년 원자력 관청인 IAEO의 소재지가 되었고, 1979년 겐프(Genf)와 뉴욕 외에 세번째 UN 도시로 임명되었다. 1986년 전 UN 사무총장 쿠르트 발트하임(Kurt Waldheim)이 오스트리아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과거 때문에(발트하임은 2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의 장교였다) 강하게 비판받았고, 다른 국가 원수들도 그를 기피하여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어떠한 국가 방문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르샤바 조약 기구가 붕괴되는 게 확실시되자, 오스트리아 정부는 EC(유럽 공동체)에 가입 신청을 제출했고 1995년 가입에 성공했다. 오스트리아의 니콜라우스 폰 쿠덴호프 칼러기(Nikolaus von Coudenhove -Kalergi) 백작은 1923년 PANEUROPA라는 잡지를 발행했고, 하나의 유럽 공동체에 대한 운동을 주장했는데 그 이후 여기에서 유럽 연합이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EC가입은 매우 늦어졌는데 수십 년 동안 오스트리아에 강요돼 왔던 중립주의 때문이었다. III. 정치 오스트리아는 연방에 기초한 의회 민주주의 국가로 내각 책임제를 채택하고 있다. 의회는 국민 의회(Nationalrat)라 불리고, 183명의 의원은 비례 대표제에 따라 국민이 선출한다. 그에 반해 하원으로서는 연방 의회(Bundesrat)가 있고 63명의 의원은 연방 주의 주 의회에서 파견된다. 법률은 국민 의회에 의해 결정된다. 그 효력 발생은 연방 의회에 의해 지연될 수는 있으나 방해받지는 않는다. 일상 정치의 수행은 연방 수상의 과제이고, 국가 원수는 대표 기능만을 수행한다. 연방 정부는 부수상뿐 아니라, 14명의 연방 장관으로 함께 구성된다. 연방 주는 고유의 의회와 주 정부를 운영하는데, 그 때마다 의장이 주관을 한다. 연방과 주의 관할은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현재 연방 정부는 사민당(SPO:1991년까지 사회당이라 불렸고 1889년에 창설, 당원 대부분이 노동 조합 구성원, 중소 기업가, 소농, 지식층이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은 희박하고 서유럽 민주주의에 가깝다.)과 국민당(OVP: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에서 결성된 카톨릭계 보수 정당과 같은 계열이며 자유주의 경제의 기수로 1960년대 말까지 1당의 지위를 누렸다.)의 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유당(FPO:독일과의 합방을 주장하는 대독일주의 계통에 속하며 옛 나치스의 흐름을 타고 있다.)은 가장 중요한 야당이고 많은 주 정부에서 대표적인 당이다. 그 외에 통일 녹색당(VGO:1986~)과 오스트리아 대안 그룹(ALO:1986 ~)이 국민 의회에서 의원들로 선출되었다. 1978년의 국민 투표에서 츠벤텐 마을(Zwentendorf)의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비준 공포가 거부되었다. 정치적으로 환경 운동을 대표하는 VGO(통일 녹색당)은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힘이 약하다. 오스트리아 정치의 특이한 점은 이스라엘과의 소원한 관계이다. 이스라엘에게는 홀로코스트(유태인 탄압의 참상)에 대해 오스트리아가 무책임한 것으로 보여짐에도, 오스트리아 정부는 연방 독일이 그들의 역사적 책임을 진 것처럼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 연방 수상 크라이스키(Kreisky) 하에서 오스트리아는 공식적으로 친아랍 정책을 폈다. 1979년 PLO는 오스트리아 정부에 의해 신임되었다. 크라이스키는 자신은 유태인이면서, 그것 때문에 ‘유태인 배척주의자’로 불렸다. 국내 정치에서는 수년 동안 우경화의 운동이 나타났다. 외르크 하이터(Jorg Haider)가 이끄는 자유당(FPO)은 오스트리아 정당 정치에서 우익의 한편을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와의 관계 한국 전쟁 당시에 오스트리아는 정복 상태여서, 주권도 자국 군대도 없었다. 그래서 UN 안전 보장 이사회가 대한민국을 지원하라고 요청했을 때 따를 수 없었다. 1955년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승인하는 조약에서 오스트리아는 외교 정책에서의 엄격한 중립을 맹세해야 했다. 오스트리아와 우리 나라는 1963년 외교적 관계를 체결했고 양국간에 무역 협정이 1971년 10월에 이루어졌다. 그 밖에도 1974년 12월부터 오스트리아 공화국과 북한 사이의 외교적 교섭이 성립되었다. IV. 경제 오스트리아 경제 체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본주의를 기조로 하면서도 주요 기간 산업을 국유화, 국영화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관광업은 국가 경제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오스트리아는 겨울뿐 아니라 여름에도 여행객들을 끄는 알프스의 아름다운 경치를 제공한다. 바카우(Wachau)에 있는 도나우 계곡은 볼 만한 명승지이다. 뒤른슈타인(Durnstein) 요새에서 영국 왕 뢰하프트 리온하르트는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Leopold) 후작에 의해 감금되어(1192~1194) 그 밑에 놓여 있는 도나우 골짜기의 멋진 경치를 즐길 수 있었다. 잘츠부르크와 빈은 여행을 즐기는 예술 애호가들에게 강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오스트리아는 매혹적이고 변화가 많은 경치뿐만 아니라 가격이 적정한 휴가지로도 명성이 높다(축제, 공연 시기의 잘츠부르크는 제외). 또한 오스트리아의 친절한 손님 접대와 훌륭한 음식은 찬사를 불러일으킨다. 농업은 중요한 경제 요소이다. 산비탈에서는 방목이 주로 행해졌으며(유제품), 낮은 곳에 위치한 지역에서는 포도가 재배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갈탄, 마그네사이트, 납, 아연, 크롬, 철광석, 염, 천연 가스와 적은 양의 석유가 채굴된다. 도시 잘츠부르크는 암염광에서 그 이름을 따 왔고, 슈타이어마르크에 있는 아이젠네르츠(Eisenerz)는 철광 석채굴(Eisenerz-obbau)에서, 케른텐에 있는 블라이부르크(Bleibwrg)는 납채굴(Belt)에서 이름을 따 왔다. 브레너를 거쳐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철도 무역은 유럽 경제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오스트리아는 철로의 가장 힘든 부분을 부담하고 있지만 적은 이익만을 얻기 때문에 도로와 철도 노선의 건설과 유지에 있어 가장 높은 비용을 부담한다. 대부분의 화물차 기사들은 오스트리아에서 쉬지 않고 통과한다. 또한 도나우 강은 통과하는 길로서 드나드는 데 문제점이 많다. 왜냐하면 수면이 낮은 곳이 여러 군데 있기 때문에 큰 배들은 통과할 수가 없다. 그러나 물 밑을 파내는 것은 환경 운동가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친다. 도나우 계곡은 고속 도로선을 놓기에는 너무 좁다. 철도와 고속 도로의 동서 연결은 도나우 남쪽으로 지나간다. 알프스에서 간선 도로들은 가능한 한 멀리 강계곡을 따라 간다. 많은 계곡의 교각과 터널이 이 땅에서는 전형적이다. V. 문화와 생활상 1. 언어와 인종, 국민성 공용어는 독일어이다. 주민의 98%가 독일어계 오스트리아인이고 소수의 슬로베니아인(1만 6000명), 크로아티아인(2만 2000명) 그리고 마자르인(독일식 헝가리인이라 불린다. 1만 2000명)이 있다. 오스트리아인은 로마적 정서와 발칸적 정열을 공유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다민족 국가를 형성하였기에 여러 인종으로 뒤섞여 국제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같은 게르만족인 독일과 구별되는 점이다. 또 칭호를 좋아하여 실제보다 과장된 칭호를 종종 사용한다. 예를 들어 대학을 마치고 나면 박사라고 부르기도 하고, 박사 학위를 받고 나면 교수라고 불리기도 한다. 2. 종교 오스트리아는 카톨릭 국가이다. 국민의 90%가 카톨릭 교도이며 6% 정도만이 개신교(프로테스탄트)를 믿는다. 카톨릭은 오스트리아인들의 생활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으며 풍속이나 습관, 연중 행사의 많은 부분이 카톨릭적이다. 도처에 멋진 교회들이 있다. 마을에는 소박한 양식들로 된 교회가 있고 도시에는 로코코나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들이 많이 있다. 이런 현상은 카톨릭 국가에 전형적인 것으로, 다른 유럽 개신교 국가들에서는 일반적이지 않다. 3. 예술 빈은 합스부르크가의 소재지였고, 역사적으로 다민족 국가를 형성하였기에 여러 민족 문화를 융합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는 중심지였다. 오스트리아 음악은 독일 음악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나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등의 민속 음악을 받아들여 독일 음악보다는 밝은 선율을 가진 변화 있는 리듬을 특징으로 한다. 빈은 옛부터 연극과 음악의 중심지였다. 황제의 궁은 전 유럽의 예술가들에게는 매우 매혹적이었고, 예술가들은 일자리를 찾거나 혹은 예술 후원자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모차르트, 베토벤 등 많은 음악가들이 모여들었고 빈은 가장 중요한 음악의 중심지가 되었다. 빈 필하모니는 세계적 지위를 지니고 있고, 지휘자 카라얀이 죽었을 때는 전 세계에서 애석해 하였다. 빈에서 왈츠가 발전하였으며, 요한과 리챠드 스트라우스는 이 곳에 큰 영향를 끼쳤다. 매년 빈의 궁정 무도회는 춤 시즌을 개시한다. 오페라 무도회는 `상류층 수만 명'과 관련된 행사이다. 여기서는 합스부르크의 귀족적 궁중 문화 전통이 계속 지켜진다. 빈에서는 왈츠 외에 오페라, 소가극, 행진곡 등도 발전하였다. 회화 분야에서 오스트리아는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 같은 위인들을 배출해 냈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의 정치 인생을 시작하기 전에 두 번이나 오스트리아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 신청서를 제출했으나 두 번 다 거절되었다. 빈은 또한 극예술의 도시이다. 왕실 극장과 빈에 있는 극장들은 독일어 문화권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빈 이외에 잘츠부르크 역시 문화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4. 교육 오스트리아의 교육 수준은 높다. 19세기 무렵 이미 8년 동안의 의무 교육 제도가 실시되었으며, 사립 학교도 있으나 전반적으로 국가가 관리, 통제하고 있다. 종합 대학으로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빈 대학과 그 외에 인스부르크 대학, 그라츠 대학, 잘츠부르크 대학 등이 있다. 5. 스포츠 오스트리아의 문화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겨울 스포츠이다. 스키는 온 국민이 사랑하는 스포츠이다. 오스트리아 내에서 동계 올림픽 출전 티켓을 얻는 것은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 종종 오스트리아의 스키 선수들은 동계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서 국적을 바꾼다. 그래서 마크 기라텔리(Marc Girardelli)는 룩셈부르크를 택했다. 1972년 동계 경기는 인스부르크에서 열렸다. 스키 외에 축구가 대중적인 운동이다. 1978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오스트리아는 8강까지 진출했고, 독일팀을 3 대 2로 물리쳤다. 최근에는 많은 오스트리아 테니스 선수들이 주목을 받고 있는데 토마스 무스터(Thomas muster)는 세계 랭킹에서 상위에 속한다. 6. 음식 오스트리아 요리는 다양하다. 독일 요리에 헝가리 요리가 가미되어 독특한 맛을 내는데 햄·소시지 요리나 헝가리 요리처럼 파프리카를 넣은 요리는 먹어 볼 만하다. 또 바다가 없기 때문에 담수어나 새 요리가 발달하였다. 생크림을 띄운 비엔나 커피가 유명한데 빈 사람들은 커피를 터키에서 들여 와――커피는 아랍의 예멘(Yemen)에서 유래했다.――유럽의 여러 나라에 전했다. 유명한 크로와쌍(Croissant)도 빈에서 유래했다. 1683년 터키가 빈을 포위 공격하였을 때, 빈의 빵굽는 사람이 이슬람의 오스만을 상징하는 반달 모양의 퍼프페이스트 과자를 만들어 냈고 마리아 테네지아의 딸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빈의 빵굽는 전통을 파리에 가져갔다. 구워 만든 과자류는 오스트리아의 특산물이다. 오스트리아를 방문하는 사람은 자커 케이크(Sacher-Torte 자커 호텔을 따서 이름 붙였다.), 린츠 케이크(die Linzer Torte), 도나우웰레(Donauwelle)를 먹어볼 만하다. 오스트리아인들은 단 음식을 좋아한다. 식당의 메뉴판에서 잘츠부르거 녹컬른(Salzburger Nockerln:계란, 우유, 밀가루, 설탕으로 만들어 따뜻하게 먹는 거품이 있는 단음식)과 팔라트쉰켄(Palatschinken:쉰켄은 햄이란 뜻이지만 햄이 아니라 달게 만든 팬케이크다)들은 항상 찾아볼 수 있다. 오스트리아 음식에 크뇌델(Kn el:주먹만한 크기에 묽은 전분 가루로 인해 끊는 물에서 구형체가 된 것)이 있다. 그리고 헝가리에서 유래한 굴라쉬(Gulasch)도 이에 속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