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기 주교 수원교구장 재임 13년
소공동체·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에 매진 가정 성화 바탕으로 복음화·하느님 나라 건설 앞장 지역 특성에 적합한 사목 위해 대리구 체제로 재편 시노두스 개최·대사회 나눔 운동·성지개발 등 주도
최덕기 주교 재임 13년. 그 끝자락에서 바라본 수원교구는 이제 막 애벌레가 껍질을 깨고 나와 나비가 되는 형상이다. 복음화율 증가, 교구 인프라 확충 등 모든 면에 있어서 그렇다.
최 주교는 특히 교구를 굴러가게 할 두 바퀴로 ‘소공동체 활성화’와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를 선택했다. 이 수레를 이끌어 가는 6마리 말이 바로 6개 대리구이고, 마차를 끌어가는 마부가 ‘성가정’이다.
이 성가정 마부가 이끄는 수레가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최덕기 주교는 그 지향점으로 늘‘가정 성화를 바탕으로한 이 땅의 복음화’와 ‘하느님 나라 건설’을 강조했다. 특히 최 주교는 자주 “하느님 나라 건설을 ‘지역사회에서’ 하자”고 했다. 하느님 나라 건설의 장이 바로 ‘지금 여기’인 것이다.
▨ 복음화율
최덕기 주교 재임 기간 늘어난 신자 수는 무려 30만명에 이른다. 많은 이들이 수원교구의 이같은 급속한 신자 수 증가 원인으로 ‘신도시 개발’을 꼽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단편적 시각이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인구대비 신자비율을 보면 2002년 8.87% 이던 것이 2003년 9.29%, 2004년 9.37%, 2005년 9.58%, 2006년 9.73%로 꾸준한 증가를 보이고 있다.
인구대비 신자비율의 증가는 수원교구 신자 증가가 단순히 신도시 개발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통계는 신도시로 유입되는 인구 중 천주교 신자가 유난히 많다는 가정을 하지 않는 한, 신도시 개발과 신자 수 증가를 단순 등식화하기 힘들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수원교구 신자 수 증가는 최 주교의 리더십에 따른 교구의 역동성, 선교 열기, 소공동체의 활성화 등 다양한 요인에서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 시노두스
최덕기 주교가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이끈 수원교구 시노두스의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일반적으로 ‘시노드’는 교구 전체의 모든 문제점을 망라해 논의하고 그 대안을 다루는 것인데 최 주교는 ‘구역·반 공동체 활성화’와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라는 두 가지 의제에만 초점을 맞췄다. 수원교구 시노두스의 또 다른 특징은 최종문헌이 단순히 신학적인 이론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담은 ‘지침서’및 ‘참고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시노두스 실현에 대한 당시 교구장 최덕기 주교의 강한 의지가 투영돼 있다. 최 주교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실천하지 않는 시노두스는 무의미하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최 주교의 의지는 “단촐한 시노두스 결과문을 가지고 교구 전체가 집중력 있게 구현시켜 나아가야 한다”는 최종문헌 문안에서도 잘 드러난다.
결국 시노두스가 두 가지 의제에만 집중함으로써 만족할만한 ‘교구 만의’ 사목 대안들을 마련할 수 있었고 또한 실현 가능성도 높였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당시 일부에서는 구역반 공동체와 청소년 문제만 해결한다고 해서 교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최 주교는 최종문헌에서 “구역·반 공동체 활성화와 청소년 신앙생활의 활성화가 이뤄지면 수원교구는 앞으로 더 큰 문제들도 쉽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최 주교는 또 이렇게 말했다.
“시노두스의 성공적인 구현은 수원교구가 다른 많은 일들도 이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고 따라서 수원교구에는 희망찬 분위기가 형성될 것이다. 그러나 교구민 모두가 장기간에 걸쳐 결의하여 만들었고, 교구가 의지를 가지고 정책적으로 펼치는 일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다면, 교구는 더 이상 어떤 것도 교구적으로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하겠다.”
▨ 대리구제
2006년 최덕기 주교가 대리구 체제 도입을 선언하고 6개 대리구장 신부를 임명했을 당시, 교구민들은 이를 하나의 ‘큰 변화’로 받아 들였다. 물론 대리구 제도는 최 주교가 밝혔듯이 “교회법적 규정에 따른 것”일 뿐 새로운 개념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리구장 신부가 실질적으로 대리구 사제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또 견진 등 교구장 권한이 대폭 이양 된다는 점에서, 대리구제는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개념이었다.
특히 지역별 특성에 맞는 다양한 사목의 활성화라는 점에서 큰 기대를 모았다. 이와 관련 교구 사제들은 ‘대리구 체제’가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우선 교구청과 대리구의 유기적 관계가 시간이 흐를수록 자리잡아 가고 있다. 선교 및 쉬는 신자, 가정 사목에 대한 배려 또한 대리구 차원에서 강화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대리구 체제 이후 대리구 사제단이 다양한 행사 등을 통해 일체성을 높였다는 점이 가장 돋보인다. 신자들의 활동 폭도 넓어 졌다. 대리구별로 평협 조직의 틀이 갖춰졌으며 청년 미사 등 각종 활동 신심 단체의 대리구 차원 연대 또한 강화되고 있다. 교구 공동체의 일치와 친교를 향한 ‘첫발’이 최 주교의 대리구제 도입 의지로 가능했다면 두 번째, 세 번째 걸음은 이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 소공동체 활성화
최덕기 주교는 시노두스를 마치며, ‘소공동체’를 신앙생활 활성화의 방편으로 제시했다. 최 주교는 시노두스 최종문헌 글 첫머리에서 “시대의 요구와 징표들을 직시하면서 구역반 공동체 활성화를 통하여 세상의 복음화와 공동체의 복음화를 이루려고 한다”고 명시했다. 최 주교는 단순히 소공동체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선언적인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최 주교는 최종문헌을 통해 구역반 공동체 봉사자의 자격에서부터 임기, 포상규정, 교류방안에 이르기까지 매우 구체적인 내용을 밝혔다. 또 시행 세칙은 교구와 지구, 본당 차원에서 해야 할 일을 구분해 문서화 함으로써 구역반 공동체에 대한 유기적이고 조직적인 지원이 가능하도록 했다.
과거 수원교구 일선 본당에 있어서 소공동체 운동은 ‘선택 사항’이었지 ‘의무 사항’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 주교는 이제 그 선택을 의무로 바꾸어 놓았다. 소공동체 운동이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운동이 아니라, 급변하는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희망’이 된 것이다.
▨ 평신도 사도직 활성화
수원교구에 가면 평신도 사도직이 보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수원교구 평신도 사도직 활동은 유명하다. 미리내성지 인근 골프장 건설 반대를 위한 교구 환경연합의 활동에서부터 교회 내 복음화 활동에 이르기까지 평신도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수원교구는 특히 검증된 평신도 지도자를 교구가 직접 양성하고 조직화해 평신도 교육의 전면에 나서도록 했다. ▲성경봉사자회 ▲소공동체 봉사자회 ▲선교봉사자회 ▲가정 복음화 연구 봉사자회를 중심으로 복음화 봉사자를 양성, 본당에 파견 교육하고 있다. 한국교회에서 교구가 직접 선교와 소공동체, 성경 전문가를 모집, 양성, 조직화해 일선 본당에 파견하는 것은 유래가 없는 일이다.
이 같은 교구의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교구의 전폭적 지지는 ‘평신도들의 자발적 교육열기→봉사의욕 고취→격려→신뢰에 걸맞는 높은 수준의 평신도 사도직 실현→신뢰’라는 선순환의 고리로 이어지고 있다.
▨ 기타
최덕기 주교 재임 기간, 수원교구의 사회사목활동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수 년 년전만해도 10~20개소에 불과하던 교구 인준 사회복지시설이 벌써 100개소를 넘어섰다. 직영 복지관만 6개소. 복지 분야도 장애인, 여성, 의료, 노인, 행려인 등 전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헌혈 운동 등 대사회 나눔 운동도 활발하다.
최덕기 주교의 땀을 이야기할 때 성지개발을 빼놓을 수 없다. 수원교회사연구소 설립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으며, 새로이 요당리 성지 개발에 착수하는 등 신앙 선조들의 신심을 따르려는 노력도 돋보였다. 어농, 양근, 수리산 성지 등 기존 성지들도 차별화 및 성전건립, 성지 개발을 위해서도 많은 땀을 흘렸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를 창간하고, 교구 명예기자단을 출범시키는 등 홍보 활동 또한 크게 강화한 것도 최 주교의 12년을 돌아보면서 빠트릴 수 없는 기억들이다.
제4대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 인터뷰
"사제단과의 일치·대리구제 정착에 앞장" 전임 교구장님 노력해 이룬 전통 발전시켜 신자들의 행복·유익·기쁨 위해 헌신할 것 최덕기 주교님 건강 위해 많은 기도 부탁
제3대 수원교구장 최덕기 주교의 사임에 따라 교구장직을 승계한 제4대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는 주님의 뜻에 따르며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교구를 이끌어가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또 사제단과의 일치를 통해 대리구제를 안정시키고 지속시켜 거대한 교구를 잘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교구민들에게는 지난 13년 간 교구를 위해 헌신해 온 최덕기 주교를 위한 기도도 당부했다. 이용훈 주교와의 인터뷰는 3월 30일 오후 7시30분 수원교구청 4층 이 주교의 집무실에서 이뤄졌다.
“저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능력이 출중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사제로서 하느님의 불림을 받은 소명을 이행하는 한 사람입니다.”
교구장이라는 무거운 십자가를 진 소감에 대해 이용훈 주교는 “저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그분께 의탁하면서 교구를 이끌어 가고자 하는 소박하고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다”며 “정말 하느님 뜻이 무엇인지,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성령께서 잘 이끌어 주시도록 청하며 기도하는 마음만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수원교구가 지난 46년간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세 분 교구장님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그분들의 뜻을 잘 이어받고 특별히 교구의 좋은 전통들을 발전시켜야 하는 과제가 (우리 모두에게) 남아있다”고 밝혔다.
이 주교는 특별히 전임 교구장 최덕기 주교를 존경하며 각별한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최 주교님께서는 지난 13년간 몸을 돌보지 않고 일을 하셨는데 건강상 이유로 사임하시게 되어 저희들 마음이 무거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교구 안에 머무르시면서 건강이 허락하시는 한 계속해 교구를 위해서 일을 해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교구민 모두가 건강하시도록 기도해야겠고 여러 면에서 보살펴 드려야 할 의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수원교구를 어떻게 이끌어 갈지에 대해 이 주교는 “(보좌주교와 부교구장으로) 교구 안에서 살았던 사람이니 지금껏 하던 것처럼 일한다면 주님께서 잘 보살펴 주실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사제단과의 일치가 교구를 잘 이끌어 갈 수 있는 선행과제라고 힘줘 강조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제단과의 화합과 하나됨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도 사제단과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지만 앞으로는 더욱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아 부을 생각입니다.”
이 주교는 또 “본격 시행된 지 3년이 지난 대리구제를 안정시키고 지속적으로 잘 추진해야만 거대한 교구를 잘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최덕기 주교님의 사임 소식을 접한 신자들이 얼마나 놀라움을 갖고 이 일을 받아들이실지 짐작이 간다”는 이주교는 전임 최덕기 주교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비롯한 교구 사제단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 주교는 “최 주교님께서 건강상 문제로 교황님께 사임을 청한 것이고 그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라는 것을 신자들께서 잘 이해하셨으면 좋겠다”며 “그야말로 불철주야, 노심초사 교구를 위해 일하셨고 여전히 우리 가운데 계실 우리 교회의 큰 어른을 사랑해주시고 건강하시도록 기도해 주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 주교는 아울러 “비록 교구를 위해 봉사해야 할 제 자신 아직 두려움과 걱정도 크다”면서 “신부님들과 함께 신자들의 행복, 유익, 선익, 기쁨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 지켜봐주시고 많은 기도를 부탁한다”고 했다.
◆ 이용훈 주교 약력
1969년 2월 : 서울 성신고등학교 졸업
1977년 2월 :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신학과 졸업
1979년 2월 :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대학원 졸업
1979년 3월 6일 : 사제 수품
1979년 3월 - 1980년 2월 : 수원교구 안성본당 보좌, 안법고등학교 교사
1980년 3월 - 1981년 1월 : 성신고등학교 교사
1981년 1월 - 1981년 7월 : 수원교구 신장본당 보좌
1981년 7월 - 1982년 3월 : 수원교구 수진동본당 보좌
1982년 3월 - 1984년 2월 : 수원교구 정남본당 주임
1988년 9월 : 교황청 라테라노대학교 성 알퐁소대학 윤리신학 박사
1988년 10월 - 2003년 3월 :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1992년 3월 - 1994년 2월 : 수원가톨릭대학교 학생처장
1997년 3월 - 1998년 6월 : 수원가톨릭대학교 교무처장
1998년 6월 - 2002년 6월 : 수원교구 사제평의회 위원, 참사회의 위원
1998년 6월 - 2002년 6월 : 수원가톨릭대학교 총장
2000년 6월 - 2001년 10월 : 수원교구 시노두스 중앙위원
2001년 4월 - 2002년 6월 : 수원교구 사제평생교육위원회 위원
2002년 12월 - 2003년 3월 : 미국 보스턴 하버드대학교 연수
2003년 3월 7일 : 수원교구 보좌주교 임명(카타붐 카스트라 명의주교)
2003년 5월 14일 : 주교 수품
2004년 10월 - 현재 : 주교회의 교육위원회 위원장
2004년 10월 - 현재 : 주교회의 사회주교위원회 위원
2008년 10월 10일 : 수원교구 부교구장 임명
2009년 3월 30일 : 수원교구장 계승
새 수원교구장 탄생 의미와 전망
50주년 향한 교구 복음화 도약의 신호탄 대리구제 정착·소공동체 활성화 등이 교구 주요 현안 평신도 역할 강화·소공동체 봉사자 양성 등 방안 필요
3월 30일 최덕기 교구장 주교의 사임으로 이용훈 부교구장 주교가 교구장직을 승계했다. 수원교구가 교구설정 40주년(2003년)을 넘어 50주년을 향해 뛰고 있는 시점에서 맞은 이번 새 교구장 탄생은, 전임 김남수 주교와 최덕기 주교가 만들어 놓은 교구 복음화의 발판을 굴러 도약하는 시점에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숨 가쁘게 변화를 거듭해온 수원교구가 또 한 번의 큰 발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번 수원교구장 임명을 두고 큰 기대를 보내고 있다. 외형적 면에서 한국교회 제2의 교구로 성장한 수원교구가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지에 대한 관심도 모아지고 있다.
이 같은 기대는 ‘오늘’ 수원교구가 보여주고 있는 특유의 결집력과 추진력에 기인한다.
■ 수원교구의 어제 그리고 오늘
수원교구에는 다른 교구와 달리 각 성당에 ‘고통 받는 십자가 예수상’이 아닌 ‘예수 부활상’을 설치한 곳이 많다. 조원동 주교좌 성당이 그렇고 구산성지 성당이 그렇다. 부활상에선 희망과 생동감이 느껴진다. 수원교구의 생동하는 분위기는 이처럼 교구 곳곳에 설치된 부활상을 닮았다.
10년 전 수원교구 신자는 48만4389명, 본당수 119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2007년 말 현재 신자수는 69만7160명으로, 20만명 이상 늘었다. 게다가 2009년 현재 본당 수는 187곳에 이른다.
수원교구의 오늘은 또 젊다. 20~30대 신자가 전체 신자의 30%를 넘는다. 이같은 활기는 소공동체 활성화,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 성가정 운동, 대리구제 정착, 평신도 봉사자 양성 등 다양한 사목의 활기로 이어지고 있다. 영성관 착공, 본당 분할, 성전 건립 등 계속되는 교구 인프라 확충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원교구민들이 영적 활기를 잃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같은 배경에는 1999~2001년 개최된 교구 시노두스가 큰 몫을 했다. 당시 교구는 ‘구역·반 공동체 활성화’와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라는 두 가지 의제를 도출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지금까지 진력해 오고 있다. 수원교구는 오늘도 확신하고 있다. 구역·반 공동체 활성화와 청소년 신앙생활의 활성화가 이뤄지면 앞으로 더 큰 문제들도 쉽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복음화의 텃밭은 이미 만들어진 셈이다. 이제 이용훈 주교가 최덕기 주교로부터 그 밭을 일굴 쟁기를 넘겨 받았다.
■ 수원교구의 내일
그렇다고 해서 수원교구에 장밋빛 희망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넘어야 할 산과 건너야할 강 또한 적지 않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걷는 급속한 성장기의 청소년기가 그렇듯 고민은 많이 안고 있는 것 또한 수원교구다. 우선 엄청난 양의 본당 분할 수요와 이에 따른 성전 건축 기금 마련 압박을 들 수 있다. 수원교구 내 시(市)는 현재 17개로 전국 교구 중 가장 많은 수의 시를 관할하고 있다. 기존 도시의 확장과 신도시 건립도 앞으로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성전 신축이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뤄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성전을 건립하자마자 분당해야 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수원교구 신자들이 얼마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둘째, 교구의 정체성 확보 문제다. 안양·평촌·과천·산본·의왕·성남·분당 등 경기 남부 지역 주민들이 대부분 그렇듯 수원교구 내 상당수 신자들이 ‘수원’이 아닌 ‘서울’을 생활권으로 하고 있다. 수원을 중심으로 한 교구 공동체 형성을 위한 정체성 확보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셋째, 특수사목 및 학자 사제의 부족 문제를 들 수 있다. 수원가톨릭대학은 현재로선 본당 사제 수급의 숨통만 간신히 틔우고 있다. 환경·청소년·청년·여성·노인·사회복지·직장·홍보·노동·도시빈민·장애인·농촌·이주사목 등 각 사목 분야별로 전문가를 양성하는 작업이 시급한 실정이다. 특히 수원교구는 반월·시화 공단 등 대규모 공단을 안고 있지만 아직까지 체계적 노동 사목의 틀은 보이지 않고 있다. 수원교구는 활기와 불안, 감정의 고양과 침울함, 이기심과 이타주의 등이 번갈아 나타나는 청소년기를 빼어 닮았다. 청소년기가 장년기를 좌우하듯 지금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교구의 50주년 이후를 판가름 할 것으로 보인다.
가파른 언덕길을 달려온 수원교구가 2013년 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 제2의 교구라는 외적인 교세를 어떻게 내적인 열매로 연결시킬지 주목된다.
■ 수원교구의 희망
이용훈 주교는 3월 31일 ‘최덕기 바오로 주교의 수원교구장 사임에 즈음하여 수원교구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에게 보내는 교구장 특별서한’에서 교구의 현안으로 대리구제의 정착과 소공동체의 발전,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를 꼽았다.
실제로 많은 이들은 수원교구의 내일이 대리구제도의 정착에 달려있다고 말하고 있다. 3년 전 최덕기 주교가 대리구 체제 도입을 선언하고 6개 대리구장 신부를 임명했을 당시, 교구민들은 지역별 특성에 맞는 다양한 사목의 활성화라는 점에서 큰 기대를 모았다. 이와 관련 교구 사제들은 ‘대리구 체제 3년’이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우선 복음화 및 복음화 국장 신부가 전문적이고 세분화된 사목을 전개하고 있다. 선교 및 쉬는 신자, 가정 사목에 대한 배려 또한 대리구 차원에서 강화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대리구 체제 이후 대리구 사제단이 다양한 행사 등을 통해 일체성을 높였다는 점이 가장 돋보인다.
신자들의 활동 폭도 넓어졌다. 대리구별로 평협 조직의 틀이 갖춰졌으며 청년 미사 등 각종 활동 신심 단체의 대리구 차원 연대 또한 강화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교구 직할 체제하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현상들이다.
하지만 대리구제가 더욱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평신도들의 역할이 강화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대리구별 평신도들의 특화된 활동이 요청된다는 지적이다. 지금까지 교구장과 대리구장, 사제단에 의해 대리구제가 논의되어 왔다면 이제는 신자들이 나서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교구 공동체의 일치와 친교를 향한 ‘첫발’이 최덕기 주교의 대리구제 도입 의지로 가능했다면 두 번째, 세 번째 걸음은 이제 이용훈 주교와 함께 걸어갈 성직자·수도자·평신도 모두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소공동체 발전도 수원교구의 최대 과제 중 하나다. 수원교구는 8년 전 시노두스를 마치며, 최종문헌 글 첫머리에서 “시대의 요구와 징표들을 직시하면서 구역반 공동체 활성화를 통하여 세상의 복음화와 공동체의 복음화를 이루려고 한다”고 명시했다. 8년이 지난 현재, 교구 소공동체 운동이 시노두스의 선언을 실현하고 있는지 진지한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교구는 2002년 7월 산본성당과 북수동성당에서 ‘안양 1지구 구역·반 봉사자 학교’및 ‘수원 2지구 구역·반 봉사자학교’를 잇달아 개설한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봉사자를 양성했다. 최근에는 그 교육 내용도 점점 정교화되고, 진화하고 있다. ‘교구의 발’이 양성되자 교구의 각종 사목 방침들도 힘을 얻고 있다. 최근 각 대리구에서 전개하는 선교운동과 가정 복음화 운동, 쉬는 신자 회두 운동이 소공동체 조직의 적극적 지원으로 활기를 띠고 있는 것이 좋은 사례다.
하지만 아직도 신자들 중에는 “소공동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이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존 신심 단체들과 소공동체와의 협력 문제, 여성 소공동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남성 소공동체의 활성화 문제 등도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소공동체가 신앙 생활 공동체, 복음화 공동체의 성격으로 승화하지 못하고 단순한 기도 모임에 머물고 있는 사례도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내일을 키워 나가기 위해 이제 다시 한번 신발 끈을 조여야 할 때다.
교구장 특별 서한 '최덕기 바오로 주교의 수원교구장 사임에 즈음하여'(요지)
교구 발전 위한 노고·업적에 감사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께서는 3월 30일 오후 7시(로마시간 정오) ‘수원교구 교구장 최덕기 바오로 주교님의 사임을 수락하신다’는 내용을 발표 하셨습니다.
우리 교구의 제3대 교구장직을 수행하시면서 교구민을 위해 혼신을 다 바쳐 사목하셨던 공경하올 최 주교님의 사임 소식에, 많은 이들이 놀라움과 함께 서운함과 충격을 가지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갑작스런 소식은, 현재 부교구장직을 수행하는 부족한 저에게 교구장직을 승계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새로이 수원교구 교구장직을 맡게 되는 저는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의 전통에 따라 수원교구를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교회적 직무 앞에서 겸손되이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성령의 도우심을 빌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최 주교님께서 지니신 깊은 신심의 바탕 위에 섬밀(纖密)하게 연구하여 계획된 하느님 사업과 교구의 사업은 빈틈없이 추진되어 풍성한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사목과 선교의 필수 요건인 본당 신설, 새로운 성지의 개발, 소공동체 활성화,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 사회복음화 사목, 수도회 활성화 등은 최 주교님께서 불철주야 고심하시며 이루어 놓으신 값진 열매입니다. 당면한 교구의 현황과 미래를 간파하시고 사목의 효율성과 선익을 위해 대리구제를 구상하시어 출범시키셨습니다.
이렇게 수원교구는 탄탄한 제도적 기초 위에 세상에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채비를 갖추며 순항하고 있습니다. 이제 최 주교님께서 발판을 놓으신 ‘대리구제의 정착’과 ‘소공동체의 발전’, 그리고 ‘청소년 신앙심을 더욱 공고히 하는 일’이 우리에게 현안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최 주교님께서 사목일선에서 교구민과 함께 하셨던 13년간의 시간들은 참으로 큰 축복과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사제들과 교구민들은 최 주교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영적 선익과 끝없는 사랑을 베푸신 것을 결코 잊지 않고 주교님을 위해 계속적으로 기도와 존경을 드림으로 보답할 것이며, 맑은 교회 정신으로 세상을 복음화 하는데 진력할 것입니다.
최 주교님께서는 비록 사임을 하신 교회의 원로요 교구의 최고 어른이시지만, 우리 교구 내에 머무시면서 사제들과 신자들의 아버지로서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제 여러 모로 부당한 저에게 수원교구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 책무가 주어졌습니다. 저는 전임 교구장이신 최 주교님의 뜻을 이어받아 저에게 맡겨진 수원교구를 위하여 역대 교구장님들께서 보여주신 모범과 사목적 유산, 그리고 영적 전통을 더욱 잘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2009. 3. 31 수원교구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
교회법으로 본 부교구장의 교구장직 승계
전임자 사임 등 이유로 자동 승계
교회법 403조 1항은 ‘교구의 사목적 필요가 있으면 교구장 주교의 요청에 의하여 한 명이나 여러 명의 보좌주교들이 임명되어야 한다. 보좌주교는 계승권을 가지지 아니한다’고 명시한다.
또 403조 3항은 ‘성좌는 더욱 합당하다고 여기면 특수한 특별권한을 갖는 부교구장 주교를 직권으로 선임할 수 있다. 부교구장 주교는 계승권을 가진다’고 밝히며, 교회법 409조 1항은 ‘부교구장 주교는 교구장좌가 공석이 되면 그 즉시 교구장이 된다’고 명시해 놓고 있다.
교황청은 3월 30일 오후 7시(로마시간 정오)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께서 존경하올 최덕기 바오로 주교님께서 건강상 이유로 제출하신 수원교구의 교구장직의 사임을 허락하셨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최주교의 사임으로 인해 공석이 된 수원교구 교구장직은 지난 2008년 10월 10일 부교구장 주교로 임명된 이용훈 주교가 자동적으로 승계하게 된 것이다.
새 교구장 맞이한 교구 교세 통계
수원교구 신자 수는 2007년 말 69만7160명으로, 본당 수는 178곳, 공소는 28곳이다. 교구 관할 지역내 총 인구수는 2007년 말 702만 6015명으로 인구대비 신자비율은 9.92%다. 교구 인구대비 신자비율은 2002년 8.87% 이던 것이 2003년 9.29%, 2004년 9.37%, 2005년 9.58%, 2006년 9.73%로 꾸준한 증가를 보이고 있다. 전체 신자 중 남성 신자는 29만2860명, 여성 신자는 40만4300명.
매년 신자 수가 2만~2만5000명씩 늘어나는 추세를 감안할 경우, 신자 수는 이미 지난해 5월 말 현재 70만명을 돌파 했고, 10% 복음화율도 지난해 말 경 달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자 수 70만명은 서울대교구를 제외한 그 어느 교구도 넘지 못한 산이다.
지난 6년 동안 늘어난 신자 수는 총 12만 여명. 1963년 10월 7일, 한국교회 10번째 교구로 탄생할 당시 신자 수가 4만 여명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장세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신자 수 10만명을 돌파(1981년)하는 데 17년이 걸렸지만 20만명(1988년)은 7년, 이어 30만명(1992년)과 40만명(1996년), 50만명(2000년), 60만명(2004년), 70만명(2008년)을 넘어서는 데는 각각 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교구내 성직자 수는 주교 2명 포함, 408명. 이중 교구 소속 사제는 외국인 1명 포함 343명이고, 선교회 소속 사제는 3명, 수도회 소속 사제는 60명이다. 또 수도자 중 수사는 101명, 수녀는 1290명이 활동하고 있다.
신자수 1만명 이상 본당은 성남대리구 분당요한(1만6224명), 분당성마태오(1만3191명) 안양대리구 중앙본당(1만742명), 용인대리구 수지본당(1만2160명) 등 4곳이다.
연령별 신자 증감 추이를 살펴보면 만 50~59세 신자의 증가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 연령대 신자는 2006년에 비해 8693명이 증가, 9.29%의 높은 증감율을 보였다. 반면 만 1~6세는 오히려 전년도에 비해 1267명 감소, 유아세례 문제에 대한 교구의 고민을 나타냈다. 하지만 만 20~29세 청년 신자는 전년도에 비해 3564명 증가, 만 50~59세, 만 40~49세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증가 수치를 보였다.
교구 신학생은 성남대리구 29명, 수원대리구 44명, 안산대리구 17명, 안양대리구 43명, 용인대리구 24명, 평택대리구 38명으로, 학부생과 연구과생, 휴학생, 유학생 포함 총 195명이다.
교구 역대 교구장 발자취
교구 쇄신·발전 위해 헌신
교구장 최덕기 주교가 사임하고 교회법에 따라 부교구장 이용훈 주교가 수원교구장직을 승계했다. 제4대 수원교구장을 맞이하며 교구 역사 46년간 교구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역대 교구장들을 살펴본다.
■ 초대 교구장 윤공희 대주교
1924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윤공희 대주교는 1950년 사제품을 받고 서울 명동본당 보좌, 부산 포로수용소 군종신부로 사목했다. 1956년 이탈리아로 유학한 윤대주교는 로마 우르바노대학과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0년 귀국해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총무로 봉직하던 중 수원교구장으로 임명됐다.
1963년 초대 교구장으로 착좌한 윤대주교는 1973년까지 10년간 교구장으로 사목했다. 당시 수원교구는 농촌이 대부분이고 방인 사제로만 구성되어 있어 외부의 지원이 없고 경제적 자립도 약했다. 초대 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는 자립을 위한 신자 재교육에 주력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전국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결성되자 한국에서 처음으로 ‘교구평신도 사도직 협의회’를 결성하고 ‘평신도 교육 3개년 계획’을 통해 교구 공동체의 쇄신과 부흥을 이끌었다. 또한 신학생의 양성과 후원을 위해 ‘우술라회’를 창설했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교구장과 사제들의 일치 속에서 신자들의 신앙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 2대 교구장 김남수 주교
1922년 만주에서 태어난 김남수 주교는 1948년 사제품을 받고 로마로 유학 1952년 우르바노대학에서 교리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4년 10월 14일 수원교구 2대 교구장으로 임명됐으며 같은 해 11월 21일 교구장에 착좌했다.
사제 양성에 남다른 관심을 쏟은 김남수 주교는 1984년 수원 가톨릭대학교를 설립했으며 1994년에는 중국 길림교구와 자매결연을 맺어 교구간 물적?재정적?인적 교류에 적극 나섰다. 교구청 업무와 조직의 규모에 맞게 수원시 장안구 정자동에 지상 6층, 지하 2층 규모의 새 교구청사를 완공하고 1997년 2월 이전했다. 특히 김남수 주교는 생명수호를 위한 ‘아이 낳기 운동’을 적극 권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주교는 견진성사때면 ‘적어도 셋은 돼야 신부 하나, 수녀 하나를 만들고 하나는 데리고 살 수 있다’는 요지로 강론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23년간 교구장으로 몸담아 수원교구의 기틀을 탄탄히 세운 김남수 주교는 1997년 6월 4일 은퇴했으며, 2002년 6월 1일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 3대 교구장 최덕기 주교
1948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난 최덕기 주교는 1975년 10월 사제품을 받았다. 1983년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사목신학 박사학위를 받은 최주교는 수원가톨릭대학교 교무처 처장, 남양?군포본당 주임, 교구 사목국장을 거쳐 1996년 1월 수원교구 부교구장으로 임명됐으며 이듬해인 1997년 6월 제3대 교구장에 착좌했다.
최덕기 주교는 교구 설정 후 첫 교구 시노두스를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개최해 교구 쇄신과 발전의 기틀을 다졌으며, 지난 2006년에는 당면한 교구의 현황과 미래를 미리 내다보고 사목의 효율성과 선익을 위한 대리구제를 출범시켰다. 또한 사목과 선교의 필수 요건인 본당 신설과 새로운 성지 개발, 소공동체 활성화,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 사회복음화 사목, 수도회 활성화에도 힘을 쏟았다. 1997년 교구장 취임 당시 사제 205명, 신자 42만여 명, 본당 101개, 성지 9곳이었던 교구는 현재 사제 373명, 신자 72만여 명, 본당 187개, 성지 14곳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다.
신임 교구장에게 보내는 교구청 사제들의 소감·각오
3월 30일 오후 7시. 제3대 교구장 최덕기 주교 사임소식을 접한 교구청 사제들은 교구청 3층 최덕기 주교 집무실을 찾아 감사 인사를 전하고 30분간 담소를 나눴다.
이어 교구청 사제들은 7시30분경 이용훈 주교 집무실을 찾아 이 주교에게 교구장 승계 축하 꽃다발을 전하고 환담을 나눴다.
다음은 교구청 각 국 국장과 사회복음화국 전담 신부들이 이날 자리에서 새 교구장에게 전한 소감과 각오.
■ 사무처장 이영배 신부
우리 교구가 굉장히 커진 것에 비해서 조금은 내실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새 교구장님의 꼼꼼하심과 모든 것을 끌어안으심이 교구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크면 클수록 내실 있는 것이 필요한 데 새로운 교구장님 통해서 잘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주교님의 모토가 사제단의 일치입니다. 주교님을 중심으로 모든 사제단이 하나가 되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사제단이 일치되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사제단이 모든 일을 적극적으로 하기 때문에 교구장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될 수 있고 앞으로도 잘 해나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 복음화국장 문희종 신부
우리 교구는 지금 대리구제 실시 3년차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한 주기를 지내고 새로운 한 주기를 맞습니다. 대리구제는 사목 대리구제입니다. 새 교구장님께서는 이 대리구제가 정착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교구는 2013년에 50주년을 맞이합니다. 교구장님께서 100년을 향한 수원교구의 비전을 제시하고 그 비전을 향해서 나아가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는데 주력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 청소년국장 장기영 신부
사무처장 신부님 말씀처럼 교구의 내실을 기하는게 중요하고 가장 중심은 젊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주교님께서 하시는 일에 젊은이들이 바탕이 될 수 있도록 고민하고 노력하면서 교구가 젊어지는 기반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사회복음화국장 이기수 신부
가까이에서 모시며 주교님께서 꼼꼼하시고 세심하면서도 사제들을 잘 끌어안으시는 분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무처장 신부님께서도 사제단의 일치를 말씀하셨는데 앞으로 잘 되리라 생각합니다. 복음화국이 교구의 어머니라면 사회복음화국은 아버지입니다. 앞으로도 그 역할을 잘 해나가 열매를 맺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 관리국장 류덕현 신부
우리 교구 본당수가 현재 187개인데 계속 신도시가 개발되고 있고 머지않아 본당은 200개를 넘을 것입니다. 주교님께서 200개 본당을 관리하시기 어렵기 때문에 대리구제를 통해서 잘 해나가시리라 생각합니다. 주교님께서는 형제적 사랑을 모토로 하시는데 우리 젊은 신부들이 교구 내 각 본당의 분당에 따른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데 힘을 모으겠습니다. 주교님께서 신부님들이 일치하는 데 힘을 보태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와 교구 신부님들 또한 주교님 중심으로 잘 해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교정사목전담 김기원 신부
항상 도움을 주셔서 교구의 넓은 지역에서 어렵고 힘든 이들을 돕는데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주교님의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 이주사목전담 최병조 신부
우리 교구는 한국 교회에서 이주민이 가장 많은 교구입니다. 주교님께서 물심양면으로 보이지 않는 지지 해주셔서 필요한 곳에 이주민센터와 쉼터가 모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이주민사목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특별히 주교님께서는 그동안 이주민들을 위해 옷과 학용품을 전해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이주민들에게 희망이 될 것입니다.
되돌아 본 수원교구 역사
“교구민과 함께 호흡한 역동의 역사” 63년 열악한 농촌 지역서 방인사제 28명으로 시작 교세 성장과 더불어 성역화 작업·신학교 설립 등 박차 시노두스·대리구제 등 발전 가속화… 50주년 준비 돌입
3월 30일 교구장 최덕기 주교가 사임함에 따라 수원교구민들은 교구장을 보필하며 참된 목자로 헌신해 온 부교구장 이용훈 주교를 제4대 교구장으로 맞이하며 교구사의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제3대 교구장 최덕기 주교 사임과 이용훈 주교의 교구장 승계라는 역사적 순간에서 교구 46년 역사를 되돌아본다.
교구 설정과 정착
1960년대 초. 여러 차례의 교구 분할에도 여전히 서울대교구의 사목 관할 구역이 넓은데다가 경기도 남부 지역의 교회 발전이 예상되자 이 지역에서 사목하고 있던 성직자들은 1962년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에게 교구 분할을 건의했다. 그리고 이듬해 주한 교황 사절 주디체 대주교가 수원을 시찰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63년 10월 7일 마침내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수원교구’가 서울대교구에서 분리돼 한국인 성직자 교구로 설정됐으며 초대 교구장은 당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C.K) 사무국장이던 윤공희 신부가 임명됐다. 교구는 한국 교회의 열 번째 교구이며 8 15 광복 후 설정된 교구 중 두 번째 방인교구였다. 설정당시 교구 현황은 1개 시와 10개 군, 본당 24개, 공소 205곳, 사제 28명, 신학생 57명, 수도자 44명, 신자 수는 42,548명이었다.
당시 교구는 농촌이 대부분이고 방인 사제로만 구성되어 있어, 외부의 지원이 없고 경제적 자립도 약했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초대 교구장 윤공희 주교를 비롯한 교구민들은 교구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1967년 화서동에 교구청사를 신축해 이전했고, 같은 해 12월 28일에는 ‘천주교 수원교구 유지재단’이 설립됐다. 1969년에는 수원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창립된데 이어 1971년 12월 1일에는 월보 ‘사목’을 창간했다. 동시에 교구는 평신도 교육 3개년(1972년~1974년) 계획을 수립해 실천해 나가는 한편, 1973년에는 각 본당별로 사목 협의회를 구성하도록 했다. 1973년에는 교구 가톨릭농민회가 창설됐고, 미리내성지에서 교구 설정 10주년 행사를 겸한 순교자현양대회도 열렸다. 초대 교구장 윤공희 주교는 1973년 11월 7일 광주대교구장에 임명됨으로써 대주교로 승품돼 10년간 몸담았던 수원교구를 떠나게 된다.
교구의 안정과 변모
1974년 교구는 제2대 교구장을 맞이한다. 1974년 10월 5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제2대 수원교구장에 임명된 김남수 주교는 같은 해 11월 21일 교구장에 착좌했다. 당시 교구 신자는 67,736명, 본당은 31개였다.
교세 성장에 따라 교구는 1976년 조원동본당을 설립했으며 이듬해 5월 18일에는 조원동 주교좌성당 봉헌식을 거행했다. 1977년 4월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4년 만에 다시 발족됐으며 같은 해 9월에는 구산에 순교 복자 김성우 현양비가 건립되면서 성역화 작업이 추진됐다. 1980년 4월에는 M.E 수원협의회가 창립됐고 12월에는 교구 가톨릭여성연합회가 발족했다. 1981년에는 교구 ‘천지의 모후’ 꼬미시움이 레지아로 승격됐다. 같은 해 6월 24일에는 천진암에서 제1회 한국 천주교회 창립 행사가 열렸다.
1982년 5월 열린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 수원교구에 제4 대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교구는 그 해 8월 대신학교 설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했고, 1984년 3월 2일 ‘수원 가톨릭대학교’가 개교했다. 이에 앞서 1983년 9월 4일에는 ‘수원주보’ 창간호가 발간됐다.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시성식을 기념하고자 교구는 1984년 9월 미리내에서 103위 한국 순교자 시성 경축대회를 개최했다. 1986년 5월 10일에는 전 교구 차원의 성령쇄신대회가 수원 실내체육관에서, 6월 1일에는 교구 성체 현양대회가 수원 공설운동장에서 각각 개최됐다. 교구 설정 25주년을 맞아 교구는 1988년 10월 9일 수원 공설운동장에서 ‘빛이 되어’ 주제로 교구 신앙대회를 개최했다.
1990년대 들어 신도시의 발전으로 본당의 관할 구역이 여러 차례 조정됐으며 본당 신설도 활발해졌다. 1993년 3개 본당을 신설한 데 이어 1995년 1월에는 6개 준본당을 본당으로 승격시켰으며 2월 8일에는 8개 본당이, 9월 14일에는 2개 본당이 신설됐다. 이러한 과정에서 1996년 1월 25일 최덕기 신부가 부주교로 임명되고 2월 22일 주교로 서품됐다.
교구의 발전과 현재
1996년 3개 본당 신설에 이어 1997년에는 정자동본당을 비롯해 12개 본당이 신설됐다. 같은 해 2월 3일에는 교구청이 화서동에서 정자동 새 청사로 이전되면서 기존 교구청사는 청소년 문화원으로 조성됐다. 1997년 6월 4일 최덕기 주교가 제3대 교구장직을 승계하여 9월 25일 착좌식을 가졌다. 또 7월 29일에는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에서 정자동본당을 주교좌로 설정함에 따라 8월 20일 축성미사가 봉헌됐다.
최덕기 주교는 한국 교회에서 두 번째로 큰 교구로 성장한 교구 사목을 원활히 하고자 본당 신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1998년 12개 본당이 신설됐고 이듬해 1월에 6개 본당이, 2000년에는 9개 본당이 신설됐다. 아울러 각처에 분산돼 있는 순교성지에 전담신부를 임명해 성역화에 힘쓰고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사회복지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교구는 대희년을 한 해 앞둔 1999년 새로운 복음화의 길을 모색해 보는 교구 시노두스(대의원회의)를 개최했다. 2001년까지 2년간 진행된 시노두스를 통해 교구는 구역·반 공동체와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의 두 가지 과제에 대해 교구민 전체가 공동의 합의를 이루어내고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성과를 거뒀다. 시노두스 최종문헌은 두 가지 의안인 ‘구역·반 공동체’와 ‘청소년 신앙생활’을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했으며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시행세칙 또한 제정했다. 교구는 또한 2002년 1월 ‘천주교 수원교구 규정 시행’을 공포하고 사회복음화국과 성소국을 신설하는 등 교구청 편제를 개편했다. 또 소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2002년 10월 수원 실내체육관에서 ‘소공동체 봉사자대회’를 개최했다.
2003년 교구는 40주년 기념 신앙대회를 수원종합운동장에서 개최했으며 교구 설정 40주년 기념 교구 규정집도 발행했다. 앞서 1월에는 수원교구 교회사연구소가 설립됐고 교구 양업시스템도 개통했다. 5월에는 그 해 3월 수원교구 보좌주교에 임명된 이용훈 주교 서품식이 거행됐다. 2005년 9월에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몬시뇰에 임명된 심상태, 변기영, 이정운 몬시뇰의 서임미사가 정자동 주교좌 성당에서 봉헌됐다.
교구는 2006년 5월 큰 변화를 맞이한다. 교구장 최덕기 주교는 교령을 반포하고 교구를 수원·성남·안양·평택·용인·안산대리구 등 6개 대리구로 분할하고 대리구장을 임명했다. 이는 교구 중심 사목체제에서 대리구 중심 사목 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사목 환경의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
2006년 대림 1주일을 맞아 교구장 최덕기 주교는 2007년도 사목교서를 발표하고 대리구제의 안정적인 정착과 가정의 성화를 통해 2001년부터 시노두스 문헌을 따라 전개해 온 ‘소공동체 활성화’와 ‘청소년 신앙생활 활성화’ 실현에 힘써 줄 것을 당부했다.
2013년 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이하는 교구는 올해 초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4년 앞으로 다가온 설정 50주년 준비에 본격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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