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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방어기지의 역할을, 반대로 적을 공격할 경우에는 최전선의 전투기지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신라 공격로나 660년 백제 멸망시 김유신의 백제 진격로,
667~668년 고구려 멸망시 신라군의 공격로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와 같이 군사적으로 중요했던 김천은
백제 멸망 이후 ‘백제여적百濟餘賊’이라 표현되는 백제부흥군을 진압하는 데에도
거점據點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백제 멸망시 가림도행군총관으로 참여했던 시철위가 백제 멸망 후
산발적인 백제부흥군을 진압하기 위해 김천 방면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더불어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에 대비하여 모종의 임무,
즉 고구려 원정에 신라의 상응을 독려하거나
혹은 고구려 원정로 확보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시철위가 김천에 정사초당을 지은 까닭
그리고 앞서 시철위가 김천에 주둔하며 정사초당을 세운 것은 그를 함자도행군총관에 제수한 황제의 은혜를 불법에 의지하여 기리기 위함이었다고 추정한 바 있다. 그러나 시철위가 정사초당을 세운 이유가 이 뿐이었을까 궁금해진다. 이에 대해 기존 연구자들이 몇 가지 가정을 제기하였는데,5) 그 견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장군이 백제 원정의 성공 이후 고구려 원정에 대비하여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정사초당을 세웠다는 가정이다.
둘째, 시장군이 백제부흥군과 싸우다가
어떠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정사초당을 지었다는 가정이다.
셋째, 그가 신병身病으로 불사佛舍를 짓고 요양했을 가능성이 있다.
넷째,방유애房遺愛 모반사건(653)으로 자신의 유배와 동생 부부의 죽음 등
가문의 불행으로 충격을 입고
깊이 불심에 빠져든 그가 우리 땅에 그대로 남아 불법을 펴게 된 것은 아닐까하는 가정이다.
다섯째, 시장군이 전쟁의 와중에 이 지점에서 불력에 의한 종교적인 도움을 받았거나
혹은 알 수 없는 신이神異를 겪고 정사초당을 건립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상기한 것은 모두 가정일 뿐 확실한 것은 앞으로의 연구 성과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비문의 찬자撰者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
이 비가 순수한 우리나라의 비인지 아니면 중국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참고할 만한 점이 있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황제와 관련된 용어 앞에는 공간을 두어 높임을 표시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당 태종을 중국쪽에서 호칭하는 태종문황太宗文皇(제)이라고 표현한 점도 참고가 된다.
셋째, 예맥이라는 용어가 백제나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 자신들도 사용하지 않는 중국식 표현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몇 가지를 참고로 비문의 찬자를 중국인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서체에 구양순체歐陽詢體 수용 이전에 신라에서 유행했던
북조北朝 해서의 서풍書風이 일부 남아있다는 점이나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662년경)」,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682년경)」,
「김인문묘비金仁問墓碑(695년경)」 등과 같은 구양순체로 쓰여졌다는 점,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중국계 금석문(「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정림사지 오층석탑 미석각자定林寺址 五層石塔 楣石刻字」,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과는 서체상으로 크게 차이가 있다는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비문은 중국적인 취향에 맞게 신라인이 지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신라인에 의해 지어진 것을 중국인이 일부 가감 수정했을 가능성도 있다.
비문 찬자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많은 검토가 요구된다.
경북 김천시와 상주시가 잊혀져가는 삼한시대 고도읍 되살리기에 나서고 있다.
김천시는 감문면과 개령면 일대 옛 감문국(甘文國) 유적지를
경북도 지정문화재로 지정을 신청키로 했다고 7일 밝혔다.
삼한시대 부족국가로 현재 김천시 감문면과 개령면 일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감문국은 서기 231년 신라의 이찬 석우로로부터 정벌당했고, 557년에 감문주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감문면과 개령면 일대에는 감문산성과 속문산성 등의 산성과 고분 등 유적이 많이 남아 있어
김천시는 2004년부터 경북대박물관에 지표조사를 의뢰하는 등 감문국을 되살리기 위한 준비를 해왔다.
이를 통해 전체 1.4㎞에 달하는 산성 3개소와 적석묘 200여기 등 고대 유적을 확인한 김천시는
옛 감문국 지역의 보전 가치가 높다고 보고 문화재 지정 신청과 함께 본격 발굴에 들어가
복원과 관광지 개발 등의 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김천시 문화공보담당관실 김해문씨는 "올해는 문화재로 지정되는 절차를 거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며
"감문국을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포럼 등을 열어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한시대 고도읍인 사벌국(沙伐國)과 고령가야국(古寧伽倻國)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상주시 역시 고대 역사문화자원을 재조명해 관광자원화하기로 했다.
삼국유사와 한서(漢書)에 따르면 사벌국은 삼한 및 삼국시대 상주의 옛 지명이었고,
고령가야국은 현재 상주시 함창읍에 있던 작은 나라로 추정된다.
상주시 사벌면에는 전사벌왕릉(傳沙伐王陵, 지방문화재 기념물 25호)이 있고,
함창읍에는 전고령가야왕릉(傳古寧伽倻王陵, 지방문화재 기념물 26호)을 비롯한
많은 고분군과 토성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최근 사벌국과 고령가야국 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해 지역활성화를 꾀하기로 하고
관련 토론회를 개최한 상주시는 유적지 복원 등의 사업을 추진할 방침이다.
상주의 사벌국, 의성의 조문국처럼
김천 역사의 뿌리도 고대국가다. 바로 감문국이다.
감문국은 김천의 정신이다.
개령면 동부리 마을 앞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다.
‘동부연당’이다.
동부리는 옛 감문국의 중심인 궁궐이 있은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궁궐에 딸린 궁궐지가 바로 동부연당이라는 게 김천 향토사학자들의 견해다.
동부연당에서 인근 감문산을 넘어 북쪽으로 8㎞ 떨어진
감문면 삼성리 오성마을의 밭 가운데에 봉분이 하나 있다.
높이 5m, 지름 10m 정도의 그리 크지 않은 무덤이다.
하지만 김천에선 가장 큰 고분이다.
감문국의 시조왕인 ‘금효왕릉’이라 전해지고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원래는 현재보다 훨씬 규모가 컸으나 경작지로 잠식돼 규모가 축소됐고,
일제강점기 이후 수차례 도굴되면서 왕릉이라는 증거도 사실 사라졌다고 한다.
주민들 사이에선 ‘말무덤’이라고 알려졌는데,
여기서 ‘말’은 곧 ‘크다’는 의미로 보아 말무덤은 ‘수장의 무덤’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실제 동국여지승람에선 “현의 북쪽 20리에 큰 무덤이 있는데
전하기를 감문국 금효왕릉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또 개령 서부리의 도로변에 위치한
옛 사자사 터 옆에는 경작지로 개간이 돼 봉분의 규모를 식별할 수 없는 무덤도 있다.
감문국 왕비의 능으로 전해지는 ‘장부인릉’이다.
김천 향토지에는 이 무덤에 대해 “일명 장부인릉이라고 하고 일명은 장희릉이라고 하니
감문국 어느 임금님의 궁희(宮姬)였던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감문산(개령뒷산) 정상부의 감문산성,
감문면 속문산의 속문산성,
감문면 고소산의 고소산성 등도
감문국과 관련이 깊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여하튼 감문국과 관련이 깊은 흔적들이다.
타 지방의 고대국가들처럼 역사적 근거가 미비하지만
김천 땅에 고대국가가 존재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감문국은 어떤 국가였을까?
감문국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 본기 조분이사금 편에 “신라가 이찬 석우로를 대장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멸하고 그곳을 신라의 감문군으로 삼았다.
때는 조분이사금 2년(231년)이다”라고 적었다.
감문국의 세력과 관련해선 중국 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삼한의 큰 나라는 만호, 작은 나라는 수천호”라고 했고,
서거정의 동국통감에는 “큰 나라는 4천~5천호, 작은 나라는 6백~7백호”라고 했다.
감문국은 삼한의 변한계 12소국 중 하나다.
국가의 규모에 대해서는 정확한 근거가 없으나 앞서 열거한 감문국 역사 흔적들로 유추컨대
국가로서의 기틀을 갖춘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진한 12국의 하나인 사로국,
즉 신라는 차례로 주변 소국을 복속한 뒤 영역 확장을 꾀하는 과정에서 낙동강 서편의 변한 12국을 공략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감문국이 위치한 김천지역이 영남 내륙의 교통 요지이자
한강 유역을 연결하는 거점이어서 일찍이 신라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감문국은 지리적으로 낙동강 서편에 위치해 친가야 입장을 견지했다.
이에 신라는 추풍령 너머의 금강 유역 확보와 감문국과 가야와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인 감문국을 집중 공략해 금강과 한강 유역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신라는 감문국을 복속시킨 이후 감문군, 감문주, 개령군 등으로 개편하면서 정치·군사 거점으로 삼았다.
감문국은 어찌보면 역사적 징검다리이기도 했다.
속문산성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송북리 백운산[옛날에는 속문산이라 일컬어졌음]에 있는
삼국 시대 성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 권 29,
김산군(金山郡) 성곽조(城郭條)에
“속문산성 석축주위이천사백오십오척 고칠척 내유이천이지 유군창
(俗門山城 石築周圍二千四百五十五尺 高七尺 內有二泉二池 有軍倉)”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삼국 시대에 속문산성은 어모현에 속했다.
이 산성은 백제와의 국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신라와 백제 간에 뺏고 뺏기는 싸움을 거듭했던 성이다.
백제 멸망 전 장국 의직(義直)이 신라를 공격하였는데,
의직은 이 속문산성과 고성산성(高城山城)을 함께 침공했다.
당시 김유신(金庾信)이 이 두 성을 지켜냈다.
결국 의직이 패하여 혼자 말을 타고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다.
속문산성은 산정(山頂)의 능선을 따라
동북쪽을 꼭짓점으로 하는 이등변삼각형 모양의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백운산 정상에 능선을 따라 축조된 산성은 동북으로 길쭉한 말각삼각형으로
북서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동쪽까지는 석축과 토축을 혼용하였으며, 동에서 북쪽까지,
즉 성북마을이 있는 쪽은 자연 절벽을 이용하였다.
성의 둘레는 800m이다.
성벽은 아래쪽의 석축이 350㎝, 위쪽이 250㎝이지만, 축성된 부분은 500m 정도 된다.
성내의 북북서 끝에 석축 둘레 30m, 직경 10m의 봉수대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이 봉수화덕은 직경 1m 정도 된다. 이곳을 중심으로 많은 기와편이 산재하고 있다.
봉수대라 생각되는 곳에서 동쪽으로 10m 정도 나오면 세 개의 주춧돌이 나란히 놓여 있다.
현재 샘 2개,
문지(門址) 2개, 망루 추정지 3개,
장대(將臺) 1개소가 확인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29, 김산군 봉수조에
“남쪽은 지례현의 구산에, 서쪽은 충청도 황간현 눌이항산에 응한다.
소산 봉수 군의 북쪽 29리에 있다.
동쪽은 개령현 감문산에, 북쪽은 상주 회룡산에 응한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봉화산 봉수지 또는 운학산 봉수지라고도 한다.
소산 봉수지는 봉화산 정상에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그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봉수지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30×40m의 장방형 대지가 남아 있어
관련된 터로 추정될 뿐이다.
소산 봉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개령면 동부리 뒷산 감문산 봉수를 받아 상주 회룡산 봉수로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고소산 성지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김천시 감문면 문무리 산39
시 대 삼국시대
고소산성은 속문산성과 함께 신라 초기에 축성되었다.
문무동 마을 사람들은 속문산성을 숫성, 고소산성을 암성이라고 부른다.
옛날 장수 부부가 있어 숫성은 남편 장수가, 암성은 아내 장수가 하루아침에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고소산성은
포곡식 산성(성 내부에 계곡을 포용하고 있는 형태로, 능선을 따라 성벽을 축조한 산성)으로,
전체 둘레는 1.5㎞ 정도이나 전체 규모는 알 수 없다.
아래 부분에 석축한 곳이 500m이고 나머지 정상부 쪽으로는 토축을 하였다.
전체적으로 석축은 계곡을 포함하여 80×50×30㎝ 정도로 허튼쌓기를 하였다.
성내는 완만한 경사의 계곡을 이루나 성 밖인 북·서쪽은 급경사를 이룬다.
토성은 폭 4m, 높이 1~1.5m 이다. 정상의 북동쪽 정면으로 장대지가 확인된다.
고소산성은 남북 방향의 구 교통로로 추정되는
문무리에서 상주시 공성면 이화리로 넘어가는 고갯길과
서쪽의 구례리에서 상주와 김천으로 통하는 곡간 대지의 길목에 조성된 것으로 보아
이들 교통로에 대한 감시와 관리,
그리고 유사시 산성에 입보하여 일대를 방어를 할 수 있는 목적으로 구축된 산성으로 보인다.
송북리 고인돌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김천시 감문면 송북리 349
시 대 청동시대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송북리 성북 마을 뒤 서쪽 20m 지점 상여집 뒷담에 인접해 있는 고인돌이다.
주로 한강 이남에서 많이 발견되는 양식인 남방식 고인돌이다.
굄돌〔支石〕의 있고 없음과 높이에 따라 남방식과 북방식으로 구분하는데,
남방식은 굄돌이 낮거나 없는 방식이다. 덮개돌은 계란형이고 긴지름은 남북 방향이다.
크기는 270㎝×250㎝, 높이 130㎝이고, 굄돌 1개가 드러나고 있다.
문무리 고분군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김천시 감문면 문무리 산78 일원
시 대 삼국시대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문무리 마을 주변과 야산에 있는 대규모의 고분군이다.
6세기 때 만들어진 횡혈석실묘로 알려져 있다.
석실 벽면은 대형의 판석 또는 할석으로 쌓아놓았다.
보광리 고분군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김천시 감문면 보광리 산6-1|산18-1 일원
시 대 삼국시대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보광리 보광마을에 있는 신라 시대 고분군이다.
보광리 고분군은 5~6세기에 축조된 고분군으로, 제1군에서 현재 고분으로 추정되는 것은
현지에서 고묘로 불리는 것이다.
봉분의 규모는 직경 약 10m, 높이 약 1m로 비교적 나지막한 형태인데
동편의 일부가 유실되었다.
그러나 유실 범위와 그 주변부에서 석재나 토기편이 보이지 않으므로
고분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제2군의 고분 중 지표상에 봉분이 남아 있는 것은 3기이며,
다소 애매한 것을 포함하면 10기 내외로 크기는 6~7m 정도로 작은 편이다.
그중 1기는 산사태로 인해 봉분의 동남쪽 일부가 유실됨으로써
부분적으로 개석이 노출된 상태이다.
개석재로 보아 내부 구조는 장축을 북동-남서의 장방형인 구덩식 돌덧널무덤으로 추정된다.
발굴 조사된 고분이 없어 구체적인 유물 자료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표 조사시 제2군에서 산사태로 개석이 드러난 고분의 주변부에서
삼국 시대의 경질 토기편과 적갈색 연질 토기편이 확인된 바 있다.
김천시 감문면 보광리에 분포하는 2개의 고분군 일대에는
대부분 민묘가 조성되어 있거나 일부는 밭으로 개간되었고 경사 위쪽으로는 봉토 위에 소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특히 제2군에서 확인되는 고분들은
민묘 조성과 밭 개간 당시에 파괴되어 일부 개석과 벽석이 드러나 있는 등
유존 상태가 양호하지 못한 실정이다.
보광리 고분군은 김천시 개령면의 서부리 고분군·동부리 고분군·양천리 고분군의 하위에 속하는
소규모 단위의 고분군으로서 김천 지역 단위 고분의 규모와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삼성리 고분군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경북 김천시 감문면 삼성리 906 일원
시 대 삼국시대
삼성리 고분군은 감문소국의 고지로 알려져 있는 개령면 중심지에 위치한 삼국 시대
주고분군 외곽의 하위 고분군에 해당한다.
현재 봉토분의 분포 양상, 내부 구조의 장축 방향, 판석조 벽체
그리고 산포 유물로 미루어 5~6세기 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김천 지역 내에서는 중규모에 해당하는 고분군이다.
전체적인 조사 현황으로 보아 봉토분의 구조 양식은 판석조 수혈식 석실분일 가능성이 높으며,
현 지표 아래에는 작은 할석조 구덩식 돌덧널무덤이 많이 분포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천시 감문면 삼성리 오성마을 뒷산 정상부에 위치한 고분은
봉분의 직경이 약 10m, 높이 1~1.2m로 규모는 영남 지방에서 중형급에 속하나
일대에서는 비교적 큰 고분에 해당한다.
봉분 중앙부는 도굴로 인해 훼손되었다.
내부 구조는 석실의 장벽을 구성한 판석 일부가 노출되어 판석조인 것은 알 수 있으나
벽석의 높이는 알 수 없다.
노출된 판석 1매는 너비 155㎝, 두께 28㎝ 내외로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감문초등학교 뒷산의 완만한 서쪽 경사면에 분포하는
고분 4기도 판석을 이용하여 내부 공간의 벽체를 쌓은 구조로 봉분의 직경이 7~9m,
높이가 1m 정도 되는 고분들이다.
내부 구조를 알 수 있는 것은 장벽이 5~6매, 단벽은 1매의 판석을 사용했으며
공간 규모는 길이 3.7m, 너비 0.96m로 장방형이다.
삼성리 고분군의 분포 범위 중 산지에는
소나무와 참나무 등의 크고 작은 나무들이 봉토 상부에 자라고
주변으로 일부 민묘가 조성되어 있으며,
김효왕릉 주변은 완만하게 개간되어 계단식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한편 외관상 뚜렷한 봉분이 남아 있는 고분 외에도
오성마을 뒷산에는 도굴로 훼손된 다수의 소형 돌덧널무덤과
그 주위에 토기편이 산재되어 있어 실제 고분의 숫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성리 고분군은 대체로 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감천의 지류인 외현천 상류의 곡간 평야를 배경으로 생활하던 집단의 무덤들이다.
다수의 소형 고분들은 대체로 판석을 이용하여 내부 벽체를 구성한
수혈식 돌덧널무덤으로 보이며, 남아 있는 봉토분의 분포 현황으로 미루어
중규모 고분군이라고 할 수 있다.
삼성리 고분군은 김천 지역 내 재지 양식 및 신라 영향의 단위 고분 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