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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후 암산 자암산 정상에서 본 안동시내
南後面 皆谷里 / 儉岩里 / 古上里 / 古下里 / 光音里 / 丹湖里 / 武陵里 / 上阿里 / 下阿里 / 南後面 남후면은 안동시의 중남부에 위치한 면으로 면적은 63.09㎢이고 인구는 2,761명이다. 조선시대에는 안동부(安東府)의 남쪽에 있다하여 부남(府南)이라 칭하다가 숙종(肅宗)때 남선과 남후 두 면(面)으로 갈라졌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면제도가 생겨서 남후면이라 칭하였다. 법정리는 10개리였으나 1983년에 수상리와 수하리가 안동시 강남동에 편입되고 단호리가 편입되어 현재는 9개 리에 33개 자연 마을로 되어 있다. 면의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북부에 낙동강의 본류가 흐르고 있다. 낙동강의 지류인 미천이 동부에서 곡류하면서 북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하며 그 연안에 상당히 넓은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주요산업은 농업으로 주곡을 주로 생산하고 사과, 배추, 무 등도 재배한다. 하아리와 고상리및 고하리에서는 고추, 마늘, 참깨 등을 특산물로 재배하고 있으며, 광음리의 한골에서는 야산을 개간하고 포도단지를 조성하여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도로는 면의 동부를 중앙선 철도와 5번 국도가 통과하고 있으며, 면내에도 구담~무릉 간의 군도가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재로는 천연기념물인 광음리의 구리측백나무자생지가 있다. 수령이 수백년 된 측백나무 400여 그루가 자생하며, 비늘이끼, 부처손, 은빛고사리 등이 함께 자라고 있는데 이 일대 1,500평은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안동의 남쪽관문 자연경관의 표상이 되고 있다. 조선 전기의 유적으로 보이는 광음리 분청사기요지가 남아 있고, 하아리에도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민무늬토기 유적이 있다. 주요 관광지는 무릉리의 기암절벽에 맑은 물이 흐르는 무릉유원지가 있다.
남후면 개곡리의 보리 익는 들판
1. 皆谷里 이 마을은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검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개곡리라 한다. ◇ 접실․개곡(皆谷) 이 마을은 고려 말에 사복재(思復齋) 권정(權定) 선생이 접거(接居)하였으므로 접실이라 하며 안동 김씨와 밀양 박씨의 동성 마을이다. 이 마을은 골마와 덕마로 나누는데 별신굿이나 동채싸움을 할 때는 골마와 덕마로 나누어서 겨룬다. 예부터 맛 좋은 무가 생산되어 왕께 진상했다고 한다. 영조께서 접실 무가 맛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하에게 그 무를 구해 오라 했더니, 신하는 안동 접실까지 가지 않고 동대문 시장에서 구해 왕에게 바쳤다. 왕께서 접실 무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장물에 담가 보니 보통 무와 같으므로(접실 무는 장물에 담그면 무 전체가 간장을 빨아들임) 즉석에서 처형하였다고 한다. 접실 마을 앞 밭 전체가 무를 재배해도 다 그런 것이 아니고 2, 3필지가 그러하다고 전해지고 있다. ◦ 진골:이 골은 접실 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로서 골이 길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골로 계속가면 수하동 무즈무가 나온다. 예전에 이곳 사람들은 이 골을 통해서 안동시내로 다녔다고 한다. ◦ 집골:이 골도 접실 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인데 예전에 집이 있었다고 집골이라고 한다. ◦ 불미골:이 골도 역시 접실 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로서 예전에 대장간이 있었다고 불미골이라 한다. ◦ 도둑골:접실 뒤에 있는 골짜기로 산모퉁이가 나와 있어서 안쪽이 보이지 않는다고 부르는 이름이다. ◦ 문니골:산의 양쪽 능선 모양이 문과 같이 생겼다고 칭하는 이름이나 지금은 채석장이 생겨서 그 모양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골은 접실 마을 앞 미천 건너편에 있는 골이다. ◦ 샘골:이 골도 마을 앞 건너편에 있는 골로서 아랫골과 윗골이 있는데 샘이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등앞들:접실 앞에 있는 들 이름이다. ◦ 된빗대바우:접실 뒤에 있는 바위이다. ◇ 말루골․마장동(馬場洞) 접실 남동쪽에 인접한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아래쪽에 있는 마을은 아랫말루골 이고 위쪽에 있는 마을을 웃말루골 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앞 들에서 삼과 무를 많이 생산했다 한다.
암산유원지
2. 儉岩里 이 마을도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야리를 병합하여 검암리라 한다. ◇ 검방우․검암(儉岩) 이 마을은 400여 년 전에 순천 김씨가 개척하였고 마을 뒤에 검은 바위가 있어서 검바우라 했으며 이곳은 선비들이 모여서 소일하던 곳이기도 하다. 특산물로는 무와 배추이고, 맛이 좋아서 옛날 임금님께 진상하였다고 전한다.
◦ 당골․당곡(堂谷):검방우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울창한 수목들이 연중 아름답게 단장되므로 이곳에 당을 지었다 하며 검방우 주민은 물론 인근 사람들도 봄과 가을이 되면 이곳을 찾아와서 경관을 음미했으며 모두가 이곳을 당골이라 부르고 있다. ◦ 안동마령동기와까치구멍집:이 집은 남평 문씨의 종가로 약 300년 전에 지은 것이다. 안동지역의 전형적인 겹집평면 구성이며 일반적으로 초가지붕이나 보기 드문 기와지붕이다. 까치구멍집은 북부산간형 서민주택으로 안동이 남방한계선이다. ◦ 안동권씨 검암리 재사(安東權氏 儉岩里 齋舍):이 건물은 안동 권씨 집안에서 조상들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지은 재사이다. 건물의 형태는 안채와 부속건물이 연결된 ㄷ자형이다. ◦ 신천강씨 검암리 재사(信川康氏 儉岩里 齋舍):이 건물은 신천 강씨 집안에서 조상들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지은 재사이다. ◦ 도원들:검방우 앞에 있는 들인데 새들이라고도 한다. ◦ 배웃골:검방우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 대실․대애실․대야곡(大也谷) 조선 숙종 때 삼척김씨와 안동권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고 지형이 야(也)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대야곡, 대양동, 대애실이라 불려진다. ◦ 김성경 유허비(金成慶遺墟碑):단칸 맞배지붕 비각안에 세워진 비이다. 이 비에는 “通訓大夫行安東判官金公諱成慶遺墟”라고 적혀있다. ◦ 모운사:대실 서쪽에 있는 절인데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 행계․한계․대계(大溪) 이곳은 낙동강과 미천이 합쳐지는 한계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계라 하고, 낙동강을 숫물, 미천(眉川)을 암물이라 한다. 두 강물이 합쳐지는 지점에 넓은 백사장이 있는데 이 백사장에서 모래 뜸질을 하면 만병에 좋다고 한다. ◦ 딱밭:한계에 있는 골짜기로서 저전이라고도 한다. ◦ 딴섬:한계 서쪽에 있는 섬인데 독섬이라고도 하며 낙동강과 미천이 합하는 지점인데 모래사장으로 되어 있다. ◦ 산막골:한계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 소릿골:한계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3. 古上里 이 마을은 본래 남후면 지역으로 고일 위쪽이 되므로 웃고일 또는 상고곡, 상고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납시리, 중방리, 흠실 등을 병합하여 고상리라 한다. ◇ 납시골․납시(納是) 마을 옆에 창(倉)이 있었는데 그 창 옆에서 세금을 바쳤기 때문에 납시(納是)라 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마을은 공주 이씨가 처음 자리를 잡았으나 지금은 평해 황씨가 많이 살고 있다. ◦ 납시지:납시골 북서쪽에 있는 못이다 ◦ 고상리 선돌떼:이 선돌은 고상리 고곡초등학교터에 2기가 있고 학교 앞 논둑에 1기가 있다. 처음에는 3기의 선돌이 40~50m 간격으로 나란히 있었다고 한다. 교실 앞 화단에 있는 것은 운동장 중간에 있는 것을 옮겨놓은 것이라 하며, 선돌 중에서 학교 담장 옆에 옮겨지지 않은 것 하부에는 5개의 성혈이 있다. 크기는 각각 105㎝, 142㎝, 80㎝이다. 이 선돌을 마을 주민들은 수구맥돌이라고 하는데 지리적으로 맥이 되는 곳에 서 있어 마을의 재난을 막아준다고 한다. 또 이를 없애거나 함부로 옮기면 마을이 화를 입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자암산 정상에서 본 암산유원지
◇ 딱밭머리 납시골 입구에 있는 마을인데 딱나무 밭이 있었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지금은 고곡초등학교 터가 있고 고일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다. ◇ 동리거리 이 마을은 상리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동리거리라고 불리고 있다. 지금은 독립된 마을이 아니고 상리에 속한다. ◦ 고계정(高溪亭):동리거리 서쪽에 있는 정자인데 공주 이씨들이 세웠다. ◇ 상리(上里) 이 마을은 납시 보다 약 100년 뒤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납시 위쪽에 있다 하여 상리라고 부르며 고상리의 중심지이고 가장 큰 마을이다. ◦ 염상봉[監峯]:화산이어서 마을에 불이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어느 대사의 말에 의하면 바닷물을 항아리에 담아서 묻어 두고 물이 마르기 전에 또 바닷물을 길러다 붓곤 하면 마을에 불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또 이 산에서 음력 7월에 풋굿을 하고 정성을 드려 마을 제사를 올려 왔으나 지금은 중단되었다. ◦ 비적골:상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음식골:상리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솟발이마 이 마을은 솟발 같은 모양으로 세 집이 있다 하여 솟발이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은 네 집이 있으며 상리 마을에 속한다. ◇ 흠실․흠곡(欽谷) 흠실 마을은 상리 서쪽 중방리(中坊里) 동쪽에 위치하고 토지가 비옥하고 살기가 흡족하다 하여 흠실이라 부른다고 한다. 또 예전에 이 마을에 신흠이란 부자가 살았다고 흠실이라고도 한다. ◦ 내용골:흠실 남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나링이골이라고도 한다. ◦ 늘근테:나링이골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노현곡이라고도 한다. ◦ 정골:늘근테 건너에 있는 골짜기인데 예전에 그릇점이 있었다고 한다. ◦ 노현지:늘근테에 있는 큰 못이다. ◦ 신선봉:흠실 북서쪽에 있는 산이다. ◦ 항골:나링이골 건너에 있는 골짜기이다. ◦ 항골못:항골 안에 있는 못이다. ◦ 흠실유지:흠실 서쪽에 있는 못이다. ◇ 중뱅이․중방리(中坊里) 이 마을은 산 중턱에 있다 하여 중뱅이라 했다고 전해지며 고일의 가장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늘과 고추가 특산물이다.
무릉역
4. 古下里 이 마을은 고일 아래쪽에 있다고 아랫고일, 하고곡, 하고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갈곡, 신기, 덕곡, 죽리를 병합하여 고하리라 한다. ◇ 갈골․갈곡 (葛谷) 이 마을은 칡이 많이 자라던 골짜기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새터 북동쪽에 있고 참깨와 고추가 특산물이며 10여 가구가 살고 있다. ◦ 다리바웃들:갈곡 주위에 있는 들인데 바위로 다리를 놓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선밧들:다리바웃들 남서쪽 위에 있는 들이다. ◦ 아를골:갈곡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아를지:아를골에 있는 못이다. ◇ 새터․신기(新基) 임란 전에 현재 마을 뒤의 골에 마을이 있었다. 조선 선조 때 권익상(權益相)이라는 선비가 피란 와서 이 골에 살다가 자손이 번성하여 새로 터를 잡아서 마을을 형성했다고 새터라 하였으며, 이 골의 마을은 없어졌다. ◦ 덕골:이 골에서 앞으로 마을 옮겨서 별다른 피해 없이 임란을 무사히 넘겨 덕을 보았다고 덕골이라고 한다. ◦ 무일골:새터 동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남봉골이라고도 한다. ◦ 절골:죽리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서 예전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 ◦ 숨실재:새터에서 무릉리의 숨실로 가는 재이다. ◇ 죽리(竹里) 이 마을은 예전에 마을 입구 쪽에 대나무 밭이 있었다고 죽리라고 하며 새터 서쪽에 있는 아담한 마을이다. 고추가 특산물이고 뽕나무를 심는 등 복합 영농에 힘쓰고 있다. ◦ 건골:죽리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독수리봉:건골 뒤에 있은 산으로 독수리가 많았다고 부르는 이름이다. ◦ 송리재:죽리에서 일직으로 가는 재를 말한다.
남후면 광음2리
5. 光音里 이곳은 넓고 큰 바위가 여러 곳에 산재하고 있어 광암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광음이 되었다 한다. 예부터 광음 열두 동네라고 하는 말은 자연마을이 많다는 뜻이고, 광음리는 중앙선 철도와 미천(眉川) 및 5번 국도를 함께 접하고 있는 곳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리, 암산, 신기, 장성배기, 원당곡, 한곡 등을 합하여 광음리라 한다. ◇ 한골․한곡(閑谷) 큰광음 북쪽에 있는 마을로 안동 권씨의 집단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큰 저수지인 한골못이 있고, 긴 골짜기는 모두 논과 밭을 이루고 있으며, 근래에는 야산을 개간하여 포도 단지를 이루어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다. ◦ 한곡유지:한골 앞에 있는 못으로 1939년에 축조했다. ◇ 큰광음 광음리에서 제일 큰 마을이라 하여 큰광음이라 불리고 있다. 장씨와 김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으며, 밭이 많은 곳으로 고추가 많이 생산된다. 도로와 멀리 떨어진 곳이라서 교통이 불편한 편이다. ◦ 황새개골:큰광음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 장성배기․장성백(丈城伯) 마을 입구에 장승이 서 있었다 하여 장성백이라 한다. 장승이 서 있었던 주변은 마을 회관이 들어섰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벼농사를 짓고 있다. ◦ 딱밭밑:장성배기 앞에 있는 골짜기인데 닥밭이 많았다고 한다. ◇ 새터․신기(新基) 장승배기 동쪽에 있는 마을로 새로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신기라고 칭한다. 안동 권씨와 안동 김씨들의 집단마을이며 마을 동편에는 중앙선(中央線) 철로(鐵路)의 신기터널이 있다. ◦ 바티골:새터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 새터굴:새터 옆에 있는 중앙선의 굴을 말하는 것으로 1939년에 뚫었다. ◦ 홈건너:새터 앞에 있는 들로서 철도를 건너가서 있는 들이다. ◇ 암산(岩山) 산줄기 밑에 바위가 절벽을 이루고 경치가 아름답다 해서 암산이라 한다. ◦ 안동구리측백나무:안동시 남후면 광음리 속칭 암산은 암벽이 100m에 80°~90°의 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 암벽 밑은 독천으로서 소(沼)를 이루고 있다. 암벽바위 사이사이에는 20~70㎝ 크기의 측백나무가 400여 그루가 자생하며 부근에는 비늘이끼, 부처손, 은빛고사리들이 함께 자라며 일대 1500여 평을 보호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측백나무의 키는 10m 정도이나 이곳은 암벽사이에서 고생스럽게 성장하느라 거의가 20~70㎝로 기형에 가깝고 작은 나무에도 열매가 많이 달리며 그 수령은 적어도 수백년이 넘은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1975년 9월에 천연기념물 252호로 지정되었다. ◦ 암산유원지:안동에서 대구로 통하는 5번 국도를 따라 5㎞ 정도 가면 우측에 큰 냇물과 함께 못이 나온다. 이 못은 깎아지른 듯한 암벽으로 둘려 쌓여 있고 굴도 뚫려 있다. 이 못은 귀담(龜潭)이요, 냇물은 미천(眉川)이며 동쪽에는 하늘을 치솟는 만장암(晩將岩)이 있다. 멀리 황학산(黃鶴山)에서 흐르는 미천은 의성군 옥산, 점곡, 단촌 등지의 골짜기 물을 모아 일직 남후를 거쳐 낙동강에 합류한다. 만장암 위태로운 절벽이 남동언덕을 지어 못물을 누르고, 서쪽 고산 기슭에는 노송들이 더욱 운치롭게 보인다. 여기는 일찍부터 이상정(李象靖) 선생이 즐겨 놀던 곳으로 고산서원이 있어 유적과 함께 명소이기도 하다. 이곳은 안동에서 유명한 유원지로 교통이 편리해서 봄, 여름, 가을은 뱃놀이를 즐기고, 겨울철은 아주 좋은 천연 스케이트장이다. ◦ 고산서원(高山書院):이 마을 뒤에 있는 서원으로 대산 이상정 선생과 소산 이광정 선생을 배향하고 있다. ◦ 안절골:암산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서당골:암산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로서 대산 선생의 서당이 있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암산굴:암산 마을에 있는 대구 영주간 국도의 굴인데 1912년에 뚫었다. 그러나 지금은 5번 국도가 4차선으로 확장되면서 고산서원 뒷산을 지나간다.
무릉보트장은 옛날 같지 않고 조용하다.
◇ 구리날․구리․귀리․동진(銅津) 암산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앞에는 나루가 있었다 한다. 5번 국도와 인접한 마을로 양로원이 세워졌으며 밭에는 거의 사과나무를 심어서 과수원을 경영하여 생활이 윤택한 편이다. ◦ 골챙이골:구릿날 앞에 있는 골짜기이다. ◇ 박극․방곡(方谷) 광음리의 한 모퉁이에 위치한다고 해서 방곡이라 일컫는다 한다. 무릉 유원지와 인접한 마을로 지금은 소수의 가구뿐이고 사과농사를 주로 한다. ◇ 웃보마을 암산 남쪽에 있는 마을로 보(洑)가 있는 위쪽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5번 국도 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 섯박골:웃보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 절벽밑:웃보마을 건너에 있는 골짜기인데 절벽이 있다고 부르는 이름이다. ◇ 원당골․원당곡(院堂谷) 조선시대에 출장중인 관원에게 숙식(宿食)을 제공하던 원(院)이 있었던 곳이라서 원당골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원당골에 장씨가 많이 살았으나 지금은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 공신당:원당골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 모장골:원당골 옆에 있는 골짜기로서 예전에 모정(茅亭)이 있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지절골:원당골 앞에 있는 골짜기이다. ◦ 쑤밑골:지절골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 제4미천교:원당골 남쪽에 있는 중앙선의 기찻길 다리이다. 이 다리는 미천에 놓인 철교 가운데 넷째이며 1939년에 놓았다. ◦ 제5미천교:제4미천교 북쪽에 있는 철교이다. ◦ 지진바우밑:광음리 맨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일직현의 지경이었다. ◦ 진밭뚝:지진바우밑 앞에 있는 들이다.
무릉유원지
6. 丹湖里 이 지역은 본래 서선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현과 오미를 병합하여 단호리라 하여 풍산읍에 있었으나 지금은 남후면이다. ◇ 상단지․웃단지 낙동강이 동쪽에서 북서쪽으로 흘러 다시 서쪽으로 돌아 흐르고 있어 흐르는 형상이 마치 단지 모양과 비슷해서 부르는 명칭이다. 또 이 마을 주위의 흙빛이 붉고 못이 있어 단지라 하기도 한다. ◦ 낙암:건지산 남동쪽 강변에 있는 벼랑이며 뒤에는 건지산이 수려하고, 앞에는 낙동강이 소를 이루어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이곳을 낙암벨 혹은 건잔벨이라고도 한다. ◦ 상락대:고려 후기의 명장 김방경 선생이 즐겨 유상하던 상락대는 남후면 검암 속칭 대애실 앞 미천 물이 낙동강에 합류하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약 2㎞ 지점이다. ◦ 낙암정:이 정자는 반누각식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팔작지붕 홑처마이다. 세종 때 문신인 배환 선생이 은퇴하여 만년을 지내던 곳이다. ◦ 회곡나루터:상단지 북쪽 낙동강에 있는 나루터로서 단지에서 회곡으로 건너간다. ◇ 꼬지골․중단지 상단지와 하단지 중간에 위치하여 꼬지골 또는 중단지라고 한다. ◦ 고지고개:중단지와 아랫단지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 우모정:중단지 북쪽에 있는 정자이다. ◇ 아랫단지․하단지 강 하류에 위치한다고 하단지라 한다. ◦ 논들:아랫단지 뒤에 있는 골짜기인데 논이 많다고 논들이라고 한다. ◦ 단지못:아랫단지 뒤에 있는 못이다. ◦ 큰골:아랫단지 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이다. ◇ 오미단지 마을 뒷산이 강 쪽으로 뻗어 있는데 자라가 강에서 산으로 기어오르는 것과 같다하여 자라 꼬리에 비유하여 오미단지라 한다.
7. 武陵里 이곳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트골, 중산, 몽곡, 묵느므를 병합하여 무릉리라 한다. 이곳은 면소재지로서 학교, 면사무소, 지서 등이 있다. ◇ 무른개․무릉 이 마을은 미천(眉川)이 산부리를 돌아 흘러 들어가므로 무른개라 했는데 변하여 무릉촌이라 하였다. ◇ 돌트미․돌티미․중산리(中山里) 주로 돌로 이루어진 암산(岩山)과 석산(石山) 사이에 있기에 돌트미라 하며 지금은 중앙선 철로가 이 동네 가운데를 지나가며 암산을 뚫은 터널이 있다. ◇ 동트골․동티골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 년 전 삼릉(三陵) 김씨가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하루는 부친 마중을 나갔다가 이곳에서 동사(凍死)했다는 유래와 동채싸움을 했던 곳이란 유래가 겸해 전해지고 있다. ◇ 숨실․몽곡(夢谷) 이 마을은 골이 험하고 삼면(三面)이 꽉 막혀 외부의 소식을 잘 듣지 못한다 하여 숨은골, 꿈꾸는 골이라는 뜻에서 숨실 또는 몽곡(夢谷)이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 동녘골:숨실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뒷골:숨실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 육십골:동녘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자리골:육십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먹골:자리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먹골못:먹골에 있는 못이다.
남후면 검암리 들판 ◇ 묵느므․진답(陳畓) 이 마을은 미천 강변에 묵는(경작하지 않는) 논이 많이 있었는데 이를 경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넓은 앞들의 토질이 비옥하여 옛날에는 배추와 무가 잘되었다 하나 지금은 사과의 산지로 유명하다. ◦ 소장골:묵느므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서 면적이 비좁은 골이라 하여 소장골이라 한다. ◦ 건넌들:묵느므 앞 미천 건너에 있는 들이다. ◦ 남악들:묵느므 남쪽에 있는 들이다. ◦ 무짓개울:묵느므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담방골:무짓개울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사안(思案) 무릉리와 수상동 및 월림리 등 3개 마을 사이에 있다 하여 사안이라 하며 마을 사이에 작은 내가 흘러 경계를 이루고 있다. ◦ 단지계곡:이곳은 산 위에서 돌을 던지며 항아리 속에 물을 넣는 소리가 난다해서 단지계곡이라 했다 하며 이 계곡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어느 집에서 아기장수를 낳았는데, 낳는 즉시 벽장 위로 뛰어오를 만큼의 힘이 있었으므로 부모들이 겁에 질려 안반(국수를 미는 두터운 나무판자)으로 눌러 죽였다. 그런데 그 아기장수가 태어날 때 계곡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났다가 이 아기 장수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소장골을 향하여 날아 들어갔다고 한다. ◇ 보안 보의 안에 있는 마을이란 데서 연유된 이름이다. 강가에 위치하여 소(沼)를 이루고 있으며 근자에 와서는 유원지로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 여싯골․골안마을 이 마을 이름은 예전에 여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또 여우가 많이 출몰했던 골짜기였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무릉천 위를 달리는 철교
8. 上阿里 ◇ 웃아틈실․상아(上阿) 원래 아틈실(阿谷)은 상아리와 하아리을 통칭하는 명칭이다. 위쪽에 있다 하여 웃아틈실이라 하고, 아래쪽에 있다고 해서 아래아틈실이라 부르고 있다. ◦ 돌문:마을 어귀에 돌문이 서 있다. 타지방 사람이 이곳을 지날 때는 절을 하고 말을 탔을 때는 하마하여 통과해야 화를 입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이 돌문은 상아리를 지켜주는 수호신이어서 돌문을 없애거나 무너뜨리면 마을에 피해가 온다 하여 지금도 소중히 보호하고 있다. ◦ 집앞골:상아리 앞에 있는 골짜기이다. ◦ 조산들:집앞골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 갱변들:조산들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 징골들:갱변들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 늘근태골:상아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따바짓골:못밑골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 왜샛골:따바짓골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 딧골재:상아리에서 고상리의 납시로 가는 재를 말한다. ◦ 말응골:상아리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못밑골:상아유지 아래에 있는 골짜기이다. ◦ 웃개골:상아유지 위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지삿골:상아리와 풍천면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 살그밋골:지삿골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상아유지:상아리 남쪽에 있는 못인데 1935년에 정부 보조로 축조했다. ◦ 흠실재:상아리에서 고상리의 흠실로 가는 재이다.
9. 下阿里 아틈실(阿谷) 아래쪽에 위치한 하아리 전체를 아래아틈실이라 부르며 다음과 같은 작은 마을을 통틀어 일컫는 마을이다. ◇ 남짓골․남지곡(南池谷) 이 마을은 남쪽에 못이 있었다고 남짓골이라고 한다. ◦ 공실:남짓골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샘수골․천수곡(泉水谷) 약 300년 전에 한발이 심하였을 때 식수가 없어 이곳에 하천을 파니 많은 물이 나와서 샘수골이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 굿봉들:샘숫골 서쪽에 있는 산으로 해발 335m이다. ◦ 굿봉들재:굿봉들 남쪽 기슭에 있는 재이다. ◇ 고개 너머 고개 너머 위치하고 있다고 부르는 이름이다. 낙동강에 인접한 마을로 강 건너편은 풍산읍이다. 토지가 비옥하고 채소가 잘되기로 손꼽히고 있는 마을이다. ◦ 딴섬:고개넘 북서쪽에 있는 넓은 사장이다. ◦ 하아리 무문토기 산포지:이 유적은 하아리 낙동강 연안 수직 암벽이 끝나는 곳으로부터 서쪽으로 풍천면 병산리가 마주 보이는 곳까지 약 1㎞의 제방 위에 있다. 이곳에는 민무늬 토기와 석기조각들이 흩어져 있는데, 제방을 쌓는 과정에 다른 곳으로부터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유물은 구멍무늬 토기, 붉은간 토기 등이 수습되었다. ◇ 재궁못 이 마을은 재궁(재실)이 있다고 부르는 이름이다. 낙동강에 가까운 고개 너머 마을 남서쪽에 있는 10여 가구인 작은 마을이며 고추가 특산물이다. ◦ 가는골:재궁못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소새박골:재궁못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수박등:재궁못 뒤에 있는 산인데 해발 177m이다. ◦ 배고기재:이 재는 아틈실에서 안동으로 갈 때 아주 산세가 가파르고 험준한 고개를 넘어야만 하는데 아무리 든든하게 배불리 먹고 길을 나서도 고개를 올라 넘어서면 허기질 정도가 되었다고 배고픈 재라 하였다가 차차 변음하여 배고기재가 되어 전하여 오고 있다.
자료 제보자 남후면 권영식(76세, 개곡리 413), 권혁기(55세, 검암1리 282), 이병조(65세, 고상리 512) 권석봉(78세, 고하리 650), 김우동(83세, 고하리 죽리), 김회동(72세, 고상리 흠실) 김 영(70세, 광음2리 561), 임사원(65세, 광음1리 410), 권태호(78세, 광음리 68 구리) 권영대(69세, 광음리 82), 권태흡(72세, 광음2리 613), 권중섭(71세, 무릉2리 457) 송영조(80세, 광음2리 656-3), 김춘환(68세, 상아리 446), 손기철(57세, 하아리 356) 김유성(84세, 하아리 187)
무릉유원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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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흠실 못 및에 우리논 지금은 나무가무성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