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6-38
그때에 26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어찌하면 좋은가?
경영학에서 최고로 어려운 것이 의사결정(意思決定)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최고경영자는 많은 자료를 참고하고,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경제적 사회적 환경들을 검토해서 가장 좋은 해답을 결정해야 기업이 성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에 관련된 신조어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최고경영자를 일반적으로 CEO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CEO의 권한을 점점 분권화, 전문화하여 최적(最適)의 의사결정을 위해서 권한이양과 분권화를 과감히 추진하고 있으며 2000년대에 들어와서 외국의 대기업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으며 벤처 기업 등에서 이러한 추세가 아주 빠르게 도입되고 있습니다.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교수는 “권한이양은 목표달성의 방법” 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CEO역할이 날로 다양해지는 것은 한 두 사람의 유능한 CEO만으로 큰 기업을 경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문 경영인의 영입으로 기업의 발전을 도모하여야 한다는 것이 새로운 경향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특히 선진국 기업일수록 모든 역할이 나누어집니다. 그리고 기업의 조직도 커질수록 의사결정 과정이 복잡해지므로 역할을 나누고 각 부문을 책임질 경영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CEO가 많이 분권화되었습니다.
CEO (Chief Executive Officer) 최고 대표이사 : 회장과 동급, 실질적인 경영결정권을 갖고 있는 최고경영자
CFO (Chief Financial Officer) 최고 재무경영자 : 재무 최고경영자
CIO (Chief Information Officer) 최고 정보경영자
CCO(Chief Communication Officer) 최고 기업 홍보경영자, 정보경영자
CTO (Chief Technology Officer) 최고기술경영자 : 회사의 기술개발 전체를 총괄하는 경영자
CSO (Chief Security Officer) 최고 보안경영자 : 기업의 보안의 중요성이 강조되며, 기업 기밀과 기술기밀 등 보안관련 최고경영자
COO (Chief Operating Officer) 최고 운영경영자 : 기업 내부의 사업을 담당하는 총괄책임자, 일반적으로 사장이 맡음
CMO (Chief Marketing Officer) 최고 마케팅경영자 : 회사의 마케팅 부문 전체를 담당하는 총괄책임자
CCO (Chief Compliance Officer) 최고 감사 책임자 : 회사의 경영과 준법 관련
책임자
CRO (Chief Risk Officer) 최고 위기 관리책임자 : 기업 활동에 있어서의 수 많은 위험에 대한 대처를 위한 최고 책임경영자를 두는 기업도 있음.
CBO (Chief Brand Officer) 최고 브랜드경영자 : 브랜드의 가치와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브랜드 관리를 기업경영의 최고 차원에서 관리
경영학을 공부하다보니 사장을 이렇게 분권화하고 역할을 분담한다면 참으로 의사결정을 하는데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각각 맡은 일을 책임지고 의사결정을 한다면 가장 좋은 의사결정을 함으로써 효율적이며, 효과적이며, 정확하며 오차가 적을 것입니다. 이제는 주먹구구식의 최고경영기법은 정말 버려야 할 때입니다. ‘과거에는 그렇게 했어도 모든 것이 잘 되었다.’고 고집할 때가 아닌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게 변해야 하고, 우리의 가정도 그렇게 변해야 하며, 사회도 공동체도 그렇게 변해야 합니다. 이제 권위를 가지고 명령일변도의 운영이나 의사결정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논어의 위령공 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지하, 여지하자 오말여지하야사의’(如之何, 如之何者, 吾末如之何也巳矣)라는 말입니다. <‘어찌하면 되는가, 어찌하면 되는가?’ 하고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나도 그를 어찌할 수가 없다.>라는 말입니다. 어떤 문제에 부딪쳐 그 문제에 대하여 최고의 해결책이나 정답을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최선의 방법이고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를 맞대고 서로 노력해서 최고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이 경영자의 다양한 역할이며 다양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어찌하면 좋은가를’ 말로만 앞세우고 실제에 있어서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에 나는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고추랑 깨를 널어놓고 열무를 뜯으러 갔는데 비가 억수로 와서 그 집 아낙이 집으로 뛰어와 보니 서방님이 밖에서 비를 맞으며 “어찌해야 하나? 어찌하면 좋겠는가?”> 돌아다니고 있더랍니다. 나는 그렇게 어리석은 샌님이라는 생각에 씁쓰름하답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잉태고지를 받는 날입니다. 전에는 ‘성모 영보축일’(聖母 領報祝日)이라고 했습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계획을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전달 받는다는 의미이며, 성령께서 성모님께 찾아오심을 성모님께서 받아 모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하느님의 소식을 전해 받고 성모님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주님의 뜻을 수용(受容)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구세주 파견 계획을 이루십니다. 가장 최적의 해법이 이미 나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정답을 받아들이는 분이 수용이 있어야 합니다. 성모님은 최고의 의사결정자로서 예수님을 잉태하는 사건을 직접 수용하십니다. 그래서 ‘성모 영보 대축일’이라고 했고, 지금은 ‘예수님 탄생예고축일’ 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여과 없이 겸손하고 과감하게 거의 개혁적인 차원에서 받아드린 성모님과 요셉성인이 없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선교한다고 하면서도 매일 어찌할까 하고 걱정만 하다가 보니 세월이 다 지났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차원에서 이웃과 사귀며 만나야하겠다고 결심하고도 역시 하겠다는 말만 앞세우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며, 특히 나의 모습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잉태하시지만 나는 예수님을 잉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처럼 겸손하게 주님께서 찾아오심을 받아들이지 않고 내 교만으로 그분을 영접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주님의 종이심을 고백하며 생명을 던진 영접을 하지 않고 매일 어찌할까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꺼이 오실 수 있도록 내가 깨끗하고 아름답지 못하면서 주님께서 오시지 않는다고 불평만 늘어놓고 있습니다. 정말 나는 어찌해야 할까요? 매일 어찌할까만 되풀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께서 결단을 촉구하시는데도 말입니다.
-순교자와 함께하는 하루-
제가 거룩한 순명을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하였더라면 저는 벌써 우리 포교지인 조선에 들어가 있거나 그렇지 아니하면(순교하면)저 세상에서 우리 신부님들 곁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저의 장상이 명하시는 깃만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최양업 신부의 여섯 번째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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