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오(圜悟)스님께서 풍주(灃州)의 협산(夾山) 영천선원(靈泉禪院)에 주석하시면서
설두 중현(雪竇重顯)스님의 송고(頌古)에 대하여 평창한 말씀의 핵심.
벽암록 下
제76칙 안목을 갖추고 밥을 먹음(喫飯具眼)
[垂示]
垂示云. 細如米末. 冷似冰霜. 幅塞乾坤. 離明絶暗.
低低處觀之有餘. 高高處平之不足. 把住放行.
總在這裏許還有出身處也無. 試擧看.
[수시]
미세하기로는 쌀 꼭지 같고 차갑기로는 얼음과 같으며
천지에 꽉 차 있고 밝음도 여의고 어둠도 끊겼다.
가장 낮은 곳에서 그것을 살펴보아도 아직도 틈이 있고,
가장 높은 곳에서라도 그것을 결코 평평하게 할 수는 없다.
잡아들임[把住]과 용서해줌[放行]이 모두 여기에 있다.
몸을 벗어날 곳이 있느냐? 거량해보리라.
[본칙]
擧. 丹霞, 問僧, 甚處來. 僧云, 山下來. 霞云, 喫飯了也未. 僧云, 喫飯了.
霞云, 將飯來與汝喫底人, 還具眼. 僧無語.
長慶問保福, 將飯與人喫, 報恩有分, 爲什不具眼. 福云, 施者受者二俱漢.
長慶云, 盡其機來, 還成否. 福云, 道我得.
거량하다.(擧.)
단하스님께서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어느 곳에서 왔느냐?”(丹霞, 問僧, 甚處來.)
- 참으로 온 곳이 없다고는 대답할 수 없다.
온 곳을 알려면 어렵지도 않다.
“산밑에서 왔습니다.”(僧云, 山下來.)
- 짚신을 신고 그의 뱃속에 들어가 그대의 속셈을 다 보았다.
(단하스님의 의도를) 모르는구나.
이 말씀 심금을 울리는군. 말 밖의 속뜻을 알아차렸군.
그의 수행이 잘 되었는지 아직 멀었는지를 알았다.
“밥은 먹었느냐?”(霞云, 喫飯了也未.)
- 두 번째 더러운 물을 뿌렸다.
하필이면 자잘하게 저울 눈금을 세는가! 핵심을 알아야 한다.
“먹었습니다.”(僧云, 喫飯了.)
- 과연 (눈앞에 있는) 노주(露柱)도 못 보고 부딪치는구나.
옆 사람에게 콧구멍을 뚫렸다.
원래 구멍 없는 철추였다.
“너에게 밥을 먹여준 사람은 안목을 갖추었느냐?”(霞云, 將飯來與汝喫底人, 還具眼.)
- 비록 이처럼 세력에 의지하여 사람을 속였지만 죄상에 의거하여 판결을 하였다.
당시에 선상을 번쩍 들어 뒤엎어버렸어야지, 부질없이 무얼 하느냐.
스님은 말이 없었다.(僧無語.)
- 과연 도망치지 못하는구나.
이 스님이 작가였다면 그에게 ‘화상의 안목과 똑같습니다’고 말했을 텐데.
장경(長慶)스님이 보복(保福)스님에게 물었다.
“밥을 먹여주었으니, 은혜를 갚을 만한 자격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안목을 갖추지 못했다 하였을까?”(長慶問保福, 將飯與人喫, 報恩有分, 爲什不具眼.)
- 절반쯤 말했을 뿐이다.
온몸이 전체가 눈이다.
단칼에 두 동강이 났다.
한 번은 추켜 주었다가 한 번은 깎아내리는군.
“주는 사람이나 받은 사람이나 둘 다 장님이다.”(福云, 施者受者二俱漢.)
- 법령에 따라서 집행하였다.
한 구절로 완전히 말하였다.
그런 사람 만나기도 흔치 않다.
“그 기틀[機]을 다하여도 장님이 되었을까?”(長慶云, 盡其機來, 還成否.)
- 무슨 놈의 좋고 나쁜 것을 따지는가!
그래도 아직은 긍정할 수 없다. 무슨 주발을 찾느냐.
“나를 장님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福云, 道我得.)
- 두 사람 다 (번뇌의) 풀 속에 있는 놈이다.
용머리에 뱀 꼬리이다.
당시에 그가 “그 기틀을 다하더라도 장님이 되었을까?”라고 말했을 때,
그에게 ‘장님’이라고 말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도 절반쯤 말했을 뿐이다.
똑같은 작가인데 무엇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자니 마을도 없고
뒤로 돌아가자니 주막도 없다고 했을까?
[평창]
등주(鄧州)의 단하 천연(丹霞天然)스님은 어느 곳 사람인지 모른다.
처음 유학(儒學)을 익히며 과거에 응시하려고
장안(長安)의 객사[逆旅]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홀연히 꿈속에서 흰빛이 방에 가득하였다.
점장이가 “공(空)을 깨칠 상서이다”고 해몽하였는데 우연히 만난 한 선객이 물었다.
“어디 가시오?”
“과거보러 갑니다.”
“관리로 뽑히는 것[選官]보다는 부처에 뽑히는[選佛]것이 어떻겠오?”
“부처에 뽑히려면 어느 곳으로 가야 합니까?”
“지금 강서(江西) 지방에 마대사(馬大師)가 세상에 출현하였는데,
그곳이 부처를 뽑는 곳[選佛場]이오. 그대는 그곳을 가보시오.”
마침내 곧바로 강서를 찾아가 마대사를 뵙자마자
양손으로 복두건(幞頭巾) 끈을 풀어버리려 하니, 마대사는 뒤돌아보며 말하였다.
“나는 그대의 스승이 아니다.
남악(南嶽) 석두(石頭)스님의 처소로 가보아라.”
곧 남악에 이르러 또다시 앞서 물은 뜻을 다시 여쭙자, 석두스님은 말하였다.
“행자실[槽廠]로 가라.”
스님은 감사의 절을 올리고 행자실로 들어가 대중과 함께 3년을 일했는데,
석두스님이 하루는 대중들에게 “내일은 불전 앞의 잡초를 베겠다”고 말하였다.
그 이튿날 대중들이 각기 가래와 호미를 준비하여 잡초를 베는데,
단하스님은 홀로 항아리에 물을 길어다 머리를 감고 스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석두스님이 이를 보고 웃더니 머리를 깎아주고, 또다시 계(戒)를 설하려하자,
단하스님은 귀를 막고 나와 버렸다.
그 후 바로 강서를 찾아가 다시 마조스님을 배알할 적에
참례도 하지 않은 채 바로 승당으로 들어가
성승(聖僧 : 빈두루존자상 아니면 문수보살상)의 목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때에 대중들이 경악하여 이를 급히 마조스님에게 아뢰자,
마조스님은 몸소 승당으로 들어가 그를 보고서 말하였다.
“나의 아들을 쏙 빼닮았구나[天然].”
단하스님은 문득 내려와 절을 올리고 말하였다.
“법호를 내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로 인해서 천연(天然)이라 이름하였다.
그 옛사람들이란 본래부터 이처럼 빼어났다.
이른바 관리로 뽑히는 것보다는 부처에 뽑히는 게 낫다는 것이다.
「전등록(傳燈錄)」 속에 그의 어구(語句)가 실려 있는데,
깎아지른 천 길 벼랑에 서 있는 듯, 구절마다 못과 쐐기를 뽑아주는 솜씨가 있었다.
이는 스님에게 “어느 곳에서 왔느냐”고 묻자,
스님이 “산 밑에서 왔습니다”고 말한 것과 똑같다.
스님은 온 곳을 알지 못하여 두 눈을 멀쩡히 달고서도 거꾸로 주인을 감파 당했다.
당시에 단하스님이 아니었다면 수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단하스님이 문득 “밥은 먹었느냐”고 하니,
처음 (의 문답) 은 (상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고,
이 두 번째 문답에서 그를 감파한 것이다.
스님이 “먹었습니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어리석은 놈이 원래 몰랐던 것이다.
단하스님이 “너에게 밥을 먹여준 사람은 안목을 갖추었느냐”고 묻자
스님은 말이 없었다.
단하스님이 뜻한 바는 “너 같은 놈에게 밥을 먹여 무엇 하겠냐”는 것이다.
역량있는 스님이었다면 시험 삼아 그를 한 번 내질러보고서
그가 어떻게 하는가를 살폈어야 한다.
그러나 단하스님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는데,
스님은 문득 눈만 껌벅껌벅하면서[眼眨眨地] 말이 없었던 것이다.
보복스님과 장경스님은 설봉스님의 회하에 함께 있으면서
항상 옛사람의 공안을 들어 이러쿵저러쿵했다.
장경스님이 보복스님에게 물은 “밥을 먹여주었으니, 은혜를 갚을 만한 자격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안목을 갖추지 못했다고 하였을까?”라는 말은,
굳이 공안의 일을 모두 묻지 않고 이 말을 빌어 화두(話頭)를 만들어
그가 어떻게 알고 있는가를 시험해보려 한 것이다.
이에 보복스님은 “베푸는 사람, 받는 사람 둘 다 눈 먼 놈이다”고 하였으니,
통쾌한 답변이다.
여기에서는 오직 기연에 딱 들어맞는 일만 논하였으니,
이 안에 몸을 벗어날 길이 있었다.
장경스님이 “그 기틀을 다하여도 장님이 되었을까?”라고 묻자,
보복스님은 “나를 장님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보복스님의 뜻은 “내가 이처럼 안목을 갖추어 그대에게 말해주었는데도
나를 장님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반쯤은 닫히고 반쯤은 열린 것이다.
당시 산승이 그 경우였다면
“그 기틀을 다하더라도 장님이 되었을까?”라고 말할 때,
그에게 “장님아!”라고 말했을 것이다.
애석하다. 당시 보복스님이 이 ‘장님’이라는 글자를 말할 수 있었다면
설두스님의 허다한 잔소리를 면할 수 있었을 텐데.
설두스님 또한 이 뜻으로 송을 하였다.
[송]
盡機不成瞎. 按牛頭喫草. 四七二三諸祖師. 寶器持來成過咎. 過咎深無處尋. 天上人間同陸沈.
기틀을 다했더라면 장님이 되지 않았을텐데.(盡機不成瞎.)
- 절반쯤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래도 그를 시험해야 한다.
말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남아 있다.
소 머리를 찍어 눌러 풀을 먹이네.(按牛頭喫草.)
- 돈 잃고 벌까지 받는구나.
반은 하남, 반은 하북 땅이다(온 천하가 모두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제 칼에 스스로 손을 다친 줄을 몰랐다.
서천 28조, 동토 6조의 모든 조사는(四七二三諸祖師. )
- 조문(條文)이 있으면 조문을 따르게 마련이지.
선대 성인까지 누를 끼쳤으니, 한 사람에게 누를 끼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보배 그릇을 가져와 허물 이루었네.(寶器持來成過咎.)
- 온 누리 사람들이 양손을 번갈아가며 가슴을 친다.
나에게 주장자를 되돌려다오.
산승에게까지 누를 끼쳐 벗어나질 못하겠군.
허물이 깊어(過咎深)
- 몹시 깊구나. 천하의 납승들이 뛰어넘지 못한다.
말해보라. 어느 정도 깊은가를.
찾을 곳 없으니,(無處尋.)
- 그대가 서 있는 자리에 있다. 찾아도 찾을 수 없다.
천상․인간이 다 함께 침몰되었다.(天上人間同陸沈)
- 천하의 납승을 한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그 속에서도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한 번 놓아준다. 아이고, 아이고!
[평창]
“기틀을 다했더라면 장님이 되지 않았을텐데”라고 송하니,
장경스님이 말하기를 “그 기틀을 다하여도 장님이 되었을까?”라고 했다.
보복스님이 이르기를, “나를 장님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는 마치 소 머리를 찍어 누르면서 풀을 먹이는 격이니,
그 스스로가 먹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도 소의 머리를 누르며 먹도록 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설두스님이 이처럼 노래하니, 자연히 단하스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서천 28조, 동토 6조의 모든 조사들은
보배 그릇을 가져와 허물을 이루었네”라는 것은,
장경스님에게 누(累)를 끼쳤을 뿐 아니라,
서천 28조(二十八祖)와 이 땅의 6조(六祖)까지 일시에 매몰시켜버렸다는 뜻이다.
석가부처님이 49년간 일대장교(一大藏敎)를 설하고,
최후에 이 보배 그릇만을 전했을 뿐이다.
영가(永嘉)스님은 “이는 겉치레로 괜히 속복을 벗고 출가한 게 아니라,
여래 보장(寶杖)의 친 발자취다”고 하였다.
보복스님의 견해와 같다면 보배 그릇을 가져와 모두가 허물을 지을 것이다.
“허물이 깊어 찾을 곳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대들에게 설명해줄 수가 없으며,
다만 고요히 앉아서 그 구절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미 허물이 깊은데 어찌 찾지 못할까보냐.
이는 작은 허물이 아니다.
조사의 일대사(一大事)를 일제히 땅속에 처박히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설두스님은 “천상․인간이 함께 침몰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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