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회식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폭탄주는 조선시대에도 존재했습니다.
일부 양반층이 즐겼다고 전해지는 '혼돈주'가 그것인데,
금주령과 식량난 탓에 서민은 좀처럼 접근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1837년께 술 담그는 비법을 적은 양주방에 혼돈주 제조법이 나옵니다.
막걸리 한 사발에 소주 한 잔을 부어 위로 뜰 때 마셨다고 합니다.
당시 소주는 희석식이 아닌 증류주여서 알코올 도수가 30%를 넘고, 막걸리도 10% 이상이어서 혼돈주는 지금의 '소폭'보다 훨씬 독했습니다.
이 때문에 혼돈주가 암살 도구로 악용되기도 했습니다.
정조 6년(1782년) 전북 남원 갑부의 장남 이불로도 혼돈주에 희생됐습니다.
기생 단란과 밤에 술을 마신 이불로가 아침에 변사체로 발견됐습니다.
방 안에 먹다 남은 음식과 술잔 외에 아무런 흉기가 발견되지 않은데다 외상이 없었고,
기생은 술만 따랐다고 증언했습니다.
이 사건을 수사한 남원목 형방은 혼돈주를 폭음하면 목숨을 잃는다는 사실을 알고
기생단란을 추궁했고,
단란은 암살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다가 범행일체를 털어놨습니다.
아버지 유산을 독차지하려던 차남이 혼돈주를 먹여 죽이도록 사주했다고 실토한 것이지요.
천재 실학파 학자인 석치 정철조도 1781년 혼돈주로 숨졌습니다.
연암 박지원이 석치를 위해 지은 제문에도 혼돈주의 위험성이 나옵니다.
"몇 섬의 술을 마시고 서로 벌거숭이가 되어 치고받으며
고주망태가 되도록 취해 함부로 이놈 저놈 부르다가
먹은 것을 게워내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속이 뒤집히고 눈이 어질어질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그만두련만. 이제 석치는 진정 죽었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