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길의 푸르고 맑은 바람이여
··································· 선린(善隣)·국방(國防)을 아우른 - 국헌 이헌구(李憲球)
오늘은 '선린(善隣)·국방(國防)을 아우른 - 국헌 이헌구(李憲球)' 리뷰입니다.
조선시대 호남도 감사(監司) 중 41인을 선정하여 그들의 푸르고 맑은 벼슬길을 찾아보는『벼슬길의 푸르고 맑은 바람이여』 네 번째 감사입니다.
선린은 이웃 또는 이웃 나라와 친하게 지냈다는 말이고, 국방은 말 그대로 국가의 방어를 의미합니다.
제주도민 고한록(高漢祿)을 효수(梟首)에 처한 일도 있었다. 그의 죄목은 표류를 가장하여 4차에 걸친 범월(犯越)로 타국 사람들을 현혹시켰다는 것이었다.
이 감사가 평안도감사(1842) 재임시 별무시(別武試)를 실시하여 군사를 확보하고, 의주를 바롯한 여러 산성에 군량을 비축하였다는 것도 기록에 전한다.
전라감사 재임시 국경을 넘는 범죄를 다스린 것과 평안감사 때의 양병·군량미 비축의 사실만으로도 이 감사의 선린 정신과 국방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청검(淸儉) 근면한 지방관으로서 관내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돕는 일에 힘썼을 뿐 아니라, 저때의 변경 이웃나라 백성에게도 덕화(德化)를 생각하였던 '사려심원(思慮深遠)'한 명감사였다고 할 수 있다.
'관찰사 이헌구 청간선정비(淸簡善政碑)'가 세워진 것은 그의 사후의 일이다. 재임 중에 세워진 것도 아니요, 감사직에서 물러난 직후에 세워진 것도 아니요, 내직으로 들어가 높은 직위에 오른 생시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그가 전라감사의 임기를 다하고 서울에 돌아가 여러 벼슬을 거쳐 좌의정을 지내고, 세상을 떠난 5년 후에 전라도민들이 그를 기리는 뜻을 모아 세운 철비인 것이다. 이 또한 흔치않은 일이다.
그는 사후 5년이 지나서 비석이 세워질 정도로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내 나라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의 백성까지 헤아렸다고 하는 이헌구 감사의 성품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출처: 벼슬길의 푸르고 맑은 바람이여, 선린(善隣)·국방(國防)을 아우른 국헌 이헌구(李憲球)
2019.12. 6. 작성자 : mulretime, 도서출판 시간의 물레
* 관찰사 이헌구 청간선정비(淸簡善政碑) *
이헌구(1784~1858년). 좌의정 이건명의 현손. 자는 치서(稚瑞)이고, 호는 국헌(菊軒)이다. 충간(忠簡)의 시호를 받았고 직위는 좌의정에 이르렀다.
전라관찰사 시절의 선정으로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었고, 평안감사 시절엔 산성개축 등으로 국방의식과 무예 숭상 기품을 진작시켰다. 대사헌 시절엔 외척인 김유근 김홍근 등을 탄핵하다 유배되기도 했다. 궤장을 하사받았고, 철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청혜간혜(淸兮簡兮)
불현기광(不顯其光)
구이익모(久而益慕)
여하가망(如何可忘)
맑은 기품에 간결한 일처리였네
그 빛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음이여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그리웁거니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
「관찰사 이헌구 청간선정비」
전북대학교 박물관 앞에는 '관찰사 이헌구 청간선정비'가 우뚝 서 있다. 전라감사 이헌구를 기리는 4언4구의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청아한 인품과 신속정확한 일처리를 한 주인공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그리워진다는 내용이다.
이 비는 보기 드물게 쇠로 만든 철비다. 비는 돌로 만든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옛날에는 나무로도 만들었고, 철을 재료로 쓰기도 했다. 전주시내의 한 건물 축조 때 발굴된 이 비는 1979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고을 수령의 업적을 기념하는 선정비는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래서 희소가치가 그리 많지 않다. 또 비문의 신뢰성에 의구심이 가는 경우도 있다. 수령이 재임 중 세우는 사례도 있었고, 임무를 마친 뒤 권세가 있을 때 세워진 것도 상당수다.
이헌구의 선정비는 그의 사후에 건립되었다. 관찰사 재임 중에 세류를 타는 인사들이 비문을 쓰기 위해 추렴한 것도 아니고, 감사직에서 물러난 직후에 조각된 것도 아니다. 내직으로 들어가 좌의정 등 권세가 있는 직위에 있을 때 세워진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