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 영광」
문필보다 농축에 뜻을 두고, 신학보다 자연을 좋아하여 (도쿄고등사범) 지리박물과를 선택한 김교신은 서울보다는 시골 살기를 열망했다. 1934년에 쓴 「시골의 영광」에서 그는 시골을 멸시하고 서울을 대단하게 여기는 풍조를 개탄한다.
<우리 서울처럼 시골을 분리하고 멸시하여 마지않는 서울은 필경 지구 위에는 다시없을 것이다. … 덮어놓고 서울이니까 시골은 서로 맞지 않으며, 멸시할 수 있는 무슨 특권이나 있는 것처럼 한다. … 물 위에 기름이 뜨듯이 ‘시골뜨기! 시골 아이!’라는 포위 공격에 몰리는 광경이 일본인과 중국인이 미국에서 ‘잡잡’ ‘니스’라고 조롱당하는 걸 연상케 한다. … 우리는 ‘시골뜨기’라고 멸시당할 때 시골의 영광을 감사하게 될 뿐이다.>
서울 사람이 시골 사람 대하는 태도가 마치 미국 사회에서 백인이 동양인 인종 차별하는 것 같다고 했다. 김교신은 남들이 자기를 서울 사람보다 시골 사람으로 봐주기를 원했고, 이 글을 쓰고나서 2년 후에 마침내 시골행을 실천에 옮긴다. 그는 1936년 5월 7일 경성부(京城府, 서울) 공덕정(孔德町, 지금의 마포구 공덕동)에서 정릉리(貞陵里,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로 주거지를 옮겼다. 정릉은 지금은 자동차 도로와 주택으로 빼곡히 들어찬 도심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아직 경성부(서울시)에 포함되지 않은 산골짜기였다. 김교신이 새로 이사한 곳은 주변 사방에 집이라곤 보이지 않는 외딴집이었다.
당시 서울시에 하나밖에 없는 교통수단이던 전차는 동물원(창경원) 앞까지만 운행되었다. 혜화동에서 돈암동까지는 아주 형편없이 초라하고 쓸쓸한 산모퉁이 앵두나무밭 골짜기, 뽕나무밭, 호박밭, 허허벌판, 모래사장,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이런 풍경 가운데 사람 사는 집이라곤 어쩌다가 이 구석에 한 채, 저 구석에 한 채가 눈을 씻고 봐야 간신히 찾아볼 수 있을 만큼 보기 드물었다. 김교신이 자전거를 교통수단으로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소설가 김팔봉(1903-1985)은 1933년부터 성북동에서 살았다. 그는 성북동 꼭대기에서 동물원 앞까지 걸어 나가 전차를 타고 서울 시내로 출근했고, 밤에는 다시 동물원 앞에서부터 집까지 걸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런데 얼마 후 김팔봉은 자기보다 더 먼 곳에서 시내로 출근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양정고보 교사인데 정릉 고개 넘어서 양정학교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전거로 출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분이 김교신 선생이신데 진정한 크리스천이란다. 아주 훌륭한 인격자시라고 모두 존경한단다.” 이렇게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김팔봉은 김교신을 먼빛으로 바라본 일이 딱 두 번 있었다고 회상한다. 어느 날 동소문 고개 근처에서 명륜동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자전거를 탄 신사가 그의 곁으로 훌쩍 지나갔는데 그가 바로 김교신이라고 같이 가던 친구가 알려주어서 얼핏 본 것이다. 그는 그 후 또 한 번 김교신이 역시 그 고갯길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삭발 머리에 당꼬바지 차림이었을 것이다.
김팔봉의 회고대로 김교신은 돈암동, 삼선교 일대가 허허벌판이던 시절에 정릉 산골짜기에 집을 정하고, 양정까지 삼십 리 길을 자전거로 다녔다. 평범한 농촌 주민들이었던 정릉 토박이들의 눈에 김교신과 그의 가족들이 신기하고 이질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1939년 추석 명절 무렵에 김교신은 퇴근하다가 쵸지야(丁字屋, 미도파백화점 전신)에서 ‘대(大)경성 도시계획 전람회’를 관람한다. 당시 경성 인구는 70만 명인데 50년 후에는 600만이 된다고 했다.
〈50년 후에 600만 인구를 초과하리라는 대경성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고 건강한 주거지로 만들 수 있을까. 온갖 우수한 사람들의 지혜를 종합하여야 해결될 난제이다. 지금은 시외 벽지라는 정릉리도 50년 후에는 소위 ‘도심지구’에 들어갈 것이라니 웃음이 나온다.>
정릉이 도심에 편입되리라는 예상을 보고 김교신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50년 후인 1990년 서울 인구는 1,061만 명이 되었다. 1939년의 예상보다도 460만 명이 늘었다. 김교신이 살던 정릉리 시골 마을은 아파트와 주택으로 빼곡히 들어차 옛 모습은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운 ‘도심지구’가 됐다. 김교신이 상상하지 못했던 상전벽해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