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라는 이름/김정택

[이창선]

박보라는 이름

                           김정택

내 어릴 때 이름 즉 아명은 박보였다. 똑똑이를 바보처럼 군 게 아니라 그냥 생긴 대로 마당쇠, 돌쇠 같은 막 이름으로 갓난이부터 바보라고 했다. 그 바보를 한문 박보博甫로 바꾸어 출생신고를 했으니 일단은 공명(公名)이었고 ‘유식한 사람’이라는 좋은 뜻이었다. 걸을 만 하니 순덱이라 불렀다. 호적등본을 떼어보면 초명이 博甫, 개명이 淳宅이라 명기되어있다.

이창선 시인이 내 어릴 때를 본 것처럼 내 이름을 그의 시 <거드레기>에 거느리 왕상ᄒᆞ였다. 우리 외사촌 누님은 요섯ᄉᆞᆯ에 아기업게로 우리 집에 와서 세살 난 순덱이 돌보멍 살았다. 누님은 4.3사태에 부모 다 잃고 “순덱이 어멍 한티 좋은 욕 실픈 욕 들으멍” 도사리로 살았다.

드디어 일곱 살에 취학하게 되자 宅의 된소리를 취하여 순택으로 불러주었다. 그러나 순택이란 아이가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적도 있고, 종친회 명부뿐만 아니라 옛 지역전화번호부에도 스무 명이 넘는다. 거의 보통명사 수준이다. 부모님께 불만을 말씀드리니 할아버지가 지으셨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 할아버지는 무슨 연고로 당신의 귀여운 손자 첫 이름을 김바보라 하고 한자로는 金博甫라 하셨을까? 일찍 돌아가시어 할아버지의 해명을 듣지 못하였지만, 생각건대 그것은 바로 ‘어리석은 듯 슬기로운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다.

나의 출생 시기가 바야흐로 왜정시대였으나 할아버지는 똑똑한 아이로 자라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그저 집안의 명목만 이어주기를 바랐다. 아닌 게 아니라 제주에서는 왜정 때에도 광복이 되어도 똑똑한 이들은 다 잡혀가고, 살아남은 이는 왠지 바보가 되어 돌아왔다. 똑똑한 이들이 잡혀가는 세상이어서 바보라 불렀을 것이다. 바보로 살다가 똑똑이로 되면 더 좋겠지, 고종 임금님도 어릴 때는 개똥(介同)이라 불렀지 않은가. 사고 없이 오래 살라고, 모자란 척 자라다가 똑똑이가 되라는 의미를 담아 일부러 천하게 지었을 터이다.

대체로 바보란 어떤 이인가? ① 지능이 부족하고 어리석어서 정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 ② 어리석고 못나게 구는 사람을 얕잡거나 비난하여 이르는 말이다. 두루애, 등신, 맹꽁이, 맹추, 머저리, 먹통, 멍청이, 멍텅구리, 못난이, 반편(半偏)이, 밥통, 백치, 어리보기, 어중기, 얼간이, 주우(朱愚), 죽쉬, 천치(天癡), 칠푼이들이 바보의 들러리였다,

“바보는 스스로 똑똑하지 않다는 믿음 때문에 정말로 지적 수행능력이 떨어지게 된다.”(장 클로드 크로아제 佛클레몽오베르뉴大)

그러고 보니 나는 스스로 똑똑 하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바보인 줄을 몰랐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시절 미술시간에는 바다를 하얗게, 하늘을 파랗게 그려 호되게 꿀밤을 먹었다. 나는 바닷가 오후나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물비늘의 기억을 살려 하얀 바다를 그렸건만 ‘바다는 파랗다’는 공식에 걸린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나 혼자 바보가 되고 말았다. 열 살이 넘어도 말 한마디 똑똑히 못하는 바보였다. 한 없이 착하기만 하여 바보라고 놀려도 남들이 욕하든 말든 그저 헤헤거리기만 하니 정말 간도 쓸개도 없었다.

중학교 겨울 맨발로 다니는 고아원 아이들에게 명절빔으로 받은 새 양말을 갖다 주며 사귄 적이 있었다. 고아원 애들은 나이가 많고 무서운 것이 없어 학급의 군기를 다 잡고 있었다. 그 애들은 나를 기압반열에서 노상 빼어 주었다. 모자란 아이라고.

농업학교 실습시간이었다. 검질을 매다 하도 조용하여 일어나 보니 아무도 없었다. 약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부는 안 시키고 검질 매게 한다.”는 똑똑한 명분을 세우고 다 도망가 버린 후였다. 나중에 아이들이 나에게 윽박질렀다. 교무실에 일러바쳤다며 “저 바보는 요령 하나를 피울 줄 모른다.”고.

등굣길 어느 날 짐을 잘못 실어 뒤가 무거운 말 구루마가 남문통 비탈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뒤에서 죽어라고 밀던 나에게 마부는 구루마 앞 식(軾)을 잡고앉아 하중을 버티라고 하였다. 하필 학교 선생님이 나를 보고는 그러지 않아도 무거워하는 말 구루마에 ‘작산 것’이 타고 다닌다고 꾸중을 하셨다. 그래도 나는 “제가 그러고 싶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고 변명을 하지 못하였다.

나는 7남매의 맏이로 막내와는 17살 차이가 났다. 어머니는 농사일이니 쌀장사니 늘 바쁘셔 나는 휴일이나 방학 때면 기상과 동시에 젖먹이 동생에게는 애기구덕을 흔들며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조금 큰 동생들과는 놀아 주고 책을 읽어 주는 등 영락없는 ‘동생 바보’였다. 그런 나의 모습은 보는 이들을 미소 짓게 했다.

그 바보가 용케 장가를 갔다. 신부는 똑똑했다. 온달 이야기는 들으면 바보가 현명한 공주의 내조로 인하여 훌륭한 인간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에 공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도 매사에 어리석음을 발휘했다. IMF가 올까봐(?) 은행에 함께 가서 도장만 찍어달라는 친구의 부탁에 찍어준 것은 백지 차용증이었다. 드디어 나라에 변란이 일어나 십억 대의 부도를 보증했음이 드러나자 재산을 축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 너무 바보 같으면 가엽다가도 미운증이 나는 법이다. 아내덕분에 그 빚더미에서 살아났지만, 아내는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고, 어머니는 약지 못한 아들 때문에 평생을 눈물로 살다가셨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교통사고로 근사체험(近死體驗 NDE)까지 해놓고 아는 사람이라며 가해측과 조기합의를 하는 바람에 후유증 수술비는 내 돈 내고 내 수술 받았다. 보이스피싱에도 곧잘 걸려들었다. 평생을 돌이켜 보면 지혜나 꾀가 없고 어리석음으로 충만해 있었다.

세 살 때 뇌막염에 걸려 약으로 못 고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착하기는 하지만 됨됨이가 변변하지 못하고 좀 모자란 듯 처신했다. 행동이나 말 따위가 다부지지 못하고 어리석고 둔하였다. 남들은 나를 보고 외모와는 달리 어수룩하고 잘 속고, 굼뜨고 눈치 없는 놈이라고 비웃었지만 나는 좋다고만 하였다. 유튜브, 밴드 라이브, 카톡,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줌, 스마트폰, 피처폰, 덤폰, 웹서핑, 라이트폰, 바보폰 조차도 사용할 줄 모른다. 트로트 가수나 탤런트나 영화배우의 이름을 몰라 지인들 사이에서도 좀 괴상하다고 하였다. 단체의 장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내가 하고 싶어 맡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부(副)자 붙은 직책에 있다가 정(正)자의 공석을 만나 엉겁결에 무거운 짐을 지고 죽을 고생을 한 것뿐이었다.

원불교에 입교하니 교리적으로 ‘어리석음’은 중요한 아젠다였다. 우(愚)는 사람을 망치는 바탕이며, 수행의 원리와 방법을 모르고 대소유무와 시비이해를 아지 못하여 자행자지함을 이르는 말이라고 하였다. 심지(心地)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생기므로,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면 자성의 혜(慧)를 세울 수 있다고 하였다. 우의 본말을 연구하라는 뜻이었으나 그 어리석음을 여태 깨우치지 못 하였다.

“저 사름 두릿두릿ᄒᆞ멍 뚜럼 ᄀᆞᇀ아도 잘도 ᄋᆢᆨ박쥐여. 군늉이 소곱에 지깍ᄒᆞ엿저. 이레 저레 공 먹을 거나 읏인가 ᄉᆞᆯ피멍 ᄋᆢᆨ은 실게가 말도 못ᄒᆞᆫ다.”

양전형 시인이 오라리 뚜럼이란 사람을 보고 ‘ᄀᆞᆮ는’ 말이었다. 뚜럼이란 제주어로 바보처럼 사는 사람, 너무 순진하거나 좀 모자란 사람을 일컫는다.

어느덧 나의 나이도 여든이 가까웠다. 작년에 나의 나이는 77살은 가고 78살이 왔다. 그런 뜻으로 입춘첩을 ‘七十八年來 七十七年去“라고 써 붙였는데, 올해 다시 환첩(換帖)할 필요가 없었다. 새 정부가 한국나이니 만 몇 세니 하는 말을 안 하기로 했으니 그대로 들어맞았다. 앞으로 남은여생을 ‘ᄋᆢᆨ은실게(약은 실속)’로 살려하지만 그렇게 ‘ᄋᆢᆨ박쥐(약둥이)’ 소릴 들으며 살 것까지는 없을 것 같다. 매우 늦었지만 죽을 때까지 그저 할아버지 지침대로 ‘어리석은 듯 슬기로운 사람’이 되고자 노력할 뿐이다

[이창선]

박보가 명성을 떨치는 의사 선생님의 된 것은
하늘에 별을 따오는 일이 아일 까요?
거드레기 시를 보고 박보의 숙명의 대결
산문을 보고 감동 먹었씀다 회장님!

[사라헌]

지난 해에 올린 글을 이제야 보고 읽었으니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요.
이제라도 놓지지 않는 게 퍽 다행이군요.
달인의 글을 읽으니 웃음이 절로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