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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 유치환의 초기 시에 대한 실존적 접근
-<생명의 서> 연작 3편을 중심으로
오 양 호
1. 유치환의 초기 시 무엇이 문제인가.
청마 유치환은 김영랑, 박용철이 주재하던『문예월간』에 <정적>(1931)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온 뒤 많은 시집을 출판하였다. 1950년대까지 간행한 시집만도 8권이나 된다.
유치환의 작품연구는 아주 많다. 『다시 읽는 유치환』에서 이런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많은 논저 가운데 이 글은 다음 5편의 평론·논문·저서를 주목한다.
1) 김춘수, <유치환으론 >『문예』(1953. 6월호)
2) 문덕수, <생명의 의지>(『현대문학』(1957. 11~12월호)
3) 김종길, <비정의 철학>(『세대』17호. 1964. 10 월호)
4) 오세영, 『유치환』(건국대출판부.2000)
5) 박철석, 『새 발굴 청마 유치환의 시와 산문』 (열음사. 1997)
1)은 짧지만 유치환의 시를 동양의 주정적 서정주의와 이를 압살하려는 서구의 의지적 정신의 대립으로 독해하면서 무명의 유치환을 문제적 시인으로 문단에 끌어낸 최초의 글이다. 2)는 유치환의 시 세계를 일찍이 생명의지, 동양의 노장사상에 초점을 맞춰 평가한 평론이며, 3)은 청마를 대가의 풍격風格으로 치받든 글이란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4)는 유치환의 후기시를 서구의 실존주의 문학과 상호텍스적intertextuality 관계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논리가 새롭다. 5)는 유치환 시의 출발을 아나키즘과의 맥락Context에서 논증하는 점은 기존의 견해와 많이 다르다.
삼백 편이 훨씬 넘는 유치환에 대한 논저를 다 분석하지는 않았지만, 거개의 논저가 문제로 삼고 있는 과제는 이상의 5개의 견해로 대표된 듯하다. 나는 1984년 <유치환 론>을 『현대문학』에 발표하였고, 지금까지 이 시인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30년 넘게 유치환과 인연을 맺고 있는 셈이다.
논의가 진행되면서 드러나겠지만 이 글이 고찰하려는 작품은 <生命의 書 一, 努한 山>. <生命의 書 二, 陰 獸>. <生命의 書 三, 生命의 書>와『滿洲詩人集』의 <哈爾濱道裡公園>, 그리고 유치환의 초기 시 가운데 또 하나의 문제작 <바위>를 자생적 실존주의문학의 시각에서 독해하려한다. 그런데 이런 독해를 당장 다음과 같은 주장이 말문을 막는다.
유치환의 생명의 의지나 반기독교적 사상 등은 니체의 영향임이 분명하고,‘니체’도 이 무렵 읽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청마 유치환 평전』을 쓴 문덕수란 점에서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 특히 유치환의 시가 니체와 상호텍스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 주장에 문제가 있다. 그것은 본고가 집중적으로 고찰하는 유치환의 초기시가 아닌 그의 모든 작품을 대상으로 삼고 있고, 주장의 근거자료도 유치환의 것이 아니라 그의 형 유치진 것이다. 그리고 위에 인용된 문장의 서술어도‘생각된다’로 종결되고 있다. 중문의 구조지만 인용문은 한 문장이고 주어‘반기독교적 사상’의 서술어는‘생각된다’이다. 확신에 찬 단정이 아니다. 추측, 추론이다.
14살 중 1의 소년이 형도 어렵다고 술회한 니체와 쇼펜하우어를 독해할 수 없었을 것이란 견해가 글 한 귀퉁이에 있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출발하는 다른 유치환론이 오세영의 저서, 4)이다. 그의 초기 시를 넓은 의미의 휴머니즘문학으로서의 실존주의로 보고 있다. 결국 오세영도 문덕수와 같이 유치환이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와 다른 주장이 있다. 곧 유치환의 1차 도일시절은 아나키즘에 경도되어 있었고, 그 시절의 작품 역시 아나키즘의 맥락에서 읽는 것이 맞다는 주장이다.
유치환이 북만주로 간 시간은 첫 시집『유치환시초』에 추리고 남은 작품이 일경의 가택수색에 걸려 몽땅 뺏긴 뒤인 1940년 4월이다. 그런데 유치환의 이향을 이런 지사형 시각으로 보기도 하고 개인적 도주설로 보는 견해가 이런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2. 유치환 · 아나키즘 · 니체
청마 탄신 100주년 기념문집『다시 읽는 유치환』에 수록된 대표적인 연구에서 니체와 유치환을 직접 연결한 글은 없다. 맥락상 연결되는 것만 한두 군데 발견될 뿐이다. 사정이 이러하지만 유치환이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처럼 되어 있다. 이 문제는 조연현의『작가수업』에 <우연히 시인이 되었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술회를 확대함으로서 발생한 것 같다. 그 대문은 다음과 같은 단 한 줄이다.
문학에 있어서 가장 나에게 愛着을 갖게 한 詩人은 日本의「다까무라」「고오다로-」와「하기하라」「사구다로-」 그리고 그 밖에 아나-키스트詩人「구사노 신빼이」「다케우찌」「데루요」같은 분들이다.
주註 7)에서 밝힌 바와 같이 문덕수는 유치환이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추론임을 본인이 직접 말했고, 오세영은 유치환의 후기 문학, 그것도 시와 산문을 함께 묶는 주장이니 유치환의 초기시가 니체와 영향관계에 있다는 말은 더 이상 따질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박철석이 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연현 편저의 그『작가수업』에 나타나지 않는, ‘高村光太郞, 萩原朔太郞’란 본명을 적시하며 시인 다카무라 고타로와 하기하라 사쿠타가 받은 니체의 영향을 유치환이 이어 받았다는 말이 그렇다. 박철석의 견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새 발굴 유치환 유치환의 시와 산문』에서는 유치환의 초기시가 아나키즘의 영향이라 하고, ‘한국 현대시인 연구-18’『유치환』에서는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말의 아귀가 맞지 않고 왔다 갔다 한다. 따라서 유치환이 니체와 이중영향 관계에 있다는 박철석의 주장은은 신빙성이 없다.
1908년생인 유치환은 동경에서 두 번 살았는데 첫 번은 중학교에 다녔고(1923~26), 두 번째는(1928 ~29) 학적은 없이 사진학원에 다녔다. 첫 번은 유학이었으나 14,5세의 소년이었다. 따라서 박철석이 말하는‘하기하라 사쿠타로의 <허망의 정의> <절망의 도주>를 니체적 사유’로 독해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두 번째 동경 행은 공부하러 간 것이 아니라 무슨 직업거리를 하나 배워오고자 하는 걸음이었다.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유치환은 평생 동안 세 가지 직업을 가졌는데 첫 번은 사진관 경영이고, 두 번째는 시인이고, 세 번째는 교육자다. 유치환은 1927년 가을 동경에서 귀국하자 열 살 때부터 사귀던 권재순과 결혼하고 아버지가 경영하는 유약국 2층에 그의 최초의 생업 사진관을 차렸다. 그 뒤 그는 평양에서도 잠시 사진관을 경영했고(1932), 부산으로 이주해서(1834) 조벽암의 도움으로 일한 자리도 화신백화점 부산지부 사진관계 부서였다고 한다.
유치환은 이런 생업과 함께 이재와는 거리가 먼 시 창작에도 열중하였다. 바로 이 때 유치환은 아나키즘과 만났다. <저녁풍경> < 압 집 세 남매> 등『소제부 제1집』에 수록된 26 편의 시가 이 때 창작되었다.
유치환의 아나키즘사상은 당시 일본 유학생들이 거의 다 경도되어 있던 진보사상이다. 이런 점은 경도에서 발행된 유학생 잡지『학조』에도 나타난다. 그리고 유치환을 대학 교수로, 중등학교 교장으로 천거하고, 함께 저서도 출판하며 평생 동지로, 형제애로 우의를 나눈 하기락과의 공통분모도 이 아나키즘이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 할 때 유치환의 초기시를 아나키즘과 묶는 견해가 바른 독해다.
니체와의 영향관계가 감지된다는 유치환의 <신의 자세>와 <나는 고독하지 않다>가 발표되던 1960년대 초기의 한국문학은 양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처럼 우리도 6·25라는 잔혹한 전쟁을 겪으면서 인간이란 존재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되묻고 있던 때다. <요한시집>(장용학.1955), <모반>(오상원.1957), <나무들 비탈에 서다>(황순원.1960) 등의 소설이 이런 문제를 제기했고, 이런 문제가 확산되면서‘실존·부조리부조리不條理absurd·’란 어휘가 문단의 화두가 되었다.
우리가 이 실존주의 문학에 대해 명심해야 할 것은 한국시문학에 실존주의 영향이 나타나는 예는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실존주의 문학이 원래 소설이 중심이긴 하지만 한국의 시에는 그 흔적마저 찾기 어렵다. 소설이 실존주의 문제삼던 때에도 시는 모더니즘의 내면화, 전쟁 시의 체험적 인식, 참여시, 분단극복의지를 문제로 삼고 있었다. 그 시절 송욱의 현실비판 시, 김수영의 참여시가 있지만 그런 시는 여전히 모더니즘의 다른 양상이지 실존주의의 그 앙가주망이나 레지스탕스 문학과는 거리가 멀다. 저항의 대상 일본은 이미 망해서 떠난 뒤였기 때문이다. 그 시절 유치환은 부정부패에 대한 계속된 비판으로 경주고등 교장 직을 물러나게 되었고, 저항 시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를 발표하면서 예술원 회원직도 자진사퇴했다. 그런데 유치환의 이런 행위는 일반적으로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대변해야할 국가가 오리려 강자의 편을 들며 개인의 자유를 유린하는 권력에 대한 아나키즘적 항거, 지사형 저항, 절의에 찬 선비정신으로 인식된다.
유치환이 신의 문제와 씨름을 하는 문제의 에세이를 쓰던 시절의 한국은 모든 것이 서구사상에 빠져있었다. 물질뿐 아니라 정신까지 그런 지경에 가 있었다. 특히 종교가 그러했다. 많은 교회가 설립된 것이 바로 이때다. 미국의 구호물자가 종교단체를 통해 유입되면서 기독교의 교세가 엄청난 힘으로 사회를 지배하던 때다. 사정이 이러하기에『울릉도』『보병과 더부러』같은 한국적 정체성이 강한 시집을 출판한 유치환마저 세상을 뒤덮는 서구문화의 논리에 대입된 것이 그런 니체적 언급일 가능성이 있다.
이런 세상이 오기 한참 앞, 청마가 <생명의 서> 연작 3편을 발표할 때, 그는 그 비정의 대지에서 잔인한 인간윤리와 씨름하며 그야말로‘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에 매달려 있었다. 바로 이 허무마저 긍정하며 절망을 뚫고 나가랴는 휴머니즘이 실존주의 문학의 중심 문제이다. 이렇게 유치환은 처음부터 이 고민의 문학과 몸으로 만났다.
3. <생명의 서>의 정체, 그 작품외적 세계와 실존적 자아의 대결
유치환 시에 대한 많은 연구 가운데 ‘생명의·1, <노한 산>’, ‘생명의서·2. <음수>’, ‘생명의서·3, <생명의 서>’, 그리고 <합이빈도리공원> 을 개작, 혹은 원본 관계에서 고찰한 연구는 없다. 이 작품들의 서지적 사실을 문제로 삼는 것은 유치환의 그 도저한 북만체험의 시가「만선일보」를 시작으로『만주시인집』과『재만조선시인집』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우선 1942년 1월「만선일보」에 발표된 <생명의 서>를 보자.
처 처 亞細亞의 巨大한 地襞 알타이의 氣脈이
드디어 나의 故鄕의 조고마한 고흔 丘陵에 다엇음과 가치
내 오늘 나의 핏대속에 脈脈히 줄기 흐른
저 未開 種族의 鬱蒼한性格을 닷노니
...(중략)...
아아 해바라기 같은 태양이여
나의 조흔 怨讐와 大地우에 더한층 强烈히 빛날지니라.
<生命의 書>에서
이 시의 작품 외적 세계는 1940년대 초 만주이고, 자아화된 세계의 중심 시상은 ‘도피, 고독, 야성, 죽음, 생명’ 등의 어휘가 내뿜는 의미이다. 이런 어휘들의 외연에 나타나듯이 이 시의 화자는 거대한 지벽에서 미개와 야성과 맞닥뜨려 허탈에 싸여 있다. 하지만 고독한 투쟁 끝에 그를 극복, 마침내 생명의 열애를 실현한다.
<생명의 서> 화자는 세속으로부터 단절된 원초적 공간에 던져져 생명의 진정한 모습을 갈구하며 삶의 희열 속에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려 한다. 이 시의 화자 ‘나’는 문명이 어지럽고 미개가 몽구를 이루는 원시의 공간에서 고독으로 생명자체를 압박받는다. 하지만 ‘나’가 시체가 되어 좁은 땅尺土을 붉게 물들일지라도 대지에 태양이여 더 강렬하게 빛나라고 외친다. 과감한 종족의 피를 받은 야성의 회한 없는 생명의 열애다.
시체와 원수를 호명하면서 생명을 갈구하는 화자의 역설, 사실 화자 ‘나’는 죽음이 삶을 위협하는 모순된 운명과 직면한 상황이다. 하지만 ‘나’는 생명의 존립을 위해 어떤 힘에 매달리지 않는다. 신도 강림을 거부당한 공간에서 ‘나’가 홀로 부조리한 세계와 맞서 그런 상황을 극복하려한다. 진정한 실존을 확인하려는 생명에 대한 강한 의지가 그 힘이다.
<생명의 서>를 조이는 에피타프조의 시구, 가령 ‘시체로 업드린 나의 척토를 새가케 물 드릴지라도/ 아아 해바라기 같은 태양이여/ 나의 좋은 원수와 대지 우에 더 한층 강렬히 빛날지니라.’와 같은 표현은 최고의 가치가 탈 가치화 된 세계다. 인간이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고 추구하던 생명의 가치가 황막한 미개, 웅혼한 원시, 문명이 강말康昩된 현실 앞에서는 그 생명이 보호받지 못하고, 별것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인간의 생명은 인간이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 존재로 간주됨으로써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는 거대한 땅 끝까지 도망간 공간에서, 생명의 가치가 인간세상을 이끄는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 그 공간의 만상과 다름없는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 니힐리즘이 발생한다. 하지만 이 시의 화자는 ’光明에 漂渺한 樹木우엔 한点 白雲‘ 속에 남은 ’나‘의 생명과 그 대지를 ’그 옛날 果敢한 種族의 野性을 본받아‘ 지킬 것을 다짐한다.
인간의 질서와 자연의 질서가 화합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 현실 앞의 모진 목숨, 그렇지만 그런 상황에 굴복할 수는 없다. 이 부조리의 한 가운데서 그래도 살아야한다는 대 명제, 그래서 허무가 오히려 생명열애의 짙은 띠를 형성한다. 결국 이 작품은 ‘나’가 생존을 위해 도망치고, 헤맨 끝에 다다른 땅 끝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지만, 도전과 투지로 그걸 극복하고 홀로 생명의 자리에 건재한다. 곧 ‘나의 엄숙한 실존’을 보여준다.
실존은 고독, 나뿐인 현실로부터 시작한다. 신도 없고, 어떤 절대자도 머물지 않는 공간의 ‘나’가 실존의 원적지다. 바로 이 시의 화자가 그런 처지에 놓여있다.
4. 실존성의 굴절과 심화
유치환의 시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이 제일 먼저 거론하는 작품이 시집『생명의 서』의 표제가 된 작품 <생명의 서> 이고, 그 다음이 <바위>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린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후략)....
이 시의 화자는 죽으면 바위가 되기를 빌고 있다. 시의 구조를 보면 첫 행이 ‘바위가 되리라’는 추정형 기원문이고, 마지막 행 또한 “바위가 되리라‘는 추정형 기원문이다. 이때 /-리-/는 추정의 서법을 나타내는 선어말어미로 지금은 잘 쓰이지 않고, 고어에서나 볼 수 있는 형태이다. /-겠-/ 과 같은 의미로 쓰이지만 아어체 성향이 강하다. 시적 표현 때문이다. 이 시는 이렇게 기원문이 양괄식으로 묶고 있다. 기원이 그만큼 절실하다. 왜 그런가. 바위는 ‘애린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생명도 망각하고,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이 나도 소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죽어서는 그렇게 살겠지만 지금 ‘살아서’는 애린에 물들고, 희로에 움직이고, 생명애에 불타고, 꿈을 노래하고, 쪼개지면 소리치겠단다. 현재가 그렇지 못한 까닭이다.
<바위>는 이렇게 기원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이 시의 화자에게는 내세來世가 없다. 인간을 영육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하나의 물체로만 인식하고 있다. 죽으면 물체, 비 생명체 바위가 되겠다고 하지 않은가. 바위는 몸만 있고 혼은 없는, 물체다.
우리는 여기서 이 시의 화자가 직면한 절박한 심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실존은 삶과 죽음이 대립하는 긴장 속에서 전개되고, 그런 인간의 삶의 종착지 죽음은, 오직 인간 혼자 그 무서움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이 지상에 존재하는 만물 가운데 유일하게 미래의 죽음을 앞질러 사유한다. 자신의 유한한 삶을 의미 있게 꾸려나가는 단 하나의 존재다. 하지만 이 존재는 삶과 죽음의 틈새에서 자신의 현재적 의의를 잠시도 쉬지 않고 확인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 문학에서 말하는 그 고독한 인간실존의 핵심이다.
<바위>의 화자는 지금 ‘나’를 둘러싼 엄혹한 현실과 대면하고 있다. 그걸 극복하기엔 엄청난 힘이 든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다. 삶의 문제가 극대화된 현재의 생명애 때문이다. 죽음과 삶의 틈새, 엄숙한 생존현장에 놓인 한 중간존재Inter-esse의 고독한 운명이 이 시의 화자다. 죽어서는 차라리 바위가 되겠다는 진술은 이런 고독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말이다.
실존주의Existentialism는 탄생부터 고독과 관련되어 있다. 고독한 나, 살아 남기위해 처절하게 투쟁하는 나의 문제가‘실존’이다. 케에르케골이 처음으로 이 말을 사용할 때는 불안, 허무, 절망의 의미까지 내포한 철학용어였으나, 그 뒤 까뮈, 사르트르, 사무엘 베케트 등의 실존주의문학의 부조리란 용어와 만나면서 이 말에는 실존주의문학의 특성을 압축하는 또 하나의 의미가 추가되었다.
유치환이 산 인생내력에도 서구의 실존주의 생산 철학가들이 전쟁 속에서 체험한 고독과 다르지 않은 ‘부조리· 실존’의 자취가 역력하게 나타난다.
부조리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 그렇지만 그 가치가 없는 짐을 짊어지고 그래도 살아야 한다. 이 모순에 싸인 인간의 절망, 이 이율배반적인 운명에 반항할 때만 인간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리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부조리 성격은 까뮈의 소설 <이방인>에 극명하게 나타난다.
<이방인>의 주인공(뫼르소)은 살인죄로 사형 선고를 받지만 자신의 사형이 집행될 때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하기를 바란다. 신성神性의 구원을 거부하고, 죽음과 당당히 맞서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그는 ‘죽음이란 신도 인간도 해결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대상’으로 인식한다. 산다는 것이 결국은 죽음이다. 죽음을 피할 장소도 없고, 달아날 출구도 없다. 당연히 재생이나 내세는 안 믿는다. 내일이면 끝날 목숨, 고립무원의 존재가 이 주인공이다. 그래서 그는 반항한다. 죽음의 운명에 반항함으로써 잠자던 의식이 깨어나 로봇 같은 인간이 아닌 자신의 의지에 따라 그 나름의 가치를 창조하는 자유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비웃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기를 압도하는 자부심이 세계와 맞선다는 판단 때문에 오히려 행복하다. 죽음에 대한 반항만이 자신의 죽음을 극복하는 유일한 삶의 방식이라고 믿는 존재다.
<바위>의 경우는 어떠한가. <바위>의 화자 또한 고독한 존재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압도하는 고독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그러나 죽은 뒤에 이 화자는 재생하여 바위가 되기를 기원한다.
‘바위’란 무엇인가. 까뮈는 이렇게 사유한다. ‘저 돌들과 하나가 되고 싶은 유혹, 역사와 그 야단법석을 깔보는 저 불타오르는 비정의 세계와 한 덩어리가 되고 싶은 욕망!’이라고. 돌에 대한 까뮈의 이런 사유는 유치환이 바위에 투사하는 사유와 다르지 않다. 비정의 세계, 인간사를 깔보는 의식이 그렇다. 까뮈의 이런 발상이 제2차 세계대전의 비인간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고, 유치환에게는 그런 발상이 엄혹한 일제식민지 체험과 연결된다. 유사한 체험이니 사유도 유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돌‧바위’를 통한 유사함이니 신기하다.
서구 정신사에서 인간은 전통적으로 바위·돌을 신이 거주하는 자리로 인식했다. 코카사스지방에는 ‘최초에 세계는 물로 덮여 있었으며, 그때 위대한 창조자인 신은 바위 속에 살고 있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그렇다면 바위·돌은 한 인간(작가)의 영혼 깊이 잠겨 있는 영생의 욕망과 죽음이란 공포의 모순과 갈등을 이중적으로 육화시킬 수 있는 존재다. 이런 점에서 바위는 신성神性을 지닌다.
이런 논리로 보면 유치환의 <바위>는 현실을 부정하고 신성을 희구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바위는 현실을 거역, 반항하면서 영원을 지향하는 존재이자 인간의 심층심리에 숨어있는 운명을 이중적으로 육화시키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그렇다면 유치환의 사유와 까뮈의 사유는 다르지 않다. 까뮈든 유치환이든 그들이 창조한 인물, 그러니까 <이방인>의 주인공이나 <바위>의 화자의 반항이 사실은 어떤 절대적 힘을 향해 ‘나는 살고 싶다. 도와 달라’는 발버둥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신적인 무한성을 지니고, 다른 한 편은 동물적 유한성을 지니는 중간존재다. 그러나 이 모순이 성립될 때 비로소 개인의 ‘실존’이 실현된다. 불가사의한 역설의 성립이다. 이러한 인간은 생명의지를 통해 자기를 넘어서고, 다시 자기창조를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고, 그런 상황을 극복해야 초인 Übermensch 超人, 그 넉넉하게 자기를 실현하는 능동적 인간이 된다. <바위>의 화자, ‘나’가 염원하는 바로 그 인간상이다.
초인은 누구인가. 그는 죽음 앞에서도 생을 찬미하는 자다. 그렇다면 <바위>의 화자는 중간존재를 넘어서는 그 초인이 아닐까. 자기 초극을 꿈꾸며 자기 존재의 가능성 실행을 향해 의지를 뻗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바위>의 표현미학은 상징의 갑골문자다.
5. 절망과 초극의지의 길항
<노한 산>은 <생명의 서> 연작 3편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이다,
그 淪落의 거리를 지켜
먼 寒天에 山은 홀로이 돌아앉아 잇섯도다.
눈 자 거리는 저자를 이루어
사람들은 다투어 貪婪하기에 여념이 업고
내 일즉이
호을로 슬프기를 두려하지 안헛나니
日暮에 하늘은 陰寒이 雪意를 품고
사람은 오히려 우르러 하늘을 僧惡하건만
아아 山이여 너는 노피 怒하여
그 寒天에 구디 접어주지 말고 잇스라.
<怒한 山> 전문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찾아간 북방, 그러나 거기서 만난 건 흑토의 황야, 볕이 사라진 하늘, 음산하고 삭막한 광야에 돌아앉은 산, 저자 거리에 넘치는 탐람貪婪과 그런 광경이 슬픔만 내뿜는다. 그러나 모진 목숨 때문에 화자 ‘내’는 그런 현실 앞에서 슬퍼하지 않는다. 약한 것은 죄가 되는 세계다, 그러기에 ‘내’는 눈을 품은 검은 구름이 쫙 내려앉는 해거름, 화가 잔뜩 치밀어 불끈 솟은 듯한 산을 향해 앙버티고 선다. 지금 ‘내’게는 삶은 고통뿐, 그것이 미래에 대한 전망을 차단하지만 오히려 그 차단으로 인한 절망 때문에 그런 상황에 반항하는 힘이 생긴다. 역설이다. 절망과 고통이 두려워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것에 저돌적으로 달려든다. ‘산이여 너는 노피 노하여/ 그 한천에 구디 접어주지 말고 잇스라’는 자신감, 이것이 화자의 잠자던 의식을 깨우쳐 고통을 초월하는 의지의 존재로 만든다. 긴장이 극대화된 톤이다. 힘의 형상화가 조화로운 비장미를 형성하는 것은 이런 점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 생명의지가 포괄되는 자리에 유치환 시의 한 극점이 형성되고 있다.
생명을 압도하는 현실에 대한 힘겨운 대결, 그런 위협에 대한 초연한 의지, 더 이상 유보가 불가능한 상황으로 내몰린 운명, 그렇기에 반항한다. 그럼으로써 살아있는 인간이 된다. 이 모순과 역설, 이것이 바로 유치환이 ‘산’을 ‘창궁蒼穹의 저쪽에서 오는 외롬이라’(<산>)에서 ‘아아 산이여 신의 간성干城이여’의 신의 호출로(<산·1>), 드디어 ‘노피 노하여 그 한천에 구디 접어주지 말고 잇스라.’(<노한 산>)며 거듭 호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다.
화자, ‘내’는 이런 허무와 절망의 현실이 삶을 가로막지만 그 고통을 긍정하고 향유한다. 절망의 자의식을 가능으로 극복하고 자신의 힘의 의지에 따라 새로운 가치를 주체적으로 창조하는 실존적 존재가 된다. 마지막 행의 단호한 결단의 이면에 이런 부조리한 삶과의 투쟁의지가 더 많이 들어있다.
이런 점에서 이 시의 화자, ‘내’는 니체가 이상적인 인간으로 내 세운 위버맨쉬 Übermensch超人, 그 ‘인간Mensch을 초극Über하는 자' 와 유사하다. 초인은 니힐리스트이다. 그러나 초인은 니힐리스트의 절망으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초인은 자신의 삶을 포용하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한다. 그리고 허무감nihilism에 찬 삶을 반복한다할지라도 자신의 운명애는 결코 식지 않는다. <노한 산>의 화자가 이런 초인의 성격을 닮았다.
유치환이 <노한 산>을 발표할 무렵은 엄마와 생이별시킨 아들을 잃는 참척을 당했고, 세상은 세계대전의 공포에 싸여 있었다. 살겠다고 찾아온 북만은 흑토 만리인데 야수와 마적이 수시로 출몰하여 생명을 위협하였다. 실존문제가 충분히 자생할 조건이다. 삶의 허망함, 수동적 운명, 자연과 인간 사이의 장벽, 예측이 불가능한 미래, 삶이 당장 파멸될 상황이다. 맞서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세계다. 그러나 그런 현실에 내몰려 전락할 수는 없다. 시의 화자가 서 있는 공간은 이렇게 급박하다.
서양의 실존주의 문학사조가 6·25를 겪은 우리나라를 뒤덮던 시절 유치환의 산문 몇 군데에 나타나는 사실을 근거로 유치환이 니체의 영향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마치 박태일이 유치환의 만주행 동기를 ‘도주’라면서 당시 유치환의 주변사를 이리저리 끌어와 그의 시가 부왜문학이라고 단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는 논리의 비약이다. 시 자체 분석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시 작품을 작품 외적 기준으로 검토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함께 아우르는 것이 콘텍스트를 기준으로 검토하는 것보다 대상을 더 정치하게 해석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유치환의 북만 시절의 시에 나타나는 니체적 사유는 결과적으로는 니체와 유사하나, 니체와의 상호텍스트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성립된다.
6. 유치환과 신
애초에 ‘<生命의 書>, 二’로 발표된 <음수>는 유치환 시의 중요 키워드인 신神을 테마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神도 怒여워 하시기를 그만 두섯나니
한 나제도 오히려 어두운 樹陰에 숨어
劫罪인양 昏昏한 懶思의 思念을 먹는者!
너 열 두번 일러도 열 두번 치려지 안코
드디어 마음속 暗鬼에 벙어리 되여
하늘 푸르른 福音을 내 바더드리지 못하여
항시 보이잔는 怨讐에게 기어 며 넉싀 치위가튼
骨수에 사모치는 怨恨에 줄을상 하나니 하여
...(후략)...
<陰獸> 에서
‘음수陰獸’라는 말은 유치환이 만든 말이다. 사전에 없다. 굳이 뜻을 밝힌다면 ‘짐승, 그늘에 사는 짐승’의 의미다. 이런 한자어의 사용은 그의 말대로 치면 서정적 사색의 결과이지만 독자로 보면 관념적 사유가 너무 강해 독자를 제한할 수 있다.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약점이다. 이런 점은 습작기부터 나타났는데 유치환 자신도 이런 것을 ‘한자투성이요, 사투리가 활보하는, 부끄러운 노릇’으로 생각한다.
‘음陰’ 이란 한자어는 의미가 많다. ‘음지·응달·그림자·흐림·세월·북쪽·침묵·비밀’의 뜻을 함께 지니고 있다. 시 제목을 ‘짐승’이라고 하기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표상한다. 그가 당시에 처해있던 삶의 조건을 거의 다 포함한다고 할만하다. 유치환만이 부릴 수 있는 말이다. 북쪽, 흐린 하늘, 침묵의 검은 땅, 외진 대지의 이미지를 그대로 퍼 담는 말이다. 이런 사정으로 시상은 어둡고, 톤은 무겁고, 분위는 원귀가 나도는 듯하다. 악령이 눈을 번뜩이고, 죽음의 그림자가 그늘에서 하늘이 복음을 내릴까 저주한다.
실존주의는 원래 전쟁을 경험하고 난 사람이 만나는 허무, 절망, 고독의 세계에서 잉태한다. 이것은 니체, 사르트르, 까뮈 등의 중심사상이 전쟁을 겪는 허무와 고독 속에서 배태했고, 성장하여 실존주의로 발전한 데서 드러난다. 유치환이 맞선 그 악독한 세월도 니체, 사르트르, 까뮈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남의 전쟁 총알받이로 나가야하는 생명이라 오히려 더 허무하고, 더 억울하고, 더 고통스러웠다.
니체의 시대는 리얼리즘의 시대다. 그는 마르크스의 사상과 활동이 전성기를 이룬 시기에 태어나 전쟁의 고통 속에서 자랐다. 그는 고통 받는 모든 존재자는 살려고 하고, 그런 존재자의 삶은 모두 권력에의 의지로 간주했다. 한 때 나포레온을 숭상했던 초인의 철리가 이런 사유를 유발했다. 이런 논리로 보면 삶은 고통이며 인간은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그는 당연히 문학을 고전적 규범이나 낭만적 아름다움으로서가 아니라 고통스런 삶의 증인으로 인식했다.
까뮈는 사르트르와 같은 무신론적 실존주의 계열에 속하는 사상가이자 문인이다. 이들은 신의 죽음 혹은 절대자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니체와 함께 묶인다. 이들은 인간이 자신의 주체적 의지로 자신과 세계를 끌어안는 것을 본질로 규정한다. 이들은 또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며 무엇보다 개개의 인간으로 존재하는 실존이 우선이며, 본질은 존재양식의 개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려면 먼저 신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이 없으면 본성도 없다. 본성이 없다면 인간은 실존 다음에 인간 스스로 모든 것을 계획하고 원하는 것을 창출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기의 정체를 주체적으로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실존은 주체성, 나라는 인간, 너라는 인간 그 자체다. 인간이 주인이라 자유롭고, 스스로 행동을 선택하며, 자신의 실존을 자신이 책임진다.
유치환에 있어서의 신이란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생명은 무릇 온갖 생명과 함께 무량광대한 우주가 영원한 질서와 조화 속에 창생하고, 또한 운행되는 그 불가지론적 신비와 마찬가지로 있다고 생각한다.
<노한 산>에서의 이것은 화자의 초극의지로 존재하고, <음수>에는 ‘하늘 푸르른 福音을 내 바더드리지 못하여/항시 보이잔는 怨讐에게 기어 며 넉싀(넋의) 치위’ 같이 존재한다. 이때의 하늘이란 어떤 존재인가. ‘짐승’의 하늘이다. 하늘도 무심한 그런 하늘이고, 구해도 주지 않은 허무의 하늘이다. 그리고 그 하늘은 ‘하늘도 曠野갓치 외로운 이 北쪽거리’, 또는 ‘人車의 흘러가는 거리의 먼 陰天’, <합이빈도리공원>의 그 비정의 하늘이고, ‘먼 寒天에 山은 홀로이 돌아앉아’ 있는, 혹은 ‘日暮에 하늘은 陰寒이 雪意를 품’은 <노한 산>의 그 분노에 찬 하늘이다.
유치환의 허무· 니힐리즘은 이렇게 일찍부터 그의 시세계를 지배했다. 그리고 그 유전인자는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 한다는 그 유전법칙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후기 시로 오면서도 지속된다. 이것은 서양의 그 실존주의의 태생, 내림과 다르지 않다. 결과가 일치하니 개체와 계통이 동일해야 하겠지만 유치환의 초기시의 그것과 니체의 그것 사이는 동일 유전인자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런 점은 유치환의 니체 비판에서 확인할 수 있다.
7. 마무리
유치환의 초기 시에 나타나는 실존주의적 성격은 니체와 유사하나 니체와 무관한 그의 독자적 인생체험의 결과임이 드러났다. 이런 점은 그의 습작기 시가 아나키즘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의 재만시절의 <생명의 서> 연작 3편이 니체와 유사한 역경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그와의 영향관계를 발견할 수 없는 데서 확인되었다.
‘生命의 書·一’, <怒한 山>(만선일보. 1942,1,18,日)의 화자는 허무와 고독에 싸여 있지만 자신의 힘의 의지에 따라 새로운 가치를 주체적으로 창조하는 실존적 존재임이 밝혀졌다. 이런 점에서 이 시의 화자는 니체의 이상적인 인간상 위버맨쉬Übermensch超人를 닮았다. 초인은 니힐리스트이지만 절망으로 인해 고통을 받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며, 설사 허무한 삶을 살지라도 결코 식지 않는 힘의 의지를 소유하고 있는 존재인 까닭이다. 그리고 <노한 산>에 나타나는 유치환의 이런 실존주의적 세계인식은 외래적 영향이라기보다 자생적으로 형성된 체험적 시론임이 드러났다.『소제부 제1집』의 <산>과『초고집·1』의 <산·1>의 그 분노에 찬 산 모티프가 <노한 산>으로 결정본이 된 것이 확인되고, 그의 술회에도 그런 점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生命의 書·二’, <陰獸>(만선일보. 1942,1, 19,月)의 화자가 신이 돌보지 않는 생명의 위협에 대항하는 자세는 니체와 같다. 이런 무신론적 사유는 광야에 내몰려 생명에의 무도無道한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빨갛게 타오르는 생명애를 느낄 때, 또는 생명을 걸면서 생명을 지켜야 하는 모순 속에서, 그런가하면 부조리하고 허무한 세상, 그 허무마저 긍정하고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극복하려 발버둥 칠 때 신도 외면한 비인간적 상황에 대한 형상화란 점에서 그러하다. 그렇지만, 유치환의 신은‘오직 무량광대에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니체와 다르다. 이것은 니체나, 까뮈, 사르트르 등이 체험한 신과 외연은 동일하나 내포는 다른, 절대자에 대한 유치환 나름의 반응이라는 의미다.
‘生命의 書·三’, <生命의 書>(만선일보.1942.1,21,水)의 화자는 원시의 공간에서 절대고립으로 생명자체를 압박받는다. 그러나 죽음이 생명을 위협하는 그 모순된 운명과 직면하는 순간도 삶의 희열 속에 실존을 확인한다. 또 신도 강림을 안 하는 부조리absurd한 상황과 대면할 때도 생명의 존립을 위해 절대자의 힘에 매달리지 않고, 생명에 대한 강한 갈구로 자신을 지킨다. <바위>의 화자는 현실을 거역, 반항하면서 영원을 지향하는 인간의 본성을 이중적으로 육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생명의 서>의 사유를 지속·심화하는 자리에 있다. 유치환의 시적 사유와 까뮈의 그것의 접점이 여기다. 두 사람이 문제로 삼는 반항의 본질이 부조리한 인간의 운명에 대한 도전이고, 신적인 무한성과 동물적 유한성의 중간존재로서의 인간의 능동적 실존, 곧‘반항하면서 영원을 지향하는 인간 본성’이 실현되기 때문이다.
실존주의가 원래 전쟁, 절망, 고독, 허무를 체험한 철학자들이 거기서 사상을 잉태, 발전시킨 인간주의 철학이고, 실존주의 문학 역시 그러한 논리로 해독되는 인도주의 예술이라면 유치환이 <생명의 서>를 통하여 인간의 실존을 문제로 삼아 결과적으로 형성시키고 있는 문학적 의의는 1940년대 초기, 북만이란 비인간적 상황과 맞서 인간주의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식민지 시기 한국문학을 빛낸 정신사의 독특한 예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1940년대 초기의 어떤 시가 거둔 성과보다 앞선다. 모든 민족적인 것이 사멸해 가던 시기에 오직 ‘존재의 본질’, ‘삶의 본질’, ‘생명의 본질’만을 고민하며 유치환 혼자 그런 인간의 실존문제를 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일제강점기 말의『청마시초』(1939), 해방기의『생명의 서』(1947),『울릉도』(1948),『청령일기』(1949), 한국전쟁기의『보병과 더불어』(1951), 그리고 한국전쟁 뒤에 연달아 출간된『청마시집』(1954),『제9시집』(1957),『유치환 시선』(1958)이 있다. 약 20년 동안 2,3년 마다 시집을 한 권씩 출판한 셈이다. 1930년대 시인으로 1950년대까지 이만큼 시 창작 활동을 왕성하게 한 시인은 유치환이 유일할 것이다.
2) 유치환과 인연이 깊고, 그의 영향을 받은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청마문학회가 출판한‘청마탄신100주년기념문집『다시 읽는 유치환』(시문학사.2008)에 수록된 유치환 관계 연구논문과 평론은 약 330 편이다. 그러나 이 목록에서 빠진 자료도 있을 것이니 유치환에 대한 연구논저는 어림잡아 350편은 되겠다.
3) 시의 제목이 ‘生命의 書’로 묶인 작품은 셋이다. “生命의 書....(1) 柳致環. <一, 怒한 山>. (만선일보. 1942,1,18,일)// 生命의 書...(2) 柳致環. <二, 陰獸>(만선일보. 1942,1, 19,월)// 生命의 書....(3) 柳致環. <三. 生命의 書>. (만선일보.1942.1,21,수)”이다. 1942년 1월에 3일간 발표된 이 세 작품은 그 뒤 1942년 10월 延吉에서 간행된『재만조선시인집』에는 제목이 <생명의 서> <노한 산> <음수>로 바뀌고 몇 군데 표현과 표기가 달라졌다. 이것은 유치환이 입만 직후부터 생명의 문제, 인간의 존재의 문제를 깊이 사유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이런 점에서「만선일보」의 <生命의 書> 연작 3편은 유치환시의 원적의 자리에 있다.
4) 朴八陽 편,『滿洲詩人集』 (吉林市 第一協和俱樂部. 1942,9월) 유치환의 <편지> <귀고> <합이빈도리공원> 3편이 첫 번째로 실려 있고, 이하에 윤해영, 함형수, 김조규 등 시인 11명의 시 37편이 수록된 재만 조선시인들의 최초의 엔솔로지. 전 70쪽.
5) 문덕수,『청마 유치환 평전』(시문학사. 2004) 73 쪽
6) 유치진, <나의 수업시대>.동아일보 1937. 7.22
7) 이 대문에 대한 의문 때문에 나는 문덕수 교수를 2015년 6월 12일 시문학사에서 만나 유치환이 니체를 읽었다는 자료가 있는가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없다’고 했다. 다만 니체와 유사한 점이 많아 그의 형의 말을 근거로 추론한 것이라고 했다.
8) 정대호, <유치환 시 연구-아나키즘과 세계인식의 관련양상을 중심으로> 경북대 대학원 (박사) 1996
박철석, <『소제부 제1시집』과 청마의 시>『새 발굴 유치환 유치환의 시와 산문』(열음사.1997) 514~528 쪽 이미경, <유치환과 아나키즘-특히『소제부』『생리』지 소재의 시를 중심으로>『한국학보』101집(일지사. 2000.겨울). 유치환이 중 2 때 형이 가입시킨 <토성회>도 아나키즘 단체다. 당시 동경에서 공부하던 유 치진, 유치환, 유치상 3형제가 모두 아나키스트였다.
9) 유치환, <나의 처녀작 시절> 『나의 창에 마지막 달빛이』(문학세계사.1979).138 쪽
10) 박태일,『유치환과 이원수의 부왜문학』(소명출판사.2015) 참조
11) 38편의 논저 <찾아보기>에서 ‘니체’는 한번, ‘실존’이란 용어는 두 번, 그것도 같은 사람(최동호)의 글이다.
12) 조연현 편,『作家修業-문단인이 걸어온 길』.수도문화사.1951년 117쪽. 「다까무라」「고오다로-」는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郞이고,「하기하라」「사구다로-」는 하기하라 사쿠타로萩原朔太郞 다. 「다케우찌」「데루요」도 한 사람(竹內)이름이다. 이 책의 서문 끝에 이런 조연현의 말이 있다. ‘4284년 10월 임시수도 부산에서’. 곧 6·25로 부산이 서울이 된 와중에 만든 책이라 이런 오류가 발생했을 것이다.
13) 박철석 편저, 한국 현대시인 연구-18 『유치환』(문학세게사.1999) 184 쪽
14) 박철석 편저, 앞의 책. 187 쪽
15) 『소제부 제1집』.1930.8. 東京. 소제부시사 간행. 발행 겸 편집 책임 유치진.
16) 조선유학생회『학조』제2호 (경도 학조사. 1927) ‘학우회보’ 및 ‘편집여적’ 참조
17) 경북대 철학과 교수, 무정부주의자.『아나키즘』『한국아나키즘 운동사』유치환·하기락 공저,『사랑과 모랄의 진리』(훈민각.1971) 등의 저서가 있다. 시인 유치환을 경북대 문리대 국문과 강사로, 통영여자중학교 교사 유치환을 경남 안의중학교장으로 영전시킨 사람도 하기락이다. 당시 하기락은 안의중학교 이사장이었다. 나는 하기락의 차남과 영신고등에서 함께 근무한 바 있고, 바둑의 적수로 친하게 지냈다.
18) 유치환;『나는 고독하지 않다』 대구, 평화사, 1963
19) 김하준,<교장선생님 유치환>『다시 읽는 유치환』(시문학사.2008). 389~390쪽 참조.
20) 우리가 실존주의를 처음 수입할 때 이 문학을 고민문학苦悶文學이라 했다. 전기철,『한국전후 문예비평 연구』(국학자료원.1994). 238 쪽
유치환의 다른 글 <회오의 신> <인간의 우울과 희망>과 같은 에세이에도 신과 인간의 문제가 언급된다. 그러나 그런 글은 그가 생각하는 신이란 영원한 무(허무)에 이르는 길에서 만나는 무량광대한 절대적 존재란 장자莊子의 범신론적 입장에 서 있다. 그러기에 그는‘신은 죽었다고 외친 니체의 갈파야말로 야만적인 수전노적 신앙에 받들린 계집 같은 투기심의 기독교 신에 대한 증오와 반항’이라했을 것이다.
21) 오세영,『유치환』 (건국대학교 출판부,2000)에서는 <노한 산>을 (『신문학』3호,1946,7)로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편지> <귀고> <하르빈 도리공원> 이 ‘재만시인집’에 수록된 것으로 잘못 기술하고 있다. ‘재만시인집’이란 시집은 없고,『재만조선시인집』이 있다. 그리고 이 세 작품은『만주시인집』맨 앞자리에 수록되어있다. 가나다순이 아니다. 당시 유치환이 이민문단에 차지한 위상을 암시한다.
22) 生命의 書....(3) 柳致環. <三. 生命의 書>. (만선일보.1942.1,21,수)이다.『재만조선시인집』137~139 쪽의 <生命의 書>는 띄어쓰기 표기가 만선일보 원본과 다르다. 시집 『생명의 서』(행문사,1947) 에는 이 작품명이 <生命의 書 二章>으로 되어 있고, 몇 개의 표기가 이 원작과 다르다. 본고는 개작본이 아닌 이 원본을 텍스트로 한다. 표기 역시 그러하다. 다른 시 3편, <노한 산>, <음수>의 경우도 사정은 같다.
23) 實存主義는 20C 초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생겼다. 실존existence이란 말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 현실존재’이고, 나, 너, 개개의 인간이 실존이다. 이때 각자의 고유한 존재의미를 살리는 일은 각자를 그의 세계로부터 드러나게 하고 그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머물게 하는 방식으로 실현된다. 이런 경우에만 각 존재자는 그의 존재의미가 드러난다.(정은해,『삶의 철학』 원미사. 2000. 62쪽 참조).
한편 ‘실존’이란 말은 ‘무엇인가 있게 해 주는 것’이란 본질이란 말과 대립된 개념으로 사용된다. 진짜는 없다. 그렇기에 본질은 가능한 어떤 것이다. 이런 가능이 실현되어 시간과 공간 속에 있게 될 때 우리는 그 상태를 ‘실존’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건들은 본질과 실존이 구별되어야 한다. 이 용어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사용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후에는 철학뿐만 아니라 문학과 다른 예술분야에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고 남아있는 것은 산산이 파괴된 삶의 터전, 널브러진 주검뿐이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는 살기 찬 상황에 싸인 현실 속에 오직 남은 것은 ‘나’ 뿐인 현실, 실존주의는 여기서 시작된다.
24) 반도 남단 평화로운 바닷가에서 태어났으나 식민지 국민으로서 살 앞날이 불안하여 배운 사진술, 그 기술로 성가를 하겠다고 부산으로, 평양으로 다시 고향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며 살던 내력, 그런 세월 끝에 만난 지원병, 노무원 징용까지 강요받는 중·일전쟁, 2차 대전의 공포, 그런 소용돌이 속에 가족을 거느리고 북만주로 탈출했다가 당한 맏아들의 죽음 등이 그렇다
25) 알베르 까뮈, 『결혼⦁여름』(김화영 옮김, 책세상. 2011). 103 쪽
26) 이승훈, 『문학으로 읽는 문화상징사전』(푸른 사상, 2009). 213쪽
27) 「만선일보」1942년 1월 18일(일). 유치환, <생명의 서(1). 一, 努한 山>.『재만조선시인집』. 140~141 쪽에는 표기, 띄어쓰기 등이 다르다.
28) 박철석, 한국현대시인연구-18.『유치환』(문학세계사.1999). 193 쪽 참조. <6년후>의 테마가 된 아들의 생모 伊蘭은 유치환이 만주로 떠날 때 부산 모 여관에서 아이(일향)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지금은 생사조차 모를 伊蘭!’(『구름에 그린다』신흥출판사.1959. 47 쪽)의 그 숨겨진 여자다.
29) 박태일,『유치환과 이원수의 부왜문학』(소명출판사.2015) 참조
30) 「만선일보」1942, 1, 19(월). 유치환, <생명의 서(2). 二, 陰 獸>.『재만조선시인집』 142~143 쪽에서는 행갈이 표기, 띄어쓰기 등이 다른 데가 있다.
31) 유치환은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1961년 일학기까지 경북대학에 강의를 나왔다. 유치환은 나도 참가한 1960년 2월28일 경북고가 중심이 된 의거를 지지하고, <2‧28학생의거기념탑> 비문을 썼다. 당시 나는 대구 문성당판『유치환시집』의 한자투성이 시를 읽으며 ‘시를 이렇게 써도 되나’는 의문까지 들었다. 그때 시론 강의를 하던 김춘수교수의 무의미 시와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또 하나 고백이 허용된다면 나는 고‧3 때 장티프스에 감염되어 약 4개월 넘게 병원과 집에서 치료와 요양을 했는데 그 때 표지가 떨어져 나간 책 한 권이 집에 굴러 다녔다. 나는 그 책을 회복기에 읽었는데 주인공이 아주 별종이었다. 하도 희한한 인물이라 ‘뭐 이런 인간이 있나’ 싶어 두 번 읽었다. 그게『이방인』이었다. 정확하게 1960년 10월이다, 까뮈가 한국에 처음 소개된 때였을 것이다. 나는 유치환과 까뮈를 이렇게 동시에 만났다. 이런 것이 인연이 되어 나는 학사학위 논문을「<나무들 비탈에 서다>의 실존적 고찰」이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다.
32) 유치환, <나는 우연히 시인이 되었다> 조연현 ,『作家修業-문단인이 걸어온 길』(수도문화사.1951) 117 쪽
33) 김주연; <니체의 문학 비평 연구>『독일문학』36권 1호 통권 55집. 참조
34) 유치환, <신과 인간의 고독> 『나의 창에 마지막 겨울 달빛이』(문학세계사.1979). 202 쪽
35) 일찍이 서구의 한 뛰어난 지식인이 현대의 입구에 서서 신은 죽었다고 절규 선언하였다. 그러나 우주와 함께 존재하고, 우주와 함께 영원할 신이 결단코 사멸할 리 없으므로 이 선언이야말로 실상은 그들이 굴종하고 절대 숭봉하던 그들의 신을 그들 자신의 손아귀로서 마침내 교살하였음을 의미한 데 지나지 않늗다. 유치환, <신과 인간의 고독>『나의 창에 마지막 겨울 달빛이』(문학세계사.1979). 200~201 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