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3082001072230025002
예전에 불법비디오의 폐해를 강조하기 위해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이라는 표현을 쓴 경우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마마’는 천연두(天然痘)를 가리키는 말이다. 궁중에서 ‘상감마마’ ‘아바마마’ 등과 같이 사용되던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천연두가 매우 무서운 질병임을 빗댄 것이다. 또한 천연두를 ‘큰 손님’이라고 부르고 홍역을 ‘작은 손님’이라고 불렀는데, 이 또한 이 질병들을 무서워했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실제 옛날에는 매우 높은 사망률과 빠른 전염력 때문에 무시무시한 질병으로 인식된 것이 사실이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도 이러한 전염병을 무서워해서, 그 지역으로 행차하는 것을 피하는 장면들이 <왕조실록> 곳곳에 나오며, 질병을 피해 아예 거처를 옮기는 기록도 나온다. 그런데 영조 32년 11월 17일의 기록을 보면, 왕세자에게 천연두의 증세가 있자 약원 신하들을 궁궐 내에 숙직도록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영조는 어의들에게 말하기를, “내 마음이 안절부절못하여 능히 스스로 안정될 수가 없구나”하고, 이어서 약원의 여러 신하들에게 강서원(講書院)에서 직숙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그만큼 천연두를 무서워했음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이어서 닷새 뒤인 22일의 기록에도, 영조의 불안한 마음이 기록되어 있는데, 임금이 약방의 세 제조와 여러 의관을 소견하여 하교하기를, “천연두는 본디 날짜가 있어 한 보름도 지나가지 않는데, 내 마음은 하루가 한 달 같아, 실로 산에 들어가 알지 못한 채 조금 낫기를 기다려 돌아오고 싶으나, 그렇게 할 수가 없구나”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러한 왕세자의 천연두는 발병한 지 열흘이 지난 26일에 그 막을 내린다. 왕세자의 질병이 완전히 나았기 때문에, 천연두 치료를 위해 특별히 설치되었던 동궁의 의약청(醫藥廳)을 혁파하고, 약원의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는 기록이 나오는 것이다. 천연두는 그야말로 국가의 비상상황이었던 것인데, 그것은 사실 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천연두는 대두창(variola major)과 소두창(variola minor)의 2가지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하는 질환인데, 아주 전염성이 강하고 종종 치명적인 질병이다. 대두창은 더 흔하고 심각한 형태로서, 역사적으로 치사율이 20∼50%에 이르며, 이에 비해 소두창은 덜 흔하고, 대개는 치명적이지 않은 경미한 형태로, 사망률은 1% 미만이었다고 한다.
초기에는 고열 및 두통과 몸살을 앓게 되는데, 이후 피부 발진이 나타나게 된다. 발진은 처음 입안에 붉은 반점들로 나타나서 아픈 상처로 변하는데, 이와 동시에 얼굴 피부에 나타나고 팔, 손, 다리와 발로 퍼져서, 24시간 이내에 온몸으로 퍼지게 된다. 이어서 발진은 튀어 올라온 돌기 모양으로 변하고, 돌기들은 농포로 변하고, 다시 농포들은 딱지로 진행된다. 대부분의 돌기들은 초기 발진이 나타난 후 2주 이내에 딱지가 앉게 된다. 마지막으로, 딱지가 떨어지는 단계가 되면 움푹 팬 흉터를 남기게 된다. 그래서 천연두를 앓고 나면 ‘곰보’가 된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천연두는 ‘두창(痘瘡)’이라고도 불렸는데, 의성(醫聖) 허준은 1590년에 광해군의 두창을 치료하여 이듬해 당상관의 반열에 올랐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책임 어의로서 의주로 유배되었다가도, 바로 풀려나 광해군의 어의로서 왕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았었다. 허준은 전해 내려오던 <창진집>을 개정하여 언해한 <언해두창집요>를 저술하였는데, 이는 천연두치료가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왔다는 증거라 하겠다.
하늘땅한의원장 www.okskylan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