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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 여행4 - 윤동주 시비를 보고는 걸어서 조일소 가마를 거쳐 가미우지신사에 가다!
2019년 4월 9일 교토 의 케이한전철 키요미즈고조에키 (京阪電鉄 淸水五条駅) 에서
케이한 혼센(京阪 本線) 전철을 타고는 9번째 역인 주소지마 中書島(중서도)역
에서 우지센 (京阪 宇治線) 으로 환승해 7번째 케이한 우지역 (京阪 宇治駅) 에
도착해서는 646년 우지강(宇治江) 에 만들었다는 우지바시 宇治橋 다리를 건넙니다.
세계 최초의 여류 소설 인 “겐지 이야기” 의 작가 무라사키 시키부 (紫式部) 의 석상을
보고는 일본화폐 10엔짜리 동전 에 나오는 뵤도인 平等院(평등원) 절을 구경한 후에
인포메이션센타 에 들러서 윤동주 시비 위치를 지도에 표시한 다음 강을 따라 30분
을 걸어서 나무다리 천게빈교 (天ケ瀕橋) 로 강을 건너는데 여긴 비가 설 땅이 없습니다?
좀더 내려가 댐 못미쳐 백홍교(白虹橋) 다리 앞에서 윤동주 시비 를 발견하는데 학우들과
다리 에서 마지막 사진 을 찍고 경찰에 체포되어 죽었으니 주부 곤타니 노부코
(紺谷延子)씨는 시를 읽고 꽃을 우지강에 던지는 추모행사 를 열다가 2009년 6,358명
의 서명을 받아 교토부(府) 에 제출하고 백방으로 뛰어 2017년에야 시비를 세운 것 입니다.
간도 용정에서 성장한 윤동주 가 국내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총독부에서 지정한 고등
보통학교에 진학해야 하니... 9월 평양 숭실중학교 4학년에 입학하려 했던 윤동주는
결국 3학년에 편입하니 큰 좌절이었지만 10월에는 처음 자신의 글이 활자로 변하는
체험을 했으니 숭실중학교 YMCA 문예부에서 낸 ‘숭실 활천’ 에 ‘공상’ 을 발표합니다.
이어 12월에는 최초의 동시 ‘조개껍질’ 을 썼으니 이 시 끝에는 평양의 ‘봉수리 에서’
썼다고 쓰여 있는데... 하지만 더 큰 좌절이 닥치니 숭실중학교는 신사참배에
반대 하자 평남도지사는 1936년 1월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는 숭실중하교 교장
맥큔의 교장 인가를 취소하고 파면 하니 학생들은 동맹휴학 을 하고 3월에 윤동주는
문익환 등과 숭실중학교를 떠나는데 이 무렵 3월 24일에 ‘모란봉에서’ 란 시를 씁니다.
작게 움츠러져 있는 ‘앙당한’ 솔나무는 윤동주나 친구들 모습일까. ‘얼음 섞인 대동강
물에/ 한나절 햇발이 미끄러지다’ 라는 표현도 신선하지만, 2연을 더욱 주목할
수 밖에 없으니 허물어진 모란봉 성터에서 ‘철모르는 여아들이/ 저도 모를’
이국말 (일본말) 로 노래 부르며 ‘재질 대며’ 뜀 뛰며 일본 놀이 를 하고 있다.
"문명 이라는 이름으로 침략해 오는 일제가 밉다는 뜻이니 이 시는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나, 이태준 단편소설 ‘패강랭’ 을 생각하게 하는데....
성터와 함께 허물어지는 한 나라의 언어와 생활을 천천히 응시하게 하면서도
윤동주는 희망을 잃지 않았으니 동시‘창구멍’ 은 1936년 초에 창작된 시로 추정됩니다"
바람 부는 새벽에 장터 가시는
우리 아빠 뒷자취 보구 싶어서
침을 발라 뚫어 논 작은 창구멍
아롱아롱 아침해 비치웁니다
눈 내리는 저녁에 나무 팔러 간
우리 아빠 오시나 기다리다가
혀끝으로 뚫어 논 작은 창구멍
살랑살랑 찬바람 날아듭니다
"구절구절 아빠 사랑이 간절하다. ‘눈 내리는 저녁에 나무 팔러 간/ 우리 아빠 오시나
기다리다가’ 침 발라 작은 창구멍을 뚫는다. 얼마나 궁하면 나무가 젖을수밖에 없는
눈 내리는 날 나무 팔러 나갈까. 새벽도 아니고 저녁에 말이다. 새벽부터 밤늦게
고단하게 일하는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 마음 소담한 비애가 독특한 리듬으로 반복 된다."
"윤동주는 연희 전문 재힉시절 때에도 평양에 가서, 서양 고전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다방‘세르팡’ 에 들르곤 했는데 “한번은 초현실주의 등 현대예술 관련 토론 이
벌어졌다. 옆 테이블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청년이 불만스럽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초현실주의 같은 사조는 인정할 수 없다’ 는 표정이었다. 시인 윤동주 그였다"
"중국에서 태어나 평양 숭실중학교, 서울의 연희전문에서 공부하고, 일본에서 절명한
그의 이력은 ‘중국-북한-한국-일본’ 을 연결하는 아시아 평화공동체 에 대한
작은 창구멍 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윤동주 강연을 할 때, 중국과 일본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 를 볼 때마다, 나는 윤동주가 내놓은 작은 창구멍이 떠오른다."
"한때 남북 공동 문학교과서 를 만든다면 어떤 작가를 넣어야 할지 고민한 적이 있다.
북한에서도 높이 평가받는 김소월, 이육사 등과 함께 윤동주 는 통일문학을 위한
창구멍 역할을 할 수 있다. 아시아 문학교과서 를 만든다면 윤동주가 작은 역할을
하지 않을까. 윤동주는 우리 시대와 아시아인에게 다가오는 희망과 실천의 상징 이기에..."
2년 전에 교토 옛 일왕의 궁궐 앞에 도시샤 대학교 에 들러서 윤동주 시비 를 본
기억이 떠오르는데... 동주 시비 옆에는 鄭芝溶 詩碑(정지용시비) 가 있으니
'압천(교토 가모가와 강)' 을 새겼는데 가만히 읽어 보던 일이 다시 떠오릅니다.
'鴨川 十里ㅅ벌에/ 해는 저물어...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여울 물소리....'
정지용 은 1902년 옥천에서 태어나 휘문고보에 입학해 홍사용, 박종화, 김영랑과 이태준
을 만났는데 3· 1운동이 일어나자 무기정학을 받고 요람에 소설 “3인” 을 싣고
휘문학교의 교비생으로 교토의 도시샤대학 영문과 에 입학해 시 “석류” 를
썼으며 문예시대에 ‘홍춘’,‘산엣색시 들녘사내’ 등을 발표해 시인으로 등단 합니다.
일본 문단지“근대풍경(近代風景)” 에는 예민한 언어 감각으로 순간의 이미지를
그린 '카페 프란스', '바다', '갑판 위' 와 같은 작품들을 실었으니...
지금 들여다 보아도 지극히 현대적 인데, 1930년대 우리 문단의 총아였던
김기림 은 "한국의 현대 시는 지용에게서 비롯되었다." 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1929년 모교 영어교사로 부임하고 김영랑과 함께 동인지“시문학”을 창간해 순수시 운동
의 물길을 텄으며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등과 “9인회”를 만드는데 문인탄압과
회유 에도 꺾이지 않은 민족시인 으로 1948년 “문장”에 발표한 ‘조선시의 반성’
에서 “친일(親日) 도 배일(排日)도 못한 나는 산수에 눕지 못하고 들에서
호미도 잡지 못하였으니 그래도 버릴수 없어 시를 이어 온 것”이라고 고백 했습니다.
윤동주와 정지용 을 회상해 보고는 왼쪽에 우지강을 끼고는 흙길을 걸어서 올라가는데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지라 호젓해서 좋기는 한데........ 치안이 좋은 일본이
아니라면 이 길을 걷는데는 좀 겁이 날 것도 같은데, 생각 중에 행인이 몇 보입니다.
한 20여분 정도 걸으니 드디어 인가 가 나타나는데 오른쪽에 동선원(東禪院) 절 입니다.
강 아래에 특이한 바위는 귀석(龜石) 인데..... 드디어 관광객 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계속 걸으니 오른쪽에 혜심원 절 이 보이고 왼쪽에는 우지코엔(宇治公園) 의 조무교
(朝霧橋) 다리 가 보이니 지도에 朝日燒(조일소) 라고 나오는 朝日燒窯藝資料館
(조일소요예자료관) 을 찾는데 이건 내 선입견 탓으로 오해를 해서 빚어진 촌극 이니...
자료를 조사하면서 朝日燒窯藝資料館 (조일소요예자료관) 라는 이름을 보고 규슈 가고시마의
심수관가 나 아리타의 도조 이삼평 등 조선과 관련된 가마 로 알았는데.... 그러니까 朝日
(조일)을 조선과 일본 으로 읽었더니 아니올씨다? 朝日燒(조일소) 에 가서 둘러보니 朝(조)
자는 아침 조 자요, 日(일)자는 해(태양) 일 자이니.... 아사히야끼(朝日燒 조일소) 라고 읽습니다.
그러니까 아사히(朝日 조일) 는 일본의 3대 신문중 하나인 아사히 신문 같은...
그래도 여기 아사히야끼(朝日燒) 는 시시한 도자기 가마가 아니고
이 땅 우지에서 오래전 옛날인 400년전에 세워져서는 오랜 세월
우지 이 자리를 지켜온 도자기 공방 이니 역사와 유래 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아사히 야끼 는 원래 공방과 가게 가 같은 공간에 있다가 1년전쯤 분리 해서
따로 있는데 그렇다고 해도 바로 이웃에 있으니 두곳을 다 볼수 있으며
가마가 있는 공방은 숍에 얘기해서 허락을 받아야만 들어가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흙을 반죽하는 장소 가 나오고 다음은 성형실 이며 무늬까지 새긴 다음 가마에 넣고
불을 지피는데 가마 위에 신당을 꾸며놓았으니 도자기를 굽기 전에 불의 신에게
기도를 올린다고 하는데... 가마에서 도자기가 나오기 전 까지는 어느 누구도
결과물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아 여겨지니 도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순답니다?
아니면 도자기 체험 행사 등에 쓴다는데.... 아사히야끼(朝日燒) 는 차의 고장 우지 답게
대부분 다기 세트 로 일본에서는 찻잔을 '사카즈키' 라고 부르는데, 찻잔과 술잔의
구분이 크게 나뉘어져 있지 않으니 사케를 마실라 치면 술잔으로 써도 무방하리라 봅니다.
그런데 가고시마의 14대 심수관씨가 금년에 별세 했으니.... 동아일보 서영아
씨는 ‘횡설수설’ 칼럼 난에 “심수관의 恨(한)” 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고향이, 고향이 그립소이다….’ 1598년 정유재란 으로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도공들은 살기 좋은 성내로 옮길 것이 허락되자 이런 말로 거절했다. “
“이들이 정착한 규슈 나에시로가와(현 미야마) 는 언덕 너머로 한반도를 향한 바다 가
펼쳐져 있었다. 70여명이 대대손손 한복을 입고 모국어 를 사용하며 살았다.
지식인이자 작가인 시바 료타로 가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리’ (1969년) 에서 이런
모습을 그려냈다. 16일 향년 93세로 별세한 심수관 옹은 이때 정착한 심당길의 14대손 이다”
“2년 전 찾아본 그는 가업을 15대에게 물려주고 애견과 함께 한가롭게 집과 요(窯) 를
오갔다. 명문대를 나온 그도, 아버지 13대도, 그 아버지인 12대도 궁극의 목표는
가업 계승 이었다. 혈기왕성한 소년 시절 14대가 “사관학교에 가겠다” 고 하자
13대는 마당의 나무들을 가리켰다. “저들은 스스로 원해 여기 심겨 있는 건 아니다.”
“ 하지만 심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노력한다. 우리도 저
나무와 같다. 14대는 1998년 동아일보 일민미술관에서 심수관가(家)
‘400년 만의 귀향전’ 을 열었고 고향인 전북 남원에서 불씨 를
채취해 미야마에 옮겼다. 아버지 13대의 유언을 34년 만에 이뤄낸 거였다.”
“조선의 도예 가 일본에서 꽃핀 이유로 14대는 ‘다도(茶道)’ 의 존재를 들었다.
조선의 다완은 일본의 성(城) 하나와 바꿀 정도로 귀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막사발 에 불과했고 도공들은 사람 축에도 못드는 천민 이라?
"임진왜란이 ‘도자기 전쟁’ 이라 불린 이유다. 조선이 천시했던 도공 들을 일본은 사족
(사무라이)으로 대우 했고 장인이 빚은 도예품은 유럽에 일본문화 를 알리며 팔렸다.
이렇게 이뤄진 일본 근대화와 부의 축적 이 제국주의로 이어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
조선은 공맹의 도인 유학 그중에 송나라 주자학 을 신봉한 나라니 기술을 천시 했지요?
“14대 심수관이 1965년 첫 방한 때 서울대에서 한 강연 얘기가 새롭다.
당시 한국의 대학들은 한일 수교 반대 운동 으로 들끓었다. 계란 맞을 각오로 말했다."
“'당신들이 36년 한 을 말한다면 나는 360년 한 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는 것 아닌가?' 강연장은 일순 고요해졌고 곧이어 눈물바다 가
됐다고 한다. 그로부터 다시 50여년, 과거사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더 쿨해져 있을까.“
1965년 박정희 대통령 은 미국이 경제개발 차관을 거부 하자 원수인 일본으로 달려갔으니
무상 3억불, 유상 2억불에 지급보증 1억불등 6억불(당시 일본 외화 보유고의 30%) 을
들여와 포항제철, 울산공업단지, 소양강댐, 경부고속도로, 부두항만 시설에 석유와
철광석, 고무등 원료 를 구입해 "GDP 100 달러였던 나라를 30,000 달러" 나라로 만들었지요?
포항제철 은 원래 협정에 없던 것을 일본 와세다대학 출신인 박태준 이 일본에 가서 스승께
읍소해 관리와 제철 사장을 움직여 농업분야에 써도록 정해진 1억불 을 제철소 건립으로
돌리고... 신일본제철 기술자들이 일본의 기계설비를 들여와 포항에서 재 조립한후 기술
이라고는 없던 한국인들을 제철 기술자로 훈련시켜 주고 첫 쇳물 까지 뽑아 주었던 것입니다.
“2년 전, 그는 말끝마다 “다시 한국에 가보고 싶다” 며 눈을 가늘게 뜨다가도
“나이 때문에 어려울 것” 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특히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청명한 날씨를 그리워 했다. 지금쯤 ‘천 개의 바람’ 처럼
자유로워진 그의 혼백 이 바다 건너 고향땅을 돌아보고 있기를 빌어 본다. “
고인은 조선의 불씨를 규슈 가고시마현 미야마에 가져왔으니... 1998년 남원에서 채취한
불씨 를 가져와 일본의 흙과 기술로 도자기 를 빚었다는데 그 때 가져온 불씨가
지금도 규슈 남단 가고시마의 서쪽 미야마(美山 미산)에 사쓰마 야키 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정유재란때 명군 3천과 조선군 1천 합계 4천 병사와 성민 8천이 지키던 남원성 이 고니시
유키나가등 왜군 5만 6천명의 공격으로 무너진후 조상인 심당길은 남원에서 왜군에
잡혀올 때 남원의 고령토 흙과 유약 등을 가져와 일본에서 첫 도자기 를 빚으면서
불만 일본 것을 빌렸다고 했으니 그래서 초기 백자를 "히바키리 火ばかり" 라고 했었지요?
언덕 위에 자리한 우지 진자 宇治神社(우지신사) 를 보는데 규모가 크지 않은게 일본의 동네에서
흔히 보는 그런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평범한 신사 입니다. 그러고는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10분 가량 언덕길 을 더 올라가니...... 우지신사 뒤편 언덕에 자리한 우지가미진자
宇治上神社(우지상신사)에 도착하는데.... 도리이에는 새끼줄과 종이 등을 매달아 놓았습니다.
이 신사의 본당 은 근처 뵤도인과 동시대인 1060년대에 지어졌다니, 현존 건물로는 일본
최초의 신사 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되었다는데, 신사는 작고 수수하지만 토끼
모양의 오미쿠지 가 재미있으며 금년이 돼지해 이다 보니 맷돼지 도자기 도 팔고 있습니다.
연대 측정 결과 1060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사 건물 인데
국보인 혼덴(本殿 본전) 앞에는 짚으로 만든 '지혜의 륜(輪· 바퀴)' 이 있으니
이른바 포토존 인데 통과해서 왼쪽으로 세번 돌고 다시 오른쪽으로 세 번 돈다고 합니다?
일본의 신사는 보통은 본전이 배전과 통로로 연결되어 있고 별도 담으로 둘러싸여서 가려지게 하는데 여긴 배전과 본전 사이가 트여서 바로 다닐 수 있는게 특이한데.... 토끼를 숭배 하는게 또 별스럽습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절을 찾으면 593년에 성덕태자에 의해 창건된 오사카의 시텐노지 (四天王寺 사천왕사) 라고 나오지만 나라현 아스카 에 소가씨가 창건한 아스카사 (飛鳥寺 비조사) 에 가면 596년에 창건된 이 절이 최초 이고 시텐노지는 593년에 착공했다고 주장하며 나라 호류지(法隆寺 법륭사) 도 최초의 절 논쟁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사의 경우에도 여기 우지가미신사 가 1060년 뵤도인이 창건될 무렵 같이 지어 최초라지만 나라현 덴리 (天理 천리)시에 칠지도 를 간직한 이소노카미신궁 (石上神宮 석상신궁) 과 역시 나라현 사쿠라이시 미와(三輪)산 아래에 5세기에 조성됐다는 오미와 신사(大神) 도 자기 신사가 일본 최초 라고 주장합니다. 오미와 신사가 5세기 그리고 이소노카미신궁이 6세기 에 만들어졌다면 최초 논쟁에 여기 우지가미 신사는 끼이지도 못하는데.... 어느분 이야기는 창립 연대가 아니라 "현존 하는 신사 건물" 자체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연대의 신사 건물 이라 말한다고 합니다. |
첫댓글 오늘은 바빠서 인사만 드리고 시간날때 찬찬히 보겟습니다.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늘 선생님덕분에 이번에는 윤동주시인님에 대해서 상세히 잘 배웁니다
"침 발라 작은 창구멍을 뚫는다" 모란봉에서는 라는 시는 처음 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