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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제(崇禎帝, 1611년 2월 6일 ~ 1644년 4월 25일)는 중국 명나라의 제16대 황제(재위 : 1628년 ~ 1644년).
묘호는 의종(毅宗). 시호는 순천수도경검관문양무체인치효장렬민황제(順天受道敬儉寬文襄武體仁致孝莊烈愍皇帝)이며,
이름은 주유검(朱由檢)이다. 천계제의 동생으로써 후사가 없는 천계제의 뒤를 이어 명나라 제16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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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1611년 2월 6일 태창제(泰昌帝)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인 천계제(天啓帝)의 아들들이 모두 요절 하였고,
1627년 9월 30일 천계제가 죽은 뒤, 1628년 제위에 올랐다. 즉위 후 형 천계제때 전횡을 부린 환관 위충현(魏忠賢)을 처단하였고,
명신으로서 유명한 서광계(徐光啓)를 등용하는 등 국정 개혁에 임한다.
명 말은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패전 이후 북쪽에서 만주족(滿洲族)인 후금(後金)이 침입해오고,
남쪽에서는 1627년에 이자성(李自成)의 반란이 일어나서 명나라으로선 어려운 시기였으며,또한 17세기 들어 닥친 전세계적인
기상악화와 천재지변으로 흉작이 계속되어 더욱 더 민심이 흉흉했다. 만력 연간 이후로 계속해서 세금이 증가하고
재정의 수요가 증가하였지만, 재정은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숭정제가 즉위할 무렵의 명나라가 닥친 어려움이 이와 같았다.
숭정제는 천계제와 달리 정치에 열심이고, 정사(情事)에 빠지는 일도 없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
황제로 있던 17년 동안 부지런히 국정에 임하였던 황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시의심(猜疑心)이 강하고,
가신을 신용하지 못했던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위 직후부터 여러 차례 신하를 죽였고, 특히 1630년 산해관에서
만주족으로부터의 방어를 혼자서 맡고 있던 명장 원숭환(袁崇煥)을 죽인 일은 치명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혹자는 명 말의 숭정 연간 혼란의 원인 중 하나를 숭정제의 시의심으로 꼽기도 한다.[1] 재위 17년간에,
숭정제에 의해서 살해당한 신하는 총독(総督) 7명, 순무(巡撫) 11명에 달해, 그 외 파면된 사람도 다수 있어 이것이
신하들의 사기를 현저히 저하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숭정제는 중세(重稅)를 견디지 못한 섬서성 출신 반란군인 이자성을 진압하기 위해 차례로 토벌군을 보내지만,
그 이자성 토벌군을 조직 하기 위해서는 다시 증세(增稅)가 필요했다. 다시 이로 인해 궁핍한 백성들이 반란군에 참가해,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1644년, 이자성군은 북경을 포위하여, 3월 19일에 북경은 함락되었다. 한 기록에 따르면 숭정제는 위급을 알리는 종을 울렸지만,
신하들이 모두 도망가서, 환관 왕승은(王承恩)만 혼자 있었다고 한다. 1644년 3월 29일 숭정제는 아들들을 자금성으로부터
탈출시키고, 처첩과 딸들을 살해하고, 자금성의 북쪽에 있는 경산(景山)으로 가서 목을 매달아 자살하였다.[2]
[편집] 묘호의 표기
처음에는 남명정권의 황제였던 홍광제(弘光帝)가 묘호를 사종(思宗)으로 추증하였으나 곧 의종(毅宗)으로 개호(改號)했고
융무제(隆武帝) 때에는 따로 묘호를 위종(威宗)으로 올렸다. 이후 남명정권을 제압하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청나라는
다시금 숭정제에게 회종(懷宗)의 묘호와 장렬민황제(莊烈愍皇帝)라는 시호를 올렸으나 현재는 일반적으로 의종이라는
묘호가 널리 쓰인다.
[편집] 가족
- 부황 : 광종 태창제
- 황후 : 장렬민황후 주씨
- 장남 : 황태자 주자랑(朱慈烺)
- 차남 : 회은왕(懷隱王) 주자선(朱慈煊)
- 삼남 : 정왕(定王) 주자형(朱慈炯)
- 사남 : 영왕(永王) 주자소(朱慈炤)
- 오남 : 도영왕(悼靈王) 주자환(朱慈煥)
- 육남 : 도회왕(悼懷王)
- 장녀 : 장평공주 주평아(長平公主 朱平兒)
- 2녀 : 소인공주 주이미(昭仁公主 朱利美)
- 3녀 : 낙안공주 주내영(樂安公主 朱內寧)
- 후궁 : 신왕측비 원씨(信王側妃 袁氏), 다른 비빈들은 모두 시해되었으나 원귀비는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 후궁 : 전귀비(田貴妃)
- 후궁 : 왕순비(王順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