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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은 제이콥 W. 킵 교수가 1985년 10월에 쓴 논문으로 Soviet Military Doctrine from Lenin to Gorbachev,. 1915-1991에 수정해 기고한 것입니다. 어짜피 보는 사람도 없고 이해할 만할 사람도 없을 것 같지만 올려 봅니다.
가장 천박한 소련 측 군사 저작일지라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관과 국가관이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클라우제비츠는 몇몇 소련 학자들에게 '관념론자' 딱지가 붙어 비판받기도 했지만 소련 군사 이론가들의 신전에서는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그리스 철학자들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1 보로실로프 참모 대학의 전 총장인 I. E. 샤보로프 상장은 클라우제비츠의 방법론은 전장 연구에서 급진적인 것이었다고 서술했다.
"클라우제비츠는 사실 군사 이론에서 최초로 '영구적'이고 '불변적'인 것을 부정했으며 전쟁 현상에서 상호 연관성과 상호 보완성을 시험하려 힘썼고 전쟁의 규칙과 원칙을 자명하다고 가정하기 위해 행동하고 연구했다."2
유럽 군사학의 아버지격인 클라우제비츠
소련 저자들은 레닌이 클라우제비츠의 저작을 높이 평가한 것은 말하지만 레닌의 <전쟁론 Vom Krieg> 독해가 레닌의 전쟁관과 군사관의 기초를 이루게 했다는 건 말하기 꺼려 한다. 소련 저자들은 레닌이 언제, 어떻게 <전쟁론>을 읽었는지 주목하지 않거나 레닌이 클라우제비츠의 개념을 그의 당과 군사 정책에 적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는다.3 본고에서는 프로이센 장교와 러시아 혁명가 사이의 지적 유대를 조사하여 소련 군사과학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연관성을 더 잘 이해하게 할 것이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이념적 기반에는 구체제의 전문 군인들에 대한 강한 불신이 깔려 있었다. 개혁자들과 혁명가들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함께 군사 전문가들이 사악하고 독기 넘치는 군국주의의 원흉이라는 생각을 공유했다. 전문 군인들은 자본주의자들이 이윤을 탐하듯 승리의 영광을 탐하고 노동 계급에 고통밖에 안겨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은 노동 계급이 구성한 민병대가 국가 방위에 더 좋다고 생각했다. 1917년에 볼셰비키들은 그들의 반군사주의 감정으로 구 군대의 해체에 힘을 실었고 새 정부가 즉시 전쟁을 멈출 것을 약속했다.4
한편으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두 설립자가 남긴 방대한 군사학 저작들을 물려받았다. 피터 비거가 지적했듯이, 이 두 친구는 그들의 군사 저작에서 노동자들의 사단을 구상했다. 엥겔스는 스스로를 아마추어 군인으로 여겼으며 무기 체계 발달이 군사학에 끼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졌다. 마르크스는 국제 관계, 전쟁이 국내정책에 끼치는 영향, 그리고 전쟁 속에서의 혁명의 가능성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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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에서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엄청난 족적을 남긴 두 친구
마르크스가 죽은 후 엥겔스는 군사 분야의 저술을 계속했고 1887년에는 총력전이 자본주의 유럽에서 어떤 것인지에 대해 무서운 예측을 했다.
"이 전쟁은 전례 없는 크기의 전 지구적 전쟁이 될 것이다. 800만에서 1,000만에 이르는 군인들이 어느 한쪽을 파괴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유럽은 메뚜기 떼도 할 수 없었던 황폐를 맞을 것이다. 30년 전쟁으로 지속된 기근은 3~4년간 지속되었고 전 유럽에서 기아, 전염병, 참전 병사들의 야만화, 무역, 산업, 금융의 희망 없는 추락을 가져 왔다. 현재 이것들의 끝을 보는것은 불가능하고 투쟁에서 누가 살아남을지도 미지수다. 오직 하나만 확실하다.
지구적인 빈곤으로 노동 계급이 최후 승리를 거둘 환경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6
엥겔스는 이 위기 뒤에 무엇이 올 것인가는 얼마 말하지 않았다. 이 전쟁은 매우 거대하고 유럽 전체에 총체적 혁명이라는 위기를 가져와 전 유럽을 사회주의로 전환시킬 것이었다.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의 존재는 없어지고 프롤레타리아트 국가는 내외부의 위협이 없어짐에 따라 군대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었다.
엥겔스의 예측이 있은지 27년이 흐르자 유럽은 대전쟁에 휩싸였다. 그 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계승자들은 유럽의 많은 국가에서 영향력 있는 세력으로 성장햇다. 독일 사회민주당 같은 몇몇 정당은 혁명 활동을 꺼렸다.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1890년에 제2 인터내셔널을 조직했고 인터내셔널이 전쟁의 발발을 막고 노동자들의 연대를 강화시킬 것으로 기대했다.
1907년에 슈트트가르트에서 열린 제2 인터내셔널.
그러나 세계대전을 막는데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1914년 여름과 가을에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세르비아 사회당을 제외하고는 능동적이건 수동적이건 간에 자신들 정부들이 벌이는 전쟁을 지원했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주류는 그들이 차르 체제에서 탕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를 지키길 원했다. 이는 레닌을 역겹게 만들었다.
"노동 계급을 위해 전쟁을 막아야 하는 사회주의자들이
차리즘과 애국주의에 매몰되다니!!"
하지만 엥겔스의 예측은 그들 모두를 따라다녔다. 총력전은 사회주의 이념과 유럽 사회 양쪽을 수천문의 대포가 전쟁에서 인명과 대지를 찢어 버리듯 무너트리고 있었다.
군사 분야에 대한 레닌의 초기 저작을 보면, 당시 그의 군사관이 깊은 사색이나 연구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아 수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일어난 식민지 쟁탈전, 특히 러일전쟁에 대한 레닌의 관찰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전쟁 정책과 신무기가 자본주의 전쟁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저작들을 현저히 인용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레닌의 사색과 저작은 전쟁이 진행되며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과학적 법칙의 범례와 같은 이념은 제외나 변칙이 유형의 핵심을 위협할 대 해체를 시작한다. 토마스 쿤이 '일반 과학'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일반 이념 담론은 계속 어렵게 디었다. 레닌의 연구는 유럽의 사회주의자들과 공유한ㄴ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용어인 '실행'과 '목적 환경'은 이론의 핵심이었다. 1914년에 레닌은 다른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함게 마르크스주의의 틀과 이론적 가정을 통한 힘이 뷸규칙적으로 변하는 현실에 직면했다.7
역사적 유물론으로 세상을 분석하는 마르크스주의는 계급 투쟁을 강조함으로서 절망적인 현실에서 인류를 해방시킬 것을 약속했다. 헤겔은 그의 시대에 역사적 문잭에서 철학적인 고찰을 했고 인류의 지식, 행동, 그리고 희망으로 이성 사회를 확립할 수 있다는 명제를 만들었다. 마르크스는 그가 약속한 목표를 세우는 경향과 영구적인 힘을 약속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물질적 여건은 철학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부정되었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가 지적했듯이 마르크스가 연구한 노동자의 소외, 물신 숭배, 가치 증대, 공황 등은 이혼, 범죄, 인구 이동, 직업 순환 등 사회적 사실과 닮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으이 항목은 어떠한 경험론적 과학을 부정앴고 사회의 객관적인 현상을 묘사하고 조직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경험론적 과학이 단지 그들의 부정하는 걸 보여주는 이론의 겉보기라고 보았다. 옳바른 이론은 세계를 바꿔야 한다는 의식 이상이어야 했다.8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에 대한 11개의 테제에서 이렇게 말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가지로 '해석'해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시키는 일이다."9
마르크스의자들이 전유럽에 걸친 1914년의 여름과 가을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상황은 너무 번지르르 해서 현실이 이론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불규칙했다. 유럽의 사민주의자들은 국제주의와 평화주의를 선언하면서 전유럽 전쟁에 휘말렸다. 그들이 이론은 전쟁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제2 인터내셔널과 노동자 연대는 강대국들 사이의 대전쟁을 막으려 노력했다. 사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과학 혁명과도 연관이 있어서 제1차 세계 대전 발잘 10년 전부터 관찰자들은 자본주의의 예상 못한 발전에 주목했다. 이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핵심적인 범례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전은 이론에 큰 위기를 가져다 주었다.10
레닌의 경우 이 경우는 소비에트 군사과학에 있어서 깊이 통찰할 것이었지만 사실 별로 반갑지 않은 것이었다. 혁명에 직접 참여하는 레닌에게는 전 유럽 전쟁의 영향은 추상적인 고려의 대상이었다. 대조적으로 레닌은 세계를 바꾸는 데 참여하고 있었기에 전쟁의 과정과 결과를 꿰뚫어 볼 혜안을 필요로 했다. 다른 한편으로 레닌은 금융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구가들을 다룬 그의 사상의 절정을 이루는 책인 <제국주의론>을 소개했다.11
또다른 한편으로 레닌은 그의 사상을 재조직 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상 재조직은 전쟁을 예측하고 전쟁을 막는데 마르크스주의를 적용한 것이 명백한 오류였기 때문에 필수적이엇다. 지축을 뒤흔드는 세계의 대사건의 상황에서 레닌이 이 전쟁을 분석하고 그의 행동을 이끌 이론적 틀을 만들기 위해 철학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제일 인상적이다. 이 과정은 대부분의 소련 저작에서 찾을 수 있는 건조하고 역사적인 레닌의 관점에 대한 설명과 달리 소비에트 군사 과학의 발전이라는 우리의 관심사와 얽혀 있어 흥미를 돋군다. 이 과정은 레닌의 전 이론 재조직과 관계가 있다.12
사진 출처들:
http://www.sciencephoto.com/media/222777/enlarge
http://en.wikipedia.org/wiki/File:Marx_and_Engels.jpg
http://communiststudents.org.uk/?p=2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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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클라우제비츠옹의 이 구절이 생각나네요 .......
"전쟁은 정치적 수단과는 다른 수단으로 계속되는 정치에 불과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