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진종
[眞宗 ]
송(宋)나라의 세번쨰 황제로 그냥 겁쟁이였다. 재위기간은 24년이나 되었는데 본래 셋째 아들이라
황위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장남이 폐서인되고 둘째형은 요절하여 그가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사실 요나라가 침공해 온 것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진종은 겁을 먹고 개봉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신하들에게 떠밀리다시피 해서 친정을 했다. 송나라의 군사들은 황제가 온 것을
보고 크게 사기가 올랐고, 생각한 대로 침공이 진행되지 않던 요나라 군대는 기가 죽었다. 그런데
이런 유리한 상황에서도 진종은 요나라를 치기는 커녕 협상을 하라 명했다(전에는 땅 떼어주려고
했는데 역시 신하들의 극렬 반대에 부딪혀 공물을 주는 방식으로 바꿈).
요나라 진영에 사신으로 가게 된 사람은 조리용이라는 사람이었는데 떠나기 전 황제가 그를 불러
'세폐는 100만이 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명을 받고 가려는데 강경파의 우두머리였던 재상
구준이 그를 불러 '폐하의 훈령은 그렇지만 30만을 넘어서는 안 되오. 만약 넘을 경우는 내가 그대의
목을 칠 것이어'라며 엄포를 놓았다. 구준은 요나라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대신이었는데
황제가 그의 말을 듣지 않아 몹시 성난 상태였다.
이렇게 조리용은 무거운 마음으로 요 진영에 가게 되었다. 당시 송나라의 경제력은 백만 세폐라 해도
부담갈 정도가 아니었으나 당장 자신의 목이 성하지 않을 것이기에 협상 끝에 백은 10만냥에 비단
20만필을 매년 요에 주고 요나라는 송나라를 형님으로 모시기로 하는데 합의했다.
조리용이 들어오자 그 소식을 들은 환관(물론 진종이 보내서 온)이 세폐의 액수가 얼마인지 물었다.
그러나 조리용은 이런 중요 사항을 황제가 아닌 환관에게 먼저 말할 수 없다 하여 말하지 않고
뺨에 손가락 세 개만 대고 있었다. 이걸 본 환관은 행궁 - 황제의 임시 거처 - 으로 돌아가 진종에게
"아마 3백만 정도에 합의를 본 듯 하옵니다" 라고 보고를 하였다. 진종은 3백만이라는 소리를 듣자
"너무 많지 않은가?" 라고 했다가 "그래도 그 정도면 다행이지"라는 심약한 말을 했다.
당시 황제가 나와 있던 행궁은 개봉에 있는 황궁보다 당연히 작았기에 이 진종의 말은 조리용에게도
들렸다. 그래서 '너무 많다'라고 착각한 줄로 안 조리용은 진땀을 흘리며 보고를 했는데 '30만에
합의를 봤다'고 하자 진종은 기쁨에 겨워 조리용에게 큰 상을 내렸다.
굴욕적이긴 했지만 아무튼 이걸로 북쪽 국경은 안정되었다(나중에 서하도 이와 비슷한 조약을
맺어 차와 백은, 비단을 주는 대신 책봉을 받는 식으로 평화를 샀다).
다행히도 황제 본인이 사치가 심하다던가, 간신들을 총애하여 국정을 말아먹지는 않았다. 하지만
본인의 무덤에 쓸데없이 공을 많이 들였고 도교에 심취하는 등의 잘못된 일은 있었다. 후세 사가들은
진종과 다음 황제(진종의 여섯번째 아들) 인종의 치세 기간을 묶어 함평-경력치세라고 부르며
북송의 전성기로 구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