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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사진의 이해』 제8강 핵심 강의노트
바라보는 자, 기다리는 자, 놀라는 자 — 브레송·프랑크·모어의 사진적 태도
※ 이번 강의에서 다룬 세 글은 존 버거(John Berger)의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남자(A Man Begging in the Metro)」, 「마르틴 프랑크—『하루에서 다음 날로』에 붙이는 팩스 서문(Martine Franck: Fax Foreword to One Day to the Next)」, 「장 모르: 초상화를 위한 스케치(Jean Mohr: A Sketch for a Portrait)」이다.
첫 글은 『Photocopies』(1996), 두 번째 글은 마르틴 프랑크의 사진집 『One Day to the Next』(1998), 세 번째 글은 장 모르의 『At the Edge of the World』(1999)에 처음 실렸다.
세 글은 이후 제프 다이어(Geoff Dyer)가 편집한 『Understanding a Photograph』에 함께 수록되었다.
『At the Edge of the World』가 1999년에 처음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John Berger 공식 아카이브와 Reaktion Books에서 확인된다.
마르틴 프랑크가 브레송의 배우자이자 30년 이상 매그넘 회원으로 활동한 사진가였다는 사실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재단과 Thames & Hudson에서 확인된다.
[1] 세 편의 글을 함께 읽어야 하는 이유
1. 세 글은 서로 다른 사진가의 촬영 태도를 다룬다.
(1)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세계를 끊임없이 바라보다가 사건과 형태가 일치하는 순간에 반응하는 사진가이다.
(2) 마르틴 프랑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다음 순간을 기다리며 경계를 건너는 사진가이다.
(3) 장 모르는 무엇을 미리 찾거나 증명하지 않고 세계가 보여주는 우연한 장면에 놀라는 사진가이다.
“바라보는 자는 브레송, 기다리는 자는 프랑크, 놀라는 자는 장 모르, 뭐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00:10:31)
2. 세 글은 사진가 개인의 성격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세 사진가의 서로 다른 태도를 통하여 사진의 시간성, 우연성, 비연출성, 타자와의 거리, 사진가의 자기망각, 관찰과 놀라움, 사진과 글의 관계를 함께 탐구한다. 따라서 세 글은 하나의 넓은 사진론으로 연결된다.
“이 세 사람의 작가를 우리가 보면서 사진가들이 촬영할 때 어떤 태도와 작업 행위 과정 속에서 갖게 되는 심리적인 상태, 이런 것들을 분석한 거예요.”
“따라서 이 세 편의 글을 함께 묶어서 보게 되면 사진이라고 하는 매체의 본질적 특징들이 드러나는데, 넓은 의미에서의 사진미학 이론을 펼쳐놓은 것이다, 이렇게 보시면 될 것 같아요.”(00:04:35)
3. 강의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은 사진이 세계를 소유하는 행위인지, 아니면 세계를 맞이하는 행위인지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세계를 소유하는 행위인가, 아니면 세계가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도록 자신을 열어놓는 행위인가?”(00:11:21)
버거가 강조하는 사진가는 세계를 지배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현실에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다. 세계가 스스로 드러내는 것을 보고, 기다리고, 받아들이는 사람에 가깝다.
“이 세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진가가 세계를 지배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대상에 강요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에요.”(00:10:31)
[2] 세 글은 형식도 서로 다르다
1.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남자」는 인터뷰에 기초하지만 소설적인 서사 구조를 가진다.
브레송과 버거의 대화를 그대로 기록한 인터뷰가 아니라, 방문 장면·대화·기억·연상·지하철에서의 체험을 결합한 문학적 에세이이다.
“이 에세이는 브레송에게 찾아가서 인터뷰 형식을 취하고 있어요. 인터뷰 글인데, 글의 전개 양식을 보면 인터뷰 자료를 가져온 소설적 구조를 취하고 있어요. 물론 소설처럼 허구적인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에요.”(00:05:27)
2. 마르틴 프랑크에 관한 글은 팩스로 주고받은 서신을 시간순으로 배열한 형식이다.
해석을 완성된 비평문으로 정리하기보다 질문과 답변이 엇갈리는 실제 대화를 그대로 노출한다. 두 사람이 서로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사진의 의미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남긴다.
“마르틴 프랑크는 팩스로 서신을 주고받은 글을 가감 없이 그대로 날짜 순서에 따라, 시간순에 따라서 놓은 거죠. 굉장히 드라이한 어떤 자료 같은 거예요.”(00:06:14)
“서로 엇갈리고 있는 지점들이 있어요. 말이 항상 자기 의도와 뜻대로 잘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러면서도 우리는 여기서 사진이라는 매체를 대하는 사진가의 태도를 만날 수 있잖아요.”(01:45:00)
3. 「장 모르: 초상화를 위한 스케치」는 오랜 우정에서 나온 친밀한 초상이다.
버거는 장 모르에게 직접 질문하기보다 그의 얼굴을 그리면서 축적된 기억과 감정을 끌어낸다. 따라서 이 글은 일반적인 작가 소개나 작품 해설이 아니라 글로 그린 초상화에 가깝다.
“장 모르와의 오랜 친분 간에 자기만이 알고 있는 것, 충분한 대화를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을 초상화로 그리면서 떠오르는 감정과 오랜 세월 켜켜이 쌓여 있었던 장 모르에 대한 내면의 생각과 시선을 끌어내는 거죠.”(00:09:06)
[3]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 끊임없이 바라보는 자
1. 브레송의 눈은 단순히 사물을 보는 눈이 아니라 관찰에 중독된 눈이다.
버거는 브레송의 눈을 유리나 커튼이 없는 창에 비유한다. 이는 사진가의 시선이 외부 세계를 향해 완전히 열려 있음을 뜻한다.
“그의 눈은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 순수해서라기보다는 관찰에 중독되어서 그렇다. 눈이 영혼으로 이어지는 창이라면 그의 눈에는 유리도 커튼도 없다.”(00:21:08)
2. 브레송에게 사진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는 ‘겨냥하기’이다.
이때 겨냥은 대상을 공격하거나 소유한다는 뜻만은 아니다. 세계에 집중하고, 장면이 스스로 질서를 드러내는 순간을 기다리는 신체적 태도이다.
“사진에서 제가 흥미를 느끼는 건 겨눈다는 것뿐입니다. 겨냥하는 거죠. 저격병처럼요.”(00:24:05)
[4] 궁술과 자기망각
1. 브레송은 『활쏘기의 선(Zen in the Art of Archery)』에서 영향을 받았다.
강의에서는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가 1943년에 관련 글을 브레송에게 주었다고 설명한다. 정확히는 독일 철학자 오이겐 헤리겔(Eugen Herrigel)의 선불교적 궁술론과 연결되는 이야기이다.
“불교 선종에서 궁술에 대해 정리해 놓은 글이 있다는 거 아십니까? 조르주 브라크가 1943년에 저한테 그걸 줬죠.”(00:24:05)
2. 궁술의 핵심은 계산이 아니라 열린 상태와 자기망각이다.
궁수가 과녁을 억지로 맞히려고 할수록 몸은 경직된다. 사진가도 마찬가지로 구도를 머릿속에서 계산하는 동안 현실의 순간은 지나가 버린다.
“그건 어떤 상태라고 할까요? 열려 있음에 대한 문제. 그러니까 자신을 잊어버리는 상태입니다.”(00:24:59)
3. 자기망각은 훈련이 없는 무작위 촬영이 아니다.
자신을 잊는다는 것은 아무 방향에나 카메라를 들이대는 일이 아니다. 충분한 훈련을 통하여 구도와 형태가 몸에 내면화된 뒤, 촬영 순간에는 의식적인 계산을 내려놓는 상태이다.
“그러니까 아무 데나 겨냥하시는 건 아니겠죠? 아니죠. 기하학이 있습니다. 위치를 1밀리미터만 바꿔도 배열은 달라지죠.”(00:24:59)
[5] 결정적 순간의 정확한 의미
1. 결정적 순간은 단순히 극적인 사건의 절정이 아니다.
사건 전체에서 무엇이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었는지는 대개 사건이 끝난 뒤에야 판단할 수 있다. 따라서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을 스포츠나 사고의 극적인 찰나와 동일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냥 일반화해서 인생의 어떤 결정적 순간, 스포츠 경기에서 사건의 결정적인 순간, 이런 거 아니에요.”
“사건이 발발하고 끝난 다음 뒤돌아보았을 때 그 사건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그때가 바로 결정적이었던 것 같아’라고 사후 판단한 것이잖아요.”(00:34:14)
2.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은 세 요소가 일치하는 순간이다.
①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적 순간
② 사진가에게 내면화된 기하학적 구성
③ 그 둘의 일치를 알아차리고 셔터를 누르는 직감적 반응
“결정적 순간은 사실 두 가지가 만나는 순간인 거죠. 현실의 사건적 순간과 회화적으로 훈련된 기하학적 시선이 결합되고, 그것을 선택하는 사진가의 감정, 육감, 직감이 삼위일체가 되는 거예요.”(00:33:20)
3. 결정적 순간은 사진가가 연출하여 만드는 순간이 아니다.
이미 현실에 존재하는 관계와 형태가 한순간 질서를 이루었을 때, 사진가가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은 현실을 연출해서 만드는 순간이 아니라 연출되지 않은 현실 속에서 사건과 기하학이 한순간에 맞아떨어진 것을 발견하는 순간이에요.”(00:44:32)
[6] 기하학, 구도와 훈련
1. 브레송에게 기하학은 장식적인 미학이 아니라 현실의 구조를 알아보는 방법이다.
그는 수학자나 물리학자가 어떤 이론을 ‘우아하다’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의미에서 기하학을 말한다. 구조가 명료할수록 장면의 의미도 강하게 드러난다고 본다.
“선생님이 기하학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미학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수학자나 물리학자들이 우아함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접근이 우아하면 진실한 것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겁니다.”(00:25:56)
2. 기하학은 촬영할 때 새로 계산하는 공식이 아니라 오랜 훈련으로 내면화된 감각이다.
브레송은 입체파 화가 앙드레 로트에게 미술을 배우고 회화·드로잉·미술사 연구를 통해 화면의 각도, 비례, 면과 선의 관계를 익혔다.
“열아홉 살이 된 앙리는 입체파의 대가 앙드레 로트에게 미술을 배웠다. 그리고 거기에서 앵글에 대해, 벽이나 사물이 기울어지는 방식에 대해 배웠다.”(00:53:12)
“오랜 훈련을 통해서 기하학과 구도가 눈에 내면화되면 사진가는 계산하지 않고도 현실 속에서 순간적으로 나타난 질서를 알아볼 수가 있어요.”(00:43:33)
3. 강의에서 황금비율은 브레송의 고전적·회화적 구도를 설명하는 사례로 제시된다.
황금비율은 대략 1:1.618이다. 다만 브레송의 모든 사진이 황금비율이라는 하나의 공식으로 구성되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의 기하학은 고정된 황금비 공식보다는 선, 면, 리듬, 균형, 위치 관계가 순간적으로 조직되는 방식에 더 가깝다.
“황금비율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규칙, 질서예요. 그런데 그것이 인위적인 게 아니라 자연이고 우주의 법칙이라고까지 밀고 가는 사고가 있다는 거예요.”(00:29:50)
“브레송은 고전적인 회화의 구도 법칙을 내면화한 시선을 가지고 사진을 찍는다는 것, 이것이 결정적 순간이라는 거죠.”(00:29:50)
4. 브레송과 세잔의 ‘생각하지 않음’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브레송은 촬영 순간의 계산을 거부하지만 이미 내면화된 기하학을 통해 순간을 붙잡는다. 반면 세잔(Paul Cézanne)의 반복적 회화는 변화하는 지각을 고정된 고전적 비례로 환원하지 않으려는 시도와 관련된다.
“세잔은 황금비례 법칙에 맞춰서 그림을 그리지 않아요. 포착되지 않는, 그려질 수 없는,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을 계속 그리는 거예요.”(00:31:41)
“여기서도 브레송이 계산하지 않는다고 해요. 사진을 찍는다는 건 대상을 내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거죠.”(00:32:20)
[7] 비연출과 노 트리밍
1. 브레송이 연출을 꺼린 이유는 현실의 질서를 사진가가 대신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하학은 사진가가 만들어 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실 속에 존재하는 질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장면을 꾸미는 일이 아니에요. 사진가가 그 질서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서는 것이죠.”(00:42:36)
“연출은 현실에 사진가의 구도를 강요하지만 카르티에 브레송이 원하는 것은 현실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관계와 형태를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00:43:33)
2. 촬영 후 크로핑을 하지 않은 태도도 이 미학과 연결된다.
브레송은 완성된 프레임을 촬영 순간에 결정하려 했으며, 인화할 때 네거티브의 가장자리까지 보여주는 검은 테두리를 남겼다.
“그 부분을 찍고 난 다음에도 트리밍을 하지 않죠. 노 트리밍이라고 하는 검은 선으로 둘러쳐져 있는 식으로 프린트를 하잖아요.”(00:44:32)
다만 브레송의 사진을 ‘완전히 객관적인 비연출 사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위치 선택, 기다림, 프레이밍, 셔터 순간, 사진 선택은 모두 사진가의 적극적인 판단이다. 그의 비연출은 판단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의 인물과 사건을 직접 지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8] 사진과 드로잉의 서로 다른 시간
1. 브레송에게 사진은 즉각적인 반응이고 드로잉은 지속되는 명상이다.
“사진은 방아쇠를 당기는 겁니다. 정확한 순간에 손가락에 힘을 줘 누르는 것이죠.”(00:35:54)
“드로잉은 명상의 한 형태죠. 드로잉에서는 선을 더하고 또 더합니다. 조금씩 더하지만 전체의 모습이 어떻게 될지는 절대 알 수 없죠.”(00:40:48)
2. 드로잉은 부분을 계속 쌓아가며 전체를 향해 가지만, 사진은 전체가 한순간 나타났다고 느낄 때 반응한다.
“드로잉은 언제나 전체를 향한 끝나지 않는 여정입니다. 하지만 사진을 찍는 건 반대입니다. 전체가 보이는 순간이 닥쳤을 때 그걸 느끼는 거죠. 그 부분들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말입니다.”(00:40:48)
3. 그 순간을 알려주는 것은 브레송이 말한 ‘제3의 눈’이다.
이는 초자연적 능력이라기보다 오랫동안 훈련된 시각과 신체가 의식적 계산보다 먼저 반응하는 직관을 뜻한다.
“이 느낌은 선생님의 감각들이 고도로 예민해져 있을 때, 이를테면 육감적으로 느끼시는 걸까요? 제3의 눈이죠.”(00:41:42)
[9] 모성적 시선과 사랑
1. 버거는 브레송의 손글씨와 사진에서 ‘모성적인 것’을 발견한다.
버거는 브레송의 크고 열려 있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손글씨를 보면서 그의 사진적 시선도 모성적일 수 있다고 연상한다.
“나는 그의 손글씨를 생각하고 있었다. 크고 읽기 쉽고 열려 있고 모난 데가 없는, 계속 이어지는 놀라운 글씨체.”(00:42:36)
“그의 손글씨가 놀라운 것은 모성적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모성적인 것은 없을 것 같다.”(00:45:32)
2. 모성적 시선은 대상을 감상적으로 미화하는 사랑이 아니다.
매춘인, 난민, 노동자, 술 취한 사람, 판사, 어린이, 동물 등 서로 다른 존재를 환상 없이 보면서도 무관심하지 않게 바라보는 태도이다.
“중절모를 쓴 남자, 도살장의 일꾼들, 연인, 주정뱅이, 난민, 매춘부, 판사, 소풍 나온 사람, 동물들, 그리고 모든 대륙의 아이들, 무엇보다 아이들 사진에서 확인해 봐야겠다.”(00:46:23)
“오직 어머니만이 그렇게 감상적이지 않고 아무런 환상이 없는 사랑을 지닐 수 있다고 나는 결론짓는다.”(00:46:23)
3. 결정적 순간에 대한 직감도 이러한 사랑처럼 육체적이고 즉각적인 것으로 해석된다.
“어쩌면 결정적 순간에 대한 그의 직감이라는 것도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직감처럼 육체적이고 즉각적인 것일지 모른다.”(00:46:23)
4. 그러나 ‘모성적’이라는 해석은 브레송이 직접 제시한 이론이 아니라 버거의 비평적·문학적 해석이다.
브레송의 사진 전체를 설명하는 객관적 공식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비연출, 관심, 공감, 직감이 결합된 시선을 설명하는 버거의 은유로 이해해야 한다.
“맞는지 안 맞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데 왜 존 버거든 바르트든 이런 사랑의 감정과 시선을 가지고 사진을 얘기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셔야 돼요.”(00:49:20)
[10] 아베 피에르의 초상과 바르트의 어머니
1. 버거는 브레송이 촬영한 아베 피에르의 초상을 그의 어머니가 보았을 모습과 연결한다.
“만약 피에르 신부의 어머니가 오늘날 그를 본다면 바로 이 사진에 찍힌 모습으로 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00:56:02)
이는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Camera Lucida)』에서 어머니의 시선과 사랑이 갖는 특별한 의미와 연결된다. 타인은 한 사람을 사회적 이미지나 유형으로 보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그를 고정된 이미지로 환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진가들이나 세상 다른 사람들은 나를 하나의 이미지로 본다. 그런데 어머니는 나를 그렇게 보지 않을 거라는 거예요. 사랑의 모성애적 감정으로 보는 시선이죠.”(00:48:14)
[11] 사진의 지시성 — ‘그것이-존재했음’
1. 사진은 문자언어처럼 자유롭게 가정법이나 부정법을 사용할 수 없다.
사진은 의미에 관해서는 거짓말하거나 오해를 만들 수 있지만, 촬영된 대상이 카메라 앞에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기 어렵다. 이것이 바르트가 말한 사진의 노에마, 즉 ‘그것이-존재했음(ça-a-été, that-has-been)’이다.
“문자로는 ‘피에르 신부가 있었을지도 몰라’라고 가정법을 말할 수 있지만 사진은 그렇게 말할 수 없잖아요. 찍혀 있는 이 대상이 반드시 그때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는 점에서 확연히 다르죠.”(00:56:53)
강의에서 언급된 ‘사진은 부정법이 없는 동사원형 같다’는 표현은 사진의 문자적 문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 가정이나 가능성보다 과거의 현존을 직접 지시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12] 브레송의 시선이 버거에게 내면화되다
1. 인터뷰를 마친 버거는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남자와 장애가 있는 아내를 본다.
남자는 아내와 함께 살기 위해 구걸하고, 승객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말한다.
“장애가 있는 여자를 사랑하는 게 어떤 건지 여러분은 모르실 겁니다. 저는 늘 아내를 사랑합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이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는 것만큼 많이 사랑합니다.”(00:58:49)
2. 버거는 무의식적으로 지하철 문 쪽을 바라보며 브레송이 라이카를 들고 서 있을 것 같은 환시를 경험한다.
“그 풍경을 지켜보던 중 어느 순간 나는 갑자기 문 쪽을 힐끗 바라본다. 그가 라이카를 든 채 서 있을 것만 같다. 그 동작은 거의 순간적으로 아무런 생각 없이 이루어졌다.”(00:58:49)
3. 이는 브레송의 시선이 버거에게 일시적으로 내면화되었다는 뜻이다.
“카르티에 브레송이 바라보는 방식이 버거에게 일시적으로 내면화되었다, 이런 뜻으로 말할 수 있겠어요.”(00:18:32)
브레송을 만난 뒤 버거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보게 된다. 사진은 결과물만이 아니라 세계를 지각하는 습관 자체를 변화시킨다.
“당신이 본 것은 늘 당신과 함께 있어요.”(00:19:33)
[13] 사진은 우리의 세계 지각을 바꾼다
1. 사진의 등장은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바꾸었다.
강의는 이를 벤야민의 ‘시각적 무의식’, 손택의 사진화된 세계, 기 드보르(Guy Debord)의 『스펙터클의 사회』와 연결한다.
“사진이 등장하면서 우리의 감각과 지각이 바뀌었다. 어떤 식으로 사진적으로 세상을 본다는 거죠.”(00:19:33)
“손택은 아예 이 세계가 사진으로 뒤바뀌었다, 역전되었다고 얘기하잖아요.”(00:19:33)
2. 벤야민의 ‘시각적 무의식’은 사진이 현실에서 맨눈으로 알아차리지 못한 움직임과 세부를 정지·확대하여 드러낸다는 개념이다.
“현실에서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을 사진이 정지시켜서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볼 수 있게 하고, ‘내가 현실에서 보지 못했던 것을 이것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구나’라고 발견하게 되는 것, 이런 것이죠.”(01:32:17)
3. 동시대 사진가는 이미 사진적으로 조직된 세계 안에서 작업한다.
따라서 사진을 단지 아름다운 구도를 만드는 기술로 이해하지 않고, 사진이 세계를 어떻게 이미지로 바꾸고 인간의 감각을 조직하는지 질문해야 한다.
[14] 마르틴 프랑크 — 아직 오지 않은 순간을 기다리는 자
1. 프랑크의 사진적 시간은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과 미묘하게 다르다.
브레송이 지금 눈앞에서 완성된 질서를 발견한다면 프랑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다음 행동, 다음 상태, 다음 세계를 기다린다.
“프랑크의 사진은 이미 어떤 완성된 순간을 붙잡는다기보다, 아직 오지 않은 다음의 어떤 순간을 향해 있다고 버거가 얘기해요.”(01:05:46)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이 지금 여기에 주어진 질서를 발견하는 순간이라고 한다면, 프랑크의 사진은 앞으로 무엇인가 일어날 것이라는 가능성을 기다리는 순간에 가깝다는 거예요.”(01:06:25)
2. 버거는 프랑크의 사진에서 ‘기대’와 ‘도약’을 반복해서 발견한다.
“당신의 사진들 중 아주 많은 작품들이 기대 혹은 앞으로 도약하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죠.”(01:14:49)
[15] 프랑크 사진의 ‘근접 미래’
1. 사진은 지나간 순간을 기록하지만 동시에 그다음에 일어날 일을 상상하게 한다.
프랑크의 사진 속 인물들은 이미 행동을 끝낸 사람이 아니라 곧 뛰어내리고, 무대에 올라가고, 장난을 치고, 새로운 존재가 되려는 사람들이다.
“바로 근접 미래죠.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죠? 매우 자주 그 도약이 보입니다.”(01:17:24)
2. 구체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① 담장에서 뛰어내리는 토리섬의 아이들
② 파리의 곡예사
③ 오페라 무대에 오르기를 기다리는 견습 무용수
④ 현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티베트의 어린 승려
⑤ 사진가에게 장난을 거는 노인
⑥ 갓난아이를 바라보는 할머니
⑦ 인형을 든 토리섬의 여자아이
“담장에서 뛰어내리는 도네갈의 아이들이나 파리의 곡예사처럼 물리적인 도약도 있고, 오페라 무대에 올라가 춤추기를 기다리는 견습 무용수나 현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티베트 승려처럼 정신적인 도약도 있죠.”(01:17:24)
3. 프랑크 사진의 미래성은 바르트가 루이스 페인(Lewis Payne)의 초상에서 설명한 미래완료와 연결된다.
알렉산더 가드너(Alexander Gardner)가 촬영한 루이스 페인은 사진 속에서는 아직 살아 있지만, 관객은 그가 이후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사진은 ‘그는 죽을 것이다’와 ‘그는 이미 죽었다’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 청년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보니까, 이 사진은 과거지만 그의 미래도 나는 보게 되는 거죠. 따라서 미래완료 시제를 미리 보는 사진이라고 바르트가 말하잖아요.”(01:15:44)
프랑크의 사진은 죽음의 미래완료만이 아니라 다음 행동이 열려 있는 근접 미래의 시간성을 강조한다.
[16] 이야기와 사진은 끝에서 시작된다
1. 버거는 프랑크에게 “끝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묻는다.
사건은 진행 중일 때보다 끝난 뒤 하나의 이야기로 규정된다. 사진 속 순간도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을 때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이야기가 이야기가 되는 건 끝이 알려졌을 때죠.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는 추방당한 후에야 하나의 이야기가 됩니다. 신데렐라는 유리구두를 잃어버려야만 했고요.”(01:07:26)
2. 보도사진의 ‘결정적 의미’도 대개 사후적으로 형성된다.
“사진 속에는 순간이 담겨 있지만 그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사건이 모두 끝나고 정의된 상태에서야 하나의 의미 있는 이미지로 간주되는 거예요.”(01:08:15)
3. 이 논리는 사건이 끝난 뒤 남은 흔적을 촬영하는 ‘애프터매스 사진(aftermath photography)’과도 연결된다.
“현대사진의 다큐멘터리 사진들은 애프터매스라고 해서 전쟁이나 자연재난이 일어난 이후에 가서 사진을 찍고, 그 흔적을 통해 사건의 내막을 보여주는 형식을 취해요.”(01:08:15)
다만 사건 진행 중의 사진에 이야기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사진 한 장만으로는 이야기의 전후 맥락이 확정되지 않으며, 캡션·역사적 지식·다른 사진·관객의 기억이 결합될 때 특정한 이야기가 형성된다는 뜻이다.
[17] 사진은 진실도 거짓도 아닌 주관적인 한순간이다
1. 프랑크에게 카메라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해주는 이유이자 보호막이었다.
“저는 끔찍할 정도로 수줍음이 많았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어려웠죠. 손에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제가 할 일이 있었던 거예요. 어딘가에 있어야 할 이유가 되었어요.”(01:22:13)
2. 카메라는 프랑크를 직접 행동하는 사람보다 증인의 위치에 서게 했다.
“직접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증인이 되는 거였죠.”(01:22:13)
3. 그러나 증인이라는 위치가 객관적 진실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사진이 꼭 거짓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늘 진실인 것도 아니에요. 그저 한순간의 주관적인 인상이라고 해야겠죠.”(01:22:13)
4. 프랑크가 좋아하는 것은 예상한 장면의 성취가 아니라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이다.
“사진에서 제가 특히 좋아하는 건 바로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이에요.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예상치 못했던 것을 포착할 수 있게 준비하고 있어야 하죠.”(01:22:13)
[18] 수줍음, 두려움과 속도
1. 버거는 프랑크의 수줍음이 호기심과 모험심의 반대가 아니라고 본다.
“수줍음은 심약함과는 다르다고 해야겠죠. 왜냐하면 수줍음에는 호기심이라는 요소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대담함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모순이죠. 수줍음이 많은 사람들이 모험을 즐긴다는 거예요.”(01:25:01)
2. 사진가의 움직임은 두려움을 제거하지 않지만 두려움을 통과하게 한다.
“아마 두려움은 평생 극복할 수 없겠죠. 하지만 두려움에 대한 해독제는 사람들의 상상과 달리 속도입니다.”(01:25:58)
3. 프랑크는 바다와 파도를 두려워하면서도 조금씩 가까이 다가간다.
이 경험은 사진가가 위험한 경계 가까이 접근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신체와 한계를 의식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조금씩 파도에 가까이 다가가기는 했지만, 갑자기 파도가 닥치거나 바위에서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계속 들더군요.”(01:20:15)
“렌즈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날 수 있죠. 그 짧은 시간 동안 프레임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데다가 정확한 프레임을 잡기 위해 앞뒤로 좌우로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니까요.”(01:21:14)
[19] 프랑크의 사진가론 — 카메라는 하나의 경계이다
1. 프랑크는 카메라를 대상과 사진가 사이의 경계이자 장벽으로 본다.
“사진기는 그 자체가 하나의 경계입니다. 대상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끊임없이 허물어야 하는 일종의 장벽이죠.”(01:43:01)
2. 사진가는 카메라 뒤에 안전하게 머물 수 없다.
타인에게 다가가려면 자신의 익숙한 세계와 사회적 거리, 수줍음, 두려움의 경계를 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진가는 한계를 넘는 거예요. 어떤 대담함, 넘어가는 느낌, 무례해진 느낌,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일 수도 있고요.”(01:43:01)
3. 경계를 넘는 일은 자기망각과 타자 수용을 필요로 한다.
“건너편으로 넘어가는 일이라면 순간적으로 자신을 잊어버렸을 때, 다른 이들을 받아들일 때에만 거기에 있을 수 있을 거예요.”(01:43:01)
4. 사진가는 서로 다른 두 세계에 동시에 속한다.
사진가는 관찰자이면서 참여자이고, 바깥에 있으면서 안으로 들어가며, 자신이면서 동시에 타자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따라서 사진가로서 저는 서로 다른 두 세상에 동시에 있는 셈이죠. 사진을 찍을 때의 제 느낌에 대해 확실히 할 수 있는 말은 그 말밖에 없어요. 나머지는 무의식의 영역입니다.”(01:43:01)
[20] ‘건너편에서는 똑같지 않다’
1. 버거는 프랑크 사진의 핵심을 경계를 건너는 순간에서 발견한다.
① 현재와 미래의 경계
② 나와 타자의 경계
③ 안과 밖의 경계
④ 이해와 미지의 경계
⑤ 육지와 바다의 경계
⑥ 익숙한 세계와 낯선 세계의 경계
“당신의 사진을 한 장 한 장 보면서 이 경계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어떤 순간의 경계, 경험의 경계, 이해력의 경계, 대륙의 경계, 모든 사진에서 이런 건너감 혹은 막 건너가려는 상태가 보입니다.”(01:41:08)
2. 경계를 건너면 대상뿐 아니라 사진가 자신도 이전과 같지 않다.
“나는 당신의 작품집을 보며 가지는 친밀감을 이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건너편에선 똑같지 않다.”(01:42:06)
[21] 위반과 사진의 정치성
1. 버거는 경계를 넘는 행위를 ‘위반(transgression)’이라고 부른다.
위반은 단순한 무례나 법규 위반이 아니라 기존 질서가 타자에게 부여한 거리, 범주와 금기를 넘어서는 행위이다.
“위반, 이게 제가 계속 찾아 헤매던 단어예요. 이 단어의 첫 번째 의미, 법적인 한계를 넘는다는 뜻이 중요합니다.”(01:44:01)
2. 좋은 사진은 기존 세계질서를 전복할 가능성을 가진다.
“당신과 내가 존경하는 사진들 대부분에는 어떤 전복적인 경향이 있죠.”(01:44:01)
3. 그러나 사진은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를 유지하는 데도 이용된다.
따라서 사진이 본래부터 해방적이거나 전복적인 것은 아니다. 광고, 홍보, 감시, 소비 체계는 사진을 기존 질서에 순응시키는 데 이용한다.
“통탄스럽게도 오늘날 전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질서에 영합하기 위해 일주일에 수백만 장의 사진들이 활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 질서란 현 단계에서는 자유시장과 신자유주의입니다.”(01:44:01)
4. ‘위반’에는 지질학적 의미도 있다.
서로 다른 지층이 바다의 움직임 등에 의해 겹쳐지는 것처럼, 사진은 분리되어 있던 시간·공간·사람·기억을 하나의 표면 위에 겹쳐 놓는다.
“위반이라는 단어에는 또 다른 지질학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의 지층이, 특히 바다의 움직임에 의해 다른 지층에 어색하게 겹쳐지는 현상을 말하죠.”(01:44:01)
[22] 행복과 사진의 시간
1. 버거는 불행은 지속되는 상태가 될 수 있지만 행복은 순간이라고 말한다.
“나는 행복이 어떤 상태일 거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불행은 상태일 수 있지만 행복은 그 본성상 하나의 순간이죠.”(01:36:09)
2. 행복은 지속적인 서사보다 짧고 밀도 높은 사진의 시간에 가깝다.
“불행이 종종 장편소설과 비슷하다면 행복은 사진과 훨씬 더 비슷합니다.”(01:36:09)
3. 행복의 순간은 놀라움과 관계된다.
“그리고 그건 바로 당신이 말한 놀라움이라는 감각과 밀접한 관련이 있죠.”(01:36:09)
사진은 행복을 영원히 소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잠깐 찾아온 놀라움과 충만함을 지나간 뒤에도 다시 만나게 하는 매체이다.
[23] 연속 촬영과 사진 선택
1. 한 장면을 여러 컷 촬영하는 것과 ‘결정적 한 장’을 고르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프랑크는 같은 장면을 여러 번 촬영했고 그중 한 장을 선택했다. 결정적 순간은 반드시 단 한 번만 셔터를 눌렀다는 뜻이 아니라, 촬영과 편집 과정에서 어느 프레임이 장면의 관계와 긴장을 가장 잘 드러내는지 판단하는 문제이다.
“사진가는 한 장면을 많이 찍어요. 그러다가 여기 하나를 딱 선택한 것이죠.”(01:27:06)
2. 선택된 사진에는 브레송적 구성과 프랑크적 기대가 함께 존재할 수 있다.
“시각적 구성 요소가 나름 균형과 조화가 잘 되어 있으면서 우리의 시선이 전체 화면 안에서 비례미를 느끼면서 만나게 되는 거예요. 브레송적이에요. 그것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죠, 마르틴 프랑크도.”(01:29:37)
그러므로 ‘브레송은 구도, 프랑크는 기대’라고 완전히 분리해서는 안 된다. 버거가 서로 다른 특징을 강조했을 뿐, 실제 사진에는 구성·우연·기대·직감이 중첩되어 있다.
[24] 장 모르 — 세계가 보여주는 것에 놀라는 자
1. 장 모르의 사진은 미리 정해놓은 주제를 현실에서 찾아내는 방식이 아니다.
“장 모르는 미리 정해놓은 주제를 세계에서 찾아내서 사진으로 증명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세계가 자신에게 무엇을 보여줄지 알지 못한 채 끊임없이 관찰하는 사람이에요.”(01:48:20)
2. 버거는 사진가들을 그들이 세계에서 찾는 가치에 따라 비교한다.
① 유진 스미스(W. Eugene Smith)는 피에타와 같은 연민과 희생의 이미지를 찾는다.
② 에드워드 웨스턴(Edward Weston)은 조화를 찾는다.
③ 워커 에번스(Walker Evans)는 견딤과 지속의 가치를 찾는다.
④ 장 모르는 아무것도 미리 찾지 않는다.
“유진 스미스는 피에타와 같은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고, 에드워드 웨스턴은 조화를, 워커 에번스는 견딤의 가치를 찾는다면, 버거가 보기에 장 모르는 아무것도 찾지 않는다.”(01:48:20)
“장 모르는 내 생각에는 아무것도 찾지 않는다. 그가 찾는 것은 그가 우연히 마주친 것들이다.”(02:06:11)
3. ‘아무것도 찾지 않는다’는 것은 무관심하거나 아무 생각 없이 촬영한다는 뜻이 아니다.
특정한 결론을 현실에 강요하지 않고, 예상하지 못한 독특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격식 없음은 무관심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것은 놀라운 일을 맞이하기 위한 단순한 준비 단계일 뿐이다.”(02:07:09)
[25] 목적 없는 사진
1. 장 모르는 국제기구의 의뢰를 수행하면서도 의뢰 목적에 속하지 않는 사진들을 계속 촬영했다.
“출장을 보낸 기관에서 요구했던 기록 사진들 외에도 자신만의 사진을 수만 장이나 찍을 수 있었다. 그런 사진들은 목적이 없는 사진들이었다.”(02:11:51)
2. 목적 없는 사진은 의미 없는 사진이 아니다.
이미 머릿속에 세워둔 명제를 증명하거나 설명하기 위해 촬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미 머리에 담고 있던 어떤 생각을 증명하거나 예시하기 위해 찍은 사진이 아니라는 의미다.”(02:12:49)
3. 그 사진들은 준비·격식·소속 없이 마주친 순간에 대한 개인적인 기록이다.
“그 사진들은 준비도, 격식도, 소속도 없이 그를 놀라게 한 순간들에 대한 개인적인 기록들이다.”(02:12:49)
4. 장 모르의 사진은 눈앞의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그 현실을 낯설게 보게 한다.
“장의 작품은 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곳을 보여준다. 보는 이에게 익숙한 대상을 찍은 경우에도 그 이미지는 여전히 어떤 놀라움을 전해준다.”(02:12:49)
[26] 친밀함 속의 절대적인 놀라움
1. 버거는 잘 아는 사람의 초상을 그리기 위해서는 그에 관한 기존 지식을 잊어야 한다고 말한다.
친밀함이 강할수록 우리는 상대를 이미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 초상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을 다시 낯설게 볼 때 가능하다.
“잘 아는 누군가의 초상화를 그리려면 눈앞에 있는 대상에서 놀라움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잊고 또 잊어야 한다.”(01:56:58)
2. 살아 있는 초상의 중심에는 친밀함과 놀라움이 동시에 존재한다.
“살아 있는 초상화의 핵심에는 모두 친밀함에 둘러싸인 절대적인 놀라움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01:56:58)
3. 버거는 장 모르의 얼굴에서 ‘개와 소년’을 발견한다.
개와 소년은 순진함이라기보다 세계를 늘 새롭게 만나는 감각, 낮은 자세, 호기심, 즉각적인 반응을 상징한다.
“그 안에 개 한 마리와 소년이 보이고 그 둘은 나와 비슷한 또래인 한 남자의 얼굴 안에 담겨 있다.”(01:56:58)
“개와 소년에게 세상은 놀라움의 대상이니까. 종종 경이롭고 가끔은 기적처럼 보이기도 하는 세상은 끊임없이 놀라움을 주는 것이다.”(01:57:53)
4. 장 모르의 사진은 놀란 상태에서 비롯된 깨어 있음의 결과이다.
“장이 평생 동안 찍은 사진들은 놀란 상태에서 비롯된 어떤 깨어 있음의 결과물이다.”(01:57:53)
[27] 장 모르의 거리와 격식 없음
1. 장 모르의 사진에는 격식이 없지만 배려가 있다.
“그가 찍은 이미지들에서는 이상하게도 격식이 없는, 경계하지 않는 어떤 분위기가 느껴진다. 일종의 동요 없음. 그럼에도 배려가 있는 그 동요 없음.”(02:06:11)
2. 이러한 거리는 냉정한 객관주의가 아니다.
대상에게 지나치게 달라붙어 감정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무관심하게 멀어지지 않는 거리이다. 이 거리 때문에 사진은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강한 윤리적 권위를 얻는다.
“바로 이 지점이 그 사진들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한다.”(02:06:11)
3. 그의 사진은 판단보다 관찰을 앞세운다.
“장의 이야기는 어떤 인물도 어떤 대상도 빠트리지 않으며 절대 판단하지 않는다. 종종 가슴에 피를 흘리게도 하지만 과장은 하지 않는다.”(02:08:03)
4. 장 모르의 놀라움은 꾸준한 관찰에서 나온다.
“마지막으로 이 놀라움은 꾸준한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험이 많고 두려움을 모르는 여행자와 함께 있는 어린이 혹은 개의 놀라움이 담긴 관찰이다.”(02:12:49)
[28] 익숙한 것과 낯선 것 사이의 속삭임
장 모르의 사진은 평범한 것을 기이한 구경거리로 만들지 않는다. 익숙한 현실 속에 이미 들어 있는 낯섦을 발견한다.
“최고의 여행 이야기를 만드는 비밀은 이것이다. 익숙한 것과 색다른 것 사이, 흔해 빠진 것과 미지의 것 사이, 일상적인 것과 치명적인 것 사이의 속삭임.”(02:07:09)
이 태도는 관광자의 시선과 다르다. 관광자는 미리 기대한 장면을 확인하지만, 장 모르는 무엇을 만나게 될지 모른 채 관찰한다.
[29] 장 모르가 사진가가 된 과정
1. 장 모르는 처음부터 직업 사진가가 되려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제네바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화가를 꿈꾸었다.
“그는 사진을 찍으며 평생을 보내겠다는 결심 같은 것을 한 적이 없다. 그는 제네바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화가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02:09:01)
2. 1949년 팔레스타인 난민을 돕는 국제적십자위원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사진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1949년 이스라엘 서안지구와 요르단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보살피는 국제적십자의 대표단에 지원했다.”(02:09:01)
3. 그는 처음에 동생에게 선물하려고 산 동독제 카메라를 자신이 사용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적십자 활동을 하는 동안 동독제 사진기 한 대를 살 기회가 생겼다. 그는 동생에게 줄 선물로 그 사진기를 샀다가 계획과 달리 본인이 직접 쓰기 시작했다.”(02:09:01)
4. 사진은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의 세부를 잊지 않기 위한 수단이었다.
“자신이 목격한 사람들과 관련해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나 이해할 수 없는 세세한 모습들을, 자주 고통스럽고 가끔은 절망적이고 간혹 어떤 깨우침을 전해주기도 했던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02:09:54)
5. 이후 국제기구의 사진 작업을 하면서 비교적 자유롭게 세계를 여행했다.
“그는 제네바에 있는 유엔 산하기관 여러 곳, 특히 세계보건기구와 난민고등판무관실에서 일을 시작했다.”(02:10:53)
“그의 사진이 유엔을 거쳐 신문에 실리는 일이 종종 있기는 했지만 장 본인이 사진기자나 종군 사진기자로 활동한 적은 한 번도 없다.”(02:11:51)
6. 장 모르는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와 함께 팔레스타인인의 경험을 다룬 『마지막 하늘이 사라진 후에(After the Last Sky)』를 출간했다.
강의의 “30년 후”는 대략적인 표현이다. 팔레스타인에서 일한 1949년과 책이 출간된 1986년 사이에는 약 37년의 간격이 있다.
“그로부터 30년 후 그는 에드워드 사이드와 함께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과 고난을 다룬 책 『마지막 하늘이 사라진 후에』를 출간한다.”(02:09:01)
[30] 장 모르와 ‘세상의 끝’
1. 『세상의 끝에서(At the Edge of the World)』는 지리적으로 세계가 끝나는 장소만을 뜻하지 않는다.
장 모르가 큰 수술 뒤 요양하던 제네바 인근 산악 지역을 주민들이 ‘세상의 끝’이라고 부른 데서 제목이 나왔다. 동시에 난민, 이주민, 추방된 사람처럼 기존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난 존재들의 삶을 상징한다.
“실제로 지리적으로 이 세상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상징적인 어법인데, 장 모르가 스위스 산골 마을에서 요양하다가 그 동네 사람들이 자신의 마을을 ‘세상 끝’이라고 표현한 데서 이름을 따온 책이죠.”(00:08:30)
2. 장 모르는 세계를 여행하지만 어디에서나 이방인으로 남는다.
“장은 언제나 외국 땅에 있다. 혹은 장은 언제나 이방인이다.”(02:17:33)
3. 그러나 그는 주인과 손님의 윤리를 동시에 안다.
“모든 유목민들이 그렇듯 그는 손님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며 손님은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02:17:33)
“모순은 그가 바로 그곳, 세상의 끝에서 마치 주인이면서 동시에 손님인 것처럼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이다.”(02:17:33)
사진가의 윤리란 타인의 세계를 자기 소유물처럼 점령하지 않으면서도 무책임한 구경꾼으로 남지 않는 태도이다.
[31] 브레송·프랑크·모르의 차이
1. 브레송은 이미 나타난 사건과 기하학적 질서의 일치를 본다.
“그가 말하는 결정적 순간은 선택한 것 혹은 본 것이죠. 마치 모든 시간들이 펼쳐진 하늘에서 내려다본 것처럼요.”(01:23:12)
2. 프랑크는 앞으로 닥칠 예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기다린다.
“하지만 당신은 앞으로 닥칠 예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기다립니다.”(01:23:12)
3. 장 모르는 무엇을 기다리거나 찾는다는 의식마저 최소화하고, 우연히 마주친 것에 놀란다.
“그것들은 그가 지나가던 그 시점에 마침 벌어진 일들이다.”(02:06:11)
4. 그러나 세 태도는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브레송에게도 기다림과 놀라움이 있고, 프랑크에게도 기하학적 구도가 있으며, 장 모르에게도 축적된 훈련과 선택이 있다. 버거는 세 사진가의 절대적인 차이를 증명한 것이 아니라 각 작품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사진적 태도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사진 매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특징들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지, 한 특정 사진가의 예술관이나 세계관으로 고착화시켜 말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아요.”(02:19:32)
[32] 사진과 글은 서로를 설명하는 삽화가 아니다
1. 버거와 장 모르의 공동 작업에서 글과 사진은 같은 내용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사진이 이미 보여준 것을 글이 다시 설명하거나, 글이 말한 것을 사진이 다시 반복하는 그런 형태를 피하는 거예요.”(01:49:21)
2. 버거는 이를 ‘절제력’이라고 부른다.
사진이 말한 것을 글이 해설해 버리거나 글의 주장을 사진이 증명하도록 만들지 않는 태도이다.
“버거는 이를 절제력이라고 말하고 있어요.”(01:49:21)
3. 이미지와 글은 두 다리처럼 번갈아 움직여야 한다.
“두 개의 다리로 앞으로 나아가야 했는데 한쪽 다리는 이미지, 다른 한쪽은 글이었다. 양쪽 모두 상대의 속도에 적응해야 했다.”(02:15:38)
4. 동어반복은 사진책의 흐름을 멈추게 한다.
“이미지와 글을 함께 사용할 때 책의 흐름을 가장 자주 막는 것은 동어반복, 즉 같은 것을 두 번 말하는 의미 없는 반복이었다. 한 번은 말로, 한 번은 그림으로 말이다.”(02:16:37)
5. 좋은 사진책에서 글과 이미지는 서로의 빈자리를 열어준다.
한쪽이 다른 쪽을 번역하거나 종속시키지 않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앞으로 진행시킨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이야기에 보조를 맞추며 함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절제력이 필요하다.”(02:16:37)
[33] 사진의 의미는 한 장 안에 고정되지 않는다
1. 사진의 의미는 사진 내부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다른 사진, 배열, 캡션, 글, 역사적 맥락, 관객의 기억과 경험이 결합될 때 의미가 만들어진다.
“사진의 의미는 한 장의 이미지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미지와 글, 보는 관객들의 기억과 경험과 관계를 맺으면서 계속 만들어지는 것이죠. 고정되어 있지 않아요.”(01:49:21)
2. 작가의 의도는 작품을 시작하게 하는 동력이지만 최종 의미 그 자체는 아니다.
“내가 어떤 의도와 의미를 집어넣었는데 사진에 안 들어갔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의미를 만들고자 하는 동기와 의도는 작업을 만들어내는 에너지원이지, 그것이 관객에게 똑같이 전달되는 것은 아니에요.”(01:51:16)
3. 관객의 다른 해석은 실패가 아니라 사진 의미의 변주이다.
“그 사진 한 장을 관객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의미를 변주시키는지, 또 다른 해석들을 만들어내는지를 봐야죠.”(01:51:16)
4. 모든 사람이 작가의 의도를 동일하게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의도했던 의미를 보는 사람마다 똑같이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불가능함을 인정하셔야 돼요.”(01:51:16)
[34] 바르트의 앵커리지·둔한 의미·푼크툼과의 관계
1. 앵커리지(anchorage)는 글이 이미지의 여러 가능한 의미 중 일부를 선택하도록 방향을 고정하는 작용이다.
강의에서는 배가 항구에 잠시 정박하는 것에 비유하지만, 바르트의 정확한 개념은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떠다니는 기의들의 사슬’을 캡션이나 언어가 제한하는 작용이다. 의미가 완전히 영구 고정된다는 뜻은 아니지만, 단순히 잠시 머물렀다 다시 떠나는 상태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의미가 잠시 고정되는 것을 앵커리지라고 얘기해요. 항구에서 배가 와서 잠시 정박하는 상태.”(01:50:17)
2. 바르트의 ‘둔한 의미(obtuse meaning)’는 사진이 비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정보적 의미와 상징적 의미로 완전히 설명되지 않고 남는 제3의 의미를 가리킨다. 따라서 사진의 의미가 열려 있다는 논의와 연결할 수 있지만, ‘사진의 무의미’와 동일하지는 않다.
“사진 속에 의미가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어요. 나는 그것을 텅 비었다고 말하는데, 바르트의 둔한 의미와도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어요.”(01:50:17)
3. 장 모르의 ‘놀라움’은 바르트의 푼크툼과 연결할 수 있지만 두 개념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푼크툼은 관객을 찌르는 우연한 세부이고, 장 모르의 놀라움은 사진가가 촬영 과정에서 세계의 독특함을 맞이하는 태도이다. 하나는 주로 관객의 체험이고 다른 하나는 사진가의 관찰 태도라는 차이가 있다.
“장 모르에 관한 글에서는 또 다른 사진가의 태도가 등장합니다. 버거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놀라움이에요. 이 놀라움도 바르트가 말하는 푼크툼과 연결시킬 수 있어요.”(01:47:35)
[35] 사진을 배열하는 것은 문장을 쓰는 일과 비슷하다
1. 촬영 순간에는 모든 요소를 통제하기 어렵지만, 촬영한 사진을 고르고 배열할 때는 문장을 구성하듯 작업할 수 있다.
“촬영할 때는 이렇게 할 수 없어요. 구성할 겨를이 없거든요. 그런데 찍었던 사진들을 선택해서 배열할 때는 이렇게 문장을 쓰듯이 할 수는 있지 않을까요?”(00:59:40)
2. 그러나 사진의 배열은 문자언어와 동일한 문법을 가지지 않는다.
사진에는 주어·서술어·시제·부정·가정법이 언어처럼 명확하게 표시되지 않는다. 따라서 배열은 의미를 지시하면서도 관객의 연상과 상상을 열어두어야 한다.
“물론 그것은 문자가 전하는 메시지와 동일한 것은 아니죠. 그런 구조의 문법은 사진이나 이미지에는 없으니까요.”(01:00:36)
3. 사진책과 포트폴리오에서 중요한 것은 개별 사진의 완성도만이 아니다.
사진들 사이의 간격, 반복, 충돌, 시간의 이동, 시선의 방향과 글의 개입을 통하여 전체 의미가 형성된다.
[36] 모더니즘 사진과 동시대 사진에 대한 강의의 문제 제기
1. 브레송과 프랑크의 구성에는 회화에서 이어받은 조화·균형·기하학이 강하게 작용한다.
“세상은 내가 원하는 구도대로 놓여 있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잡으려 하는 것은 시각예술의 전범인 회화의 구도에 입각해서 찍으면 사진예술이 될 거라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죠.”(01:30:30)
2. 강의는 이러한 회화적 구도 중심의 사진을 모더니즘 사진의 한 경향으로 비판한다.
“모더니즘 계열의 사진가들은 이거를 하고 있었어요. 거의 대부분.”(00:30:44)
3. 다만 ‘회화적 구도를 사용할수록 사진의 본질에서 멀어진다’는 주장은 보편적으로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강의자의 미학적 입장이다.
사진의 고유성 역시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 동시대 사진은 회화적 구도를 폐기했다기보다 구도·기록·아카이브·연출·반복·차용·영상·텍스트 등 다양한 방식을 비판적으로 사용한다.
“그것은 그렇게 하면 할수록 사진의 본질적 측면에서는 멀어져 있는 것이죠. 이후 모더니즘 이후에 바로 그런 속성들을 가지고 작업을 전개하는 사진가들이 등장하고, 그게 동시대 예술로서의 사진가들의 경향이 되는 거죠.”(01:31:30)
따라서 이 발언은 ‘회화적 구도는 틀렸다’는 규칙보다, 익숙한 조화와 균형을 사진예술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문제 제기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37] 세 사진가에게 공통되는 윤리
1. 자신을 비워야 한다.
좋은 사진은 대상을 얼마나 정확하게 통제했는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사진가가 자신의 선입견과 목적을 얼마나 내려놓고 대상을 받아들였는가가 중요하다.
“좋은 사진이란 대상을 얼마나 정확하게 포착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사진가가 대상 앞에서 얼마나 자신을 비워내면서 바라볼 수 있는가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00:16:51)
2. 타인에게 가까이 가되 타인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
브레송의 모성적 시선, 프랑크의 경계 넘기, 장 모르의 손님 같은 태도는 모두 사진가가 타자의 삶을 자기 주장에 종속시키지 않는 방법을 보여준다.
3. 지속적인 관찰과 훈련이 필요하다.
자기망각, 우연과 직감은 준비가 없는 우발성이 아니다. 브레송의 기하학, 프랑크의 촉각, 장 모르의 깨어 있음은 모두 오랜 관찰과 작업을 통하여 형성된다.
“물론 그 마음이 모성적인 것이든 아니든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거기에 더해 훈련, 끊이지 않는 눈의 단련이 있다.”(00:47:21)
4. 사진가는 세계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찾아서는 안 된다.
세계가 자신의 명제를 증명해 주기를 요구하는 대신, 예상하지 못한 모습이 나타날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5. 사진가는 놀라움을 잃지 않아야 한다.
경험이 많아지는 것은 놀라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작고 독특한 차이를 알아보는 능력이 깊어지는 일이다.
“원칙적으로 장 모르는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는다. 그는 많은 일들을 보고 관찰해 왔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의 눈에 띈 거의 모든 것들이 그를 놀라게 한다. 모든 것들이 아주 작지만 압도적인 어떤 방식으로 독특하기 때문이다.”(02:07:09)
[38] 강의의 최종 결론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마르틴 프랑크, 장 모르의 사진은 서로 다른 미학을 보여주지만 세 사람 모두 사진을 세계의 지배나 소유로 이해하지 않는다.
브레송은 끊임없이 바라보면서 현실의 사건과 기하학적 질서가 일치하는 순간에 자신을 잊고 반응한다. 프랑크는 아직 오지 않은 다음 순간을 기다리며 카메라라는 경계를 넘어 타인의 세계로 들어간다. 장 모르는 미리 정한 의미를 찾거나 증명하지 않고, 우연히 마주친 현실의 독특함에 놀란다.
이 세 태도는 각각 관찰·기대·놀라움으로 구분되지만 실제 사진 행위에서는 서로 겹친다. 바라보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하고, 기다리기 위해서는 자신을 열어야 하며, 자신을 열어놓을 때 비로소 예상하지 못한 것에 놀랄 수 있다.
사진은 세계를 내 의도에 맞게 정복하는 일이 아니다. 세계가 잠시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작가의 의도는 작업의 출발점이지만 의미의 종착점은 아니다. 사진의 의미는 다른 사진과 글, 역사적 맥락, 관객의 기억과 경험을 만나면서 계속 새롭게 만들어진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세계를 소유하는 행위인가, 아니면 세계가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도록 자신을 열어놓는 행위인가? 이 질문을 가지고 카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 마르틴 프랑크의 기대와 경계 넘기, 장 모르의 놀라움을 서로 비교해서 읽으면 이 세 편의 글이 하나의 긴 사진론처럼 연결되어 보일 것입니다.”(00: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