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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카또야 원문보기 글쓴이: 편집부
주제 : 위빠사나 수행에 대하여
출처 : 불교방송 12연기 법문 120회, 121회, 122회(SD 120~122)
법문 : 묘원 법사님(상좌불교 한국명상원 원장)
120회
오늘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있는 ‘위빠사나 수행과 알아차림의 확립’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수행방법의 하나입니다. 수행은 대상과 하나가 되어서 선정의 고요함을 얻는 사마타 수행이 있고, 그리고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려서 통찰지혜를 얻는 위빠사나 수행이 있습니다. 이렇게 분리해서 알아차릴 때만이 통찰지혜가 생겨서 무상, 고, 무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우리말로는 올바른 직관 또는 통찰 또는 내관이라고 하며, 그리고 직관이라고도 합니다. 올바른 직관은 팔정도의 바른 길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통찰이란 말은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서 꿰뚫어서 보는 것을 말합니다. 통찰은 모두 밝혀서 알아차린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관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자신의 몸과 마음이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을 내관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직관이란 말은 추리나 경험에 의하지 않고 대상을 직접 알아차리는 행위를 뜻합니다.
또 위빠사나 수행을 관법 수행이라고도 하는데, ‘관한다’라는 것은 한문으로 볼 때는 볼 관觀이지만, 여기서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본다는 뜻으로 관법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빨리어 ‘위빠사나’라는 말은 우리말로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다음에 수행이라고 하는 뜻은 명상 또는 마음을 계발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빨리어로 바와나bhāvanā라고 합니다. 마음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아닌 몸과 마음으로 직접 실천하는 행위를 해야 합니다. 마음의 계발이란 말은 정신적 수련과 정신적 계발을 의미합니다. 이는 평온과 고요함을 통해서 지혜가 향상되어 깨달음을 얻는 것이며, 이 깨달음이란 바로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이란 알아차리는 것이며, 알아차려서 바르게 사는 방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하다고 할 때는 관용과 지계와 수행이라는 세 가지의 조건이 성숙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수행은 선을 실천하는 필수 덕목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적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을 유념하여야 하겠습니다.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포함하여 수행을 하는 것을 경전에서는 ‘알아차림을 확립한다’라고 합니다. 알아차림을 빨리어로 사띠sati라고 하는데, 사띠는 확립한다는 말을 뜻하는 빠타나와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확립한다는 말을 사띠빠타나satipaṭṭhāna라고 합니다. 이것을 중국에서 염처경이라고도 하고, 우리는 염처경 또는 대념처경이라고도 부릅니다.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것은 대상에 알아차림을 겨냥하고 알아차림을 지속해서 튼튼하게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대상과 함께 있을 때만이 고요한 집중이 되고, 이러한 고요한 집중에 의해서만이 통찰지혜가 생깁니다.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경인 <사띠빠타나 수따satipaṭṭhāna sutta>는 부처님께서 수행은 이렇게 한다는 것을 밝힌 가르침이십니다. 그래서 상좌불교에서는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읽히고 있으며, 수행자에게 있어서도 가장 핵심적인 경전입니다. <사띠빠타나 수따>는 두 가지가 있는데, 맛지마니까야에 있는 것을 염처경이라고 하고, 디가니까야에 있는 것을 대념처경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가 같은 내용이지만 대념처경에서는 법념처의 사성제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목표와 방법이 분명한 수행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수행이라고 알려진 것들이 목표만 있고 그것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what만 있고 how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만 있고, ‘어떻게’가 없어서 수행이 왜곡되고 우리는 바른 길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은 ‘무엇’과 ‘어떻게’를 모두 충족시켜 주는 수행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법들이 경전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위빠사나 수행은 스승들과 상세한 면담을 받으면서 수행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수행자 여러분은 믿음을 가지고 노력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믿을 만한 수행을 발견한다는 것도 선업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선업의 공덕이 있어서 이 수행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먼저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염처경은 불교도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경전입니다. 네 가지의 염처念處는 마치 탑으로 올라가는 네 곳의 계단과 같습니다. 어느 계단으로 올라가든 탑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네 개의 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몸이라는 문을 통해서 열반에 이를 수 있고, 느낌이라는 문을 통해서 열반에 이를 수가 있으며, 마음이라는 문을 통해서 열반에 이를 수가 있고, 법이라는 문을 통해서 열반에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위빠사나 수행은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첫째, 몸에 대한 알아차림, 둘째,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셋째,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 넷째, 법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이것을 사념처四念處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네 가지를 사념처라고 하는데, 네 가지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을 확립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바른 마음가짐으로서 진리의 본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몸을 알아차리는 것은 육신의 덧없음을 알아차리고,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은 감각의 고통을 알아차리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의식의 무실체를 알아차리고, 법을 알아차리는 것은 존재의 무상, 고, 무아를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신념처身念處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신념처를 빨리어로 가야누빠사나kāyānupassanā라고 합니다. 여기서 가야kāya는 신체, 몸이라는 뜻이며, 아누빠사나anupassanā는 알아차림 또는 알아차림을 지속한다는 수관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알아차림을 말할 때는 반드시 지속적인 알아차림이 포함됩니다.
빨리어 경전의 전편에서는 몸과 마음이라고 말하지 않고 정신과 물질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것을 빨리어로는 나마루빠nāma-rūpa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념처 수행에서만 몸, 신체라는 뜻의 가야를 사용합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몸을 알아차리는 대상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 둘째, 몸의 자세에 대한 알아차림, 셋째, 분명한 앎을 지닌 알아차림, 넷째, 몸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킴에 대한 알아차림, 이것은 부정관입니다. 다섯째, 네 가지 물질의 요소에 대한 알아차림, 이것은 사대四大입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로 묘지에서 시체의 아홉 가지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수념처受念處 수행에 대해서 잠시 그 종류를 알아보겠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차지하는 느낌의 비중은 매우 높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느낌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느낌이 없으면 아는 것이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위빠사나 수행은 관념이 아닌 몸과 마음에 실재하는 성품을 아는 것으로, 이것들이 모두 느낌입니다.
느낌의 수효는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느낌을 기본적으로는 맨 느낌과 육체적 느낌, 정신적 느낌으로 분류하는데, 맨 느낌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에 대한 기본적인 느낌을 말하고, 육체적 느낌은 육체적으로 좋은 느낌과 싫은 느낌을 말하고, 정신적 느낌은 정신적으로 좋은 느낌과 싫은 느낌, 덤덤한 느낌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심념처心念處입니다. 염처경에 있는 알아차릴 마음의 대상은 여덟 가지를 쌍으로 한 열여섯 가지입니다. 심념처의 열여섯 가지 대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탐욕이 있는 마음, 탐욕이 없는 마음, 성냄이 있는 마음, 성냄이 없는 마음,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 위축된 마음, 위축되지 않은 마음, 커진 마음, 커지지 않은 마음, 향상된 마음, 향상되지 않은 마음, 집중이 된 마음, 집중이 안 된 마음, 자유로워진 마음, 자유롭지 않은 마음, 이상의 마음이 있을 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심념처 수행입니다. 이상은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에서 일어나는 모든 마음을 종합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곡 사야도께서는 위빠사나 수행자가 알아차려야 할 마음을 열세 가지로 분류하셨습니다. 모곡 사야도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내용은 뒤에 ‘심념처’에 대해 말씀드릴 때 자세히 밝혀드리겠습니다.
다음으로 법념처法念處입니다. 법은 마음이 알아차릴 대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수행 중에 나타나는 육체적․정신적 현상이 모두 법法이며, 알아차릴 대상에 속합니다. 특히 장애가 일어나는 것도 알아차릴 대상으로서의 법이라고 합니다.
법념처의 다섯 가지 대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다섯 가지 장애입니다. 감각적 욕망, 악한 의도, 해태와 혼침, 들뜸과 회한, 회의적 의심입니다. 두 번째, 오취온입니다. 색수상행식에 대한 집착을 말합니다. 세 번째, 12처입니다.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을 말합니다. 네 번째, 칠각지입니다. 알아차림, 법에 대한 탐구, 정진, 기쁨, 평온, 집중, 평등 이상의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사성제입니다. 이 사성제는 고집멸도苦集滅道를 말합니다.
이상이 위빠사나 수행자가 알아차려야 될 네 가지 염처이고, 그 네 가지 중에 각 각 더 자세하게 알아차릴 내용들을 말씀드렸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만일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신념처 수행을 하는 경우라도 나머지 세 가지의 알아차림을 제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들 네 가지 대상을 이렇게 구별하는 것은 한 대상을 좀 더 강조하거나 분명하게 주의를 기울여서 알아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은 하나의 큰 틀 안에서 네 가지 방법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념처 수행을 할 때에도 느낌과 마음과 법이 함께 작용합니다. 아울러 수념처 수행을 할 때에도 몸과 마음과 법이 함께 작용합니다. 또 심념처 수행을 할 때에도 몸과 느낌과 법이 함께 작용합니다. 그리고 법념처 수행을 할 때에도 몸과 느낌과 마음이 함께 작용을 합니다. 그러므로 사념처를 말할 때 네 가지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념처로 구별하는 것은 수행의 대상을 몸으로 할 것인가, 느낌으로 할 것인가, 마음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마음의 대상인 법으로 할 것인가 하는 염처별 수행으로 분류하는 것입니다. 이때 사념처는 주 대상이 무엇이냐를 말하는 것이고, 위빠사나 수행은 주 대상에 상관없이 네 가지를 모두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사념처 수행은 하나만 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21회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계속해서 사념처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미얀마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몇 년 동안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수행처에서 몸만 알아차린 것은 아닙니다. 느낌과 마음의 의도와 법을 보는 수행도 함께했습니다. 그러나 아랫배의 풍대를 주 대상으로 하는 수행을 했기 때문에 이것을 신념처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그곳에서 몇 년간 신념처 수행을 하다가 다음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곳에 갔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다시 몇 년 동안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했습니다. 그렇게 수행을 하면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소홀히 하고 오직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전력했습니다. 그런데 수행이 조금씩 예상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을 큰 스승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큰 스승님께서는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소홀히 해서 그렇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 수행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던 것을 알고 다시 균형을 잡는 수행을 했습니다. 그런 뒤에 큰 스승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큰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은 나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로만 말하는데 사실 나는 신수심법 사념처를 하는 수행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저희 스승님들은 남들이 잘 하지 않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주 대상으로 하시면서도 사실은 모든 것들이 균형된 사념처 수행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저희는 큰 스승을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네 가지 대상이라는 것은 수행의 기본적 구성이고, 그중에 어느 쪽으로 좀 더 집중을 하느냐 하는 것으로 염처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염처의 각 장 끝에 두 번째 단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나옵니다.
“일어나는 대상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사라지는 대상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그리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대상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위의 세 가지 요점이 위빠사나 수행의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이들 세 가지 요점들을 확실하게 숙지하기 전까지는 단지 알아차림만을 의미하는 염처에 불과할 뿐이며, 단지 이런 알아차림만으로는 위빠사나의 좀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수행자들이 훌륭한 의도를 가지고 진지한 노력을 하고도 알아차림이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집중의 상태에 머물러 헤매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일정한 단계인 집중을 이루기까지에는 분명히 이런 마음의 상태가 필요한 것이기는 합니다. 그래서 수행을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 수가 있어야 합니다.
염처경의 각 장의 마지막 단락에는 염처에 따라 “몸에 대하여 몸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라는 동일한 구절이 있습니다. 이는 수행자가 몸의 호흡을 알아차릴 때 들숨, 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몸에 대하여 몸을 알아차린다는 의미는 몸을 알아차릴 때는 오직 몸만 있다고 하는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념처, 심념처, 법념처의 마지막 단락에서도 동일한 내용이 반복됩니다. ‘느낌에 대하여 느낌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법에 대하여 법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더라도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탐진치가 개입되지 않게 그냥 단순히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몸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그냥 몸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의 몸을 그냥 있는 몸으로 보지 않습니다. 크다, 작다, 예쁘다, 밉다, 가볍다, 무겁다, 하는 어떤 선입관과 고정관념을 가지고 봅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몸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이게 관념이 아닌 실재를 보는 것입니다.
둘째, 몸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나의 몸’이라고 하는 유신견이 생기지 않습니다. 몸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내 몸, 네 몸, 내 자식의 몸, 누구의 몸이라고 어떤 선입관을 가지고 봅니다. 이것들은 모두 관념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몸을 볼 때만이 유신견으로 보지 않습니다.
셋째, 몸 이외의 것을 대상으로 하지 않아서 집중력을 기르게 됩니다. 이 말은 몸을 알아차릴 때 단지 몸만 알아차려야지 망상을 하거나 다른 것을 하면 집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집중이 되지 않을 때는 분열현상이 생겨서 대상의 성품을 볼 수가 없습니다.
넷째, 몸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때 모든 움직임은 마음의 의도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됩니다. 그냥 몸을 몸으로 볼 때 차츰 집중력이 생기면 그 몸이 움직이는 것이 우연히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의도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사실과, 또 들었으면 놓는다는 원인과 결과가 연속적으로 지속된다는 지혜가 생기게 됩니다.
다섯째, 이렇게 알아차릴 때 대상을 어리석음 없이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대상을 모두 어리석음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어떤 선입관, 고정관념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에 대하여 단지 몸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미혹하지 않은 상태로 지혜를 가지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낸다’라는 단어는 빨리어의 ‘위하라띠viharati’를 번역한 것입니다. 위하라띠는 거처, 머무는 곳, 사원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에 머문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몸을 알아차릴 때 몸의 대상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몸의 호흡, 자세, 분명한 앎 등등이 있는데 주석서에 의하면 몸의 자세를 알아차릴 때는 지속되는 시간에 따라서 세 가지로 분류를 합니다. 첫째, 오래 지속되는 자세는 가는 것, 서 있는 것, 앉아 있는 것, 누워 있는 것으로 행주좌와가 있습니다. 둘째, 중간으로 지속되는 자세는 앞으로 가는 것, 뒤로 가는 것, 앞으로 옆으로 바라보는 것, 구부리고 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짧게 지속되는 자세는 걷고, 서고, 앉고, 잠들고, 깨어나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입니다. 이상 몸을 알아차릴 때 어느 자세이거나 계속되는 시간에 따른 자세도 모두 알아차려야 합니다. 말을 할 때도 말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침묵할 때도 침묵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또 “더 높은 지혜와 알아차림을 위해 필요한 정도까지 알아차림이 확립된다. 이제 그 갈망과 그릇된 견해에 의하여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고 지낸다”라는 구절도 있습니다. 이는 수행자가 통찰력을 점차 계발시켰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 시점에서 위빠사나의 단계에 도달합니다. 그리하여 더 이상 몸, 느낌, 마음과 마음의 대상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또 나는 수행한다, 수행하는 것은 나다, 내 집중력은 매우 좋다, 들숨과 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은 매우 만족스럽다, 라고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이상이 수행을 하는 목표와 결과입니다. 이렇게 수행을 하면 ‘나’라고 하는 유신견이 사라지고, 오직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비로소 법을 보게 됩니다.
“집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의 세상에서 그는 어떠한 것에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제 수행자는 더 이상 몸, 느낌, 지각, 행 그리고 의식에 대해서 나, 나의 몸, 나의 느낌 또는 나의 마음이라고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 대하여 몸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라고 말씀하신 이것이야말로 수행자가 몸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신념처 수행을 하는 바른 길입니다.
오늘날의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위빠사나 수행을 완성하지 못하고 절반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염처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부분인 일어나고 사라지는 대상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을 알아차릴 때 비로소 위빠사나의 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에 의해서만이 열반이 완성됩니다. 그래서 생멸을 보지 못하면 위빠사나 수행의 도가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최소한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했다고 한다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의 지혜를 보아서 무상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무상을 앎으로써 비로소 바른 견해의 길로 들어서서 수행이 날로 발전해서 궁극의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다음 주제는 알아차림의 확립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장로 모곡 사야도께서는 알아차림의 확립을 다음 세 가지 단계로 나누셨습니다. 첫째, 알아차림의 확립으로 알아차릴 대상에 마음을 보내서 알아차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둘째,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수행에서 대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셋째, 알아차림의 확립으로 이끄는 길로 가서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업의 형성의 소멸로 이끄는 것입니다. 이것은 열반을 뜻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가 성숙하면 소멸을 봅니다. 그래서 탐진치의 번뇌가 소멸된 것이 바로 열반입니다.
이상 세 가지를 보다 명료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어떤 일어난 대상, 예를 들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나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에 마음을 집중하여 고정시키는 것을 알아차림의 첫 번째 확립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몸, 느낌, 마음, 법이 일어났다가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이것을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알아차림과 함께 알아차림을 지속시키는 것이 수행입니다. 이 두 번째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본격적인 위빠사나 수행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의 설명은 조건 지어진 현상에 대한 지혜, 즉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이 혐오스럽다는 것을 알아서 알아차림의 확립을 이끄는 길입니다. 이 길은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업의 형성을 소멸시키는 길입니다. 세 번째는 업의 형성의 소멸을 뜻하기 때문에 열반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빨리어 ‘아누싸띠anussati’는 기억, 알아차림을 말하는 것으로서 사마타로 분류되는 반면, 빨리어 ‘아누빠싸나anupassanā’는 알아차림,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서 통찰하는 수관으로 위빠사나 수행으로 분류됩니다. 이와 같은 통찰을 통하여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무상, 고, 무아로 아는 지혜가 없으면 결코 위빠사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위빠사나를 공부하면서 접하게 되는 두 가지 수행에 대한 분류의 기준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아누싸띠’는 대상과 하나가 되어서 그냥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아누빠싸나’는 알아차림과 함께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서 대상을 통찰하는 것을 말합니다.
단순하게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은 근본집중에 의해 선정의 고요함을 얻지만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찰나집중은 통찰지혜가 생겨서 무상, 고, 무아를 보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아누빠싸나’라고 아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122회
지난 시간에 이어서 위빠사나의 아누빠사나anupassanā에 대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위빠사나의 빠사나를 한문으로는 따를 수隨 자를 써서 수관隨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때의 수관은 따라가면서 본다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에는 대상과 아는 마음에 갭이 있으면 안 됩니다. 일어나는 순간에 일어나는 것을 함께 정확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이 들어와서 지혜가 성숙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을 즉시성, 현장성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밀착될 때만이 불이 나서 지혜가 생깁니다.
부처님의 정법 수행자인 쑤시마에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쑤시마여! 도과를 성취하는 것은 집중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위빠사나의 지혜로 인하여 도과를 성취하는 것이다. 위빠사나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고, 바람직한 결과를 이룰 수 있으므로, 오로지 이를 통해서만이 도과를 성취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수행을 시작하면 알아차려서 집중이 되어야 하지만 이것이 목표는 아닙니다. 집중에 의해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지혜가 나야 무상, 고, 무아를 알아서 열반을 성취합니다. 이것이 바로 계, 정, 혜 삼학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해서 “실로 쑤시마여! 진리 안에 머무는 지혜가 먼저이고, 이후에 열반에 대한 지혜가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실로 쑤시마여!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가 먼저 오고, 다음으로 열반의 지혜가 뒤따른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진리 안에 머무는 지혜를 한문으로 법주지라고 하는데, 이것은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서 얻는 지혜를 말합니다.
대상을 알아차릴 때 어떤 고정관념 없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 없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지혜가 난 뒤에 도과를 성취하는 열반에 이릅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지혜를 여실지견이라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는 자신의 몸과 마음이 항상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실재에 대한 통찰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수행자는 꿰뚫는 통찰력으로 처음에는 일어남과 사라짐의 현상이 바로 고통뿐인 사실을 먼저 깨닫고, 그다음으로 조건 지어진 현상은 불쾌하며 혐오스럽고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건 지어진 현상을 유위법 또는 유루有漏라고 합니다.
유위법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 조건 지어진 현상을 말합니다. 마음, 마음의 작용, 몸, 이렇게 세 가지를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오온입니다. 그리고 조건이 없는 현상은 무위법 또는 무루無漏라고 합니다. 무위법은 원인과 결과가 없는 것으로 열반을 뜻합니다. 이들 네 가지를 합쳐서 빠라마타 담마 또는 최승의법이라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두 단계의 통찰을 거쳐 마지막 단계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명백히 가르치셨습니다.
초전법륜경에서는 세 단계의 지혜, 즉 진리를 아는 지혜, 그리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아는 지혜, 그리고 진리를 완수하는 것을 아는 지혜를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이 세 가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는 지혜를 다음 세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첫째, 빨리어로 사짜냐나saccā ñaṇa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아는 지혜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고성제의 진리를 아는 지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성자들만이 아는 진리인 고성제이다. 비구들이여!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관해서 나의 내면의 눈이 일어나고, 지혜가 일어나고, 통찰지혜가 일어나고, 명지가 일어나고, 광명이 일어났다.”
이렇게 괴로움의 진리를 아는 지혜가 일어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지혜는 빨리어로 끼짜냐나kicca ñaṇa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아는 지혜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고성제의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아는 지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성제는 바르게 잘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비구들이여!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에 관해서 나의 내면의 눈이 일어나고, 지혜가 일어나고, 통찰지혜가 일어나고, 명지가 일어나고, 광명이 일어났다.”
이렇게 괴로움의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아는 지혜가 일어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깟따냐나kata ñaṇa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완수하는 것을 아는 지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고성제의 진리를 완수한 것을 아는 지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 고성제를 완전하고 바르게 잘 깨달았다. 그래서 비구들이여!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에 관해서 나의 내면의 눈이 일어나고, 지혜가 일어나고, 통찰지혜가 일어나고, 명지가 일어나고, 광명이 일어났다.”
이렇게 괴로움의 진리를 완수한 것을 아는 지혜가 일어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차례대로 집성제와 멸성제와 도성제에 대하여 계속해서 진리를 아는 지혜, 진리를 실행할 것을 아는 지혜, 진리를 완수한 것을 아는 지혜가 일어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냥 지혜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진리를 아는 지혜를 얻고자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아는 지혜를 얻고자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결과로 마지막인 진리를 완수한 것을 아는 지혜가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궁극의 진리를 얻고자 할 때 그냥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일정한 단계에 의해서 점진적으로 지혜가 성숙된다는 것을 유념하여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으로 세상에 깨달음을 얻은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이 선포는 자신이 어떤 외부의 지도나 가르침이 없이 스스로의 경험과 직관의 지혜로 진리를 찾아서 정등각자가 되신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이러한 선포가 있은 뒤에 마침내 법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이러한 선포는 살아 있는 모든 생명들에 대한 선포이십니다. 지각이 있어서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생명에 대해서 부처님은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포가 있은 뒤에 비로소 전법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나의 내면의 눈이 일어나고, 지혜가 일어나고, 통찰지혜가 일어나고, 명지가 일어나고, 광명이 일어났다”라고 선포하신 뒤에 마침내 법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이 길은 성스럽고 숭고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길고 지루한 사마타 수행의 길을 따라가지 말고,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지름길인 위빠사나 수행의 길로 갈 것을 초보 수행자들에게 권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선언하신 “나의 내면의 눈이 일어나고, 지혜가 일어나고, 통찰지혜가 일어나고, 명지가 일어나고, 광명이 일어났다”는 것은 모두 지혜를 얻은 여러 가지 단계의 과정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 말들은 모두 하나의 지혜를 뜻합니다.
이제 우리들의 길은 정해졌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바람직하게 사는 길은 선하게 사는 것이고, 그 선하게 사는 길을 완수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 수행은 사마타 수행의 선정의 고요함을 얻어서 먼저 번뇌를 소멸시키는 것과, 그리고 번뇌를 소멸시키는 단계를 뛰어넘어서 궁극의 해탈을 얻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사는 가장 바람직한 사명입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일상의 알아차림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 일상의 알아차림이란 것은 좌선과 경행뿐이 아니고, 아침에 눈을 떠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밥을 먹고 옷을 입고 그리고 청소를 하고 출근하고 하는 모든 것들을 다 통틀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직장인이 직장에서 근무를 할 때에도 알아차림이 있어야 하겠고,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에도 물론 알아차림이 있어야 하겠지만, 걷거나 앉거나 누울 때 차를 탈 때에나 모두 알아차릴 대상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수행을 해서 우리는 지고의 열반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그 지고의 열반은 어느 한순간만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눈을 떠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모든 과정을 빠짐없이 주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처음에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순간이라도 알아차리는 것을 시작하면 한순간이 두 순간이 되고, 두 순간이 세 순간이 되어서 조금씩 알아차림의 영역을 넓혀 갈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더욱 밀밀한 알아차림이 유지되어서 우리는 궁극의 열반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