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적지자, 불위군왕 죄인지자 불위군왕" (역적의 아들은 왕이 될수없다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수없다)
1776년 3월, 각고의 세월을 보낸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정조의 이름)은 드디어 조선의 22대 왕에 등극한다.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숱한정적들 속에서 수시로 협박과 암살의 위험에 시달리던 정조였다.
끝끝내 그를 괴롭히던 역적지자, 불위군왕. 또는 죄인지자 불위군왕.
정조는 억울했을것이다 이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것이다. 잘못이라면 아비를 사도로 둔것뿐이다. 아버지가 영조할아버지의 눈밖에 나 억울하게 죽은 때문이다. 기득권 세력에 항거하다 마침내 비운에 가신 아버지 사도.
뒤주에 갖힌 죽음을 목도했던게 열한살. 세상 이치를 이미 아는 나이였다 그야말로 와신상담, 어린 가슴에 품은한을 용케도 달래며 아버지의 한을 씻을날을 기다려온것이다.
오뉴월 팥죽모양 변덕 심한 할아버지 영조의 심기를 읽어내고 참고 또 참아 온 십여년의 세월이였다.
마침내 51여년을 왕으로 군림하던 할아버지 영조는 다행히도 죽기 얼마전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무력을 동원하면서까지 이산의 대리청정을 강행한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미웠어도 손자는 끔직히 아낀 까닭이다. 결과적으로 이 결단이 이산을 왕에 오르게 한다.
비록 역적의, 혹은 죄인의 아들이라는 주홍글씨를 벗어 내던지지는 못하지만.
이후 이산의 정치력은 이 역적지자, 혹은 죄인지자 불위군왕을 선언한 노론 세력과의 싸움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정통성에 대한 싸움이었고 막강한 권신세력과의 힘겨운 싸움이였다.
그리하여 이산은 결단한다 왕위에 오르는 첫날 기득권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천명한다.
이는 자신의 정치생명을 건 선언인거다.
할아버지 영조가 사도세자의 일을 더이상 거론치 말라고 함에 대한 거역이요 죽은 큰아버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했음을 부정하는 선언이요, 권력을 독점하다시피한 노론 세력에 던지는 경고장인 것이다.
그로부터 정조의 수난은 더해진다. 세자시절의 노론으로부터의 핍박에, 이제는 궁궐을 침입하는 암살의 위험에 놓여진다. (이에 바탕한 영화가 현빈 주연의 "역린"이다)
풍전등화요 사면초가다.
정조는 대항한다.
우선 자신과 아버지 사도세자를 반대한 어머니인 혜경궁 집안인 작은 외조부 홍인한, 할마마마인 정순왕후의 오빠 김구주등 노론의 핵심 세력을 귀양보낸다.
그리곤 홍국영을 최측근으로 내세워 병권을 강화하고 상대적 약자인 소론과 남인을 등용해 권력을 분산시킨다.
신진세력을 차출해 규장각에 배치하고 친위대인 장용영을 확장한다 문무를 재편하는것이다. 세력을 자신에게 집중케한다
그러구러 십여년. 스물 다섯에 등용한 정조는 어느새 삼십대 중반이 되고 정권은 차츰 안정기에 접어든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꼭해야만 하는숙제,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는 일을 선언한다.
1789년. 정조 14년.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군 배봉산에서 조선 최고의 길지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칭한다.
(지금의 융.건릉 자리)
마침내 자신의 힘이 여기에 이르렀음을 만천하에 포고한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살던 백성들을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옮긴다. 오늘날의 신도시를 만든것이다.
오늘날의 수원 중심지 팔달산아래 이주민을 정착시키고 관아를 만들고 점차 도시를 확장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성곽을 쌓기 시작한다. 그 도시의 이름을 그옛날 중국의 평화시대인 요순임금의 덕이 살아있는곳이란 뜻의 "화성"이라 명명한다
말하자면 정조의 도시가 설계되고 지어지는 것이다. 이제껏 조선에 없던 새로운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정조의 꿈이 담긴 도시. 정조의 이상이 실현되는 도시. 상업이 중심이 되는 도시.
기존의 세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다
보라, 그대들 권신세력 노론이 아니어도 나는 이나라 조선을 경영할수 있다!! 라는.
그 화성 공사에는 정조를 흠모하는 신진세력 남인이 헌신한다.
정조의 멘토 채재공과 젊은 천재학자 정약용등등...
그들은 백성을 하늘같이 섬겨 심지어 돌쇠, 만석이...등등 부르면 끌려나와 부역을 해야만하는 하층민중에게 정확한 품삭을 제공해 민초로부터 환호를 받는다.
정조의 꿈은 자신의 권력으로 민초위에 군림하는것이 아니라 민초와 함께 그들도 함께사는 세상인것이였다.
그래서 저 요순시대, 임금이 와도 내힘으로 밭갈고 배부르니 임금이 무에 필요한가, 라고 노래한 그 태평성대를, 임금이 누군지 몰라도 살아갈수 있는 세상을 이루고 싶음이였으리라.
화성이 완성되면 후일 순조가 되는 아들이 열다섯이 되는 1804년 아예 화성에 내려와 자리할 생각이였다.
그리하여 조선을 마침내 조선이게한 고대조 태종 이방원 할아버지처럼, 세종에게 양위하여 조선을 부흥케한 태종처럼 아들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조선을 반석위에 다시 올릴 꿈을 꾸었던 것이다 . . . . . . . . . . . . . . . 그러나, 오호통재라. 슬프고 슬픈지고, 정조는 1800년 마흔 아홉의 나이로 별세한다. 이로서 조선은 르네상스의 기운을 상실한다. 이후 주지하는바처럼 조선은 세도정치로 몰락의 길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