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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날 시화전 작품>
1) 사랑해
이경덕
가장
듣고 싶은 말
가장
하고 싶은 말
그러나
가장
어려운 말
2) 낚시질
김 국 자
나도 한땐
대어를 낚고 싶었어
미끼를 끼워 힘껏 던져보았어.
낚싯대가 흔들거려
당겨보았더니 빈 깡통이었어
다시 시도했지만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어.
계속 허탕 치다가 오기가 생겼어.
마음을 비우자
그리고 기다려보자.
마음을 비웠을 뿐인데
머리가 맑아지더니
아름다운 언어들이 떠올랐어.
대어가 아니면 어때
내 그릇에 맞으면 되는 거야.
3) 한소리 들을까 걱정된다
소운 김양호
나는 늘 뒤처지는 뒷것이었다
어제도 서툴렀고 오늘도 서투르다
늘 생경한 하루하루 능숙함이 부족해
애써 사는 난 누구도 관심 없는 뒷전이다
유년 시절 학교에 가면 존재감 없이
학생들의 머릿수만 채워주는 숫자에 불과했고
남들 다하는 것들이 어려워
느릿느릿 잘못하고 능숙하지 못해 늘 뒷자리였다
사회 통념상 단단한 프레임에 갇혀
기다리라면 기다리고 일어나라면 일어섰고
앉으라면 앉아 생각 자체를 못하게 하는 먹통 세상
세상살이가 굽이굽이 장애물이여
한 떨기 여린 꽃잎처럼 스치는 바람에도 살랑살랑
신세 한탄에 술병이 늘어가듯
변변치 못한 콤플렉스만 켜켜이 쌓여만 가고
매일매일 뒤처지지 않으려고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따라갔는데 허송세월
나에게는 오늘이 전부였구나! 늘 펼쳐지는
익숙한 일상이 소중하고 신비롭고 경이로운 것임을
오늘도 내키는 대로
내 맘대로 행동해서 한소리 들을까 걱정된다.
4) 소나기
정운일
우산 들고 가면
멈추고
우산 놓고 가면
주룩주룩
약 올리는
심술쟁이
너는 좁은 소등을
두 쪽으로 나눈다지
소뿔은 주룩주룩
꼬리는 햇님 방긋
좁디좁은 소등도
나눌 수 있다니
참 대단하다.
5) 서귀포 해녀 삼춘
한 휘 준
유채꽃 피고 지는 오름에 묻은 아들
억새가 휘날려도 잊지를 못 하겠어
가슴팍 테왁을 잡고 물질 속에 풀어두네
빨갛게 꽃잎마다 동백꽃 울던 세월
바다에 묻은 아들 물질로 잊어볼까
지고 온 망사리 가득 숨비소리 내뱉고
빨간색 등대 밑에 늘그막 하르방은
한 사발 조 껍데기 독주를 마시면서
할망은 언제쯤 오나 기다리다 지쳤다
6)마음
신은효
구름 위를 올라갔다
발끝까지 내려갔다
가까이 있다가도
저만치 멀어지고
내 것인데
내 것 같지 않고
네 것인데
내 것만 같은
7) 공
방은
나는 둥글둥글
어디든 가는 공이다
세모둥이와 네모둥이가
채신머리없다고 구박이다
짱 박혀 있으란다
허나 니는 모르제
새로운 세상을 보는
째지는 이 기분
허나 니는 모르제
우주만큼 넓은
이 큰 마음
8) 갈대소리
신영석
바람이 전하는 말 잎새에 새겨 놓고
물안개 피어나는 강기슭 사연 담아
별들이 쏟아지는 밤 사랑 노래 짓는다
연주는 서툴러도 사연이 워낙 깊어
나그네 발길 잡는 인적 드문 강나루
바람도 숨을 죽이면 갈대 소리 접는다
9)
한 뼘 키우기
안종완
다복솔이
추운 겨울을
초록으로 이겨내고.
수런수런
끄덕끄덕
봄이 왔다 속삭이며,
노란 꽃가루
바람에 실어
골고루 보내더니,
키가
한 뼘
쑤욱 자랐다.
10) 뭉게구름
강창호
하늘에 뭉게구름 두리둥실 떠 있다
순풍에 돛을 단 듯
근심 걱정 등에 업고
바람 따라가는 순리에 길
새 모양 동물 모양 사람 모양
구만리 장천 커다란 산이 되기도 한다
뜨거운 태양을 막아 쉼을 주고
검은 비구름 되어 산과 들에
생명의 물 내리고
오염된 세상 하나하나 지워간다
인생은 바람과 유수처럼
덧없이 흘러가는 거라고
한 수 가르쳐 준다
11) 낙산길
박인수
흥인지문 세월 앞에
펼친 일상
한양 도성
스치던 길
야생화 화원으로
거듭난 느림 길
전망 모습 도심은
이렇게 흐르는데
이 여름은
언제나 더위의 물결
멈추려나
12) 할미꽃
이순향
삶의 질곡 넘으셨나
등 굽은 할마씨가
보송보송 솜털 이고
남산골로 터 잡으니
한옥에
묵은 처마가
친구 삼자 반기네
13) 그러려니
이원각
황천길 가는 길에
마음을 비우구려
두견새 밤에 울건 참새들 짹짹대건
가시면 못 듣는다네
그러려니 하시오
14) 가을바람에 단풍잎 내걸릴 때엔
신동일
시원한 가을바람에
늘어선 가을 나무, 분홍 노랑 단풍 내걸릴 땐
단풍잎 사이마다 내 마음결도 내다 건다
거둬들이는 마음 자락마다 조롱조롱 분홍 노랑 단풍 단풍
가끔은 사람사이 옹이 진 마음결도, 분홍, 노랑에 지워진다
흠결 진 마음 탑새기도 단풍바람이 두둥실 감싸간다
해맑은 하늘 드높이 열리고
시원한 가을바람에 단풍 살랑일 때는
묵정밭 기경하듯
닫힌 마음 활짝 열고
가을바람 한번 쐬어 준다
갇혀있던 마음결
15) 낙조落照
취운재 박성철
세월은 길 위의 애뜨랑제
다시 한 해의
단풍 물든 사연
찬 바람에 흩어 나네
산막에 묻힌 하루가
아득한 그리운 하나 지우지 못해
눈망울 붉게 물 들이 다가
서녘 산너울
활 활 태우는
낙조落照여.
16)내 삶의 기록
설무 정기숙
매 순간 내게 주어진 일상
그냥 흘러 버리기보다
머리에 맴도는
크고 작은 일상의 기록이
언젠가는 소중한 큰 변화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물 흐르듯 생각 없이
그냥 흘러버리면
먼 훗날 내 삶의 뒷모습은
흔적 없이 잊혀지는
영영 사라질 뿐
그러기에 기록은 소중한 것
17) 두물머리 연정
한신섭
두물머리 맑은 물 수종사로 올리니
운길산 천년사찰 은행목 대웅보전
삼정헌 풍경소리는 묵언을 깨우고는
은은한 물결들을 정성스레 다기에
초의가 채우고서 불현듯 꿈속에서
수종사 삼정헌으로 다우들을 부르니
물방울 떨어지면 찻잔은 종소리 되어
조안의 다산약용 추사정희 부르고
시공간 너머 동산과 백하도 불러주네.
18) 갈대의 마음
조현상
세상을 산다는 건 강변의 갈대와 같아
비바람이 몰아쳐 여린 줄기 흔들어도
모질게
눈물 참으며
너처럼 버티는 것
푸른 잎 빛바래고 머리는 박꽃인데
저녁노을 품에 안고 밤새워 서걱대며
풋풋한
젊은 날의 꿈
아쉬운 듯 반추하네.
19) 들녘의 아버지
박옥주
헌 옷도 좋아,
헌 모자도
괜찮아.
사람들이 웃어도
참새들이 눈치 줘도
난 주인이야.
들녘의 아버지!
나를 믿고 벼들이
익어 가는데
그 믿음 버려선
절대 안 되지!
오늘도 따가운
들녘에 서서
온종일 참새 쫓는
허수아비 아버지!
20) 벚꽃이 필 때면
石泉 전성훈
흰색과 분홍색 꽃이
하늘을 뒤덮은 날
하늘에서는 소리 없이
눈 같은 꽃비가 내리고
꽃잎이 춤추는 거리에는
웃음꽃이 수를 놓으니
꽃향기에 취해 길을 잃어도
얼굴엔 미소가 넘쳐흐르는데
검버섯 속에 맺힌 눈물은
잃어버린 옛날을 그리워하네!
21) 매미소리[蟬聲]
이 승 창
가로수 녹음 속 아침서 저녁까지
왕매미들은 우리들 여기 있소
와아앙 와아앙 집단으로 울어 댄다
한낮 땡볕 땀이 옷을 적시는데
한가한 매미 울음소리에
이상하게도 시원함이 느껴진다.
오육 년 간 긴 세월을 궁벵이로
땅속 암흑에서 기다리다가
마침내 제 때에 고난의 허물 벗었다.
무거운 허물 벗고 우화(羽化)해
등선(登仙), 인간들의 분주함을
우롱하듯 한가롭게 태평가를 부른다
오랜 세월의 고난을 이겨낸
기쁨일까 환골탈태 자랑일까
시원한 노래 곡조 뽑아내는 여유
나의 귀엔, 세상 사람들아
사욕(私慾)의 멍에 벗어라 하는
소리로 들리는 것은 어이된 일인가.
22) 기름매미의 소리
정명하
찌르르르 찌르르르
우는소리가
기름 끓는 소리 같다
뜨거운 여름날이
너무 좋아
대지를 뒤흔드는
울음
존재를 나타내는
한여름의
전령이다.
23)바다
김민섭
바다는 물씨(水種-수증기) 텃밭
우주(하늘)는 알곡(구름떼) 저장고貯藏庫
바다와 강 개울에서 생성生成되는
애당초 수종은 순수하다
하늘을 맴도는 숙성熟成기간
지상에 이르기 천년千年
온 누리 샅샅이 흐르고 흘러서
온갖 용처에 쓰이고 버려진 오염된 물도
바다는 숨고르기(물때)로
더럽혀진 찌꺼기까지 본디대로 재생
공중에 날려 보내기를
억겁의 세월 윤회輪廻함이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함도
물의 윤회를 이룸이리라.*
24)‘묵매’에 붙여 (2행은 다른 글씨체로)
이 승 영
원나라 왕면의 시 묵매
7언 4구 맑은 기운 구구 절절
내 모세혈관까지 흐르는 듯하다
내 집에서는 벼루를 연못가 매화나무 밑에서 닦는데
꽃이 필 때엔 꽃 덜기마다 연한 먹빛의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걸 좋고 신기하다고 자랑함은 아니네
다만 천지의 맑은 기운이 꽃에 머문 것을 알릴 뿐이다.
초대작가 서원의 먹물 머금은 묵매
아픔의 가지 끝에 피는 속살의 묵매화
아둔한 시심에 울림으로 피어나는 꽃잎
시어 살포시 싹트도록 마음 맑게 닦으리
두 무릎 낮추면 겸손한 언어 낚여지겠지
떨리는 손끝, 먹물 찍어 행간을 읽는다
25)11월
한선희
우듬지 사이로 흐르는 쪽빛 하늘에
외줄을 건너가는 마지막 숨결 하나
퇴색하여 버석이는 서글픈 노래
무심한 암자에 쓸쓸한 섬돌에는
주인을 잃어버린 세월의 더께가
부유하는 가슴에 발자국 입혀서
미지로 빠져서 바람 타는 오감을
방황하는 늦가을 살포시 여미어
독방에 가두어 잠들게 하는 달
26) 산수유
최성옥
숨 가쁘게 꽃잎부터 터트리더니
꽃샘추위에 여린 꽃잎 바르르 떨더라
긴 겨울의 이삿짐 밀어내고
봄을 알리는 전주곡처럼 노란 꽃은 피어났네
알알이 맺은 열매들 풋풋한 향기 내뿜고
태양빛아래 붉게 물들며 익어가네
만물은 태어나면서 서서히 시들어가지만
산수유는 쓴 약이 되어 사랑의 잉태를 꿈꾸네
27)꼬막
조금래
바다에 젖어 살아가는 몸
뭍에 풀어놓는 사랑
만선을 꿈꾸다
질척한 삶 떨치지 못해
그냥 바다가 좋아서
바다 냄새 가득한 뭍에 돛을 내리고
막걸리 술잔 속에
툽툽한 손이 풀어놓는 짭짤한 사랑아
쩌어억 벌린 네 입에서
아직 펄럭이지 못한
만선의 깃발이
푸른 바다로 살아와 넘실거린다
28) 한글날
황우정
오늘 당신이 태어난 날을 축하합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숨 쉬며 사는 저는
당신 없는 삶을 감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뛰어난 통찰로 명명된 꽃과 나무와 새의 이름을
온전히 해석하지 못함을 아파합니다
풀꽃처럼 유연하고 마음 또한 넉넉한 당신은
점 하나와 작대기 두 개만으로도
모든 이와 대화가 가능한 소통의 달인입니다
가장 간단한 것으로 복잡한 것을 표현해 내는 언어의 마술사
당신은 이제 아프리카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세월 따라 당신의 용모는 조금씩 변해왔지만
저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자꾸만 당신이 보고 싶은 날
당신과 함께 풍성한 시詩밭을 가꾸는 꿈을 꿉니다
29) 지상의 좁은 문
德 和 전상욱
왼손에는 이력서
오른손에는 자격증과 교육 이수증 들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든다
전상욱취업컨설팅 출입문 입구
까맣게 줄 선 채 기다리다가
내 순번이 다가와서야
겨우 문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도봉구 강남구 양천구…
저마다 근무 희망지는 다르지만
목표는 오직 하나 취업이다
상담 마치고 나오는데
길 건너편에 복권 가게가 보인다
로또 한 장 구입했다
날밤 새우는 비정규직
최저 임금이면 어때
내일을 설계하며 잠을 청했다
30) 엄마
김윤숙
엄마!
자식들의 목소리엔
악보가 들어있다.
엄마를 부르는 도레미파솔라시도
엄마는 그 음계에 따라
하루의 운세가 달라진다
아이들 생일달이 차오면
서리발처럼 솟았다 가라앉는
에미들의 몸속엔
제자식 이름만 들어도 툭 터질 것 같은 바다 하나 일렁인다.
31) 별 따기
윤준경
사랑한다고 고백한들
무엇 하겠니
우리 사이 이렇게 먼 데
이별하자고 선언한들
무엇 하겠니
어차피 우리
만나지 못할 걸
별은 하늘에서만 살지
눈물겨운 이에게
보석을 나눠주며
따고 나면 이미
별이 아니지
32) 술맛
김정자
술은 여러 가지 맛이다
안주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분위기나 기분도 달라진다
옛날 애인 맛을 안주 삼아 한잔
배신의 맛을 안주 삼아 한잔
감사의 맛을 안주 삼아 한잔
그리움의 맛을 안주 삼아 한잔
안주를 찾아다니며 마시는 술
인생 맛이 제일 쓰고 또 제일 달다
이 좋은 친구들을 매일 만나고 싶다
33) 진눈깨비
도경원
못 견디도록 슬퍼서
눈물로라도 흘러내리지
주체 못 할 희열에
하늘하늘 춤이라도 추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바보인가 참 사랑인가
34) 꽃이 필 때
장혜자
꽃이 필 때 아프단다
그래서 소리도 못 내고
가슴만 태우는걸
꽃망울 터트릴 때도 울지 않는걸
거친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자신을 지켜내는걸
향기로만 말하는걸
고단한 하루하루를 살면서도
불평하지 않는걸
그래서 그토록 아름다운걸
왜 몰랐을까
35)쉼
이승영
못 말리는 게임 세대
회초리에 쫓기듯 컴퓨터에 몸을 맡긴다
옆 못 보게 시야를 가린 나귀나 다름없다
인디언들은 말 달리다가 한참씩 멈춘단다
영혼이 뒤따라오기를 기다려
달리 생각하면 말을 쉬게 해주는 것
앞만 보고 내달리는 요즘 애들
셀룰러폰도 쉬어줘야지
우리 모두 쉼이 필요해
*
쉼이 있는 가을 기원합니다!
행복이 주렁주렁 열리고요.
36) 자귀나무 꽃그늘 아래서
이문진
님 보고 싶어
행여 만날까
바닷가 찻집에 와 기다렸더니
서울 간 님은 오지 않고
밤새도록 철퍼덕거리는 파도 소리
애간장을 다 녹이네
자귀나무꽃 만발한
꽃그늘 아래
님마냥 품어있는
노랑나비 한 쌍
사랑해요
사랑해요
속삭이고 있네.
37) 아름다운 우리 한글
한 휘 준
흰 눈길 바위 틈새 청 노루귀 올망졸망
오순도순 모여 앉아 두런두런 밤을 새니
한글아 네가 없으면 이 고운 말 어떡해
38) 나의 아리랑
함 세 린
아직은 그 가락을 다 듣지 못했지요
휘어서 스멀스멀 품속을 더듬지만
어둠이 대낮보다 더 환해지던 그 얼굴
성에 낀 유리창이 녹았다 다시 얼고
눈 속에 매화꽃이 향기를 재워가듯
끊길 듯 저린 그 울음 삶의 등불 됩니다
39) 그림 그리는 여자
정옥임
거베라 꽃말은 신비 수수께끼
뾰쪽 끝자락 발랄한 꽃
얼굴이 백 가닥도 더 되겠다
보여주려는 게 저렇게 많아야만 했을까
모두 닮았지만 사뭇 다른 모양 뒤틀리고
엎어지고 제쳐지고 뒤둥그러진 모양새
낯바닥은 그냥 생김일 뿐 세어본다
모두 40개의 꽃잎 눈이 시다
꽃도 나를 꿰뚫어 본다
사실 내 얼굴에도 찌그러진 부분이 있다
눈이 멀어버릴 지경이다
발이 저린다 제 발이
꽃이 나를 먹어버릴 것만 같으다
40) 강촌일기
함동선
구곡폭포가 허리 곧추세우다가
물줄기가 쏟아진다
하늘은 서너 평이 될까
여름이 간 물길 따라 흘러가는 단풍잎 하나
입술연지 짙게 바른다
새들 수다 잔걸음 치는 어둠 속에
불 켤 새 없이
달이 뜬다
41) 동행인
소화 김경숙
석!
황갈색 곱슬머리
다정한 속삭임이
귓전을 간지린다
근엄하게 울려 나오는
다정한 목소리
마음의 따사로움이
온몸의 세포들을 자극시킨다
커피 향 같은 대화 속에
삶의 향기 배어나고
따뜻한 앞길이
안갯속에 묻어난다
눈빛으로 꽃피고
청각으로 듣다가
내 마음에 향기와
목화솜 같은 포근함을 사랑으로
세월의 시간 속에
다정한 삶의 여운이
마음속 깊이 새겨져
사랑과 축복의 길이 훤히 열린다
42) 깃발의 혼
강정화
혼자서 오를 수 없는 꼭대기
누가 그대 하늘에 매달았는가
하늘 가로지르는 당당함으로
거부할 줄 모르고 매달렸는가
흔들려도 어지럽다 말거라
때리거든 흠뻑 맞아라
홀로 있다고 외롭다 말거라
처절한 아픔이 곤궁할 때까지
극기의 날 온전히 견디어라
43) 사랑의 나래를 펴고
나선자
그대의 외로운 가슴에 바람이 분다.
나의 지친 가슴에도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면 어이하리요.
흠뻑 비가 쏟아지면 어이하리요.
빗줄기를 부여잡고,
그대 마음이야 오실 테지요.
그대가 만들어 준 사랑의 나래를 펴고,
비를 반기며 찻잔 속에서 그대를 만난다.
그대는 태연히 웃고만 있습니다.
나는 그리워도 참고만 있습니다.
내 맘속에 들어온 그대, 왜 볼 수가 없나요?
환한 빛으로 그대 발걸음 비치오리다.
44) 4월 단상
김형옥
질척질척 비 오는 4월
지붕이 까맣게 내려앉는다
뒷산은 빗속에
훌쩍 키가 자라고
그토록 그립던 사람들은
꽃 속에 몸을 누이고
향기로 나를 부른다
나는 눈물로 너를 보낸다
45) 천지라는 찻잔
신 현 득
백두산 천지가
한 개 그릇이라.
들여다보던 봉우리도
물그림자로 잠겨 있고,
요동벌 흰구름도 지나다가 잠기는
물그릇.
호랑이도
곰도
사슴도, 와서
마시고 가는 물그릇.
재미있는 찻잔이군 그래.
“고여 있기만 하면 뭘해.
들판을 적셔 고루 물 마시게 해야지.”
이 커다란 찻잔을 따르는 손은
우리 큰할아버지, 큰 손이야.
한 손으로 찻잔을 잡고
달문 쪽으로 약간만 기울이면,
”졸졸 졸졸 ….“
개울이 돼 흐르다가,
장백폭포에서
소리치며 내리뛴다.
”쿵 쿵!“
”강이 되는군.
고구려 땅 송화강이 되거라!“
할아버지 말씀
46)꽃
金容吉
나는 나를 보고 웃고 있네요
그런 마음씨밖엔 가진 게 없는
나니까요
47) 발바닥 공원
소정 김기자
푹푹 찌는 여름날에
시원한 바람과 구름이 머무는 곳
정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발바닥 공원 커피숍에서
차 한 잔을 시켜놓고 창밖을 보니
무지갯빛 선율 따라 선한 모습으로
서 있는 그대 커피 향과 그대가
모락모락 피어납니다.
48) 밝은 달 깊은 시름
연산군
비 개고
구름 갇혀
밤기운 맑으니
달 밝은 윤각에
꿈 이루기 어렵구나
해마다 좋은 때를
구경할 수 없으니
어옹의 한평생을
지남만도 못하네
49) 이제는 나의 춤을 추고 싶다
유서영
이제 나는 춤추고 싶다.
누구의 춤이 아니라
내 몸과 마음의 떨림에서 저절로 나오는
나만의 춤을 추고 싶다.
봄날 미국 모홍크 :(하늘 위 호수)를 발견한 인디언처럼,
여름 파도를 즐기는 마누이 해변의 원주민처럼,
가을날 드넓은 몽골의 대지 위에서 춤추는 여인처럼,
겨울날 눈 덮인 노르웨이 호수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사라지는 새처럼 말이다.*
50) 만남
김 사 랑
가을이 오는데
떠나고 싶지 않은 듯
그렇다고
내 안의 너와
머문 시간들
가을 초입에서
곧 보내고
떠나야 하는데
나의 사랑이
미흡했지만
그래도 뜨거웠다
51)코스모스
정심 김덕성
숨소리에도 꺾일 듯
추풍에 휘어질 듯 날씬한 몸매
살랑살랑 춤추는 가을꽃
호젓한 언덕길 길섶
서로 사각사각 사랑을 속삭이며
사랑의 바이러스 토해내며
행복을 나누어 준다
자연에 포근히 안겨
하늘의 뜬구름도 미소 지우고
고추잠자리와 함께 노니는
사랑스러운 코스모스
파란 가을 내음 풍기고
가슴에 스미는 그리움도 잊은 채
사랑에 젖은 아름다운 여인
순정의 코스모스
52) 흙 속에 무지개가 있다
이혜숙
지난겨울 누군가
화단에 검정비닐을 씌우고 흙으로 덮어 놓았다
흙 속에 무엇을 숨기었는지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다
나는 지나갈 때마다 그 정답을 찾으려고 관심 있게 보았다
햇살이 화단에 내려와 두런거리며 종일 놀다 돌아가고
생명수 같은 봄비도 밤새 내려서인지
이불을 걷어차듯 흙을 밀어내고 여린 싹들이 뾰족이 나왔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는데
새싹 너를 보아서는 정답을 모르겠구나
조금만 더 관찰한 후 정답을 맞히려다
화단을 가꾸시는 할아버지께 여쭤보니 튤립이란다
각양각색 예쁜 빛깔로 화사하게 웃으며 반겨준다
화단의 흙은 무지개를 품고 사나 보다
어떻게 색깔을 알고 빨강 노랑 분홍 꽃을 피워낼까
꽃이 지고 나면 어떤 색을 품고 있는지 아무도 모를 텐데
할아버지는 내년에 색깔별로 심으려고 결심하신 듯
꽃대마다 자기 색의 이름표를 목에 걸어 주었다
새봄이 되면 혹시 구근이 색깔을 잊을지라도 흙은 기억하리라
그리하여 갖가지 색으로 꽃들을 피워낼 것이다
아, 흙 속에 무지개가 있다
53) 등본
최영숙
꼼지락꼼지락
자벌레처럼
참 멀리도 걸어왔구나
몸 밖으로 걸어 나온
내 발자국
애써 지우며 걸어왔는데
나의 삶의 궤적을
단단한 필적으로 새겨 놓은 너는
내 기억력을 하나둘씩 복귀해주고 있구나
54)그리움
신화섭
억겁에 세월을 돌고 돌아
이승에서 만난 인연은
행복
백년해로 미루고
본성 찾아간 그대는
오색의 환한 빛
하나 될 날을 기다리며
기도로 채우는 안타까움은
그리움
55) 어휘를 즐기다
은천 恩泉박승연
꽃길 위에
건너편 박새 접속어다
나도 그 틈에 끼어서
접속사 그림을 그려 간다
한낮의 오후를 즐기는 새
길손을 부르는 생강나무꽃
찰나에 스치우는 봄빛의
접속사다
56) 강아지풀
윤채원
여름 한철 지천으로 뿌리내리는
아직 너는 강아지, 강아지, 강아지
잔바람에 머리 흔들며 설운 마음 감춘다
바람결 하나 상처 주지 않으며
질긴 억새의 언어로 노래하지만
누구 하나 예쁘다 불러주지 않는
가엾은 강아지, 강아지, 강아지
세상 낮은 곳 호흡하다가
발 빠르게 달려온 가을 문고리 잡고
묵묵히 스러지는
지상의 작고 아픈 이름 하나
57) 뱃사공 연가
小花 김영숙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은 고택엔
아직 여름이 남아 서성이고
골짜기 터전 삼아 살아온 뱃사공
산이 내어주고 자연이 허락한 삶 속에서
산허리 휘감고 유유히 흐르는 강줄기
추억이 묻어있는 나룻 터
바람이 실어다준 술 익은 향기에 취해본다
강폭 좁아 줄 배 타던 흔적마저 사라진 나룻 터
젊었던 뱃사공 굽은 허리춤에 쌈지만 대롱대롱
오일장 혼자 남아 뻥이요 뻥 호박엿 가위소리
난장판 정겹게 반긴다
곰탕 한 그릇 탁배기 한 사발은
덧없이 흐른 세월 시름을 달래주고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젓가락 장단에 맞춰 뱃사공 추억 한 사발로
나루터 세월 줄 배에 실어본다
58) 백로 아침에
들샘 이흥우
토해낸 구역질 꿈
잔별로 영글어서
해맑은 삶을 보듯
풀 끝에 맺혀있다
해 뜨면
사라지는 줄
까마득히 잊고서
낮 더위 밤새 식혀
풀 끝에 맺힌 이슬
지친 삶 말해주듯
욕심이 화가 될까
내 인생
가을 하늘로
남은 삶을 닦는다
59) 갈 대
조영희
가을빛 발자국에
긴 목을 늘여 빼고
지나가는 바람에게
귓속말 건네고는
살그락 옷깃 여미다
손가락을 베었다.
수련 연못 속 빠져 있는
시간을 건져내며
인연의 푸른빛을
꽃잎새에 포개 얹은
달빛도 기대고 앉아
염주알을 세고 있다
60) 봄을 알려주는 알람시계
정한규
3월이면 앙상한 나뭇가지에 새 옷 입히고
겨울잠을 자던 동물도 눈을 뜬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기지개 켜고
기다리던 봄을 맞이할 채비를 한다
3월은 내가 그리도 기다리던
봄을 알려주는 알람 시계였다
뻐꾸기시계처럼 기다리던 봄이 고개를 쑥 내미니
봄꽃을 기다리는 내 마음이 들뜬다
봄꽃이 피는 날이면
내 마음에도 꽃이 피겠지?
기다리던 봄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소리에
우리의 관계도 봄꽃처럼 활짝 피었으면 한다
봄꽃이 피면 보자던 그대가
너무나 보고 싶다
61) 왕릉(王陵)의 그림자
이경배
고요한 바람 속에
역사의 숨결이 스며든다.
황제의 꿈, 권력의 싸움,
무너진 왕국의 잔해들,
그 속에서 나는 묻는다.
이 권력은 누구의 것인가?
영원할 것 같던 그 자리가
이제는 차가운 돌로 남아,
유구(悠久)한 세월의 흐름 속에
바람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다.
62) 벚꽃잎 잡는 날
창동초등학교 4학년 3반
이서림
살랑살랑 벚꽃잎 내릴 때면
폴짝폴짝 토끼처럼 뛰어본다
벚꽃잎이 땅 위로 사르르 떨어져 버렸다
덩실덩실 나뭇가지 흔들리면
팔딱팔딱 개구리보다 높이 뛰어본다
벚꽃잎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허공에 박수소리만 짝.짝.짝.짝.
벚꽃잎이 약 올리며 도망갔다
벚꽃잎이 내 손 안으로 들어와
보리 보리 쌀!
어느새 내 손안에 벚꽃잎이 한가득
63) 강 아 지
창동초등학교 5학년 이 지 아
삑, 삑, 삑 소리가 들리면
“멍 멍 멍”
문이 리면 먹이를 본 사자처럼 달려오네.
먹을 걸 들고 있으면 후다닥 달려오네.
“간식 먹자” 하면 꼬리를
살 랑 살 랑
“산책갈까?”라고 말하면 더 신나게 달려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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