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자(孔子)의 영정
성자(子)씨 공(孔) 휘 구(丘) 자 중니(仲尼)
출생 기원전BC 551년[1] 9월 28일, 노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郰邑)
사망 기원전BC 479년[2] (71세-72세), 노나라
직업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 작가, 시인
부모 아버지: 숙량흘(叔梁紇), 어머니: 안징재(顔徵在)
처 병관씨(幷官氏)의 여식(女息)
자녀 아들: 공리(孔鯉)
제자: 안회, 자로, 자공, 증자 등
세계 4대 성인 중 한 사람으로 노나라 사람. 유교의 시조로서 중국 최초의 민간 사상가이자 교육자. 어머니는 아들을 얻기 위해 니구산(尼丘山)에 가서 신령님께 기도를 올리고 공자를 낳았다. 그런 까닭에 공자의 이름 구(丘)를 니구산의 구(丘) 자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그가 태어날 때 이마 가운데가 니구산처럼 골이 파여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구(丘)라고 지었다고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예(禮)에 뛰어났으며, 천하를 주유하며 인(仁)에 기초한 정치를 펼치려 했으나 실패하여 유가 경전을 정리·편찬하는 데 전념하고, 제자 양성에 힘썼다. 그 결과 3,000여 명의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의 말을 모아 제자들이 수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그중 유명한 것으로는 논어(論語)》,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춘추(春秋)》 등이 있다. 공자의 사상을 담고 있는 《논어》는 그의 제자들이 스승이 죽은 후 편찬한 것이다.
공자의 논어 “爲政(위정) 4장” 나이를 말할 때(한국,중국,일본)
십세 幼年 : 沖年(충년) * 15세 : 志學(지학) 학문에 뜻을 둔다.
이십대 靑年-20세
이십 弱冠(약관) 비교적 젊은 나이
삼십 30세 立志 뜻을 세운다.-30세 : 而立(이립) 뜻을 세우는 나이
삼십 장년
사십이불혹 [四十而不惑] -나이 사십이 되면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 즉 어떠한 일에도 미혹되지 아니함을 뜻하는 말.
강년-40세
오십이 지천명[知天命] -나이 오십이 되면 하늘의 뜻을 앎 따른다.
애년-50세
육십이 이순 [耳順] -60세가 되어서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이치에 통달하고,
듣는대로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기로년-60세
칠십이 稀壽(희수), 古稀 (從心종심) - 옛 부터 인생 70은 드문 일, 깨달음에 이르는 말
노년-70세
칠십칠세 喜壽(희수)
팔십 傘壽(산수) 우산 접는 나이 수
88세 米壽(미수) 八 +八 수
89세 望九(망구)
90세 卒壽(졸수) 죽음을 높임말
99세 白壽(백수) 100-1수
100세 百壽(백수),上壽(상수), 期願之壽(기원지수) 일백 수
“사람이 나서 10년을 말하여 幼(유)라 한다. 이때부터 글을 배운다. 스물을 말하여 弱(약)이라 한다. 갓을 쓴다. 서른을 말하여 壯(장)이라 한다. 집을 갖는다. 마흔을 말하여 强(강)이라 한다. 벼슬을 한다. 쉰을 말하여 艾(애)라 한다. 官政(관정)을 맡는다. 예순을 말하여 耆(기)라 한다. 가리켜 시킨다. 일흔을 말하여 老(노)라 한다. 전한다(자식에게). 80~90세를 말하여 耄(모)라 하고 일곱 살을 悼(도)라 하는데 도와 모는 죄가 있어도 형벌을 더하지 않는다. 백 살을 말하여 期(기)라 한다. 기른다.” 약관이라는 말은 약과 관을 합쳐서 된 말인데 스무 살은 약한 편이지만 어른으로서 갓을 쓰는 나이라는 말이다.
논어(공자의 말씀)에서는
從心所欲不踰矩(종심소욕불유구) -70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를 어기지 않고
格物致知(격물치지)-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참 지식에 통달되도다.
공자는 70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치를 개달았다는데
인생이란 아홉 개의 구멍을 가지고 태어나서
두 눈으로 바로보고, 두 귀로 바로듣고, 두 코로 향내를 감지하고
입으로는 정걸하게 먹고 진실되게 말하며, 두 구멍으로 배설하는데 막힘이 없다면
그것이 바로 사람이 무리 없이 삶을 이어가는 기본이요, 하늘의 도리가 아닐까 하는,
즉 나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이 천하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깨달음 이었다.
공자(孔子)
成事不說(성사불설) 이뤄진 일이라 말하지 않고
遂事不연(송사불연) 끝난 일이라 충고하지 않는다.
旣往不咎(기왕불구) 이미 지나간 일이라 땃하지 않는다.
중국 유학의 태두 공자(孔子)의 고향, 취푸(曲阜/곡부)의 공묘(孔廟)

곡부성

공묘(孔廟)-취푸(曲阜)의 공부(孔府) 대성전(大成殿)
공묘(孔廟): 공자서거 이듬해(BC478년), 노(魯)의 애공(哀公)의해 처음 세워진 이래 중수를 거듭 현재의 대부분의 건물들은 청대에 세워진 것들이다. 남북1120m, 동서140m에 달하다. 금성옥진방(金聲玉振坊)에서 성시문(聖時門), 홍도문(弘道門), 동문문(同文門), 규문각(奎文閣), 십삼비정(十三碑亭)의 참도를 지나면 대성전에 이른다.

대성전(大成殿)내 공자(孔子)영정

공자(孔子)의 묘
비석에는 '대성지성선왕묘'(大成至聖宣王墓)라고 씌어있다.

공자(孔子)의 묘로 통하는 길
기원전 11세기 주(周)의 무왕(武王)에게 영지를 하사받은 동생 주공단(周公旦)은 제후국의 하나인 노(魯)를 건국한다. 춘추전국시대 800년간 노나라(魯; 때문에 산동성의 차량번호판은 '魯'자가 새겨져 있다)의 수도였던 곳이 곡부이다. 이 도시의 이름을 높인 것은 이 곳이 공자의 고향이자 유교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현재 도시인구의 약 1/5이 공씨성을 갖고 있고 매년 9월28일부터 10월 10일에 달하는 기간에는 공자탄생을 기념하는 이벤트가 열린다. 현재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공자가 태어난 것은 주왕실의 권위가 떨어진 BC551년. 공자가 전국을 유람하고 고향에 돌아온 것이 고희 70세를 앞둔 BC484년. 그후 문하에 3,000여명의 제자를 두고 유교의 사상을 이 곳에서 강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