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 많은 도마 (2) -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
보고 믿는 믿음과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
오늘날 우리에게 ‘보고 믿는 믿음’이란,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고 믿은 것처럼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의 실체를 확인하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과 감격해하는 표정을 보고, 도마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방증(傍證)이지 체험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위에 믿는 사람의 전도와 그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방증을 얻을 수는 있지만, 개인적인 체험이 아니기에 믿기가 쉽지 않고 걸림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는 신앙이 잘 자라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성경공부를 하는 경우 훨씬 믿음이 빨리 자랍니다. 왜냐하면 말씀이신 예수님을 성경공부를 통하여 만나고 이해하면서, 믿기로 결단하고 영접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예수를 주로 시인하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막연한 기도가 아닌 구체적인 기도와 응답받는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갖게 되고 신앙이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보고 믿는 믿음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기 위한 양털뭉치 시험에 응답하시는 것을 보면서 기드온이 큰 용사가 되어가는 것처럼, 방언의 은사와 체험을 강조하는 모 교단의 구역모임이 빠른 확신을 갖게 해 주며, 소그룹에서 성경공부와 기도제목을 나누는 제자양육을 받은 사람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경우가 모두 ‘보고 믿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고난을 겪을 때에 믿음이 빨리 자랍니다. 왜 그런가 하면 고난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고 응답을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확신이 있는 사람은 열심이 있고 역경을 잘 이깁니다.
어린이의 끝없는 호기심과 질문은 알고자 하는 지식욕구의 발로이기에, 이를 존중해주고 채워주면 건강한 인격형성에 도움이 되지만, 귀찮아하고 억제하면 아이의 지식의 문을 닫아버리고 삶의 영역을 제한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 대한 의문을 용납하는 분위기가 교회 안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천성적으로 질문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는데,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지 않는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분위기 때문에 알고 싶은 당연한 궁금증을 눌러버리고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믿음이 있는 척 위장하며 지내게 만드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
(1) 화합하는 믿음
믿음은 하나이지만 거기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도마처럼, 아니 모든 제자들처럼 예수의 부활하신 모습을 만나면서 믿음은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주신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주신 믿음을 근거로 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하여 나의 믿음을 화합(결합)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세계는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믿는 ‘보고 믿는 믿음’과, 그 보여주신 세계를 믿는 믿음을 근거로, 보이지는 않지만 말씀하신 주님을 믿는 나의 믿음으로 나아가는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의 과정이 반복되면서 성장해 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히4:2)
신앙생활을 하면서 고난과 갈등이 있을 때나 기도 응답이 없을 경우, 대개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 즉 ‘나의 믿음을 화합’할 때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큰 풍랑을 만났을 때에 예수께서 바람을 꾸짖어 잔잔케 하신 후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눅8:25) 믿음이 물건처럼 잃어버리거나 어디다 두고 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은 ‘너희에게 있는 믿음(주님께서 주신 믿음)은 이 때를 위함인데 왜 두려워 떨기만 하였느냐? 믿음은 두었다 뭐 할 거냐?’는 말씀이십니다.
즉 주님께서 주신 믿음을 근거로 우리의 믿음을 화합할 기회임을 깨우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때에 우리의 믿음을 적용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보상이 따르되 어린 신앙에는 보이는 세계를, 성숙한 신앙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열어주십니다. 보이는 세계를 열어주신다는 말은 우리가 기도한 대로 응답을 받는 경우를 말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열어주신다는 말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 있지만 깨달음을 주시고 문제를 이길 담력과 받아들일 평안을 주시는 경우를 말합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값지다는 것은 물론 아실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고후4:18) 좋은 집을 갖게 되었을 때에는 큰 기쁨이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보이는 집은 그대로 있어도 그 기쁨은 어느새 스러져 없어지듯 잠깐인 것이며, 보이지 않는 것은 내 인격으로 내 영혼 안에 스며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까지 가지고 갈 수 있으므로 영원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이 땅에서 보이는 것으로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이 세상에서 누리니 잠깐이요, 이 땅에서 받지 못하였지만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받아 누릴 것이기에 영원한 것입니다.
주님은 도마를 위해 다시 오셨으며, 손과 발의 사랑의 흔적으로 도마를 받아주시며,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믿음은 다른 제자들에게 필요했던 것처럼 도마에게도 필요했고, 또한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도마를 비롯한 우리 모든 제자들은 이 주님이 주신 믿음을 근거로 보이지 않는 광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믿음의 항해를 시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믿음
모 큰 교회 대학부의 자매가 암에 걸렸습니다. 신유은사가 있다는 사람에게 안수를 받고 핏덩이 같은 것이 나왔고 이 이야기를 들은 담임목사임은 나았으니 간증하라고 해서 간증하고 전 교인의 축하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매는 몸이 점점 더 쇠약해졌습니다. 어머니 집사님이 걱정을 하면 담임목사님을 비롯하여 부목사님들, 여자 전도사님들도 한결같이 낫는다면서 ‘믿기만 하라’고 격려해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상황을 보면 낙담이 되다가도 심방을 받고 나면 힘이 나는 생활을 반복하다가 급기야 딸을 저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담임목사님은 예배 후에 어머니 집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해 주십니다. “천국 갔어!”
어머니는 이 때부터 깊은 회의에 빠져 허덕였습니다. 죽기 전에 딸의 영혼을 위해 딸의 죽음을 위해 한 번도 기도해 주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습니다. 병이 깊은 딸을 보면서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를 하려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 없는 것 같이 여겨져서 얼른 ‘살려주실 줄 믿습니다!’하였던 겁니다. 목사님은 아무 고민 없이 천국 갔다고 하지만, 어떻게 죽기 전에는 안 죽고 사는 것이 믿음이고, 죽은 후에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인지, 그렇다면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은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인지 말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제가 상담했던 내용입니다.)
이 재철 목사님이 섬기던 주님의 교회 여름 수련회 중에 어린 아이가 사고로 죽었습니다. 장례를 마친 주일날 그 아이의 아버지 되는 집사님이 나와서 다섯 가지 감사의 인사를 하였는데, 1) 모태신앙으로 유아세례를 받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2) 세상에 오염되기 전 순결한 영혼으로 불러주신 것을 감사하고 3) 은혜로운 수련회장에서 불러주심을 감사하고 4) 지금은 빈자리가 크지만 빈자리를 채워주실 것을 믿어 감사하고 5) 사고 후 보여주신 교인들의 사랑에 감사한다고 하였답니다. 또 다음 주일에는 강단 꽃꽂이와 전 교인을 위해 떡을 해왔답니다. (‘회복의 목회’ 중에서) 두 교회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그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모 기업이 주일성수와 뇌물 안 주기, 세금 다 내기를 서원하여 큰 기업으로 자랐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진급시험이 주일에 있어 시험을 보지 않아서 진급에 누락되었던 사람이 회장의 눈에 띄어 특진한 케이스도 익히 알려진 인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시도한 기업이나 사람들이 그들뿐이겠습니까? 또 그런 믿음의 시도를 한 사람은 모두 성공하였겠습니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어려움을 무릅쓰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싸움을 시작합니다.
그 중에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주님 때문에(?) 망하거나 여전히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신앙의 절개를 굽히지 않고 견뎌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36)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3-38)
믿음장이라는 히브리서 11장에는 기라성 같은 믿음의 승리자들이 나옵니다. 승리자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의 자랑스러운 이름과 찬란한 믿음의 행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35절 중간에서부터 ‘또’라고 하면서 승리나 성공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등장시킵니다.
‘악형을 받았고, 희롱과 채찍질 외에 결박과 옥에 갇히는 고난을 당하고, 돌로 얻어맞고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것과 짐승의 가죽을 옷처럼 입고 떠돌아다니고,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고 광야와 산 속과 굴속을 떠돌아다닌 사람들’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을 우리는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으로 분류해 왔습니다. 또 ‘문제를 극복한 사람’과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들을 그렇게 분류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성공한 사람들과 실패한 사람들, 문제를 극복한 사람과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대등한 반열에 놓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서 결론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
‘건강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병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부자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가난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는 요지의 책들이 나왔고 설교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감동적이며 격려가 되고 도전이 되는 말씀들입니다. 그런데 항간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서울대학 병원에도 영안실이 있더라.’
그 책을 읽거나 설교를 들은 사람이 다 나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서울대학 병원에 입원하면서 영안실로 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틀렸다고 하기는 그렇지만 맞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렇게 맞지도 틀리지도 않는, 어불성설(語不成說), 말도 되지 않는 말들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횡행하고 있습니다. 이 말들이 일부 사람들을 고무(鼓舞)하고 격려한다는 것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신실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고 흔들어 놓는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성공 신학(이런 말이 맞는지는 모릅니다)이나 결과 위주의 저급한 신앙이, 말씀을 좇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으로 인하여 고난당하는 당당해야 하고 자랑스러워해야 할, 격려를 받아야 하고 박수를 받아야 할 많은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보고 믿는 믿음’이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0-12)
산상보훈 팔복 중에 7~8번째 복입니다. 의를 위하여 곧 하나님 편에 섰기 때문에 핍박을 받은 자(과거형입니다)는 천국이 저희 것이랍니다. 이 세상에서 받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거나 핍박을 당하거나, 상대가 거짓말로 무고(誣告)할 때에 기뻐하랍니다. 현실적으로 갚아주시지는 않지만 하늘나라에서 하나님 방법대로 갚아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고 의지하는 자에게 반드시 보상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보상이 건강이요 물질이요 문제해결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 그렇게 얘기해줘야 할 것입니다. 송 명희 시인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건강은 잃었지만 건강한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정신 차리게 하는 위대한 신앙인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두 팔이 없는 복음성가 가수이며 수영 선수인 레나 마리아가 그렇습니다. 고등학생 때 전신 마비가 되었지만 붓을 입에 물고 그림을 그리는 조니 에릭슨의 당당한 모습이 그렇습니다. 두 렙돈으로 많은 부자를 부끄럽게 하고 참된 헌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 과부의 후예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걸으며 뛰는 은혜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요나단의 장애자 아들 므비보셋의 의연한 모습이 장애우들을 격려하고 고무하며, 다윗처럼 성공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우리 눈에 들어와야 합니다. 아직도 문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 문제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과 위로와 격려를 주는 믿음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볼 수 있는 눈을 떠야 할 것입니다.
모 교단의 성도들이 은사 체험과 기도 응답을 통하여 뜨거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야 백번 칭찬받아야 할 일이지만, 그들이 구하는 것이 15평 아파트가 30평이 되고 60평이 되는 것과, 티코가 그랜저로 에쿠스로 바뀌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 보이는 것(집과 차)에 집착하다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는 언제 갈 것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보이는 것으로 살다가, 죽은 후에는 보이지 않는 천국에서 살겠다는 심사 같은데, 과연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모 기업이 몇 가지를 지켜 대 기업이 되었는데, 지금도 그 몇 가지만 지키면서, 세상의 기업 경영 수법을 도입하여 더 커지려고만 할 뿐, 커진 기독교 기업이 제시하여야할 기업 모델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것은 여전히 ‘보고 믿는 믿음’의 효력에 매료되어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으로 옮겨가기를 거부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믿음의 함정은 ‘보고 믿는 믿음’의 필요를 외면한 채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을 갖겠다고 애를 쓰는 것과, ‘보고 믿는 믿음’에 안주하면서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으로 옮겨가기를 거부하는 데에 있다고 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하나님께서 풀무 불에서 건져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라고 하며 신앙절개를 굽히지 않았고 끝내 풀무 불에 던짐을 당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말은 보상을 바라지 않았다고 해도 맞고, 바랐다고 해도 맞습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았다는 것은 풀무 불에서 건져내 주시지 않아도 하나님을 외면하지도 원망하지도 않겠다는 믿음의 자세를 말합니다.(단3:19이하) 보상을 바랐다는 말은 불에서 꺼내주시지는 않아서 고통 중에 죽을지라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실 것을 바라며, 우리의 이 믿음의 선택을 인정해주시고 칭찬해 주시리란 보상을 기대한다는 말입니다.
‘보고 믿는 믿음’은 신앙의 결과가 반드시 현실로 나타나야만 하는 믿음이라면,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은 결과가 현실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받게 될 것을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서 다만 쓰임 받는 것만으로도, 드리는 것만으로도 감격해하는 믿음이야말로 참된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주의 이름으로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할 수 있었던 사도들의 믿음이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300 데나리온(1,500만원)짜리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씻은 마리아처럼 섬기는 것만으로 감격하며 아무 바랄 것이 없는 헌신도 그런 믿음입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도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보상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공짜가 없으십니다. 그분은 부자십니다. 주고 싶어서 몸살이 나신 분입니다. 그래서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갚아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환자촌에서 어떤 설교자가 지상 낙원을 ‘찌라도(島)’라고 하더랍니다. “찌라도로 가자!” 그래서 어떤 섬으로 가나보다 했더니,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가난할찌라도’ ‘낫지 않을찌라도’ ‘버림받을찌라도’ 흔들리지 않는, 오히려 기뻐하며 감사하는 경지에 이르는 신앙의 세계로 가자는 말이었답니다. 나환자들을 위문하고 섬기겠다고 갔던 신학생들이, 도리어 그들의 섬김을 받고 깨우침을 받고 부끄럽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해서 울다 왔노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도 ‘찌라도’에 가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마는 자기를 위해 나타나신 주님을 뵙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지만 믿음의 고백이라기보다는 주님에 대한 정의(定意)이며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신 대로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마16:17)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만류하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나라’고 책망하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다도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멋진 신앙 고백적 언어를 사용하였지만 신앙고백은 아니었습니다.(요11:27) 그러나 도마에게는 신앙고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 하나를 위하여 나타나주신 예수님께 대한 감격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버티던 자신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그 예수님께 대한 송구스러움과 감사함이 사무쳐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란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일 후에 도마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의심 많은 제자였으니 별 볼일 없이 살다 갔을 것으로 보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의심을 존중하고 받아주신 예수님을 자신의 ‘주와 하나님’으로 고백한 도마를 그렇게 밖에 보지 못하는 것은 도마에게도 모욕이지만, 그 도마에게 믿음을 주신 예수님께 대한 큰 모욕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도마는 페르샤와 인도에서 선교하다가 살갗을 벗겨내는 잔혹한 형벌로 순교하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