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성
시인, 《한강문학》(22호, 2020) 시부문 신인상 수상 등단, 희곡부문 신 인상 수상(23호, 2020) 해군사관학교졸업(1972), 해군 복무(1972-1993), 세한대 학교 교수 역임, 대한요트협회교육이사(1995), 요트스쿨운영, 한강문학 극시회 회장
몇 년 전 동물원에서 자란 늑대 한 마리가
우연한 기회에 동물원을 탈출 하였다가
잡혀 온 사건이 있었다. 이 극은 동물원 밖의 숲을
처음 달려 본 늑대가 가슴 속 깊이 잠들어 있던
야성을 깨닫고 자신의 의지로
다시 동물원을 탈출하는 이야기이다.
때:수년 전
장소:동물원 주변
나오는 사람:늑대 1
시극.
일인 극.
무대 뒤 흰 장막 외 무대 장치 없음.
최소한의 늑대 분장.
무대:흰 장막을 배경으로 얕은 단이 설치되어 있다.
막이 올라가고 무대 서서히 밝아진다.
늑대 분장을 한 출연자 1 무대 가운데 서 있다
늑대
| 듣기도 싫다. 보기도 싫다. 먹기도 싫다. 나는 오로지 달리고 싶을 뿐이다. 저 검은 숲을! 저 푸른 들판을! 저 빛 속을! 저 바람 속을!
나는 이제야 알았다. 이 철문 밖에 자유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나는 동물원에서 태어나 동물원에서 살며 먹여 지고, 키워졌다. 나는 얼마 후 안락사 되고, 유리 눈알 박힌 박제가 될 것이다. 나는 왜 동물원에 갇혀서 미리 정해진대로 살아야만 하는가? 이것이 운명이란 것인가?
주는 밥 먹고 어슬렁거리다 또 먹고 자고. 이건 줄에 묶여 꼬리 흔드는 강아지와 다를 게 무언가? 저 살찐 강아지와 다를 게 무언가? 내가 왜 애완견이 되어야 하나? 배부르게 해 준다는 대가로? 따뜻하게 재워 준다는 대가로?
동물원 밖의 검은 숲과 푸른 들판을 처음 보았을 때 나의 심장은 얼마나 뛰었는가? 나의 가슴은 얼마나 뜨거워졌는가? 달리고 싶다. 사라지고 싶다.
나는 이 구속과 자유의 경계를 넘어야 한다. 이 철망을 넘어가야 한다. 저 검은 숲을 홀로 지키고 푸른 들판을 자유롭게 달리는 살아있는 늑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나의 의지로 완성하는 나의 삶이어야 한다.
나가고 싶다. 달리고 싶다. 그러나 이 철망은 너무나 높아. 도무지 빈틈이 없어. 이 철벽을 넘어 탈출하기는 불가능 한 것일까?
절망인가? 절망인가? 절망인가?
나는 거부한다. 죽은 닭, 달콤한 과일, 소독약 냄새 나는 수돗물, 딱딱한 시멘트 바닥, 플라스틱 풀, 지지 않는 달, 따뜻한 잠자리 이 모든 것들을.
나는 갈망한다. 깊은 숲속의 은둔, 숲을 지키는 정령들과의 만남, 눈보라 폭풍우 속의 질주를! 굶주림 속의 맑은 정신을!
그러나 나를 가로막는 이 강력한 철망.
아. 차라리 미처 버리면 잊을 수 있을까?
또 죽은 닭을 주는군. 이 먹이는 마약이야. 이걸 먹으면 정신이 혼미해져. 먹기를 더 탐하게 되고 먹고 자고 놀고, 먹고, 어슬렁거리기를 반복할 거야. 그러면 검은 숲, 푸른 초원은 사라지겠지. 죽도록 달리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겠지. 그리고 나도 사라지겠지.
아니야. 아니야. 이것은 아니야.
나는 먹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의지로 먹기를 거부한다.
힘이 없구나. 힘이 빠져 나가는구나. 그러나 정신은 더 또렷해지고 저 검은 숲, 푸른 들판은 눈앞에 더욱 생생해.
|
늑대 쓰러진다.
늑대
| 푸른 들판을 힘차게 날아온 독수리는 검은 숲 위로 날아올라 강하의 순간을 노리며 소리 없이 하늘을 맴 돌고 구름을 뚫고 나온 빛줄기는 높이 나는 독수리를 찬란하게 비추네. 관목 사이에 옹크리고 숨은 작은 새는 바람의 움직임을 엿보고 한 줄기 오솔길은 밝은 빛 쏟아지는 저 언덕으로 아슬 아슬 이어지네.
아름다워. 모두가 자유롭고 모두가 살아 있어.
힘이 없구나. 눈이 감긴다. 그래도 인간들은 여전히 몰려들어 나를 구경하고 있어. 나를 조롱하고 있는 것 같아.
점점 기운이 빠져 나가는 구나. 마치 따뜻하고 배부를 때 맑은 정신이 빠져 나가 듯.
철망 문이 열리는구나, 사람들이 들어오는구나.
아얏. 주사를 놓네.
잠시 후 내가 기운을 차리면 또 먹이고 운동 시키고 재우려 하겠지. 주는 대로 얌전히 먹고 푹 쉬라고 하겠지. 달콤한 설탕물과 죽은 닭 던져주고 꼬리 흔들라 하겠지.
|
사람들이 나가고 늑대 엎드려 있다가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난다.
늑대
| 아무도 없네. 조용하다. 어두워졌다. 주사를 맞아서 그런지 힘이 나는구나.
옳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탈출 하자. 죽은 척 엎드려 있다가 문을 열면 박차고 나가자. 저 문을 밀고 저 담을 넘어 저 멀리 보이는 숲으로 달아나자. 가슴이 뛰는구나.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탈출만이 나의 살 길이다.
사람들이 오는구나. |
늑대 도사린다.
| 자. 문이 열린다. 하나, 둘, 셋! 으르렁. 밀어라. 넘어라. 나가자. 박차고 달리자. 힘차게 달리자. |
늑대 달려나간다.
| 바람은 차갑지만 가슴은 너무나 시원하구나. 숨은 차지만 몸은 날아갈듯. 이 거침없는 자유, 이 신나는 질주. 어찌 배부름에 비할까 어찌 따뜻함에 비할까 달리자. 힘껏 달리자. 저 푸른 들판 끝까지 세찬 바람, 흩날리는 눈보라 속으로 마음껏 소리치며 달려가자. 멀리, 멀리.
이 정도 달려 왔으면 사람들이 못 쫓아 올 거야. 조금 쉴까?
숨을 깊이 들이 마시고 한껏 내 뿜자. 가슴속에 남아있는 비릿한 냄새를 모두 내 뿜자. 호~ 흡~ 호~ 흡~ 호~ 흡~
나 태어나 처음 들판으로 달려 나왔네. 나는 나의 의지로 이 숲을 지키며 홀로 살 거야. 이곳에는 자유가 있어. 이곳에는 나의 의지와 나의 책임이 있어. 나는 이 엄중한 생명 질서 속에서 강하게 살 거야. 이 아름다운 찰나의 세상을.
어두워지는구나. 충만하고 조용한 시간이 다가 오는구나.
숲의 정령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하고 살랑이는 바람은 은사시 나뭇잎을 스치며 지나가네. 반딧불이는 밤하늘의 별들을 모두 따왔네. 어둠은 또한 조용히 다가와 온 숲을 덮고 있어.
나도 저 커다란 등걸 밑으로 들어가 숨어 볼까? 여기라면 숨어서 주위를 모두 살필 수 있겠어. 바람도 앞에서 불어오고.
오늘은 꽤 바쁘고 감동스러운 날 이었어. 이제부터 모든 것은 나의 생각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야.
저 멀리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 그리운가?
나 눈보라 속을 굶고 헤매더라도 결코 돌아가지 않을 거야. 낯선 숲에서 찬 이슬 맞고 잠들더라도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내가 앞으로 지켜가야 할 숲은 어떤 곳일까? 모두가 어울려 자유롭게 사는 곳. 서로를 존중하며 하루 하루를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곳.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 두려운가?
아무도 몰라.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시커먼 먹구름일까? 하얗게 피어나는 뭉게구름일까? 산들 바람일까? 폭풍우 회오리바람일까? 선택은 내 자신의 몫이야. 자. 이제 서서히 꿈나라로 들어가 볼까? 지나간 시간, 어릴 때 기억의 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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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진다. 늑대 잠이 든다.
늑대
| (꿈)주위는 아직 어둠에 잠겨 있네. 이제 저 새벽 살별이 서쪽으로 사라지면 동쪽의 붉은 하늘이 열리고 커다란 불덩이가 불끈 솟고 아름답고 소란한 하루가 시작 될 거야. 무거운 어둠과 침묵은 쏜 살같이 사라지고. 모두가 신나는 하루를 시작 할 거야 반짝이는 이슬. 푸르른 대지 보석 같이 빛 날거야 |
조금 밝아진다. 늑대 잠에서 깨어난다.
|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다니.
배는 좀 고프지만 마음은 충만해. 마음껏 소리쳐 볼까? 나는 달리고 있어. 나는 날고 있어.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네. 인간들의 냄새가 나네. 나를 잡으러 오는 것인가? 달아나야지. 더 먼 곳으로. 달아나야지. 결코 동물원으로 다시 잡혀 갈 수는 없지.
사람들이 가까이 오네. 으르렁. 물러서지 않을 테다. 으르렁. 가까이 오지 마라.
사람들이 먹이를 놓네. 저 먹이를 먹으면 깊이 잠 들겠지. 깨어나면 동물원일 테고. |
호루라기 소리 커진다.
늑대
| 사람들이 너무 가까이 온다. 야수의 심정으로 쫓아버려야지. 물어뜯어야지. 나는 결코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어야지. 불쾌한 기억들을 쫓아내야지. |
늑대 사람들을 공격 한다.
| 다시는 쫒아오지 못할 거야. 단단히 혼을 냈으니까. |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린다.
늑대
| 개들이 쫒아 오는 구나. 불쌍한 녀석들. 나를 쫒는 것은 너희들의 의무일 테지만 나를 지키는 것 또한 나의 의지. 오너라. 싸우자. 목덜미를 물어뜯어 피를 보게 할 테다. |
늑대 개들을 공격한다.
늑대
| 개 녀석들. 꼬리를 내리고 도망가는구나. 너희들도 인간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라. 또 다른 세상이 있어. 새로운 세상이 있다고. 그러나 너희는 사람들 밑에 너무 오래 살아서 차마 떠나기가 어렵겠지. 비극이냐, 희극이냐? 행복이냐, 불행이냐?
더 멀리 가자. 여긴 인간들과 너무 가까워. 멀리, 더 멀리 가자. 도로를 건너고 강을 건너 더 멀리 가자.
꽤 멀리 왔군. 밤새 달려왔어.
여기는 더 깊고 더 넓은 숲이야. 물마시고 풀 뜯어 먹고 좀 쉬면서 한숨 돌리자.
배고프구나. 춥구나. 죽은 닭이 먹고 싶은가? 아니야. 따뜻한 동물원이 생각나는가? 아니야.
눈보라가 치는군. 멋있는 날이야.
저 바람 부는 언덕으로 올라가자. 흩날리는 눈보라 속에 차가운 바람 속에 은빛 갈기 휘날리며 당당히 서자.
숲의 냄새와는 다른 냄새가 나는구나. 숲의 소리와는 다른 소리가 들리는구나. 비릿한 사람 냄새, 화약 냄새. 위험이 다가 오고 있는 것 같아. 알 수 없는 위험이!
|
사람들 소리가 커진다.
늑대
| 나 단 하루를 살더라도 자유롭게 질주하며. 이 숲에서, 이 초원에서 살고 싶어. 결코 박제되는 날을 기다리며 살지 않을 거야. 하루를 살아도 내 마음대로 살 거야. 멋있게 살 거야. 자유롭게 살 거야. 그리고 시나브로 자연으로 사라질 거야. |
탕.
한방의 총성이 울린다.
늑대
| 윽 인간들아! 늑대가 늑대의 꿈을 가지는 것도 죄인가? 달리는 것도 죄인가? |
늑대 쓰러진다.
맑은 눈물 한 방울 이슬처럼 반짝이며 떨어진다.
늑대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