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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5일, 송하(松下 : 집사람의 아호)의 동기(12회)인 홍집(弘集) 박종봉 교수의 초청으로, 포항 호미곶에 있는 홍집농원을 방문했다. 정년퇴직 후 갖고 싶었던 전원(田園)생활인지라 역시 동기(同期)인 부산체육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진여(眞如) 윤주락 씨 등 몇몇은 이미 오래전에 방문하여 견학한 적도 있었다는데, 시쳇말로 ‘홀딱 반했'던 모양. 몇 번이나 가보자고 했었지만 게으런 성품에다 그 일이 여간 부지런하지 않고는 어렵다는 생각에 밍기적 거렸다. 그 후 진여(眞如) 교장은 밀양에다 큼직하게 땅을 마련하고 근사한 농장을 이룩했다기에 역시 송하의 성화에 못 이겨 밀양까지 찾아가, 막 시작했다는 과수원까지 잘 구경하고, 중형(仲兄)되시는 분이 쓰셨다는 ‘자아수심(自我修心)’이라는 서첩(書帖) 한 권을 덤으로 얻어 오기도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언 십수여 년을 넘겼다.
서첩 표지와 속의 글씨
어째 그 미련인가 인연이 아직도 남아 있었는지 박 교수가 초청한 것이다. 날짜·시간까지 정하고 8회 내 동기인 한메 성용제 형에게도 연락하여 같이 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한메와 홍집과는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한메와 나 그리고 송하(松下)는 해묵은 인연이 있는지라 얼른 집사람이 전화기를 눌러댔던 것이다.
소시적에도 차를 몰고 지도(地圖)를 들고 몇 차례가 가본 호미곶이기도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고속도로’가 구석에서 끝까지 연결해 주는 데다, “300m 앞에 좌회전 하세요…” 하는 예쁜 목소리의 내비(Navi) 덕분에 어렵잖이 갈 수 있었다. 한데 빠르고 편하기는 하지만 옛날처럼 가다가 차 세우고 지도 한 번 펴보고, 길가에 서서 ‘쉬~’ 하는 일은 없었지만, 도중에 펼쳐지는 아기자기하고 푹 익은 삶의 풍광들은 도로 위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 또 다른 아쉬움이 되기도 했다. 세월보다 더 빨리 변하는 것이 ‘개발’이라는 이름의 변화인가 싶기도 했다. 물과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 바다 위에서도 용케 항구를 찾아다닌 나였기에 지금도 송하는 어디 간다면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다. 실력(?)을 믿기에….
호미곶 해맞이 광장을 거닐면서 홍집이 느닷없이 물어왔다. “선배님, 기(氣)가 있다고 믿습니까?” “기?” 엉겁결에 받은 질문이었지만 평소 내가 겪고 생각해온 것이 있었기에 “있지. 나는 그걸 자연현상이라 믿고 있다.”고 답하고는 얘기가 끊어졌다. 이참에 내가 느끼는 ‘기(氣)’에 대한 무지막지한 소견을 적어보고자 한다. ‘도사 앞에 요롱 흔드는’ 꼴이 아닐까 싶어 양해를 구하면서….
흔히 듣고 매스컴에서도 보는 “기가 세다”느니 “기를 끊으려 했다”느니 “그는 바람기(끼)가 있다”는 등 의 얘기들을 듣고 본다. 또 “기를 쓰다”, “가가 차다”, “기를 펴다” “기가 막히다” 등등 많이 사용한다.
그렇다면 기(氣)라는 것은 자연환경에 대한 것임과 동시에 우리들의 마음 혹은 인식작용에도 있다는 의미가 되리라. 그런데 이 기(氣)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것도 분명하지만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도 틀림없다.
“호미곶은 기가 세다”는 말들이 있다고 홍집은 말했다. 아둔한 내가 보기에도 기(氣)가 세게 되어있다는 생각이다. 너른 동해에 마치 칼끝같이 뾰족 내민 ‘곶[岬]’이다. 바닷가에 있다는 것만 해도 그런데 그 ‘곶’은 더할 나위 없이 바람도 자연환경도 다르다. 육지에 사는 사람들과는 달리 배를 타는 사람들은 그 곶의 이쪽과 저쪽이 바람이 어떻게 다른지 명쾌하게 설명은 못하지만 느끼는 것은 판이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황망한 바다위에 땅덩이가 꿈쩍않고 막고 있으니 그 주변의 바람의 방향이나 세기, 온도(溫度), 수온(水溫), 해류(海流), 용승류(湧昇流) 등등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환경이 같을 수가 없다. 또한 이로 인해 2차, 3차적으로 발생하는 온갖 자연현상이 만들어 내는 것이 곧 그곳의 기(氣)가 아닌가 싶다.
이런 경험은 세계 곳곳에서 했다. 지브롤트(Gibraltar), 대서양과 인도양을 가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인 Cap of Agulhas, 남미 대륙의 최남단의 마젤란 해협(Magallanes), 파나마와 스에즈 운하, 영국 북단의 St. Johns Point 등등. 거의 순간이라고 할 사이에 엄청난 변화와 현상을 보여주었다.
흔히 바위산에도 기가 있고 나무에도 기가 있다고들 한다. 당연한 사실이다. 사람에게도 각자의 기(氣)가 있다. 남녀가 다르고 체격이 다르고 혈액형이 다르고 성질이 다르고 풍기는 채취도 다르다. 이러한 것들이 작을 때는 쉽게 느껴지지 않지만 인해(人海)를 이루거나 큰 바위산이나 산(山) 전체가 가득한 숲을 이루면 거대한 기가 형성된다. 건강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도, 소나무 밑에는 다른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는 것도 그 나무가 풍기는 각자 다른 기(氣) 때문이 아닌가 싶다.
땅도 마찬가지다. 흙의 종류, 빛깔, 토질 등의 지력(地力)과 기후에 따라 그 지역에 맞는 곡종(穀種)이 있게 마련이다. 심지어는 현대 산업사회에서도 생산되는 제품에 따라 적온적습 등 환경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그뿐이 아니다. 가문(家門)이나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풍수(風水)가 좌우한다고 믿어왔던 우리 민족은 인공적으로 그 지역의 풍수를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왕성한 기(氣)를 꺾으려고 기가 센 산꼭대기에다 쇠못을 박았다고까지 했을까.
전남 장흥의 동쪽에 사자산(667m)이 솟아 있는데, 산의 모양이 사자처럼 생겨 기가 세어 장흥의 번창을 억누르고 있다는 풍수설에 따라 사자산의 정수리 즉 사자머리에 큰 쇠못을 박아 왕성한 풍수기운을 억누른 것이 1930대의 일이었다고 한다. 이 풍수설도 결국 기(氣)와 같은 차원의 것이 아닌가도 여겨진다.
학창시절에 이황(李滉:퇴계)의 이원론(理氣二元論)이니, 이이(李珥)의 이기론(理氣論)이란 말들을 듣기는 했어도 솔직히 그게 뭔지 깜깜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저 시험에 나올까 해서 외웠을 뿐이다. 성리학이론인 기일원론(氣一元論)에서는 우주 만물이 기(氣)에 의해 생성되고 존재한다고 했다.
한의학에서도 ‘기(氣)는 인체의 생명활동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물질 에너지이다. 이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선천지기(先天之氣)와 대기 중에서 흡입한 천공지기(天空之氣)와 음식으로부터 섭취한 수곡지기(水穀之氣)로 생성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분명히 기(氣)라는 것은 존재하며, 이것은 물질이고 에너지임은 분명하며 자연 및 인체뿐만 아니고 사람의 마음(인식)속에도 존재한다는 뜻이리라.
옛 우리 선조들은 우주 전체가 하늘, 땅, 인간과 같이 서로 비슷한 구조를 지닌 소우주들이 음양오행의 원리에 의해 연관되고 상호 작용을 주고받는 거대한 유기체로 보았던 것 같다. 풍수지리(風水地理)는 이와 같은 관념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되며, 이것은 천문, 의학, 음악 등 모든 분야가 이러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점성술이나 천문(天文)도 여기서 생겨난 것이 아닌가 싶다.
최근 풍수학계는 나름대로의 명분과 근거를 갖추며 발전되어 왔지만, 그것들은 각각의 특징과 장단점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가운데 일면 타당성이 있는가 하면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부분도 상존하기 때문에, 이러한 점들이 풍수가 비과학적이라 비판받으며, 제도권에 정착하지 못하고 술수(術手)로 취급받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이론에 대한 깜깜한 나 같이 하나의 현장경험자에겐 풍수와 기(氣)는 같은 맥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이아 이론(가설 : Gaia hypothesis)이란 것이 있다. 미국의 네 번째 도시인 휴스턴시 교외(郊外)에 우주비행 프로젝트의 거점인 NASA의 존슨 우주 센터가 있다. 가이아 이론은 이 휴스턴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에 이 NASA에서 근무한 영국의 학자 러브록(J. Lovelock) 박사는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요소의 균형을 지구 스스로가 조절하는 모습은 마치 지구자체가 인체의 조정 기능인 것, 즉 생물권, 대기권, 수권(水圈)을 포함하는 지구환경의 일체를 스스로 조절하는 하나의 생명체로 간주한다는 이론이다.
‘가이아’란 명칭은 그리스 신화의 여신 ‘가이아’에서 따 붙였다고 했다. 우리나라 과학자 장회익 박사도 「온생명론」에서 이와 비슷한 연구를 발표했다고 한다. 내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수긍이 간다. 간단한 예로 지구 전체로 봤을 때 남녀의 성적(性的)비율이 자동적으로 조정되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러브럭 박사
이를 뒷받침 하는 실화가 있다. 1969년, NASA 우주 기지에서 아폴로 9호를 타고 우주비행을 한 슈와이카트(Schweickart) 비행사는 지구로 귀환 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주에서 지구를 보았을 때다. 달 탐험의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고, 지구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적인 여유도 생겼다. 차분한 마음으로 어딘가에 있는 지구를 보았다. 무수한 별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그 안에 우리의 지구가 떠 있었다. 지구는 무한한 우주 속에서는 하나의 반점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울 정도로 멋진 반점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늘 내 머리속에 있었던 몇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나’라는 인간이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왜일까? 내 존재에 의미는 있는가? 우주는 물질의 우연한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우주나 인간은 창조된 것인가? 아니면 우연의 결과로 생성되었는가?
언제나 그런 의문이 머리에 떠오를 때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달랐다. 의문과 동시에 그 대답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종교학에서 말하는 신비체험이란 이런 것이 아닌지 생각했다. 내 개인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얼굴에 이 손이 닿았다는 느낌이다. 어쨌든 순간적으로 진리를 파악했다는 생각이었다』
슈와이카트 우주비행사
그리고 슈와이카트는 인터뷰에서 '가이아'의 이야기를 꺼냈다. 지구는 그 자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진 자기 조절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이렇게 강한 안정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인체가 가지고 있는 생체의 조절 기구와 같은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지구 자체가 살아있는 증거로 간주된다. 슈와이카트는, 자신의 우주 체험의 의미를 저것 이것 생각해 가는 동안,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을 만나, 그것을 읽어 가는 동안, 자신이 희미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고 확신 했다.
『인간은 가이아 안에서 살아있는 생물임을 자각하고 살아가야 한다. 가이아에게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인간은 가이아 없이는 살 수 없다.』
『인류가 우주로 진출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계속 어머니인 가이아의 태내(胎內)에 있던 인간이 처음으로 어머니의 태내에서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인류가 큰 우주진화의 첫걸음을 내딛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우주비행사가 본 무한한 우주 가운데 떠 있는 아름답고 작은 지구. 그 신비의 광경을 사람들이 알았을 때, 인류 전체의 의식이 바뀌었다. 지구는 우주에 있는 단 하나의 「생명체가 가득한 별」로, 그 생명을 지키고 있는 것이 지구환경이라는 것을 지구인들은 모두 바로 이해한 것이다.
인간은 우주선을 만들어 우주로 날 때 처음으로, 지난 수만 년간 인간을 태우고 우주를 계속 날아가고 있는 지구도 또한 큰 우주선이라는 것을 한참이나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우주선의 탑승자」들은 그 구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우주선을 망가뜨리는 짓만 하고 있기 때문에, 우주선 지구호는 바로 조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둘도 없는 지구(only one earth)」라는 생각이 세계의 상식이 되었다. 이로 인해 유엔 주최로 인간환경회의가 열리고 세계 18개국의 과학자와 사상가의 공동작업으로서 「둘도 없는 지구·인류가 살아남기 위한 전쟁」라는 보고서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지구살리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종교를 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종교적이다”는 말을 믿는다. 36시간 동안 계속 된 극한의 상황에서 선장(船長)의 오더에 따라 키를 돌리기만 하던 조타수가 갑자기 헛소리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겁에 질려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오죽했으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 ‘관세음보살님’ ‘신령님’ ‘조상님…’을 찾았을까. “누구시든 좋습니다.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게만 해 주십시오. 나는 죽어도 좋지만 나를 믿고 잠든 선원들만은 구해주십시오”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월남전에서 장교가 대신 수류탄을 앉고 장렬하게 전사(戰死)했다는 얘기가 실감이 났다.
종교는 불합리한 상황에서 생겨났다고 하던데 바로 이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에 실제로 내가 의지할 것이라곤 선박 자체의 기관(機關)과 감항성(堪航性) 그리고 순간순간 상황에 따라 내 자신이 판단한 조치 이외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도 자연현상에 대해서는 예측을 불허한다. 예측하기 위한 부단의 노력 덕분으로 어느 정도는 예상을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신비스러울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을 무식한 내게는 뭉뚱거려 기(氣)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석암(石庵) 도사의 넋두리인듯도 하고…. 헐헐헐.(계속)
첫댓글 한바탕 크게 웃었습니다.
시원하게 술술 기에 관한 글이 쓰여진다는 건 자신감이 있다는 것.
자신감이란 석암 도사의 장점.ㅎㅎ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제 완전 글쟁이(? 미안)가 된 것 같습니다.
교사- 항해사- 신세계 컴퓨터 교육자- 논픽션. 자서전 작가
이렇게 되기까지 아내의 보필이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닌지??ㅋㅋㅋ
언어폭행 당하기 전에 줄행랑합니당.=3=3=3=3=3=3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치에 맞는 글을 늦게 읽어 죄송합니다. 호미곶이 기가 세어 그 기를 꺽기 위해 쇠말뚝 모양의 등대를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기에 관한 좋은 공부를 하였습니다.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한바탕 크게 웃었"셨다니 먼저 감사함다. 웃을 거리라도 됐다는 뜻이되기도 하니까요. '아내의 보필', 고런건 한개도 안들어 갔음다.
옳은 글쟁이는 없는 걸 잘 지어내는 재주 가진 사람이지만, 어정쩡한 행편이라 그저 내가 겪고 보고 들은 것만 적습니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인데, 그래도 주인장이라도 봐 주시니 힘도 나고 황감합니다. 건강하소. ㅎ ㅎ ㅎ. 부산넘